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627자)

심판의 빚

무림 고수들에게 수리비 받기 · 권무한

쇠부채의 날이 오길의 목에 하얀 금을 그었다⁠. 피는 나지 않았다⁠. 설백천은 피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사실이 거리 사람들 누구보다 오길을 더 떨게 했다⁠.

“⁠방주님⁠.⁠”

오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리가 깔렸을 때 방주님 짐꾼들은 다 도망갔소⁠. 목수가 꺼냈소⁠.⁠”

“⁠목수에게 갚을 것은 목수에게 갚으시오⁠. 철혈방 일은 철혈방에서 말하시오⁠.⁠”

거리 위쪽 어귀에서 발소리가 났다⁠. 검은 옷의 사내 다섯이 내려왔다⁠. 맨 앞의 집사가 숯 더미를 한 번 보고⁠, 그을린 기름집 벽을 보고⁠, 쇠부채를 보았다⁠.

“⁠심판 어른⁠, 오늘이 심판 선서 날이오⁠. 선서를 앞두고 대회장 둘레에서 피를 보시면 가주께서 싫어하시오⁠.⁠”

설백천이 부채를 접었다⁠. 쇠 살이 맞물리는 소리가 새벽 거리에 찰칵 울렸다⁠. 오길이 주저앉았다⁠. 쌍칼 형제가 이 앞을 막아섰다⁠.

집사가 바우를 돌아보았다⁠.

“⁠어젯밤 이 거리에서 망치 소리가 났다고 무사들이 아뢰었소⁠.⁠”

“⁠불 끄는 소리였어요⁠.⁠”

“⁠세가가 헐겠다고 한 집이 어느 집이었소⁠?⁠”

“⁠망치 친 집이요⁠. 저 집이요⁠.⁠”

바우가 숯 더미를 가리켰다⁠. 무너진 민가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집사는 이 숯 더미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미 헐렸구려⁠.⁠”

집사는 이 말만 하고 설백천에게 고개를 숙였다⁠. 설백천은 오길을 한 번 더 보았다⁠. 다음 바우에게 눈을 돌렸다⁠.

“⁠목수 양반⁠, 선서는 정오요⁠. 단상에서 봅시다⁠.⁠”

*

해가 중천으로 올라가는 동안 버들객잔 대청에서는 셈이 벌어졌다⁠. 바우는 손가락을 접었고⁠, 마석공은 이 옆에서 소리 내어 따라 셌다⁠. 오길은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 앉아 바우가 묻는 대로 답했다⁠. 어느 집에 누구를 보냈는지⁠, 얼마를 쥐여 줬는지⁠, 무엇이라고 일렀는지⁠. 거간의 입은 값을 기억했다⁠. 이 값이 그대로 설백천의 빚이 되었다⁠.

구담이 오길에게 받은 열 냥⁠, 부순 값은 방주가 문다는 약조⁠. 연옥이 찻집 지붕과 객잔 부엌 값으로 바우에게 낸 일곱 냥⁠, 도둑을 쫓게 한 오길의 거짓말⁠. 쌍칼 형제가 넘긴 여덟 냥⁠. 쇠도끼가 넘긴 십 년 묵은 두 냥 반⁠. 첫날 아침 거리 아래쪽에서 한꺼번에 무너진 신발 가게와 민가와 기름집⁠. 목공방과 통나무 아홉 그루⁠. 어젯밤 스물이 부순 찻집 지붕과 떡집 덧문과 옹기전 독⁠. 기름집 벽 그을린 값⁠.

“⁠그리고 놀란 값이요⁠.⁠”

마석공이 손가락 하나를 더 접었다⁠.

“⁠그건 거짓 값이야⁠.⁠”

“⁠찻집 아저씨가 네 번 놀랐어요⁠. 네 번이면 진짜죠⁠.⁠”

“⁠그 사람이 놀라게 한 게 아니잖아⁠.⁠”

“⁠그 사람이 돈 주고 놀라게 했잖아요⁠.⁠”

바우가 마석공을 노려보았다⁠. 마석공은 손가락을 도로 폈다⁠. 그리고 한쪽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바우는 이것을 보지 못했다⁠.

다 합해 은자 삼백열 냥이었다⁠.

*

정오의 대회장 문 앞에는 사람이 많았다⁠. 예선을 통과한 고수들이 본선 날을 앞두고 단상을 구경하러 왔고⁠, 합비 성 안 사람들이 심판 선서를 보러 올라왔다⁠. 단상 옆에 흰 차일이 쳐져 있었다⁠. 차일 아래 의자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앉아 있었다⁠. 호연세가 가주였다⁠. 가주는 부채질도 하지 않고 단상만 보고 있었다⁠. 의자 뒤에 세가 무사 열이 칼집 끝을 땅에 나란히 세우고 서 있었다⁠. 거리 사람들은 이 노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십 년마다 강남 무림을 이 교장에 불러 모으는 사람이었다⁠.

심판 다섯이 문 안쪽에 줄을 섰다⁠. 설백천이 이 가운데 있었다⁠. 단상 계단 앞에서 집사가 선서할 글을 펼쳐 들었다⁠.

바우가 북채를 쥐었다⁠.

둥⁠, 둥⁠, 둥⁠.

세 번째 북소리가 단상에 부딪혀 돌아왔다⁠.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집사가 글을 접었다⁠. 차일 아래 가주의 눈이 처음으로 단상에서 떨어져 북 쪽으로 왔다⁠.

“⁠빚을 외치시오⁠.⁠”

집사의 목소리에 지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바우는 북채를 내려놓고 문 앞에 섰다⁠. 뒤로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섰다⁠. 구담⁠, 연옥⁠, 쌍칼 형제⁠, 쇠도끼⁠, 다리를 절뚝이는 오길⁠, 그리고 거리 사람 서른⁠.

“⁠철혈방 방주 설백천⁠.⁠”

문 안의 심판 줄에서 설백천이 고개를 들었다⁠.

바우는 하나씩 외쳤다⁠. 구담의 열 냥부터 기름집 벽 그을린 값까지⁠. 하나를 외칠 때마다 이 빚을 가진 사람이 줄에서 한 걸음 나와 섰다⁠.

구담이 먼저 섰다⁠. 문 안의 설백천을 보았다⁠. 사람들은 외팔 검객이 무엇을 외칠지 숨을 죽였다⁠. 십 년 전 계단 밑의 쇠부채 이야기는 이미 거리에 돌았다⁠.

“⁠열 냥이오⁠.⁠”

구담은 이 말만 했다⁠. 집사가 구담을 보았다⁠.

“⁠그것뿐이오⁠?⁠”

“⁠팔 값은 법도에 없소⁠. 법도에 있는 것만 외치오⁠.⁠”

설백천의 얼굴이 아주 조금 굳었다⁠. 구담은 다시 줄로 돌아갔다⁠. 이 다음에 연옥이 섰다⁠.

“⁠찻집 지붕과 객잔 부엌⁠, 일곱 냥이요⁠. 오길이 없는 도둑 이야기로 나를 지붕에 올렸어요⁠.⁠”

쌍칼 형제가 나란히 섰다⁠. 형이 여덟 냥이라 외치자 아우가 형님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투덜거렸다⁠. 쇠도끼가 마지막으로 섰다⁠.

“⁠십 년 묵은 두 냥 반⁠. 목수한테 넘겼소⁠. 이자는 안 붙였소⁠.⁠”

거리 집주인들이 제 집 이름이 나올 때마다 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오길이 절뚝이며 앞으로 나왔다⁠.

“⁠이 모든 집에 사람을 보내고 돈을 쥐여 준 건 내 손이오⁠. 그 돈은 방주님 돈이었소⁠. 부순 값은 방주님이 다 문다고 일렀소⁠. 방주님이 그렇게 이르라 했소⁠.⁠”

사람들이 술렁였다⁠. 설백천이 심판 줄에서 걸어 나왔다⁠. 걸음이 느렸다⁠.

“⁠집사 어른⁠, 비무는 강호 사람들이 한 것이오⁠. 나는 무너진 집을 샀을 뿐이오⁠. 저 거간은 목수 손에 목숨을 건져 목수 편이 된 자요⁠. 거간의 말은 값이 없소⁠.⁠”

“⁠값이 없는지 있는지는 손목이 말할 거예요⁠.⁠”

바우의 말이 끝나자 쌍칼 형제가 뒤에서 철혈방 짐꾼 셋을 앞으로 밀어냈다⁠. 어젯밤 민가에 기름을 붓던 셋이었다⁠. 형제가 이들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세 손목에 둥근 테 안에 피 혈 자를 박은 낙인이 있었다⁠. 쇠도끼가 그을린 기름 동이 하나를 땅에 내려놓았다⁠. 동이 옆구리에 같은 낙인이 불로 지져져 있었다⁠.

설백천이 잠깐 말이 없다가 숯 더미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렇다면 목수도 어젯밤 내 집 한 채를 무너뜨렸소⁠. 그 값부터 빼시오⁠.⁠”

“⁠불붙은 집이오⁠.⁠”

집사가 말했다⁠.

“⁠불 놓은 값은 불 놓은 손이 무오⁠. 이 거리 말로는 부순 손이 문다지 않소⁠.⁠”

설백천의 입이 닫혔다⁠. 이 틈에 마석공이 줄 뒤에서 뛰어나왔다⁠. 등 뒤에 숨겼던 손가락 하나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찻집 아저씨 네 번 놀란 값⁠, 한 냥이요⁠!⁠”

대회장 문 앞이 조용해졌다⁠.

설백천이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집사 어른⁠, 놀란 값은 부순 값이오⁠?⁠”

집사가 바우를 보았다⁠. 바우의 눈이 마석공에게 갔다⁠. 마석공의 얼굴이 하얘졌다⁠. 집사가 천천히 말했다⁠.

“⁠놀란 값은 부순 값이 아니오⁠. 거짓 한 가지요⁠. 거짓 한 가지에 볼기 열 대⁠, 외친 사람이 맞소⁠.⁠”

마석공이 입을 열었다⁠.

“⁠제가 외쳤어요⁠. 제가 맞을게요⁠.⁠”

바우가 마석공을 옆으로 밀었다⁠.

“⁠제 견습이 외친 건 제가 외친 거예요⁠. 셈을 가르친 사람이 저예요⁠.⁠”

세가 무사 둘이 바우를 문 앞 마당에 엎드리게 했다⁠. 곤장이 들렸다⁠. 첫 대가 떨어졌을 때 바우는 이를 악물었다⁠. 엉덩이에서 불이 났다⁠. 두 번째 대에 숨이 막혔다⁠. 세 번째 대부터는 세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 밑의 흙을 쥐었다⁠. 흙이 따뜻했다⁠. 마석공이 곁에서 숫자를 셌다⁠. 목소리가 울음으로 갈라졌다⁠. 찻집 주인이 줄에서 소리쳤다⁠.

“⁠나 하나도 안 놀랐어⁠! 하나도⁠!⁠”

열 대째가 떨어지고 바우는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석공이 이 팔을 붙잡았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었다⁠.

“⁠형님⁠, 제가 맞는다니까요⁠.⁠”

“⁠네 엉덩이는 내일 지붕에 올라가야 돼⁠.⁠”

“⁠형님 엉덩이는요⁠?⁠”

“⁠나는 내일 지붕 안 올라가⁠.⁠”

“⁠그럼 누가 올라가요⁠?⁠”

“⁠너⁠.⁠”

마석공이 울다가 웃었다⁠. 소란이 줄에서 나와 바우의 다른 팔을 잡았다⁠. 바우를 노려보면서도 손은 놓지 않았다⁠. 바우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문 앞에 다시 섰다⁠.

“⁠놀란 값은 뺍니다⁠. 나머지는 그대로 외칩니다⁠. 삼백아홉 냥이오⁠.⁠”

집사가 줄에 선 사람들을 보았다⁠. 낙인 찍힌 손목 셋과 기름 동이와 서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차일 쪽을 한 번 보았다⁠. 가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빚이 섰소⁠. 설 방주는 갚거나 받을 사람들이 됐다 할 때까지 단상에 오를 수 없소⁠. 심판 선서도 할 수 없소⁠.⁠”

설백천이 차일 쪽을 보았다⁠. 가주의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한 번 두드렸다⁠. 이것뿐이었다⁠. 설백천은 몸을 돌려 대회장 밖에 세워 둔 수레로 걸어갔다⁠. 짐꾼들이 수레에서 쇠테를 두른 궤짝 셋을 내렸다⁠. 설백천이 궤짝을 열었다⁠. 은괴와 은자가 햇빛에 번쩍였다⁠.

“⁠삼백아홉 냥이오⁠. 세어 보시오⁠.⁠”

*

해 질 무렵까지 바우는 버들객잔 대청에서 은자를 나누었다⁠. 구담에게 열 냥⁠, 연옥에게 일곱 냥⁠. 쌍칼 형제가 넘긴 여덟 냥은 떡집과 옹기전 몫으로⁠, 쇠도끼가 넘긴 두 냥 반은 목공방 몫으로 들어갔다⁠. 집주인들에게는 제 집 값이 돌아갔다⁠. 첫날 집을 판 신발 가게 주인과 민가의 젊은 부부에게도 이날 무너진 값이 돌아갔다⁠. 바우는 목공방 값과 통나무 아홉 그루 값을 받았다⁠. 소호 뗏목 영감에게 갚을 열 냥을 따로 묶었다⁠. 연옥이 소란에게 꾸어 준 스물두 냥은 바우가 목공방 값에서 덜어 돌려주었다⁠. 연옥은 받으면서 이자는 없다고 한 번 더 말했다⁠.

오길이 다리를 끌고 대청 한가운데로 나왔다⁠.

“⁠철혈방이 산 집 열둘⁠, 방주님은 한 번도 제 이름으로 산 적이 없소⁠. 손에 흙 안 묻히는 분이라⁠. 다 내 이름으로 샀소⁠.⁠”

오길은 거리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판 사람들한테 산 값에 되팔겠소⁠. 오늘 받은 수리비면 다들 살 수 있을 거요⁠. 방주님한테 혼날 일은 내가 혼나겠소⁠. 어차피 혼날 일은 이미 했소⁠.⁠”

신발 가게 주인과 민가의 젊은 부부가 대청 문간에서 서로를 보았다⁠. 염색집 주인은 깨진 쪽 항아리 생각에 한참 망설였다⁠. 이튿날 아침 이들은 은자를 들고 오길을 찾아왔다⁠.

구담은 이 저녁 대회장 등록처로 올라갔다⁠. 어젯밤 횃불을 들고 거리를 부순 스물 틈에⁠, 예선을 통과하고도 다섯 냥이 탐나 끼어든 자가 둘 있었다⁠. 집사는 불은 비무가 아니라며 이 둘을 본선에서 지웠다⁠. 빈자리 둘은 해 지기 전까지 참가비를 내는 사람에게 돌아갔다⁠. 구담은 방주에게서 돌려받은 열 냥을 탁자에 놓았다⁠. 버들객잔 이층에서 싸우고 받은 이 열 냥이 돌고 돌아 참가비 자리로 돌아왔다⁠. 집사가 붓에 먹을 찍었다⁠.

“⁠이름은⁠?⁠”

“⁠구담이오⁠.⁠”

구담은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계단 열두 칸이 저녁 해에 붉었다⁠. 이번에는 오래 보았다⁠.

*

대회장 마당에서 짐꾼들이 설백천의 빈 궤짝을 수레에 다시 싣고 있었다⁠. 바우가 엉덩이를 감싸 쥐고 이 옆을 지나다 걸음을 멈췄다⁠. 맨 마지막 궤짝이 기울어진 채 수레에 실렸고⁠, 이 바닥이 바우 쪽을 향해 있었다⁠.

궤짝 바닥 한가운데에 불로 지진 표식이 있었다⁠. 호연세가의 표식이었다⁠. 연옥이 말 위에서 이것을 보고 바우를 보았다⁠.

설백천이 수레 옆에 서 있었다⁠. 바우의 눈이 어디를 보는지 보았다⁠.

“⁠목수 양반⁠, 내가 누구 돈으로 갚았는지 이제 아시오⁠?⁠”

설백천은 웃지 않았다⁠. 지친 얼굴이었다⁠.

“⁠나는 진 거요⁠. 그런데 내가 진 돈은 내 돈이 아니었소⁠.⁠”

바우의 어깨에 손이 얹혔다⁠. 마른 손이었다⁠. 돌아보니 집사가 서 있었다⁠.

“⁠목수⁠, 가주께서 부르십니다⁠.⁠”

집사의 손가락이 바우의 어깨를 꽉 쥐었다⁠. 차일 아래 흰 머리의 노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설백천이 수레 곁을 떠나 이 차일 쪽으로 먼저 걸어갔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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