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122자) · 한수겸 · 동짓달 초사흘

지운 자국

문신을 지워 주는 여자 · 유하람

이 고을에서는 사람이 이름을 셋 쓴다. 태어나면 어미가 지은 이름을 등에 받고, 열다섯이 되면 제가 정한 이름을 왼팔에 받고, 혼인하면 두 사람이 서로 정해 준 이름을 가슴에 받는다. 그 셋을 살갗에 넣어 주는 것이 내 일이다.

자리는 셋인데 몸에 새길 수 있는 자리는 넷이다. 오른팔 바깥쪽이 넷째 자리다.

그 사내가 온 것은 동짓달 초사흘 낮이었다. 창호지 문이 밀리면서 눈가루가 한 줌 따라 들어왔고, 평상 옆 놋 등잔 불이 한쪽으로 누웠다가 겨우 일어섰다. 겨울 낮빛은 창호지를 한 번 거쳐 들어오기 때문에 희고 차다. 그 빛 속에 먹 항아리 셋과 마른 천에 꽂아 둔 바늘 열둘이 놓여 있었고, 방 안에는 아침에 끓인 아교 냄새가 아직 식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사내는 인사도 없이 평상에 앉아 솜 넣은 겉옷의 오른쪽 소매를 걷었다.

오른팔을 걷고 앉는 사람은 대개 새기러 온 사람이다. 이 사내는 아니었다. 팔뚝 바깥쪽에 이미 두 자가 들어 있었고, 나는 그 두 자를 안다. 열두 해 전 겨울에 내 손으로 넣은 것이다.

“방 목수 아니시오?”

“선생이 나를 알아보시는구려. 다들 몰라봅디다. 등이 없어진 뒤로는 어릴 적 동무도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오.”

열두 해 전 그 겨울에 고을 아이 마흔이 앓다가 갔다. 넷째 자리에 아픈 사람 이름을 새기면 병이 그 사람을 못 찾는다는 말이 돌았고, 그 말은 맞았다. 방 목수는 일곱 살 딸 이름을 들고 밤중에 이 집 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 이름을 그의 오른팔에 넣었다. 딸은 사흘 만에 일어나 앉아 미음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로 사내의 등이 없어졌다. 지운 자국도 없이, 처음부터 아무것도 새긴 적이 없는 등처럼 깨끗해졌다. 어미가 지어 준 이름이 살갗에서 가고, 그 이름으로 그를 알던 사람들 머리에서도 같이 갔다. 새기면 앞의 셋 가운데 하나가 간다. 무엇이 갈지는 고를 수 없다.

바늘 잡은 사람은 제가 새긴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잃은 등 이름을 지금도 안다. 열두 해 전 새벽에 한 번 소리 내어 말해 준 적이 있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튿날 아침 다시 와서 내 등에 원래 뭐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 뒤로는 말하지 않았다.

“지워 주시오.”

그가 오른팔을 평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

나는 대답하기 전에 스승의 상자를 끌어냈다. 평상 밑에 넣어 둔 나무 상자인데, 뚜껑을 열면 오래된 먹과 한지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온다. 스승은 열여덟 해 전에 갔고, 내게 남긴 것은 바늘 열둘과 먹 항아리 셋과 종이 뭉치였다. 그 종이 첫 장에 이렇게 적혀 있다. 지우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 장을 사내 앞에 펴 놓았다.

“알고 있소.”

“등이 돌아오지 않소. 따님을 가려 주던 것도 같이 벗겨지오.”

“병은 열두 해 전에 지나갔소. 이제 따님을 찾는 건 병이 아니라 중신어미요.”

사내가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아홉 장이었다. 첫 장의 글씨는 열 살 아이 것처럼 크고 비뚤었고, 마지막 장으로 갈수록 획이 가늘어지고 줄이 반듯해졌다. 아홉 장 모두 같은 말이었다. 아버지 오른팔에 있는 것은 내 이름이다.

“해마다 묻소. 아버지 팔에 이거 뭐예요? 열 번도 넘게 말해 줬소. 그러면 적어 두겠다고 이렇게 적고는, 다음 날 아침에 이 종이를 들고 와서 누가 이런 걸 썼느냐고 묻소.”

“제 글씨인 줄은 압니까?”

“그건 아오. 제 글씨니까 제가 쓴 줄은 아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오.”

가려진 사람은 남의 팔에 있는 제 이름을 읽지 못한다. 읽어도 붙지 않는다. 사내는 종이를 다시 접어 품에 넣으며 혼담이 들어왔다고 했다. 혼인 장부에 올리려는데 관가 서기가 붓을 대면 먹이 미끄러진다고 했다. 가려진 사람은 장부에도 가려진다.

“그래도 지워 주시오. 자국이 남으면 그때는 답할 수 있소. 지운 자국이다, 라고.”

그러고는 조금 웃었다.

“목수가 제일 싫어하는 주문이 뭔지 아시오? 대패 자국을 지워 달라는 거요. 지우면 판이 얇아지거든. 내가 그 주문을 하고 있으니 우습소.”

*

문이 다시 밀린 것은 그때였다. 이번에는 눈가루가 아니라 가죽신 두 켤레가 흙과 눈을 함께 달고 들어왔다.

앞에 선 사람은 형방 마진택이다. 쉰하나이고 형방청을 스무 해 넘게 쥐고 있다. 뒤에는 그 밑에서 적는 일을 하는 구 서리가 붓통을 차고 섰다.

형방은 평상에 걸터앉기 전에 방 목수의 걷힌 소매부터 봤다.

“넷째 자리로구먼. 호적에 올린 거요?”

“열두 해 전에 올렸소.”

내가 대신 대답했다. 형방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평상에 놓았다. 호적 이름 하나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허 씨, 동짓달 보름.

“보름날 형방청 뒷마당으로 오시오. 한 자 새기면 되오. 닷 냥 주겠소.”

표를 새기라는 말이다. 이름이 아닌 한 자를 넷째 자리에 넣으면 앞의 셋이 한꺼번에 가고, 그 사람은 살아서 걸어 다니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관가는 죽이지 않고 없앨 때 그것을 쓴다.

“안 하오.”

“그 여자 왼팔은 댁이 새겼잖소. 가슴도 댁이 새겼고. 표는 참이름 하나를 아는 손이 넣어야 든다는 것쯤은 나도 아오. 싫으면 장부만 내주시오. 그 여자 왼팔 줄만 찢어 주면 되오.”

“장부도 안 되오.”

형방이 한숨을 쉬었다. 화가 난 한숨이 아니라 말이 안 통하는 아이를 앞에 둔 어른의 한숨이었다.

“한 가, 그 여자가 죽은 남편 빚을 쉰 냥 지고 도망갈 참이오. 옥에 넣으면 이 겨울에 얼어 죽소. 목을 치면 피가 나고 딸아이가 그걸 보오. 표를 맞으면 살아서 밥을 먹소. 나는 스무 해 동안 사람을 하나도 안 죽였소. 그게 누구 덕인지 아시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엄지로 내 오른팔 바깥쪽을 문질렀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다.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인데 형방은 그 손을 보고 있었다.

“스무 해 전에는 했잖소.”

형방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두 냥 받고, 한 획.”

구 서리가 문을 열었고, 차가운 바람이 등잔불을 다시 눕혔다. 형방이 나가고 나서도 종이는 평상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방 목수가 그 종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봤다.

“선생도 그런 걸 새긴 적이 있소?”

“오늘은 댁 팔 얘기만 합시다.”

*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둘이서 보리밥을 먹었다. 지우는 일은 밤에 한다. 낮에는 창호지 빛이 살갗 위에서 번들거려 먹의 깊이가 안 보이고, 등잔 하나만 켜 두어야 먹이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그림자로 드러난다.

방 목수는 밥을 반쯤 남기고 수저를 놓더니 평상 위의 종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허 씨라면 삯바느질하는 그 과부 말이오? 우리 딸 저고리를 두 번 지어 준 사람인데.”

“그 사람이오.”

나는 허 씨를 안다. 열아홉 해 전, 그 사람이 열다섯이던 봄에 왼팔 이름을 넣었다. 두 자를 고르느라 이 평상에서 한나절을 앉아 있었고, 획 수가 많은 글자를 골랐다가 아프다고 울상을 짓더니 끝내 바꾸지 않았다. 열두 해 전에는 장 서방이라는 짐꾼과 나란히 앉아 가슴 이름을 받았다. 서로 무슨 이름을 정해 왔는지 끝까지 안 보여 주려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가, 내가 둘 다 새겨야 하니 결국 보여 줘야 한다고 하자 둘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장 서방은 두 해 전에 짐을 지고 고개를 넘다가 굴러 죽었다.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을 받으려면 아직 여섯 해가 남은 아이다.

“표를 맞으면 그 딸은 어미를 알아보오?”

“못 알아보오. 표는 셋을 다 가져가오.”

방 목수가 수저를 다시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그는 열두 해 동안 제 딸한테 날마다 같은 말을 해 준 사람이다. 어미를 못 알아보는 딸이 무엇인지 나보다 잘 알았다.

“선생이 안 하면 누가 하오?”

“누가 하긴 할 거요. 형방은 손을 찾을 사람이오.”

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걷어 올린 소매를 한 번 더 걷어 올렸다. 이제 시작하자는 뜻이었다.

*

지우는 일은 해가 진 뒤에 시작했다. 죽은 사람 것은 두 시진이면 된다. 죽으면 살갗이 먹을 놓는다. 산 사람 살갗은 놓지 않고 먹을 끝까지 붙들고 있다.

굵은 바늘을 등잔불에 한 번 지나가게 하고, 두 자 가운데 첫 획 끝에서부터 들어갔다. 새길 때는 바늘을 곧게 세워 먹을 밀어 넣지만 지울 때는 비스듬히 눕혀서 살갗 아래 뭉친 먹을 옆으로 헤친다. 먹이 흩어지면서 살이 붉게 부어오르고, 부은 자리에서 열이 올라와 내 손가락 끝까지 닿는다. 열두 해 된 먹은 단단했다. 한 획을 흩는 데 반 시진이 걸렸다.

사내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평상 모서리를 쥔 왼손만 하얗게 질려 있었고, 얼굴은 천장을 향한 채 아무 표정도 없었다. 나는 두 시진째에 물을 떠다 줬는데 그는 입술만 적시고 잔을 돌려줬다.

열두 해 전 그 밤에도 그는 이렇게 앉아 있었다. 그때는 소리를 냈다. 바늘이 한 번 들어갈 때마다 입속으로 수를 셌는데, 딸이 앓아누운 날수를 세던 버릇이 그대로 나온 것 같았다. 그러다 새벽이 되자 제 등이 가벼워졌다며 웃었고, 그게 무슨 말인지 그때는 둘 다 몰랐다. 지금 그는 아무것도 세지 않았다.

네 시진째에 등잔 기름을 한 번 더 부었다. 그 무렵 나는 그가 잃은 등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지금 말해 주면 어떨까 싶었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랬다. 열두 해 전 그 새벽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아침이면 다시 물을 것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고 바늘만 움직였다.

여섯 시진이 지나자 창호지가 안쪽부터 희어졌다. 다 탄 등잔에서 연기가 한 줄 올라 천장에 닿기 전에 흩어졌다. 그의 오른팔에는 두 자가 있던 자리를 따라 붉게 부푼 자국만 남았다. 획의 모양은 없었다. 무엇이 있었는지는 이제 나만 안다.

사내가 몸을 일으키고 그 자리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남았소?”

“자국은 남소. 그건 안 없어지오.”

“됐소. 이제 물으면 답할 수 있소.”

그는 닷 냥을 평상에 놓고 나갔다. 나는 그 돈을 밀어 돌려주려다 문밖의 눈을 보고 그만뒀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짚신 자국이 골목 끝까지 한 줄로 찍혀 있었다.

*

여덟 달 뒤에 그 딸이 왔다. 스무 살이었다. 왼팔에 새겨 달라며 종이에 두 자를 적어 보였는데, 그 두 자는 여덟 달 전 그 아버지 오른팔에서 내가 지운 두 자였다.

그 이야기는 그 자리에 가서 하겠다. 그 여덟 달 사이에 먼저 일어난 일들이 있다.

그날 아침 평상 위에는 형방이 두고 간 종이가 그대로 있었다. 허 씨, 동짓달 보름. 손가락으로 날을 꼽아 보니 열이틀이 남아 있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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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하람작가2026.10.09· 1화

    작가 유하람입니다. 이름을 셋 쓰는 고을에서 넷째 자리에 남의 이름을 새기면 병도 빚도 그 사람을 못 찾습니다. 1화의 지운 자국을 보며, 여러분이라면 누구의 이름을 빌리시겠어요?

  • 종이배2026.05.15· 1화

    이 작가님 다른 작품도 찾아 읽는 중입니다.

    • 유하람작가2026.05.16

      그렇게 읽어 주시니 다음 화 쓰는 게 덜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