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5,134자) · 한수겸 · 칠월 초사흘
여덟 달 뒤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옥분이는 유월 그믐에 옥에서 나왔다. 스무하루 만이었다. 속전 닷 냥을 누가 냈는지 옥사장은 끝내 기억하지 못했다. 떡 광주리를 든 사내가 엽전 꾸러미를 내밀었다는 것까지는 기억했는데, 그 사내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떡전 아들이 냈다. 그는 떡 판 돈을 스무 해 동안 떡전 부뚜막 밑 항아리에 모아 두었다. 항아리 바닥을 긁어 닷 냥을 채웠다고 했다. 어머니 베개 밑에서 나온 서른 닢은 손대지 않았다고 했다.
옥분이는 옥문을 나서자마자 떡전으로 가서 떡판 앞에 섰다. 떡전 아들을 한참 봤다. 스무하루 동안 그 얼굴을 못 봤으니 잊었을 법도 한데, 셋을 넘긴 얼굴이라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가 제 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옥에서 살이 쪘소. 떡장수가 날마다 떡을 넣어 줘서. 옆 칸 도둑놈이 나보고 어느 집 마님이냐고 물었소.”
“속전은 떡값에서 까겠소.”
“닷 냥이면 떡이 몇 개요?”
“삼백서른세 개하고 조금이오. 조금은 내가 먹겠소.”
옥분이가 입을 벌렸다. 제 셈을 남한테 먼저 들은 게 처음인 얼굴이었다. 방앗간 공이 소리가 멀리서 쿵 하고 한 번 울렸는데, 그녀 대신 누가 방아를 찧고 있는지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떡전 아들이 그 얼굴을 보고 웃었고, 옥분이는 됫박을 들어 그의 어깨를 치려다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떡판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쓸면서 딴 데를 보고 말했다.
“항아리 바닥을 긁었다며. 어머니 돈은 안 썼다며. 그건 잘했소.”
*
칠월 초사흘 새벽, 방 낭자가 새기는 집 뒤꼍으로 왔다. 스무 살이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보자기 하나를 들고 왔다. 평상에 앉아 보자기를 풀었다. 한지 아홉 장이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 해마다 한 장씩, 아홉 해 동안 제 글씨로 적은 종이였다. 해마다 아버지 오른팔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고, 아버지가 대답하면 그 대답을 적어 둔 종이였다. 이튿날이면 제가 물었다는 것도 잊었지만, 종이의 글씨가 제 글씨인 줄은 알았다. 글씨는 남는다. 종이는 해마다 다른 한지라 결이 제각각이었다. 맨 아래 장은 누렇게 떠서 가장자리가 바스러졌고, 맨 위 장은 아직 희었다. 포갠 종이 사이에서 오래된 먹 냄새와 장롱 속 좀약 냄새가 함께 올라왔다.
그녀는 맨 위 장을 들어 내게 보였다. 열한 살의 글씨였다. 삐뚤빼뚤한 두 자가 맨 아래에 적혀 있었다. 아버지 팔에 있는 것은 네 이름이다. 그 아래 두 자.
그녀가 둘째 장, 셋째 장을 차례로 넘겼다. 해마다 글씨가 조금씩 반듯해졌다. 열세 살 장에는 두 자 옆에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가 웃으면서 대답하심. 열여섯 살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대답하시고 부엌에 나가 한참 안 들어오심. 열여덟 살 장은 두 자뿐이었다. 그해 그녀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아홉 장 다 같은 두 자예요. 열한 살에도 열아홉 살에도 아버지는 같은 두 자를 대답하셨어요. 저는 해마다 그걸 적고, 해마다 잊었어요. 작년 겨울 선생님이 아버지 팔을 지우신 뒤에야 읽혔어요.”
그녀가 아홉 장 밑에서 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오늘 새벽에 쓴 종이라 먹이 아직 윤이 났다. 두 자가 적혀 있었다.
“왼팔에 이 두 자를 받겠습니다.”
나는 그 종이를 받아 두 자를 읽었다. 이번엔 읽혔다.
바늘 잡은 손은 제가 새긴 것을 잊지 않는다. 지운 것도 잊지 않는다. 작년 동짓달 초사흘 밤, 이 두 자를 방 목수 오른팔에서 여섯 시진 동안 흩었다. 등잔 기름을 두 번 부었고, 그 사내는 여섯 시진 동안 소리를 내지 않았다. 새벽에 마지막 획을 흩고 나서 나는 바늘을 놓았는데, 손가락이 굽은 채 펴지지 않았다. 그 두 자였다. 여덟 달 전 그 아비의 팔에서 내 손으로 지운 두 자가, 이제 딸의 종이 위에 딸의 글씨로 있었다.
제 등 이름이었다. 등과 왼팔에 같은 두 자를 두는 사람은 드물다. 왼팔은 제가 정하는 자리라, 사람들은 대개 어미가 지어 준 것과 다른 것을 고른다.
“같은 두 자를 두 자리에 두겠다는 거요?”
“아버지가 가려 준 이름을 이번엔 제 손으로 드러내겠습니다.”
방 낭자가 소매를 걷었다. 이번엔 왼 소매였다.
“열두 해 동안 이 이름은 아버지 팔에 숨어 있었어요. 저를 병에서 숨겨 준 이름이에요. 이제 저는 안 숨어요. 등은 제가 못 보는 자리잖아요. 사람은 제 등을 못 보니까요. 왼팔은 제가 보는 자리예요. 날마다 보려고요.”
*
나는 바늘을 골랐다. 가는 바늘이었다.
앞칸은 관가 봉인이 붙어 있어서 뒷방 평상에서 새겼다. 창호지 문을 반쯤 열어 두었다. 칠월 새벽이라 벌써 매미가 울기 시작했고, 매미 소리가 문틈으로 들어와 방 안의 먹 냄새 위에 얇게 덮였다. 먹 항아리 셋 가운데 가운데 항아리를 열었다. 소나무 그을음 먹이었다. 아교를 조금 풀어 넣고 저었다. 먹이 바늘 끝에 매달리는 무게로 알맞은 묽기를 가늠했다.
첫 획을 넣으려는데 손이 멎었다.
바늘 끝이 그녀 살갗 한 치 위에서 떨렸다. 여덟 달 전 이 두 자를 흩던 손이 이번엔 넣으려 하고 있었다. 같은 손이었다. 흩은 것이 여섯 시진이었는데 넣는 것은 한 시진이면 된다. 나는 그 셈이 무서웠다. 넣는 데 드는 품이 흩는 데 드는 품보다 훨씬 작았다.
방 낭자가 내 손을 봤다.
“선생님, 아버지는 그날 여섯 시진 동안 소리를 안 내셨다면서요? 저도 안 내겠습니다.”
나는 숨을 한 번 내쉬고 첫 획을 넣었다.
왼팔은 살이 얇다. 바늘을 눕혀서 넣어야 한다. 세우면 깊이 들고, 깊이 든 것은 죽어도 못 지운다. 나는 바늘을 엄지와 검지로 쥐고 가운뎃손가락으로 받쳐 비스듬히 뉘었다. 바늘 끝이 살갗을 누르면 살갗이 먼저 한 번 버티다가 들어간다. 그 버티는 느낌이 손가락 끝으로 올라올 때 반 치를 멈춘다. 스승은 그 반 치를 손으로 배우라고 했다. 눈으로는 안 보인다고 했다. 길 서방이 허 씨 오른팔에 넣은 것은 그 반 치를 모르는 손이었다.
한 땀 넣고 마른 천으로 누르고, 또 한 땀 넣고 누르기를 되풀이했다. 방 낭자의 팔이 바늘이 들 때마다 조금씩 굳었다가 풀렸다. 그녀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 있었다.
*
두 자 가운데 첫 자를 다 넣었을 때 쪽문이 열리고 형방이 들어섰다. 구 서리가 뒤에 서 있었다.
“한 가, 첩이 없는 바늘은 곤장 스무 대요. 섣달에 작청 마당에서 들었을 텐데.”
“왼팔이오. 금령에 왼팔은 없소.”
“금령 얘기가 아니오. 첩 얘기요.”
형방이 평상 앞까지 걸어왔다. 그는 방 낭자의 왼팔을 내려다봤다. 첫 자가 먹빛으로 박혀 있었고, 가장자리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형방의 눈이 그 한 자 위에 오래 머물렀다. 읽고 있었다. 읽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여덟 달 전 동짓달 초사흘, 목수 오른팔을 지운 게 한 가였지. 나도 그날 이 집에 왔었소. 지운 걸 도로 넣소?”
“지운 건 아비 팔이고, 넣는 건 딸 팔이오.”
“같은 두 자요.”
형방은 그 말을 하고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웃음이라기엔 너무 짧았다.
방 낭자가 소매를 내리지 않고 형방을 올려다봤다.
“나리, 제 왼팔은 제가 정합니다. 이 고을 법이 그렇습니다. 열다섯에 저는 가려져 있어서 못 받았습니다. 스무 살에 받는 걸 막는 법도 있습니까?”
“새김장이한테 첩이 없소.”
“그럼 저를 치십시오. 제가 해 달라고 했습니다.”
형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봤다. 바늘을 쥔 채 멈춰 있는 내 손을 봤다.
“마저 하시오.”
형방이 말했다. 구 서리가 놀라서 그를 돌아봤다.
“곤장 스무 대는 장부에 적어 두겠소. 시월에 한꺼번에 셈하오. 식년 대조 날, 동헌 마당에서. 그날 셈할 것이 많을 거요.”
형방이 돌아섰다. 쪽문을 나서다가 그는 한 번 멈췄다.
“목수 딸, 그 왼팔 이름을 남 앞에서 대는 날엔 조심하시오. 이제 대기 쉬운 이름이 하나 생겼으니.”
그가 나갔다. 구 서리가 뒤따르며 나를 한 번 돌아봤다. 제 윗사람이 왜 그냥 가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쪽문이 닫히며 문살이 흔들렸고, 매미 소리가 한순간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나는 둘째 자를 넣었다. 방 낭자는 끝까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가 관자놀이로 흘러내렸다. 마지막 획을 넣고 마른 천으로 핏물을 눌러 닦았을 때, 해가 창호지 문을 절반쯤 물들여 놓고 있었다.
*
한낮에 방 낭자는 떡전에 들렀다. 왼팔을 싸맨 무명 끝에 핏물이 조금 배어 있었다. 옥분이가 방앗간에서 쫓아와 그 팔을 들여다봤다.
“스무 살 된 날 바늘을 맞으러 가는 처녀는 처음 보오. 생일상은 누가 차려 줬소?”
“선생님이 먹 한 항아리 차려 주셨어요.”
떡전 아들이 흰무리 한 쪽을 떼어 그녀 손에 쥐여 주었다. 생일 떡이라고 했다. 방 낭자는 그 떡을 들고 한참 웃다가, 떡전 아들을 보고 말했다.
“아저씨, 이제 누굴 부를 때는 왼팔로 부를게요. 등은 아버지 앞에서만 대고 싶어요. 제 동무들한테도 말했어요. 셋이 있는데, 다들 아저씨 목소리를 알아요. 떡 사시오 하는 목소리요. 얼굴은 몰라도요.”
“동무들한테 금령 얘기도 했소?”
옥분이가 끼어들었다. 방 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 한꺼번에 오면 옥이라는 것도요. 그래서 한 사람씩 오겠대요.”
옥분이가 떡전 아들을 흘끗 봤다. 떡전 아들은 시루 뚜껑을 닦는 척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쪽지의 빈 자리를 떠올렸다. 여덟 다음 칸이 비어 있었다.
*
그날 저녁 방 낭자가 아버지 머리맡에 앉았다. 나는 문간에 서 있었다.
방 목수는 눈을 뜨고 딸을 봤다. 딸이 소매를 걷어 왼팔을 보였다. 먹빛 두 자가 아직 붉은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방 목수가 그 팔을 한참 봤다. 마른 손을 들어 두 자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게 뭐냐?”
방 목수가 물었다. 딸이 열두 해 동안 아버지한테 묻던 말이었다.
“제 이름이에요, 아버지.”
방 목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대답을 잊지 않을 것이다. 가려진 사람은 딸이 아니었고, 이제 아무도 가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손끝을 두 자 위에 얹은 채 눈을 감았다.
“알았다. 내일 또 묻지 않으마.”
방 낭자는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그 손을 제 팔 위에 얹어 두었다. 그러고는 보자기를 풀어 아홉 장 위에 새 한지 한 장을 얹었다. 붓에 먹을 찍어 맨 위에 스무 살이라고 적고,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아버지가 물으셨다. 내가 대답했다.」
그녀는 먹이 마르기를 기다려 열 장을 도로 포갰다. 맨 위 장만 글씨가 반듯했다. 보자기를 묶는 그녀의 왼 소매 아래로 먹빛 두 자가 한 번 비쳤다가 가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