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579자)
해 지기 전 백 냥
무림 고수들에게 수리비 받기 · 권무한
연옥의 말이 콧김을 한 번 더 뿜었다. 바우는 대패를 재 더미 위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손바닥에 숯가루가 검게 묻어 있었다. 바지에 손을 닦았다.
“아직이요.”
“아직이요?”
“북은 받을 돈으로 쳐요. 은괴는 제가 받을 돈이 아니에요. 그걸 대회장 문 앞에서 외치면 저도 거짓 한 가지가 돼요.”
연옥이 고삐를 풀었다 감았다.
“그럼 방주가 그 은괴로 거리를 다 사는 걸 보고만 있어요?”
“보고 있진 않을게요. 대신 연옥 씨는 궤짝을 기억해 두세요. 궤짝 몇 개였는지, 어디에 무슨 표식이 있었는지, 누가 받았는지.”
“궤짝마다 바닥에 호연세가 표식이 불로 지져져 있었어요. 은괴 밑에도 찍혀 있고요.”
“그거면 돼요.”
연옥이 바우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모닥불도 없는 밤이라 연옥의 얼굴은 잘 안 보였다.
“목수, 내가 언제까지 가운데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바우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연옥은 말 머리를 돌렸다. 말발굽 소리가 교장 쪽으로 멀어졌다.
*
이튿날 아침 성 안 전당포에서 사람이 왔다. 사환 아이가 버들객잔 대문 앞에서 소리쳤다.
“하 사장님, 새 주인 어른이 부르십니다. 빚 이야기요.”
소란은 앞치마를 벗지 않고 따라나섰다. 바우가 이 옆에 붙었다. 마석공이 따라붙었다. 구담은 대문을 지켰다.
전당포는 성 안 동문 시장 뒤 골목에 있었다. 높은 계산대 너머로 저당 잡힌 물건들이 선반마다 빼곡했다. 놋대야, 비녀, 칼, 장구, 누군가의 혼례 옷. 계산대 안쪽 의자에 흰 장포가 앉아 있었다. 이 옆에 원래 전당포 주인이던 늙은이가 손을 모으고 서 있었고, 오길이 계산대에 팔꿈치를 기대고 있었다.
설백천이 소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 사장, 이번 달부터 이 전당포는 내 것이오.”
“알아요.”
“두 해 전 물난리 때 백 냥을 빌리셨소. 그때 이 늙은이에게 한 약조가 있소. 주인이 갚으라 하면 사흘 안에 갚는다. 그 사흘을 오늘 해 지기 전으로 당기겠소. 이자가 스무 냥 붙어 백스무 냥이오.”
“사흘이라 했으면 사흘이에요.”
“사흘 뒤는 개막 다음 날이오. 그때는 하 사장이 객잔에 없을 수도 있소.”
소란의 손이 계산대 모서리를 쥐었다. 손톱 끝이 하얘졌다.
“없을 수도 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대회가 끝나면 거리 사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뜻이오.”
설백천은 이 말을 하고 나서 다른 길을 하나 내밀었다.
“객잔을 넘기시면 빚은 없던 일로 하고 쉰 냥을 얹어 드리겠소. 첫날 서른 냥 부를 때보다 스무 냥 많소. 목수 양반이 대들보를 세운 값이오.”
바우가 앞으로 나섰다. 오길이 계산대에서 팔꿈치를 떼고 이 앞을 막았다. 바우는 오길을 비켜 서서 설백천을 보았다.
“해 지기 전 백 냥이요.”
“백스무 냥이오.”
“백 냥 가져올게요.”
설백천의 눈이 바우에게 왔다. 처음 버들객잔 마당에서 하룻밤이면 된다고 했을 때와 같은 눈이었다.
“목수 양반은 늘 해 지기 전, 해 뜨기 전이구려.”
*
해 지기 전까지 네 시진이 남아 있었다. 바우의 허리춤에는 은자 열 냥이 있었다. 마석공에게 석 달 치를 주고 남은 다섯 냥과, 쌍칼 형제가 낸 여덟 냥에서 떡집과 찻집 기와 값을 치르고 남은 다섯 냥이었다. 소호 뗏목 영감에게 개막 날 해 지기 전까지 갚아야 할 열 냥이었다.
“형님, 그거 쓰면 뗏목 영감이 기둥 뽑으러 와요.”
“영감은 개막 날이야. 소란 씨는 오늘이고.”
소란이 객잔 돈궤를 열었다. 바우가 대들보를 세운 뒤로 대회 손님을 받아 모은 돈이었다. 서른두 냥이었다. 바우의 열 냥과 합해 마흔두 냥이 되었다.
바우는 목공방 재 더미로 갔다. 타다 남은 통나무 셋이 누워 있었다. 어젯밤 숯을 깎아 낸 속살이 노랗게 드러나 있었다. 서까래 감 열이 나올 나무였다. 거리에 남은 마지막 나무이기도 했다.
“석공아, 오길한테 가자.”
“팔아요? 오길한테요?”
“오길이 그랬잖아. 이 거리 나무는 한 그루에 다섯 냥이라고.”
마석공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가늘어졌다. 장사꾼 눈이었다.
오길은 신발 가게 자리 차양 밑에 있었다. 바우가 통나무 이야기를 꺼내자 웃음부터 터뜨렸다.
“목수가 나무를 판다? 그 나무 없으면 내일 무너지는 집은 뭘로 세우오?”
“그건 내일 걱정이에요.”
“한 그루 두 냥.”
마석공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오길 씨가 그랬어요, 목재 시장 다 비던 날. 이 거리 나무는 한 그루 다섯 냥이라고. 형님한테는 열 냥이라고도 했고요. 방주님 앞에서요. 그때 오길 씨 값이 맞으면 지금도 다섯 냥이에요. 그때 값이 거짓이었으면 오길 씨가 방주님 앞에서 거짓말한 거고요.”
“숯덩이가 무슨 다섯 냥이야.”
“속은 노래요. 보세요.”
마석공이 통나무 깎은 면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오길이 이 노란 속살을 보았다. 이 나무가 바우 손에 남아 있는 한 거리 집이 하룻밤에 다시 선다는 것을 알았다. 설백천이 이 나무를 바우 손에서 떼어 내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았다.
“셋에 열두 냥.”
“열다섯이요. 한 그루 다섯. 오길 씨 값이요.”
“열셋.”
“열다섯이요. 오길 씨가 깎으면 오길 씨 값이 틀린 거예요.”
오길이 이를 갈며 열다섯 냥을 세었다. 쉰일곱 냥이 되었다. 짐꾼 셋이 와서 통나무를 메고 갔다. 바우는 이 나무가 거리 위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았다.
*
거리 사람들은 바우가 나무를 팔았다는 말을 듣고 나서 움직였다. 기름집 할멈이 앞치마에 동전 꿰미를 싸 들고 왔다. 한 냥 값이었다. 찻집 주인이 한 냥을 들고 왔다. 떡집, 옹기전, 짐배 사공, 맨 처음 대청에서 손을 든 열아홉 집이 하나씩 왔다. 은자 대신 동전 꿰미로, 동전 대신 참기름 단지로 오는 집도 있었다. 마석공이 단지를 받아 들고 동문 시장으로 뛰어가 돈으로 바꿔 왔다. 열아홉 냥이 모였다. 일흔여섯 냥이었다.
오후 늦게 쇠도끼가 왔다. 머리에 감은 천은 풀었고 이마에 딱지가 앉아 있었다. 마석공은 바우 발치에 동전 꿰미 하나를 던졌다. 서른 닢이었다.
“불값이야. 일부.”
“나머지는요?”
“방주한테 받을 거 받으면.”
쇠도끼는 돌아서서 갔다. 마석공이 동전 꿰미를 주워 들고 혀를 찼다. 은자 한 냥에 한참 모자랐다. 그래도 바우는 이것을 따로 허리춤에 넣었다.
해가 서쪽 성벽에 걸렸을 때 연옥이 말을 타고 왔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소란에게 은자 주머니를 던졌다. 스물두 냥이었다.
“호송 품삯 남은 거예요. 꾸어 주는 거예요. 갚아요.”
“이자는요?”
“나는 철혈방 아니에요.”
모두 아흔여덟 냥이 되었다.
*
해가 성벽 아래로 반쯤 들어갔을 때 셋은 전당포 계산대 앞에 섰다. 바우가 은자와 동전 꿰미를 계산대 위에 쏟았다. 원래 주인이던 늙은이가 주판을 놓았다. 설백천은 의자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흔여덟 냥이오. 이자까지 백스무 냥에서 스물두 냥이 모자라오.”
마석공이 계산대에 두 손을 짚었다.
“방주님, 사흘 뒤 갚을 빚을 오늘 갚는 거예요. 빨리 갚는 사람한테 이자를 더 받는 전당포가 어디 있어요? 원래 사흘 뒤에 받으면 이자가 붙고, 오늘 받으면 사흘 치를 빼 줘야죠. 이 동네 전당포는 다 그래요. 저 할아버지한테 물어보세요.”
원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가 설백천의 눈을 보고 도로 숙였다. 그러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날짜를 당긴 건 방주님이에요. 날짜 당긴 값은 당긴 사람이 내는 거예요. 부순 손이 무는 것처럼요.”
설백천이 마석공을 보았다. 오길을 보았다. 오길은 계산대 모서리만 보고 있었다.
“견습, 정말 우리 오길보다 낫구려.”
설백천이 손을 저었다.
“이자는 없던 일로 하겠소. 백 냥이오.”
“두 냥 모자라요.”
소란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해가 성벽 아래로 거의 다 들어갔다. 계산대 위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었다.
마석공이 품에서 은자 세 냥을 꺼냈다. 바우가 재 더미 옆에서 쥐여 준 석 달 치였다.
“제 품삯이에요. 한 냥은 거슬러 주세요. 놀란 값으로 쓸 거예요.”
마석공은 은자를 계산대 위에 올렸다. 바우가 마석공을 보았다. 마석공은 바우를 보지 않았다. 늙은 전당포 주인이 한 냥을 거슬러 주었다. 설백천이 일어섰다.
“백 냥, 받았소.”
설백천은 소란에게 고개를 숙이고 계산대를 돌아 나왔다. 바우 옆을 지나면서 말했다.
“목수 양반, 나무를 팔았구려. 오늘 밤이 예선 마지막 밤이오.”
*
버들객잔 대문 앞에서 구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명을 감은 어깨가 저녁 바람에 굳어 보였다.
“예선장 뒷마당에 다녀왔소. 오늘 예선에서 떨어진 자들이 오길 앞에 줄을 섰소. 스물이오. 하나에 다섯 냥씩 받았소.”
“다섯 냥이면 뭘 하래요?”
“예선 마지막 밤을 거리에서 크게 놀라고 했소. 무너지는 건 방주가 다 산다고.”
바우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고친 집이 다섯이었다. 나무는 오늘 다 팔았다. 무너지면 다시 세울 나무가 없었다.
바우는 물동이를 들었다. 마석공이 다른 동이를 들었다. 둘은 해가 다 지기 전까지 고친 집 다섯을 돌았다. 기둥과 들보가 물린 자리마다, 서까래가 도리에 물린 자리마다 나무못 머리에 물을 한 국자씩 부었다. 마른 나무못이 물을 먹고 부풀어 구멍을 꽉 물었다. 집이 한 번 더 조여졌다. 기름집 영감이 이 모양을 보고 물었다.
“그게 뭐 하는 거야?”
“집이 오늘 밤 덜 흔들리게요.”
“흔들릴 일이 있어?”
바우는 대답 대신 영감에게 오늘 밤 문을 걸고 기름틀 옆에 있으라고 했다. 찻집에도, 떡집에도, 옹기전에도 같은 말을 했다. 거리 사람들이 하나둘 덧문을 닫았다. 구담은 칼을 무릎에 올려놓고 버들객잔 대문 문지방에 앉았다. 하나 남은 손으로 칼자루를 쥐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어깨의 무명에 피가 조금 배어 나왔다.
*
이 밤 버들객잔 이층 동쪽 방은 비어 있었다. 구담은 대문을 지켰다. 마석공은 아래층 대청 탁자 위에서 코를 골았다. 소란이 등잔을 들고 계단을 올라왔다. 바우는 방 한가운데 서서 느티나무 대들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란이 등잔을 바닥에 놓고 이 옆에 섰다. 손을 뻗어 대들보 아랫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대패 자국이 손바닥에 걸렸다가 풀렸다.
“이거 바우 씨 장가갈 집 대들보였다면서요.”
“석공이 입은 막아야 돼요.”
“왜 줬어요?”
“이층이 없으면 손님을 못 받잖아요.”
“그건 내 사정이죠. 바우 씨 사정은요?”
바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소란의 손이 대들보 위에 머물렀다. 소란의 팔목 안쪽에서 비누 냄새와 술 냄새와 장작 연기 냄새가 같이 났다. 바우는 이 냄새를 오래 맡았다. 소란이 손을 내려 바우의 손바닥을 잡았다. 끌 자루 자국이 패인 자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손이 왜 이래요?”
“밀어서요.”
“다 밀어서 해요? 집도, 사람도?”
소란이 한 걸음 다가섰다. 등잔 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대들보 위로 길게 올려 보냈다. 소란의 숨이 바우의 턱에 닿았다. 바우가 숨을 들이켰다.
이때 대들보가 떨렸다.
손바닥으로 먼저 알았다. 대들보를 짚고 있던 소란의 다른 손도 알았다. 둘이 동시에 창 쪽을 돌아보았다. 거리 아래쪽 어둠 속에서 횃불이 하나, 둘, 열, 스물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칼집 부딪치는 소리, 술 취한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대문 밖에서 오길의 목소리가 거리 전체에 울렸다.
“예선 마지막 밤이오! 강남 고수들의 비무요!”
쿵.
버들객잔 대문 기둥이 걷어차였다. 이층 대들보가 바우의 손바닥 아래에서 한 번 크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