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205자) · 한수겸 · 삼월 스무날
허 씨를 부르다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석 객주 집 부엌에 들어가는 길은 옥분이가 알고 있었다. 방앗간은 닷새마다 석 객주 집에 떡쌀 두 섬을 댄다. 해 진 뒤에 부엌 뒷문으로 들여 놓고, 부엌 여자가 불리려고 물에 담그는 것까지 보고 나와야 삯을 받는다고 했다.
“짐꾼이 하나 모자라오. 선생이 지시오.”
삼월 스무날 저녁, 옥분이는 쌀 한 섬을 내 등에 얹어 놓고 새끼로 묶으며 그렇게 말했다. 쌀 한 섬은 무겁다. 새끼가 어깨를 파고들었고, 나는 한 걸음 내딛자마자 허리가 저절로 꺾였다.
“허리를 펴시오. 짐꾼이 허리를 그렇게 꺾으면 초짜인 줄 다 아오.”
나는 허리를 폈다. 쌀섬이 뒤로 쏠려서 넘어질 뻔했다.
“아니, 도로 굽히시오. 조금만.”
방 낭자가 뒤에서 쌀섬 밑을 두 손으로 받쳤다. 그녀는 옥분이 방앗간 일꾼 행세를 하기로 했다.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소매를 걷어 올렸는데, 목수 딸이라 손목이 가늘어도 힘은 있었다. 그녀는 쌀섬을 받친 채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선생님, 짐꾼은 그렇게 한숨을 쉬지 않습니다.”
“한숨이 아니오. 숨이오.”
옥분이가 앞장서며 코웃음을 쳤다. 우리는 그렇게 저잣거리를 가로질러 석 객주 집 뒷골목으로 갔다. 두 달 전 두칠이가 나를 밀어붙였던 흙벽 앞을 지나면서, 나는 쌀섬 밑에서 고개를 더 숙였다.
*
부엌은 밤에도 더웠다.
솥 다섯 가운데 둘에 아직 불이 들어 있었고, 아궁이 앞 바닥에 깔린 멍석에서 솔가지 타는 냄새와 누룽지 눌은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다. 천장 서까래에는 그을음이 두껍게 앉아 등잔 불빛을 먹었다. 그 어둑한 부엌 맨 끝 솥 앞에 여자 하나가 쪼그려 앉아 솥을 닦고 있었다. 오른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고, 팔뚝 바깥쪽 먹빛 획이 불빛에 검게 번들거렸다.
간난이는 아궁이 옆 볏짚 더미에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물동이를 옆에 끌어안은 채였다. 손등이 터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옥분이가 쌀섬을 풀어 놓고 부엌 문간에 섰다. 누가 오는지 보는 자리였다. 나는 쌀섬을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이번엔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보는 눈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나는 알았다. 얼굴을 알아본 것이 아니었다. 오른팔의 亡을 알았다. 길 서방이 굵은 바늘을 세워 넣은 그 자리를 나는 형방청 뒷마당에서 봤다.
“아주머니, 잠깐만 손을 놓아 주시오.”
여자가 수세미를 솥 가장자리에 걸쳤다. 나는 먼저 내 왼팔 두 자를 댔다. 그리고 열아홉 해 전 이 사람이 열다섯이던 봄, 획 많은 글자를 골랐다가 아프다고 울상을 짓고도 끝내 바꾸지 않았던 그 두 자를 불렀다.
여자의 손이 멈췄다.
방 낭자가 그다음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왼팔이 없다. 그녀는 제 등 두 자를 댔다. 남의 집 부엌에서 제 등을 대는 일이라 목덜미가 붉어졌는데,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부른 두 자를 따라 불렀다.
옥분이는 문간에서 돌아서서 왼팔을 댔다. 문밖을 살피면서 부엌 쪽으로 고개만 돌려 불렀다. 그녀답게 빨랐지만 가짜는 아니었다.
셋이 찼다.
나는 여자를 봤다. 돌아서서 부뚜막을 한 번 보고, 다시 여자를 봤다. 여자의 얼굴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광대뼈가 조금 나왔고 눈썹 끝이 처졌으며, 왼쪽 입꼬리 옆에 작은 점이 있었다. 열아홉 해 전 평상에서 울상을 짓던 그 얼굴이었다. 넉 달 동안 이 얼굴이 이 부엌에 있었다.
“허 씨.”
내가 말했다. 여자가 나를 봤다. 그 이름을 제 것으로 듣는 눈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대답했다.
“예.”
그녀는 수세미를 다시 집으려다 말고 나를 올려다봤다.
“선생이 나를 아시오? 나는 선생을 처음 보는데.”
“열아홉 해 전 봄에 댁 왼팔을 내가 새겼소. 획 많은 글자를 고르고는 아프다고 울상을 지었소. 열두 해 전엔 장 서방하고 나란히 앉아 가슴을 받았소. 서로 무슨 이름을 가져왔는지 안 보여 주려고 등을 돌리고 앉았다가, 둘이 한꺼번에 웃었소.”
여자가 제 가슴께를 손으로 짚었다. 거기 무엇이 있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런데 손은 그 자리를 찾아갔다. 그녀가 웃으려다 말았다. 입꼬리 옆의 점이 한 번 떨렸다.
“장 서방이 누구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이름을 대면 그 사람이 두 해 전 고개에서 굴러 죽었다는 말까지 해야 했다.
*
간난이를 깨울지 말지는 옥분이가 먼저 물었다.
“애한테 말해도 되오? 사흘이면 저 사람은 제 이름을 또 잊소. 애가 엄마를 알게 됐는데 엄마가 애를 모르면, 그걸 애가 어떻게 견디오?”
방 낭자가 볏짚 더미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잠든 간난이의 터진 손등을 한참 내려다봤다.
“알려 주세요. 모르는 쪽이 더 아픕니다. 저는 열두 해 동안 아버지 팔에 뭐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답을 듣고 잊는 것보다 물을 게 있는 줄도 모르는 게 더 컸습니다.”
옥분이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간난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부엌에 처음 보는 어른이 셋이나 있으니 겁을 먹고 물동이부터 끌어안았다. 나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간난아, 나를 아느냐?”
“새기는 집 아재요. 우리 집에 왔었잖아요. 근데 우리 집이 어디였는지 모르겠어요.”
“네 등 이름을 아느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끄러운지 물동이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엄마가 지어 줬대요. 근데 저는 엄마가 없어요. 누가 그러는데 엄마가 지어 준 거래요.”
나는 아이 귀에 허 씨의 왼팔 두 자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저기 솥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그 두 자의 주인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솥 앞의 여자를 봤다. 날마다 물을 부어 주던 아주머니였다. 아이의 눈이 여자와 나를 몇 번 오갔다.
“아재, 먼저 제 이름을 대야 한다면서요?”
아이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여자 앞으로 가서, 제 등 두 자를 댔다. 제 어미가 지어 준 두 자였다. 그리고 내가 가르쳐 준 두 자를 불렀다. 또박또박, 한 자씩 끊어서 불렀다.
넷이 되었다.
여자는 아이가 대는 등 이름을 듣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아이의 저고리 앞섶을 들췄다. 안감 한쪽에 무명실로 두 자가 수놓여 있었다. 삯바느질하는 집 아이들은 옷 안에 제 이름을 달고 다닌다. 잃어버리면 찾으라고 그렇게 한다. 촘촘한 땀이었다. 여자는 그 땀을 엄지로 한 땀씩 쓸었다. 쓸다가 멈췄다.
“이건 내 손이오.”
여자가 말했다. 누구한테 하는 말도 아니었다.
“이 땀은 내가 놓은 땀이오. 이렇게 끝을 한 번 되감는 건 내 버릇이오.”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봤다. 처음 보는 얼굴을 보는 눈이었는데, 그 눈이 점점 젖어 들었다. 아이가 제 저고리를 들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붙잡고 놓지 않았다. 허 씨의 손은 솥을 닦던 물에 불어 쭈글쭈글했고, 아이의 손은 터서 갈라져 있었다. 그 두 손이 솥 앞에서 한참 엉켜 있었다.
*
부엌 문간에서 옥분이가 기침을 크게 했다. 초롱 불빛이 뒷마당을 건너오고 있었다.
두칠이가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석 객주가 들어왔다. 석 객주는 잠자리에 들었다 나온 차림이었다. 솜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쳤고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칠이가 초롱을 들어 우리 얼굴을 하나씩 비췄다. 내 얼굴에서 초롱이 멈췄다.
“또 오셨구려. 짐꾼 차림은 처음 보오.”
두칠이 말했다. 석 객주는 아이를 보고, 아이가 붙잡은 여자를 봤다. 그 눈이 여자 위에서 흐렸다. 그는 그 여자가 누군지 몰랐다.
“이 사람은 허 씨요. 삯바느질하던 과부고, 이 아이 어미요. 객주가 산 표를 맞고 넉 달째 이 부엌에서 삯 없이 솥을 닦고 있소.”
“누군지 모르겠소.”
석 객주가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어 아이에게로 옮겼다.
“저 아이는 아오. 빚이 쉰 냥이오.”
그가 두칠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칠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 손에 얹었다. 관인이 찍힌 빚 문서였다. 석 객주는 그 종이를 펴서 등잔 쪽으로 기울여 보였다. 장 서방 이름 아래 간난이 이름이 있었다.
“아비가 진 빚은 자식이 갚소. 아이는 여기 있소. 저 여자는 누군지 모르니, 나가겠다면 막지 않소.”
그는 그 말을 하고 문서를 도로 접었다. 여자가 아이의 손을 더 꼭 쥐었다. 나는 그 손을 봤다. 막지 않는다는 말은 문을 열어 둔다는 말이 아니었다. 아이를 두고 나갈 수 있으면 나가 보라는 말이었다.
“그 빚은 꾸민 것이오. 장 서방은 짐꾼이오. 짐꾼이 객주한테 쉰 냥을 무슨 수로 빌리오?”
“관인이 찍혔소.”
석 객주가 돌아섰다. 문턱을 넘으며 그가 옥분이를 흘끗 봤다.
“방앗간 쌀은 다음 닷새부터 안 받소.”
옥분이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두칠이가 초롱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우리가 나가야 할 차례였다.
허 씨는 일어서지 않았다. 아이 손을 쥔 채 솥 앞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여기 있겠소. 이 애가 여기 있으니.”
그녀는 제 이름을 사흘이면 잊을 것이다. 그래도 저고리 안감의 땀은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고 부엌을 나왔다. 뒷문 빗장이 등 뒤에서 걸렸다. 빈 쌀섬을 둘러멘 내 어깨에 새끼 자국이 화끈거렸다.
*
골목을 빠져나오자 옥분이가 빈 쌀섬을 발로 걷어찼다.
“닷새에 두 섬이오. 한 해면 백사십 섬이 넘소. 그걸 한마디로 끊소?”
“내가 채워 주겠소.”
“선생이 무슨 수로? 첩도 없는 사람이.”
옥분이가 한 번 더 걷어차려다 말았다. 방 낭자가 쌀섬을 주워 먼지를 털었다. 그녀의 눈가가 젖어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옥분 언니, 떡전 쌀을 두 배로 대면 되잖아요. 떡전 아저씨는 이제 목소리로 장사를 하시니까.”
“그 양반 떡이 두 배로 팔리면 내 떡값은 누가 깎아 주오?”
옥분이가 투덜거렸지만 걸음은 떡전 쪽으로 향해 있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
사흘 뒤 아침, 옥분이가 석 객주 집 뒷골목 우물가를 지나다가 간난이를 만났다. 쌀을 대던 길은 끊겼으니 일부러 돌아간 길이었다. 그녀가 방앗간에 돌아와 전한 말은 이랬다.
“애가 그럽디다. 오늘 아침에 엄마가 제 이름을 몰랐다고. 그래서 저고리를 들춰 보여 줬더니, 엄마가 그 땀을 만지고는 이건 내 손이다 하더래요. 그러고 나서 제가 엄마 이름을 불러 줬다고. 엄마는 그 이름을 듣고 또 예, 했다고.”
옥분이는 그 말을 하며 방아 찧던 공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공이가 확 속으로 떨어질 때마다 쿵 소리가 났고, 그녀는 그 소리에 맞춰 말을 끊었다.
“사흘마다 그럴 거라오. 애가 그러는데, 사흘에 한 번 엄마를 새로 만나는 거라고. 그게 좋대요.”
쿵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옥분이가 공이를 놓고 소매로 얼굴을 훔쳤다. 쌀겨가 날려서 눈에 들어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