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270자) · 한수겸 · 이월 열엿새

가짜 이름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이월 열엿새, 흰머리 아낙이 새기는 집 뒤꼍으로 왔다. 이번에도 늙은 사내의 소매를 쥐고 있었다. 쪽문을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평상 끝에 털썩 앉더니 치마 속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동전 한 닢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아홉 냥이 나갔소. 세 번 갔소. 세 번 다 부르는 사람이 달랐소. 선생이 셋이면 얼굴이 남는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아침에 헛간 문을 열면 또 처음 보는 영감이 나오오.”

나는 늙은 사내의 오른 소매를 걷었다. 팔뚝 바깥쪽에 획 하나가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오래된 먹이라 푸르스름하게 가라앉았고, 획 끝이 한 번 꺾여 있어서, 서툰 손이 넣은 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소매를 걷는 동안 가만히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소매를 걷는 일에 익숙한 사람처럼 굴었다.

셋이 불렀는데 안 됐다. 스승의 종이가 틀렸거나, 셋이 셋이 아니었다. 나는 아낙이 굴린 동전을 주워 그녀 손바닥에 도로 얹었다. 그 동전은 따뜻했다. 한참을 쥐고 온 쇠였다.

“부르는 사람이 제 이름을 댈 때 어땠소?”

“빨랐소. 귓속말하듯 빨랐소. 세 번 다 그랬소.”

*

이튿날 남쪽 골목 들머리의 길 서방 집에 들렀다. 부름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가장 잘 보이는 문간이 거기였다.

길 서방은 그날도 문간에 앉아 있었다. 무릎의 먹 사발은 여전히 씻지 않은 채였고, 여러 겹 말라붙은 먹 위에 새 먹이 또 한 겹 덮여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사발을 옆으로 밀어 두고 앉을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주었다. 쓸어 준 자리에 먹 자국이 번졌다.

“선생, 나도 저 집에 불려 갔었소. 부르는 사람으로요. 두 푼 준다기에.”

“가서 무얼 했소?”

“문간에서 두칠이 그럽디다. 장부에는 진짜를 대고 입으로는 아무거나 대라고. 아무거나가 뭐냐고 물었더니 옆집 개 이름도 좋다고 했소. 우리 옆집 개는 이름이 없소. 그래서 안 했소.”

그는 제 농이 우스웠는지 혼자 웃다가, 웃음을 거두고 나를 곁눈으로 봤다.

“선생, 장부에 진짜를 대면 그게 어디로 가오?”

“형방청으로 가오.”

길 서방이 먹 사발을 도로 무릎에 올렸다. 사발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허 씨에게 스무 냥을 받고 바늘을 든 손이 그 손이었다.

“그럼 나는 반 치를 덜 알아서 다행이구려. 안 갔으니.”

그는 그 말을 제게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그 반 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그도 알았다.

*

나흘 뒤 이월 스무날 밤, 부름집 뒷담을 넘었다.

넘었다고 하기엔 담이 낮았다. 허리께까지 오는 흙담에 볏짚 이엉을 얹은 것이라, 한 발을 걸치자 이엉이 버석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뒷마당에는 장독이 셋 있었고, 그 너머 뒷방 창호지에 등잔 불빛이 누렇게 떠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비쳤다. 하나는 앉았고 하나는 서 있었다. 나는 장독 뒤에 쪼그려 앉았다. 독에 서린 찬 기운이 무릎으로 올라왔고, 된장 냄새가 밤공기에 섞여 코끝에 눅눅하게 붙었다.

서 있는 그림자가 곽 노인이었다. 목소리로 알았다.

“아이들이 가짜 이름을 대고 있소.”

앉은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한 번 났다.

“문간에서 막례 귀에 대는 이름은 진짜요. 장부에 적히는 이름 말이오. 그런데 손님 앞에서 소리로 대는 건 아무 두 자요. 어제 부른 짐꾼은 제 왼팔 이름이라고 옆집 개 이름을 댔소. 그러니 아무 일도 안 일어나오. 이름을 주지 않았는데 무엇이 붙겠소?”

“그래서 또 오지 않소.”

낮고 느린 석 객주의 목소리였다.

“알고 시켰소?”

“장부에만 진짜면 되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창호지 너머 곽 노인의 그림자가 한 걸음 다가섰다. 등잔이 흔들려 두 그림자가 창호지 위에서 한 번 크게 부풀었다가 줄어들었다.

“객주, 나는 쉰 해를 새겼소. 제 이름을 먼저 대는 건 목숨을 대는 거요. 새기는 사람들은 그걸 알아서 이름을 받으면 입을 닫소. 그런데 여기서는 저 아이들 목숨을 장부로 받아 두고, 손님한테는 헛것을 팔고 있소. 아이들한테 두 푼, 손님한테 석 냥. 그 장부는 닷새마다 형방청으로 가오.”

“품삯은 치렀소.”

“그 품삯으로 저 아이들이 표를 맞으면 누가 치르오?”

주판알 소리가 멎었다. 한참 조용했다. 그러다 석 객주가 말했다.

“일흔하나에 타관이오. 여기서 나가면 어디 가시오? 아드님 찾던 길은 어쩌시고.”

곽 노인의 그림자가 굳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석 객주는 그 말을 하고 다시 주판알을 튕겼다. 한 번, 두 번. 셈이 끝났다는 듯이.

나는 장독 뒤에서 무릎을 짚었다. 아드님이라는 말이 귀에 걸렸다. 곽 노인이 이 고을에 온 것은 아들 때문이었고, 아들은 없었다. 석 객주는 그 없는 아들을 알고 있었다.

뒷방 문이 덜컥 열렸다. 두칠이가 초롱을 들고 나왔다. 초롱 불빛이 뒷마당 흙바닥을 둥글게 훑으며 장독 쪽으로 왔고, 나는 숨을 멈췄다. 장독 셋 가운데 가운데 독의 뚜껑이 들렸다. 두칠이가 국자로 된장을 한 번 퍼 담는 동안, 초롱 불빛은 내 짚신 코앞 한 뼘에서 흔들렸다. 된장 냄새가 확 끼쳤다. 두칠이는 뚜껑을 도로 덮고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부엌 문턱을 넘은 뒤에야 나는 숨을 내쉬었는데, 무릎이 독에 붙어 얼어 있어서 펴지지 않았다.

*

뒷방 문이 열리기 전에 누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문간에서 장부를 쓰던 여자였다. 장독 사이로 기어 왔는지 치맛자락에 흙이 묻어 있었다.

“선생님, 저쪽으로요.”

그녀가 나를 뒷담 모퉁이로 끌고 갔다. 가까이서 보니 눈가가 붉었고, 먹 묻은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름은 막례, 나이는 스물둘이라고 했다. 곽 노인은 지난가을부터 제 어머니 주막 뒷방에 묵었고, 그녀는 노인 밥상을 날라 주다가 글씨를 안다는 까닭으로 이 집 장부를 맡게 되었다고 했다. 노인이 가는 데를 따라다니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장부 베낀 것을 닷새마다 구 서리가 가져갑니다. 제가 베껴 드립니다. 처음엔 품삯 장부인 줄 알았습니다. 셋째 번에 구 서리가 이름 두 개에 먹으로 점을 찍는 걸 봤습니다.”

“그 점 찍힌 사람들이 누구요?”

“열여섯 먹은 아이 하나, 빨래하는 아주머니 하나입니다. 둘 다 가짜를 안 댄 사람들이에요. 가짜를 대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진짜를 댔습니다. 진짜를 댄 사람한테만 점이 갔습니다.”

그녀가 치마를 움켜쥐었다. 치마 주름이 그녀 주먹 안에서 뭉개졌다.

“저도 제 이름을 장부 첫 장에 적었습니다. 제 손으로요.”

*

이튿날 아침, 곽 노인과 막례가 떡전으로 왔다.

떡전 아들은 시루에 찹쌀을 안치고 있었다. 김이 떡전 안을 가득 채워서, 들어서는 사람마다 얼굴이 먼저 젖었다. 곽 노인은 문간에서 한참 그를 봤다. 처음 보는 떡장수를 보는 눈이었다.

“이 사람이오?”

“이 사람입니다.”

내가 먼저 내 왼팔 두 자를 댔다. 세 번째라 목이 덜 걸렸다. 그리고 떡전 아들의 등 이름을 불렀다. 떡전 아들이 시루 뚜껑을 쥔 채 우리를 봤다. 그 손에 늘 그렇듯 힘이 한 번 들어갔다.

곽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소매를 걷지 않았다. 제 왼팔을 손바닥으로 한 번 덮었다가 내려놓았다.

“나는 새기는 사람이오. 남의 이름을 쉰 해 받았소. 내 것을 남 앞에서 대는 건 처음이오. 일흔한 해에 처음이오.”

그가 두 자를 댔는데, 목소리가 낮고 또렷했다. 귓속말처럼 빠르지 않았다. 한 자 한 자를 입 안에서 다 굴리고 내놓았다. 그 두 자가 떡전 김 속에 섞여 흩어지는 동안 곽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떡전 아들의 두 자를 불렀다.

막례가 그다음이었다. 그녀는 입을 두 번 열었다가 닫았다. 세 번째에 두 자가 나왔는데 끝이 갈라졌다. 그녀는 제 귀까지 빨개진 것을 손등으로 가리며, 떡전 아들의 이름을 따라 불렀다.

일곱이 되었다.

떡전 아들이 막례를 보고, 곽 노인을 보고, 다시 막례를 봤다. 그러고는 시루 뚜껑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굽혔다.

“처음 뵙겠소, 하고 인사를 하려다 말았소. 이제 댁들한테는 그 인사를 못 하겠구려. 스무 해 한 인사인데 쓸 데가 줄어서 섭섭하오.”

막례가 웃음을 터뜨렸다. 울던 끝이라 웃음에 콧소리가 섞였다.

떡전 아들이 제 목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부른 사람을 그 자리에서 다시 보고 있으니 목이 뜨거웠을 것이다. 곽 노인이 그것을 보고 처음으로 웃었다.

“이게 진짜요. 부름집 문간에서 목을 문지르라고 일러 주는 건 막례요. 객주가 시켰소. 손님들 목이 뜨거운 건 석 냥 낸 속이 뜨거운 거요.”

막례가 고개를 숙였다. 옥분이가 방앗간 됫박을 들고 떡전 문으로 들어오다가 그 말을 들었다.

“석 냥이면 나도 속이 뜨겁겠소. 떡이 이백 개요.”

“그 셈은 어제도 하셨소.”

떡전 아들이 말했다. 옥분이가 됫박으로 그의 어깨를 한 번 쳤다. 됫박 속에 담긴 쌀이 몇 알 튀어 떡판에 흩어졌다.

*

곽 노인은 떡전을 나서기 전에 떡전 아들을 한 번 더 봤다. 오래 봤다. 돌아섰다가 다시 봤다. 셋을 넘긴 지 한참 된 얼굴이라 그의 눈에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스물여섯이라 했소?”

“그렇소.”

“내 아들이 살았으면 마흔여섯이오.”

곽 노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떡판에 흩어진 쌀알을 손바닥으로 모아 됫박에 도로 넣어 주었다. 쉰 해 바늘을 잡은 손이라 쌀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어른, 부름집은 이제 그만두시오.”

“안 그만두오.”

그가 됫박을 옥분이에게 건넸다.

“내가 나오면 장부는 누가 보오? 막례 혼자 두면 막례도 점이 찍히오. 안에 있어야 객주가 무엇을 사고파는지 보이오. 쉰 해 남의 팔을 들여다본 눈이오. 장부 하나 못 들여다보겠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옳았고, 옳은 말이 무서웠다. 그는 막례의 손을 잡고 남쪽 골목으로 걸어갔다. 떡전 아들이 시루 뚜껑을 열었다. 김이 한꺼번에 솟아올라 떡전 들보를 적셨고, 그는 그 김 속에서 한참 떡을 뒤집지 않고 서 있었다.

해 질 녘에 흰머리 아낙의 집을 찾아가 헛간 앞에서 그 말을 전했다. 아홉 냥이 헛돈이었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한참 헛간 기둥을 쥐고 서 있었다. 기둥에 박힌 옹이를 엄지로 문지르는 소리가 사각사각 났다.

“그럼 이 영감 이름을 진짜로 불러 줄 사람을 셋 구하면 되오?”

“셋이면 되오. 다만 부르는 사람은 제 이름을 먼저 대야 하오.”

“내 이름은 내가 대겠소. 나머지 둘은 어디서 구하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헛간 문을 열어 영감을 안으로 들였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녀가 영감 소매를 한 번 더 쥐는 것이 보였다.

그날 저녁 나는 뒷방 벽 쪽지 아래에 한 줄을 보탰다. 곽 노인, 막례. 쪽지는 이제 쪽지라기보다 명단이 되어 가고 있었다. 떡전 아들이 그 줄을 보더니 제 굵은 글씨로 옆에 적었다. 둘 다 떡값 안 받음.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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