26화(5,161자) · 한수겸 · 구월 그믐

표첩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구월 스무엿새 밤, 허 씨가 간난이 손을 잡고 뒤꼍 쪽문으로 들어왔다.

석 객주 부엌에서 설거지를 끝내고 온 길이라 두 사람 손이 다 퉁퉁 불어 있었다. 허 씨 손끝은 잿물에 트서 갈라졌고, 간난이 손바닥에는 물동이 끈 자국이 붉게 패어 있었다. 허 씨가 평상 끝에 앉으며 나를 봤다. 나를 알아보는 눈이었다. 넷이 그녀 이름을 알고 그 넷 가운데 내가 있으니, 그녀 눈에도 내 얼굴은 부른 사람 얼굴로 남아 있었다.

“선생, 표첩이 형방청 궤에 있다지요. 그걸 내가 가져오겠소.”

그녀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 간난이가 옆에서 제 어미 소매를 꽉 쥐었다.

“석 객주 부엌에서 열 달을 살았소. 객주 어른은 날마다 나를 처음 봤소. 솥을 닦는 여자가 누군지 한 번도 안 물었소. 형방청 아전들이라고 다르겠소? 나는 아무도 안 붙잡아 두는 얼굴이오.”

“들키면 옥이오.”

“옥에 가면 옥사장도 나를 잊겠지요. 사흘마다 새 죄인이 들어왔다고 할 거요.”

그녀가 웃었는데 웃음 끝이 갈라졌다. 간난이가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제 어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석 객주가 잡히면 장 서방 빚 문서가 휴지가 된다. 그러면 간난이가 부엌을 나올 수 있다. 허 씨는 그 셈을 나보다 먼저 했다.

막례가 그날 밤 곽 노인의 바늘 쌈지를 들고 왔다. 가죽 쌈지를 펴자 바늘 열하나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막례가 그중 끝이 갈고리처럼 휜 바늘 하나를 뽑아 허 씨 손에 쥐여 주었다.

“어르신이 객주 곳간 궤를 딸 때 쓰던 것과 짝이에요. 궤 자물쇠 구멍에 넣고 위로 두 번, 옆으로 한 번이래요. 어르신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어요.”

허 씨가 바늘을 손끝으로 굴려 봤다. 삯바느질로 스무 해를 산 손이라 바늘을 쥐는 모양이 나보다 편했다.

간난이가 제 저고리 섶을 들춰 안감을 어미한테 내밀었다. 어미가 제 손으로 수놓은 땀이 거기 있었다. 끝을 한 번 되감는 땀이었다. 허 씨는 사흘마다 제 이름을 잊었고, 그때마다 간난이가 이 땀을 보여 주고 어미 왼팔 두 자를 불러 주었다. 오늘이 그 사흘째였다.

“엄마, 오늘 아침에 불러 줬지? 잊으면 안 돼. 거기 가서 잊으면 나 못 가.”

“안 잊는다. 바늘 쥔 손은 제 땀을 안 잊어.”

허 씨가 아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등잔 불빛이 그녀 왼쪽 입꼬리 옆 작은 점을 비췄다. 석 객주 부엌 사람들은 열 달 동안 날마다 그 점을 처음 봤다.

*

구월 그믐 밤, 나는 형방청 뒷담 밑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담은 흙을 두껍게 바른 토담이었고, 비바람에 한 군데가 허물어져 사람 머리 하나만 한 틈이 났다. 그 틈으로 뒷마당이 보였다. 뒷방 북쪽 창에 등잔 불빛이 없었다. 형방은 저녁에 동헌으로 들어갔다고 막례가 알아 왔다. 식년 대조 준비로 현감과 밤늦게까지 셈을 맞춘다고 했다. 가을밤 공기가 토담 흙에 스며 등이 차가웠고, 담 밑 풀섶에서 귀뚜라미가 끊겼다 이어졌다 울었다.

뒷마당 평상에 사내 둘이 앉아 있었다. 막쇠와 길 서방이었다.

길 서방이 거기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무릎에 나무 바늘함을 올려놓고 있었다. 형방이 불러 놓고 기다리게 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지 나는 그 바늘함을 보고 알았다. 넷째 자리를 새기는 바늘은 굵은 것부터 가는 것까지 셋인데, 길 서방 바늘함에는 굵은 것만 꽂혀 있었다. 표를 넣는 바늘이었다.

허 씨가 광주리를 이고 쪽문으로 들어섰다. 광주리에 보자기를 덮었다. 부엌 일꾼이 야참을 나르는 모양새였다.

구 서리가 뒷방에서 나오다 그녀와 마주쳤다.

“누구요?”

“부엌에서 야참 가져왔소. 형방 나리가 늦으신다고.”

구 서리가 보자기 귀퉁이를 들춰 떡 한 쪽을 집었다. 떡전 아들이 쪄 준 인절미였다. 그는 떡을 입에 문 채 뒷간 쪽으로 돌아섰다. 돌아서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허 씨가 빠져나갔다. 뒷간 문을 여는 그의 뒤통수에 아무 의심이 없었다.

허 씨가 뒷방으로 들어갔다. 창호지에 그녀 그림자가 비쳤다. 불을 켜지 않았다. 달빛만으로 궤 앞에 쪼그려 앉는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담 틈에 얼굴을 대고 숨을 참았다. 갈고리 바늘이 자물쇠 구멍을 긁는 소리는 담 밖까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내 귀에서 내 피가 도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뒤 녹슨 쇠가 끼익 하고 한 번 울었다.

*

허 씨가 광주리를 이고 나왔다. 광주리가 들어갈 때보다 무거워 보였다. 목이 조금 앞으로 꺾였다.

막쇠가 평상에서 일어났다. 그가 허 씨를 봤다. 달빛이 그녀 얼굴에 떨어졌다.

“허 씨 아니오?”

허 씨가 걸음을 멈췄다. 광주리를 인 채 막쇠를 봤다. 막쇠는 동짓달 보름 형방청 뒷마당에서 그녀 어깨를 누르고 있던 사내였다. 표를 새기는 동안 그 사람을 붙들고 있던 손은 잊지 않는다. 떡전 어머니가 그랬고, 막쇠가 그랬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열 달을 살았다.

길 서방도 일어났다. 허 씨 오른 소매가 광주리를 받친 팔에서 흘러내려 있었다. 그 팔에 亡이 먹빛으로 박혀 있었다. 너무 깊어 가장자리가 뭉개진 한 자였다. 길 서방 눈이 그 한 자에 멎었다. 새긴 사람은 그 한 자만 기억한다. 얼굴은 잊는다. 그는 얼굴은 모르고 제 손이 넣은 한 자를 알아봤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무릎에 올려 둔 바늘함이 기울어 굵은 바늘 하나가 평상 위로 굴렀다.

막쇠가 광주리를 봤다. 보자기 밑으로 책 모서리가 비죽 나와 있었다. 그가 그 모서리를 한참 봤다. 뒷간 쪽에서 구 서리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막쇠가 평상에 도로 앉았다.

“나는 오늘 뒷간 간 사이에 아무것도 못 봤소. 뒷간은 구 서리가 갔는데.”

길 서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토담 쪽을 봤다. 허 씨가 그 앞을 지나가는 동안 그는 벽만 봤다. 평상에 굴러떨어진 굵은 바늘을 줍지 않았다.

허 씨가 쪽문을 나섰다. 나는 담 틈에서 얼굴을 떼고 골목으로 돌아가 그녀를 맞았다. 광주리를 받아 이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선생 얼굴은 여기서 들키오. 내 얼굴은 안 들키고.”

*

새기는 집 뒷방에서 보자기를 풀었다. 떡전 아들과 옥분이, 간난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셋이 모이면 옥이라는 금령은 오늘 밤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보자기 안에 책이 두 권 있었다. 하나는 내 장부 넷째 권이었다. 형방이 칠월에 펴 보인 뒤 궤 맨 위에 올려 두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하나는 검은 비단으로 싼 두꺼운 책, 표첩이었다.

표첩을 폈다. 스물여섯 줄이었다. 한 줄에 한 사람이 있었다. 날짜, 사는 곳, 나이, 참이름 두 자, 넷째 자리에 넣은 한 자, 새긴 이. 줄마다 끝에 작은 글씨가 붙은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첫 줄은 사십일 년 전 호방 형수였다. 표 下. 새긴 이 진가. 호방 글씨였다. 사십일 년 전 스물일곱 호방이 제 손으로 적은 줄이었다.

셋째 줄에서 내 손가락이 멈췄다. 스무 해 전 칠월 그믐. 봉가 아들, 여섯 살. 등 두 자. 표 一. 새긴 이 한가.

내 호적 이름이 거기 있었다. 그 줄 끝 여백에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석 객주 청, 쉰 냥, 마 서리 받음. 획 끝을 눌러 멈추는 손이었다.

떡전 아들이 그 줄을 들여다봤다. 스무 해 전 제 이름 두 자가 먹으로 서 있었고, 그 옆에 내 이름 석 자가 서 있었다.

“선생 이름도 여기 있구려. 우리 둘이 한 줄에 있소.”

그가 말했다. 원망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 줄에서 손가락을 떼지 못했다. 스무 해 동안 내 장부에 적지 않은 그 한 줄을 형방은 이 책에 적어 두었다.

옥분이가 표첩을 제 앞으로 끌어가 끝 글씨가 붙은 줄만 골라 손가락으로 셌다. 치부책을 쓰는 손이라 빨랐다.

“여섯 줄이오. 석 객주 청이 붙은 게. 봉가 아들 쉰 냥, 원가 서른 냥, 곽가 새김집 스무 냥, 허가 마흔 냥. 강가 논 임자 서른 냥, 서문 밖 숯막 쉰 냥. 받은 사람은 앞 넷이 마 서리, 뒤 둘이 마 형방. 다 합치면 이백이십 냥이오.”

그녀가 됫박도 없이 셈을 끝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백이십 냥이면 떡이 만 사천육백예순여섯 개하고 조금이오. 조금은 형방이 먹었겠지.”

허 씨가 넷째 줄을 들여다봤다. 허가 과부, 서른넷, 왼팔 두 자, 표 亡, 새긴 이 길가, 마흔 냥, 마 형방 받음. 그녀는 글을 조금 읽었다. 제 줄을 끝까지 읽고 나서 간난이를 당겨 무릎에 앉혔다. 간난이가 어미 저고리 앞섶을 쥐었다.

나는 표첩을 처음부터 다시 셌다. 스물여섯 줄이었다. 줄마다 사는 곳이 적혀 있었다. 첫 줄 하나만 그 칸이 비어 있었다. 강가 논 임자는 흰머리 아낙이 소매를 쥐고 다니던 그 영감일 것이다. 산 사람 열아홉이 어디 있는지 이 책이 말해 주었다. 스무 해 동안 형방 혼자 알던 자리들이었다.

*

그날 밤 삼경 무렵, 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길 서방이었다. 그는 들어오지 않고 문간에 섰다. 손에 굵은 바늘 하나를 쥐고 있었다. 형방청 평상에 굴러떨어졌던 그 바늘이었다.

“형방 나리가 시월 보름 전날 밤에 이걸로 하라 하셨소. 선생 오른팔 하나, 방앗간 여자 오른팔 하나. 표첩에 두 사람 줄을 벌써 적어 두셨다오.”

“그래서 하겠소?”

그는 대답하지 않고 바늘을 내려다봤다. 먹 사발을 한 번도 씻지 않는다던 손이 그날은 깨끗했다.

“오늘 그 여자 팔에 있던 한 자, 내 손이오. 얼굴은 모르는데 그 한 자는 아오. 이 손으로 두 자를 더 넣으면 나는 평생 세 자만 기억하고 살 거요.”

그가 바늘을 쥔 채 돌아섰다. 골목 어둠 속으로 그의 짚신 소리가 멀어졌다.

*

길 서방이 가고 나서 나는 표첩을 다시 폈다. 옥분이와 간난이는 평상 한쪽에 기대 잠들었고, 허 씨는 잠든 딸 발에 제 치마를 덮어 주고 있었다. 떡전 아들만 깨어 있었다.

죽은 사람 줄은 일곱이었다. 곽가 새김집 줄 끝에는 누가 나중에 죽었다는 표시로 먹 점 하나를 크게 찍어 두었다. 그 점 옆에서 나는 손가락을 오래 떼지 못했다. 곽 노인은 아들 집터에 선 객주 창고를 보러 타관에서 왔다가 제 아들 줄도 못 보고 갔다.

“일곱은 어떻게 하오? 죽은 사람은 불러도 안 돌아오잖소.”

떡전 아들이 물었다.

“안 돌아오오. 그래도 이름은 남소. 무덤 앞에서 부르면 들은 사람한테 남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곱 줄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었다. 소리 내지 않고 입술로만 두 자씩 읽었다. 등잔 불빛에 표첩 비단 표지가 검게 번들거렸다.

창호지 문이 희끄무레해질 무렵 첫닭이 울었다. 그 소리에 간난이가 잠결에 어미 왼팔 두 자를 불렀고, 허 씨가 딸 등을 토닥이며 낮게 대답했다. 떡전 아들이 그 소리를 듣고 표첩을 덮었다.

2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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