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5,187자) · 한수겸 · 팔월 열닷새

스물일곱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팔월 열닷새, 한가위 아침에 황 대장이 식구를 데리고 떡전 앞에 섰다.

저잣거리는 명절 장으로 붐볐다. 송편 빚을 쌀가루를 사러 온 아낙들이 방앗간 앞에 줄을 섰고, 엿장수 영감의 가위 소리가 골목 끝까지 짤랑거렸다. 떡전 시루에서 솔잎 찐 김이 올라와, 햅쌀 냄새와 솔 냄새가 한데 엉겨 저잣거리 한복판을 덮었다. 떡전 아들은 새벽부터 송편을 찌느라 이마에 땀띠가 돋아 있었다.

황 대장은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왔다. 풀을 너무 먹여서 걸을 때마다 두루마기가 버석거렸다. 황 댁이 그 옆에 섰고, 열일곱 난 아들이 한 걸음 뒤에 섰다. 아들은 아비보다 머리 하나가 컸고, 봄부터 대장간을 물려받아 팔뚝이 아비만큼 굵어져 있었다.

“선생, 추석에 온다고 했잖소.”

“왔구려.”

“부르려면 내 이름을 대야 하오. 저기 애들이 부르는 그 노래 말이오.”

골목 어귀에서 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봄날 꽃잎이 물에 떠가네, 떠가네. 황 대장 왼팔 두 자가 노래가 된 지 여덟 달이었다. 황 대장이 그쪽을 돌아보자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더 크게 불렀다.

황 댁이 남편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당신이 대면 애들 노래가 끝나오. 노래로 불리는 것보다 제 입으로 대는 게 덜 부끄럽지 않소?”

황 대장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제 두 자를 댔다. 망치로 모루를 칠 때 내는 목소리였다. 저잣거리가 한순간 조용해졌고, 줄넘기를 하던 아이들이 노래를 멈추고 이쪽을 봤다. 제 노래 주인이 제 노래를 소리쳐 댔으니 아이들은 더 부를 까닭이 없었다.

나는 떡전 아들의 두 자를 황 대장 귀에 대 주었다. 황 대장이 불렀다. 아들이 제 왼팔을 대고 뒤이어 불렀다. 황 댁은 석 달 전에 이미 불렀으니 남편과 아들 사이에 서서 두 사람 등을 한 손씩 받쳤다.

열다섯이 되었다.

아들이 아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그렇게 고운 이름을 왜 여태 숨기셨어요? 저는 오늘 처음 들었어요.”

“너도 쉰 넘어서 꽃잎 소리 들어 봐라. 망치 쥔 손이 오그라든다.”

황 댁이 아들 등을 한 대 쳤다. 아들은 맞고도 웃었고, 황 대장은 풀 먹인 두루마기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땀이 아니라고 우겼다.

*

그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섰다. 누가 줄을 세운 것도 아닌데 방앗간 줄 옆으로 줄이 하나 더 생겼다.

짚신 장수가 먼저 댔다. 딸이 부른 것을 한 달 동안 부끄러워하다가, 딸한테 너만 하고 아비는 안 하느냐는 소리를 듣고 나왔다고 했다. 엿장수 영감이 가위를 허리춤에 꽂고 나와 댔다. 이 영감은 봄에 두칠 일꾼들을 막아선 사람이다. 두부 집 내외가 나란히 섰고, 막내딸이 그 뒤에서 제 부모를 등 떠밀었다.

부름집에서 품삯 두 푼에 가짜 이름을 대던 열여섯 소년과 빨래 아낙 둘도 왔다. 구 서리가 부름집 장부에서 그 셋 이름에 먹 점을 찍은 줄 그들도 알았다.

“석 냥짜리 가짜는 이제 안 하오. 공짜 진짜로 하겠소.”

소년이 말했다. 빨래 아낙 하나가 소년 뒤통수를 쳤다. 말이 너무 크다는 뜻이었다.

옥분이가 떡판 옆에서 됫박을 들고 셈을 불렀다. 하나 부를 때마다 됫박으로 떡판 모서리를 톡 쳤다.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방앗간 앞에 줄 선 아낙들이 쌀가루 대신 그 셈을 들었다. 대장간 풀무꾼 둘이 스물하나와 스물둘을 채웠고, 우물가 물장수가 물지게를 내려놓고 스물셋을 채웠다. 서문 밖에서 떡을 사러 온 노파가 스물넷이 되었다.

그쯤에 형방이 왔다. 구 서리와 막쇠가 따랐다. 형방은 줄 끝에 서서 줄을 셌다. 셈은 옥분이가 먼저 하고 있었으니 셀 필요가 없었는데 그는 제 손가락으로 다시 셌다.

“셋 넘게 모여 부르면 옥이오. 방을 못 읽은 사람이 있소?”

“다 읽었소, 나리. 내가 소리 내서 읽어 줬소.”

옥분이가 말했다. 형방은 그녀를 보지 않고 구 서리한테 말했다.

“다 적으시오. 대는 이름을 하나도 빼지 말고.”

구 서리가 붓을 들었다. 사람들이 제 두 자를 댈 때마다 그 붓이 움직였다. 부르는 사람들은 그 붓을 봤다. 보고도 댔다. 스물다섯은 주막 부엌 아이의 어미였고, 스물여섯은 떡전 옆 짚단 파는 늙은이였다.

스물여섯에서 줄이 끊겼다. 뒤에 선 사람이 없었다. 나는 떡전 아들을 봤고, 그는 나를 보지 않고 시루 뚜껑을 들어 김을 뺐다. 김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가 흩어졌다.

그때 줄 끝에 호방이 와서 섰다.

*

정직된 뒤로 호방은 관아에 나오지 않았다. 관아 뒤 초가에서 두 달을 보냈는데, 그사이 얼굴이 한 겹 더 말라 있었다. 벽에 걸어 두었다던 두루마기를 입고 왔다. 소매 끝에 성긴 바느질 줄이 보였다.

형방이 호방을 봤다. 두 사람 사이에 떡판 하나가 있었다.

“어른, 정직 중이시오.”

“정직이지 벙어리가 된 건 아니오.”

호방이 떡전 아들 앞으로 갔다. 그는 스무 해 전 떡전 광에서 죽이는 대신 표를 쓰라고 말한 사람이다. 그 말에 여섯 살 아이 오른팔에 한 획이 들었고, 그 획을 넣은 손이 내 손이었다. 떡전 아들은 그것을 안다. 섣달에 내가 말했다.

호방이 제 왼팔 두 자를 댔다. 예순여덟 늙은이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그가 내 쪽으로 귀를 내밀었다.

“대 주시오. 스무 해 전 광에서 그 어미가 아이 팔을 붙들고 무어라 부르는 걸 문밖에서 들었소. 표가 들자 두 자는 빠져나가고 소리만 남았소. 낮게 숨 쉬듯 하던 그 소리 말이오. 스무 해 동안 그 소리만 들고 다녔소.”

나는 떡전 아들의 두 자를 호방 귀에 대 주었다. 호방이 눈을 감고 그 두 자를 한 번 입속으로 굴렸다. 소리와 두 자가 스무 해 만에 맞붙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눈을 뜨고 불렀다.

스물일곱이 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일어났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시루 김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방앗간 줄에 서 있던 아낙 하나가 떡전 쪽을 보고 제 옆 사람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 떡장수 얼굴이 저렇게 생겼었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 옆 사람도 떡전을 봤다. 줄넘기하던 아이들이 떡전 아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잣거리 사람들이 스무 해 동안 떡을 사 가면서 한 번도 붙잡아 두지 못한 얼굴을 그날 처음 붙잡았다.

방앗간 줄에서 아낙 하나가 옥분이를 불렀다.

“옥분이, 저 떡장수가 원래 저렇게 멀끔했소? 눈썹이 저렇게 짙었소?”

“멀끔한 건 내가 반년 전에 먼저 봤소. 치부책에 그려 둔 게 여든 장이오. 구경은 줄 서서 하시오.”

아낙들이 웃었다. 떡전 아들은 귀 끝이 붉어져서 시루 뚜껑을 한 번 더 들었다 놓았다.

형방도 봤다. 형방의 눈이 떡전 아들 얼굴에서 멈췄다. 그는 스무 해 동안 이 떡전에서 인절미를 제일 많이 사 간 사람이었다.

“인절미를 판 게 자네였나.”

“스무 해 동안 제일 많이 사 가신 분이오. 오늘은 처음 뵙겠다는 말을 안 해도 되겠구려.”

떡전 아들이 말했다. 형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구 서리 손에서 명단을 받아 들었다. 스물일곱 사람의 두 자가 빼곡했다.

“스물일곱이 다 내 표첩에 올랐소. 시월 보름이 식년 대조요. 그날까지 한 사람도 고을 밖으로 나가지 마시오. 나가면 추쇄요.”

그는 명단을 접어 소매에 넣고 돌아섰다. 막쇠가 따라가다 떡전 아들을 한 번 더 돌아봤다.

형방이 떠난 자리에 두칠이 서 있었다. 석 객주 집 쪽 모퉁이, 떡전 땅에 박힌 말뚝 다섯 옆이었다. 말뚝을 세러 나왔다가 줄에 막혀 못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한 손에 새끼줄 뭉치를 들고 있었는데, 떡전 아들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뭉치가 손에서 풀려 흙바닥에 떨어졌다.

두칠은 넉 달 전 사월 열사흘 밤 주막 뒷방 문간에서 이 얼굴과 한 자 거리로 마주쳤다. 그날은 돌아서면서 잊었다. 이제는 돌아서도 안 잊는다. 그의 목덜미에 땀이 한 줄 흘렀다. 검시 날 동헌 마당에서 흐르던 그 자리였다.

떡전 아들이 시루 뚜껑을 쥔 채 두칠을 봤다. 둘 사이에 떡판과 사람들 어깨가 있었다. 떡전 아들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날 밤에도 지르지 못했다. 대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낮게 말했다.

“저 사람이오. 이제는 저 사람도 나를 아오.”

두칠이 새끼줄을 줍지 않고 돌아섰다. 걸음이 빨랐다. 석 객주 집 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저잣거리 소음 너머로 났다. 옥분이가 됫박을 내려놓고 그 대문 쪽을 한참 노려봤다. 됫박 쥔 손마디가 하얬다.

*

그날 밤 호방이 떡전 아들과 나를 관아 뒤 초가로 불렀다.

방이 좁아 셋이 앉으니 무릎이 닿았다. 호방이 궤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호적 초본이었다. 식년마다 작청에 올리기 전에 호방이 제 손으로 먼저 맞춰 보던 초본인데, 정직되면서 이 한 권만 들고 나왔다고 했다.

호방이 봉 서방 집 줄을 폈다. 스무 해 전 봉 서방 이름 위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옥사라는 뜻이었다. 그 아래 처와 아들 칸은 비어 있었다. 처는 작년 섣달 죽은 떡전 어머니였고, 아들 칸은 스무 해 동안 아무 붓도 들어가지 않았다.

호방이 벼루에 먹을 갈았다. 오래 갈았다. 먹 가는 소리가 방 안에 사각사각 찼고, 소나무 그을음 냄새가 등잔 기름 냄새 위로 올라왔다. 그는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아들 칸에 두 자를 적었다. 떡전 아들의 등 이름이었다.

먹이 섰다.

종이에 스며 번지지 않고 획 모양 그대로 검게 서서 등잔 불빛에 윤이 났다. 스무 해 동안 관가 붓이 이 사람 이름을 적으려 할 때마다 먹이 흘러 버렸다. 호방이 붓을 내려놓았다. 손가락 끝이 떨렸고, 그 떨림을 감추려고 그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스무 해 전 이 칸을 비운 것도 내 손이오. 봉 서방 이름에 붉은 줄을 긋고 아들 칸에 붓을 대 보니 먹이 흘렀소. 나는 그걸 보고 안심했소. 일이 끝났다고.”

호방이 붓을 내려다봤다. 작청에서 서른 해를 쓴 붓이라 털이 닳아 획 끝이 늘 두 갈래로 갈라졌다.

“같은 붓이오. 오늘은 안 갈라졌구려.”

떡전 아들이 그 두 자를 오래 봤다. 그러고는 입속으로 제 두 자를 한 번 말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입 모양이었다.

“선생, 사흘 뒤에도 이게 내 이름인 줄 알겠소?”

“스물일곱이면 본인도 안 잊는다고 스승 종이에 적혀 있소.”

“적혀 있는 거하고 사흘 뒤에 아는 거하고는 다르지 않소?”

“사흘 뒤에 보시오.”

그가 웃었다. 눈가가 젖은 채 웃었다.

호방이 초본을 덮고 허리춤을 풀었다. 쇠 열쇠 하나가 끈에 매달려 있었다. 호적고 열쇠였다. 그는 그것을 풀어 내 손바닥에 얹었다. 쇠가 제 몸 온기를 머금어 미지근했다.

“댁 장부 스물아홉 줄 얘기는 들었소. 석 달을 곁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건 식구뿐이오. 식구가 되는 길은 핏줄 아니면 혼인이고. 그해 가을 혼인 장부를 보시오. 팔월 열이레요.”

22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스물일곱 ·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