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135자) · 한수겸 · 사월 열사흘
밤에 간 사람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사월 열사흘 낮, 곽 노인이 막례를 데리고 새기는 집 뒤꼍으로 왔다. 막례는 치마 속에 접은 종이를 품고 있었는데, 평상에 앉아서도 그 종이를 꺼내지 않고 한 손으로 치마 위를 누르고만 있었다. 곽 노인이 턱짓을 하자 그제야 꺼냈다.
“객주 곳간 돈 장부요. 막례가 베꼈소. 부름집 장부는 닷새마다 형방청으로 가는데, 곳간 장부는 곳간 궤에서 안 나오오. 객주가 사흘 전에 궤를 열어 둔 채 부엌에 간 틈에 막례가 봤소.”
종이에는 여섯 줄이 적혀 있었다. 날짜와 돈과 받은 사람이 한 줄씩이었다. 받은 사람은 여섯 줄 모두 형방청이었다. 처음 넷은 마 서리라고 적혀 있었고, 뒤의 둘은 마 형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리가 형방이 되는 동안 돈을 받는 손은 바뀌지 않았다.
곽 노인이 손가락으로 한 줄씩 짚었다.
“스무 해 전 칠월, 봉가 곡식 일로 쉰 냥. 열여섯 해 전 동짓달, 원가 빚 일로 서른 냥. 열네 해 전 삼월, 곽가 새김집 빚 일로 스무 냥.”
그의 손가락이 그 줄에서 멈췄다. 손톱 밑에 먹이 끼어 있었다. 쉰 해 동안 빠지지 않은 먹이었다.
“이 고을에 곽가 새김집은 하나였소. 내 아들이오. 편지가 그해 봄에 끊겼소. 나는 늙어서야 찾으러 왔고, 와 보니 아들이 살던 집터에 객주 창고가 서 있었소.”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새긴 이름을 읽듯이 담담하게 읽었다. 그런데 종이를 짚은 손가락이 종이를 뚫을 듯이 눌렸다. 종이가 그 손가락 밑에서 조금씩 구겨졌다.
“나머지 셋은?”
“하나는 댁이 아는 거요. 작년 동짓달 보름, 허가 집터 일로 마흔 냥. 둘은 모르겠소. 이름 대신 동네만 적혔소.”
떡전 아들이 문간에 서서 첫 줄을 넘겨다봤다. 봉가 곡식 일로 쉰 냥. 그는 한참 그 줄을 봤다. 제 아비가 옥에서 맞아 죽은 값이 거기 쉰 냥으로 적혀 있었다. 그가 문설주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문설주가 삐걱 소리를 냈다.
“어른, 이 종이 원본은 어디 있소?”
“곳간 궤에 있소. 베낀 것으론 관가에서 안 받소. 막례 글씨니까. 원본을 가져와야 하오. 객주가 오늘 이웃 고을 장에 갔소. 내일 해 질 녘에나 온다오. 오늘 밤 내가 가져오겠소.”
“위험하오.”
“쉰 해 남의 살갗에 바늘을 넣었소. 종이 한 장 빼 오는 게 뭐가 위험하오?”
곽 노인이 웃었다. 웃으면서 그는 막례가 베낀 종이의 셋째 줄을 한 번 더 손끝으로 눌렀다. 나는 그 웃음을 믿지 않았다. 그는 그걸 알았는지 막례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일어섰다.
*
해 질 녘에 떡전 아들이 곽 노인을 주막까지 바래다주었다. 곽 노인은 셋을 넘긴 사람이라 그의 얼굴을 알았고, 떡전 아들은 그 노인 옆에서 걷는 게 좋다고 했다. 얼굴을 아는 사람 옆에서 걸으면 길이 짧아진다고 했다.
막례가 베낀 종이는 내게 남았다. 곽 노인이 두고 가라고 했다. 원본을 가져오면 둘을 나란히 놓고 대 보자고 했다. 나는 뒷방에서 그 종이를 등잔 아래 펴 두고 앉아 있었다. 여섯 줄을 몇 번이고 읽었다. 봄비가 창호지를 적시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창호지에 번지며 둥근 얼룩을 만들었고, 얼룩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방 안에 젖은 흙냄새가 짙어졌다. 그날 밤 비는 자정을 넘기며 굵어졌다.
*
떡전 아들은 새벽에 왔다.
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평상 끝에 앉았다. 온몸이 젖어 있었고, 젖은 저고리에서 빗물이 떨어져 평상 아래 흙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나는 등잔을 켰다. 그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제 목을 손으로 쥐었다.
“선생, 목에서 뭐가 빠져나갔소. 한밤중에.”
그가 말한 것은 이랬다. 곽 노인을 주막 뒷방 문간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는데, 노인이 떡판에 담뱃대를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떡전에 가서 담뱃대를 찾아 다시 주막으로 갔다. 뒷방에 등잔이 켜져 있었다. 창호지에 그림자가 둘이었다. 하나는 앉았고 하나는 서 있었다. 서 있던 그림자가 무언가를 쳐들었다. 말뚝 박는 나무 메였다. 한 번 내려쳤다. 앉았던 그림자가 옆으로 쓰러졌다.
“그게 다요. 한 번이었소.”
그는 제 두 손을 무릎 위에 펴 놓고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빗물이 고여 있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했소. 입을 벌렸는데, 벌린 채로 섰소. 질러 봤자 누가 기억하오? 아홉이 차서 저잣거리가 내 말을 기억한다지만, 한밤중 주막 뒷골목에 저잣거리가 어디 있소? 그래서 못 질렀소. 그게 제일 부끄럽소.”
떡전 아들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아서 더 무서웠다.
“서 있던 사람이 노인 품을 뒤져서 종이를 꺼냈소. 그러고 등잔을 불어 끄고 나왔소. 문간에서 나랑 마주쳤소. 두칠이었소. 얼굴을 한 자 앞에서 봤소. 두칠이가 나를 봤소. 봤는데 그냥 지나갔소. 담뱃대를 든 떡장수가 비를 맞고 서 있으니 지나간 거요. 두어 걸음 가서는 벌써 나를 잊었을 거요.”
그가 품에서 담뱃대를 꺼내 평상에 놓았다. 대통에 담배가 반쯤 남아 있었다.
“그 목에서 빠져나간 게 그때였소. 노인이 쓰러지고 조금 뒤였소. 부른 사람이 하나 줄면 목이 가벼워지는 모양이오.”
나는 그 담뱃대를 봤다. 곽 노인이 떡전 김 속에서 제 이름을 대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일흔한 해에 처음이라던 그 두 자를 나는 알았다. 그 두 자를 들은 사람은 셋이었다. 이제 그 이름의 주인은 없었다.
나는 벽에 걸린 마른 천을 내려 그의 머리에 씌웠다. 먹 닦는 천이라 먹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는 천을 쓴 채 가만히 있었다. 내가 그의 젖은 머리를 천으로 누르자 천에 스민 빗물이 차갑게 손바닥으로 번졌다. 스무 해 전 광에서 이 사람 팔을 붙들었던 손은 그의 어머니 손이었다. 그날 새벽 이 사람 머리를 누른 손은 내 손이었다. 그는 천 밑에서 한 번 코를 훌쩍였다.
*
날이 밝자 부름집으로 갔다.
비가 그친 골목에 처마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부름집 문간에 사람이 몰려 있었다. 줄 선 손님들이 아니라 구경꾼이었다. 그 사이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막례였다. 주막 뒷방에서 곽 노인을 들어다 부름집 마루에 눕혀 놓았다고 했다. 부름집이 곽 노인 일터라서 그리했다고 두칠이가 말했다.
막례는 노인 머리맡에 주저앉아 있었다. 제 어머니가 그녀의 어깨를 뒤에서 안고 있었다. 막례는 노인의 바늘 쌈지를 두 손에 쥐고 있었다. 가죽 쌈지였다. 오래 써서 모서리가 반들반들했고, 여밈끈이 두 번 이어 붙여져 있었다. 그녀는 그 쌈지를 제 이마에 대고 울었다. 소리를 삼키려고 해서 어깨만 들썩였다.
막례 어머니가 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앞치마에는 밤새 무엇을 닦았는지 누런 물이 들어 있었고, 소매 끝이 젖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주막 뒷방에서 노인을 들어 옮긴 것도 그 손이었을 것이다.
곽 노인은 홑이불을 덮고 있었다. 얼굴은 덮지 않았다. 관자놀이 한쪽이 검게 부어올라 있었고, 흰 머리카락이 거기 엉겨 붙어 있었다.
두칠이 마루 끝에 서 있었다. 새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노인이 밤에 자다 갔소. 일흔하나면 갈 때가 됐지.”
“자다 간 사람 관자놀이가 저렇소?”
“자다가 문지방에 부딪혔나 보오.”
나는 마루 밑을 봤다. 장독 옆에 나무 메가 세워져 있었다. 메 머리가 젖어 있었다. 빗물에 젖은 것인지 씻어서 젖은 것인지 나는 가를 수 없었다. 두칠이 내 눈길을 따라 메를 보고, 발로 메를 툭 차서 마루 밑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어젯밤 주막 뒷방에서 댁을 본 사람이 있소.”
“누구요? 데려오시오.”
떡전 아들이 구경꾼 사이에서 앞으로 나섰다. 젖은 저고리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나요. 어젯밤 주막 문간에서 댁이랑 마주쳤소. 댁은 손에 메를 들고 있었소.”
두칠이 그를 봤다. 위아래로 한 번 훑었다. 처음 보는 사내를 보는 눈이었다.
“처음 보는 떡장수가 뭘 봤다는 거요?”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떡전 아들의 목소리는 그들 귀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어제만큼 오래 남지 않았다. 두어 사람이 방금 누가 말했느냐고 옆사람에게 물었다. 아홉이 여덟이 되자 목소리가 옅어졌다. 스승의 종이에 적힌 그대로였다.
두칠이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그는 떡전 아들을 잊었다. 그는 나에게만 말했다.
“선생, 형방청에 알리든지 말든지 하시오. 검시는 관가가 하오.”
석 객주가 온 것은 그때였다. 이웃 고을 장에 갔다던 사람이 새벽 비를 뚫고 벌써 돌아와 있었다. 그는 마루에 올라 홑이불 덮인 노인을 내려다봤다. 오래 보지 않았다. 그러고는 막례 어머니 앞에 엽전 꾸러미 하나를 내려놓았다.
“장사 값이오. 닷 냥.”
막례 어머니는 그 꾸러미를 보지 않았다. 막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어서 반쯤밖에 떠지지 않았는데, 그 반쯤 뜬 눈으로 석 객주를 올려다봤다.
“어르신 품에 있던 종이는 어디 갔어요?”
“무슨 종이 말이오?”
석 객주가 두칠이를 돌아봤다. 두칠이는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석 객주는 다시 막례를 보지 않았다. 부름집 문에 빗장을 지르라고 두칠이에게 이르고, 오늘은 장사를 안 한다고 구경꾼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그 말에 몇이 투덜거리며 흩어졌다. 석 냥을 쥐고 온 손님들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알았다. 막례 장부에 적힌 그녀의 왼팔 이름은 이제 석 객주 손안에 있었다. 막례도 그것을 알았다. 그녀는 바늘 쌈지를 더 깊이 품에 넣었다.
*
한낮에 막례가 뒤꼍으로 왔다. 바늘 쌈지를 아직 쥐고 있었다.
“선생님, 어르신이 남 앞에서 제 이름을 댄 건 떡전에서 그날 한 번뿐이었어요. 그 이름을 들은 사람이 저하고 선생님하고 떡전 아저씨예요. 셋이에요.”
그녀는 쌈지 여밈끈을 풀었다. 바늘이 굵기대로 열한 개 꽂혀 있었다.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하나는 어젯밤 품에 넣고 가셨어요. 종이 가져올 때 궤 자물쇠를 따신다고.”
막례가 비어 있는 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가죽이 거기만 바늘 모양으로 눌려 있었다. 그녀는 그 눌린 자국을 한참 쓸다가, 곽 노인의 왼팔 두 자를 소리 내어 말했다.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듣는 사람이 이제 없었다. 그녀는 그 두 자를 한 번 더 말하고, 쌈지를 여미었다.
그날 밤 나는 막례가 베낀 종이를 스승의 상자 맨 밑에 넣었다. 바늘 열둘과 먹 항아리 셋 아래, 스승의 몸 그림 아래였다. 여섯 줄이었다. 한 줄은 떡전 아들의 아비였고, 한 줄은 원 씨의 형이었으며, 한 줄은 곽 노인의 아들이었고, 한 줄은 허 씨였다. 두 줄은 동네 이름만 있었다. 상자 뚜껑을 닫고 평상 밑으로 밀어 넣는데, 상자가 전보다 무거웠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