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5,121자) · 한수겸 · 구월 스무날

가슴은 둘이 하나다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스승 장부는 얇았다. 넷째 자리 백육십둘을 적은 책이라 굵을 줄 알았는데, 스승은 한 사람에 한 줄만 적었다. 그 한 줄에 날짜와 두 자와 값을 넣고 끝냈다. 나는 그 장부를 섣달에 한 번, 떡전 아들 등 이름을 찾을 때 폈다. 그때는 스무 해 전 봄 줄만 보고 덮었다.

구월 열아흐레 밤, 평상 밑에서 스승 상자를 끌어냈다. 떡전 아들이 등잔을 들어 주었다. 상자 뚜껑을 열자 스승이 쓰던 먹 항아리 셋에서 묵은 먹 냄새가 올라왔다. 스무 해가 넘은 소나무 그을음 냄새라 날카로운 기운은 다 빠지고, 오래 닫아 둔 장롱 속처럼 둥글고 텁텁한 냄새만 남아 있었다. 바늘 열둘이 쌈지에 꽂혀 있었다. 몸 그림 한 장, 종이 뭉치, 그리고 장부.

나는 스무 해 전 가을 장을 찾았다. 팔월에 줄이 둘 있었다.

첫 줄. 팔월 열이레, 혼례. 제자와 동문 밖 윤가 딸. 가슴을 서로 지어 주다. 그 아래 두 자가 둘 적혀 있었다. 제자 가슴, 윤가 딸 가슴.

나는 그 네 자를 읽었다. 읽는 동안에는 획이 보였다. 다 읽고 나니 머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종이에 남은 지워진 이름은 읽어도 누구 것인지가 머리에 붙지 않는다. 두 번 읽고 세 번 읽어도 같았다. 입으로는 소리 낼 수 있는데 그 소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몰랐다.

둘째 줄. 같은 날 밤. 윤가 딸 오른팔, 제자 왼팔 두 자. 병이 제자를 못 찾으리라. 값으로 윤가 딸 가슴이 가다. 그 옆 여백에 스승 글씨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가슴은 둘이 하나다. 한쪽이 가면 짝도 같이 간다. 제자 가슴도 갔다. 이 아이는 이것을 모른다.

*

종이 뭉치 맨 밑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스승 글씨였다. 섣달에 떡전 아들이 상자를 들고 나갔다 들어왔을 때도 이 장은 거기 있었을 것이다. 나는 끝장의 부름 규칙만 읽고 이 장은 넘겼다.

팔월 열닷새. 아이가 사흘째 물도 못 넘긴다. 윤가 딸이 넷째 자리를 묻는다. 새기면 저 사람이 삽니까, 안 삽니까. 나는 산다고 했다. 대신 딸의 셋 가운데 하나가 가고 무엇이 갈지는 모른다고 했다. 딸이 말했다. 그럼 가슴을 먼저 지어 주십시오. 가슴이 가면 저 사람 곁에 있을 까닭이 남습니다.

팔월 열이레. 혼례. 신랑이 일어나 앉지 못해 내가 붙들었다. 신부가 제 가슴 두 자를 신랑 귀에 대 주고 신랑이 그 귀에 두 자를 대 주었다. 밤에 딸 오른팔에 새겼다. 새기고 나니 딸이 신랑을 보고 물었다. 이분이 누구십니까. 나는 딸이 오기 전에 제 손으로 써 둔 쪽지를 내밀었다. 이 사람을 돌볼 것. 까닭은 묻지 말 것.

십일월 스무날. 아이가 내일이면 일어난다. 딸이 쪽지를 태웠다. 모르는 사내가 눈을 뜨고 누구냐 물으면 날마다 무어라 답하겠느냐 했다. 답할 말이 없다 했다. 아이한테는 말하지 말라 했다. 약속했다. 약속을 어기지 않는 대신 여기 적는다.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이 아이는 나를 원망할 것이다. 원망받을 사람이 남아 있어야 한다.

떡전 아들이 등잔을 든 채 한참 서 있었다. 불빛이 흔들려서 종이 위의 글씨가 흔들렸다. 그가 등잔을 평상 위에 내려놓았다.

“선생, 우리 어머니하고 같구려. 제 것을 내주고 붙들고 있었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 자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비어 있는 자리 밑에서 심장이 여느 때처럼 뛰었다.

*

이튿날 아침 떡전에 들렀더니 옥분이가 먼저 와 있었다. 떡전 아들이 밤새 무엇을 봤는지 벌써 다 들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됫박을 떡판에 탁 내려놓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선생, 장가를 갔었다고? 마흔셋 먹도록 총각인 줄 알고 내가 방앗간 과부를 둘이나 점찍어 뒀는데. 한 사람은 떡을 잘 치고 한 사람은 셈을 잘하오. 이제 어떡하오?”

“스무 해 전 일이오.”

“스무 해 전이면 나는 열 살이오. 열 살짜리한테 잔치 떡도 안 돌리고 장가를 갔구려. 그 떡값은 누가 받았소?”

떡전 아들이 시루 뒤에서 킥킥 웃었다. 옥분이는 그쪽으로 됫박을 한 번 휘두르는 시늉을 하고 나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가시오? 동문 밖에.”

“가오.”

“그럼 빈손으로 가지 마시오. 약방 여자한테 떡 한 쪽은 들고 가시오. 떡값은 내가 내겠소.”

그녀가 인절미 한 줄을 싸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떡이 아직 따뜻해서 보자기 너머로 콩고물 냄새가 올라왔다.

*

그날 구월 스무날, 스승 장부와 인절미를 품에 넣고 동문 밖으로 갔다.

약방 마당 멍석에 이번에는 구기자가 붉게 널려 있었다. 윤 씨는 마루에서 약봉지를 접다가 나를 보고 손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옆에 쌓인 봉지를 한쪽으로 밀어 앉을 자리를 냈다.

“알아 오셨소?”

나는 대답 대신 인절미 보자기를 먼저 내밀었다. 그녀가 보자기를 풀어 보고 눈썹을 올렸다.

“알아 오라니까 떡을 알아 오셨구려.”

“방앗간 여자가 싸 줬소.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떡값은 자기가 낸다고.”

“그 사람한테 전하시오. 떡값 내는 사람한테 약값은 안 받는다고.”

그녀가 인절미 한 쪽을 집어 입에 넣었다. 약재 가루가 밴 손가락으로 떡을 집어서 떡에 감초 가루가 조금 묻어 들어갔다. 콩고물이 입가에 묻었는데 닦지 않고 씹었다. 씹으면서 나를 봤다. 알아 온 것이 무엇이든 떡을 다 삼킬 때까지는 기다리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마루 끝에 앉아 스승 장부를 펴서 그녀 앞에 놓았다. 그녀가 읽었다. 약재 이름을 읽는 눈이라 빨랐다. 읽다가 이분이 누구십니까, 라는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이 사람을 돌볼 것, 까닭은 묻지 말 것, 에서 한 번 더 멈췄다. 그녀는 끝까지 다 읽고 장부를 덮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석 달 알고 혼인하는 사람이 아니오.”

“스물에는 그런 사람이었나 보오.”

그녀가 웃었다. 처진 눈꼬리가 이번에는 제대로 웃었다. 웃다가 그 웃음이 그녀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녀가 약봉지 끈을 쥔 손을 무릎에 놓았다.

“그럼 내 팔에 있는 이 두 자가 댁 거요?”

“댁 입으로 들어 보시오. 내가 부르려면 내 왼팔 두 자를 먼저 대야 하오. 그게 부르는 값이오.”

나는 내 왼팔 두 자를 댔다. 열다섯에 내가 고른 두 자였다. 남 앞에서 그것을 대는 것이 스물여덟 해 만이었다.

윤 씨가 소매를 걷었다. 오른팔 바깥쪽 두 자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스무 해 동안 그 두 자를 읽었다. 읽는 데는 막힘이 없었는데 누구 것인지 몰랐다. 이제 그 두 자에 주인이 붙었다. 그녀가 두 자 위를 엄지로 한 번 문질렀다. 내가 생각할 때 오른팔을 문지르는 것과 같은 손짓이었다.

“이게 댁이구려. 스무 해를 달고 다녔는데.”

*

나는 스승 장부를 다시 폈다. 윤가 딸 가슴 두 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그녀 앞에서였다. 지워진 사람 앞에서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면, 들은 사람은 그 이름을 그 사람에게 붙여 안다.

두 자가 입을 떠나는 순간 머리에 붙었다.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던 두 자가 눈앞의 여자 얼굴에 가 붙었다. 스무 해 전 가을, 누워 있는 내 귀에 누군가 두 자를 대 주었다. 그 소리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다만 이 두 자가 이 여자의 것이라는 것만은 이제 내 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윤 씨가 제 왼팔 두 자를 댔다. 그러고는 장부를 받아 들고 제자 가슴 두 자를 읽었다. 내 앞에서 읽었다.

목이 뜨거웠다. 쇠붙이를 삼킨 것처럼 목 안쪽이 달아올랐다. 윤 씨가 제 목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녀도 뜨거웠다. 우리는 서로를 봤다. 마흔셋 사내와 마흔 여자가 약방 마루에서 각자 제 목을 쥐고 앉아 있었다.

“새겨 주시오. 가슴에 도로.”

윤 씨가 말했다. 나는 바늘 쌈지를 꺼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내 저고리 앞섶을 풀고, 가장 가는 바늘에 먹을 찍어 내 가슴 한가운데를 한 번 찔렀다.

먹이 들지 않았다. 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갔는데 빼고 나니 먹이 핏방울에 섞여 흘러내렸다. 마른 천으로 닦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워진 자리에는 다시 새겨도 먹이 안 든다. 방 목수의 등이 그랬다.

윤 씨가 그 핏방울을 봤다. 오래 봤다. 그러고 약재 가루 묻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닦아 주었다.

“됐소. 새기지 않아도 되오. 댁은 내 가슴 이름을 알고 나는 댁 것을 아오. 제 것은 사흘이면 잊는다니, 사흘마다 올 수는 없고, 달에 한 번 오시오. 와서 불러 주시오. 나도 불러 드리리다.”

“달에 한 번이오?”

“모르고 산 스무 해도 내 것이오. 그걸 다 잘못 산 해로 만들고 싶지 않소. 달에 한 번이면 알고 사는 날도 있고 모르고 사는 날도 있소.”

*

싸리 대문 밖에서 형방의 헛기침 소리가 났다. 구 서리가 뒤에 서 있었는데, 그는 무릎에 흙이 묻어 있었다. 담 밑에 쪼그려 앉아 있던 흙이었다.

형방이 멍석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구기자를 밟지 않으려고 발끝을 골라 디뎠다. 석 객주와 다른 걸음이었다. 남의 약재는 밟지 않으면서 남의 이름은 받아 적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발끝을 보면서 스무 해 전 광 문밖에 서 있던 그의 짚신을 떠올렸다. 그는 마루 앞에서 섰다.

“한 가, 오늘은 이름이 두 개나 새어 나왔구려. 한 가 왼팔, 그리고 약방 여자 왼팔. 구 서리가 받아 적었소.”

구 서리가 종이를 들어 보였다. 두 사람의 두 자가 적혀 있었다.

“석 객주한테 약방 빚 문서가 있다지. 허 씨 집터도 그렇게 넘어갔소. 표첩에 한 줄 더 적는 건 붓 한 번이오.”

형방이 윤 씨를 보지 않고 나를 봤다.

“시월 보름까지 저잣거리 사람 모으는 걸 거두시오. 그러면 이 종이는 태우겠소. 거두지 않으면 약방 여자는 허 씨가 간 부엌으로 가오. 한 가는 그 여자를 스무 해 만에 찾았는데, 또 잃고 싶소?”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윤 씨가 약봉지를 내려놓았다.

“나리, 스무 해 전에도 나는 내 이름을 내놓고 이 사람을 샀소. 그때는 몰라서 한 줄 아시오? 스승이라는 분 장부에 다 적혀 있소. 알고 했소. 이번에도 알고 하겠소.”

형방이 그제야 그녀를 봤다. 그가 부채를 펴서 한 번 부쳤다. 구기자 말리는 냄새가 부챗바람에 실려 그의 얼굴로 갔다.

“그럼 시월 보름에 봅시다.”

그가 돌아섰다. 구 서리가 종이를 품에 넣고 따라 나갔다. 싸리 대문이 흔들리다 멎었다. 구 서리가 나가면서 걷어찬 구기자 몇 알이 멍석 밖으로 굴러 마당 흙에 붉게 박혀 있었다.

윤 씨가 다시 약봉지를 집었다. 한 번 묶고, 또 한 번 묶었다. 그 손이 조금 떨렸다. 손이 떨리심, 오늘은 셋만. 스무 해 전 누워 있는 내 곁에서 그녀가 적은 그 줄을 이번에는 내가 그녀 손을 보며 떠올렸다.

2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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