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56자)

달력 세 권, 길일은 하나

무림 결혼정보회사 · 여무겸

사월 초이틀 아침⁠, 월하원 이층 맞선 탁자에 달력 세 권이 펼쳐져 있었다⁠. 엽소화는 탁자 머리에 앉았고⁠, 곽춘매가 붓과 먹을 들고 뒤에 섰다⁠. 신랑 집이 혼례 날을 골라 신부 집에 알리고 받아 달라고 청하는 것을 청기라 했다⁠. 날을 받으면 혼례만 남았다⁠.

첫 번째 달력은 관매 장금옥이 들고 왔다⁠. 하남부 관아가 해마다 반포하는 책력으로⁠, 겉장에 황제의 연호가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장금옥은 열흘 뒤에 오겠다더니 열흘을 다 채우지 않고 나타났다⁠.

“⁠관아 도장이 찍힌 혼서는 관아 책력의 길일에만 올라가오⁠. 사월 길일은 초여드레⁠, 열사흘⁠, 열엿새⁠, 스무엿새⁠, 스무여드레⁠.⁠”

두 번째 달력은 구양추가 품에서 꺼냈다⁠. 양가죽을 꿰매어 만든 책이었고⁠, 별자리가 붉은 물감으로 그려져 있었다⁠.

“⁠마교는 서쪽 별을 보고 날을 잡는다⁠. 사월에 신부가 집을 나가도 되는 날은 열엿새⁠, 스무엿새⁠, 그리고 그믐⁠.⁠”

“⁠그믐은 휴전이 끝나는 날입니다⁠.⁠” 소화가 말했다⁠.

“⁠그래서 좋은 날이다⁠. 싸움이 붙기 전에 시집을 보내 놓으면 사위 집에 칼이 안 온다⁠.⁠”

장금옥이 혀를 찼다⁠. “⁠그믐은 관아 책력에 없소⁠.⁠”

세 번째 달력은 소화의 것이었다⁠. 손바닥만 한 낡은 공책으로⁠, 낙양 장터 서는 날과 손님 혼례 날과 비 올 날을 노인들 무릎 쑤시는 날로 짐작해 적은 것이었다⁠. 소화가 공책을 넘겼다⁠.

“⁠열엿새는 남시 비단 가게 둘째 딸 혼례 날이에요⁠. 같은 날 같은 골목에 혼례 둘이면 축의금 내는 손님들이 반으로 갈려요⁠. 비단 가게에서 저를 죽이려 들 거고요⁠.⁠”

“⁠그럼 열엿새는 지우오⁠.⁠” 장금옥이 붓으로 그었다⁠.

“⁠초여드레와 열사흘은 마교 달력에 없지요⁠. 스무여드레는 마교 달력에 없고⁠, 그믐은 관아 책력에 없고⁠.⁠”

세 사람이 동시에 달력에서 고개를 들었다⁠. 남은 날은 하나였다⁠. 춘매가 붓을 들고 적었다⁠.

“⁠사월 스무엿새⁠.⁠”

창가 의자에 앉아 있던 모용란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맞은편 창가에 앉은 사마철의 염주가 멈췄다⁠. 혼주 둘은 청기에 날을 함께 들으러 와서 서로 다른 창을 보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났다⁠.

“⁠스무엿새⁠?⁠” 모용란이 말했다⁠. “⁠망산 싸움이 난 날이다⁠. 내 남편과 큰아들 제삿날이다⁠.⁠”

“⁠내 아들 기일이오⁠.⁠” 사마철이 말했다⁠.

이층이 조용해졌다⁠. 장금옥이 붓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구양추가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소화는 공책을 덮지 않았다⁠.

“⁠다른 날은 다 지워졌습니다⁠. 스무엿새를 버리시면 휴전 안에 혼례를 올릴 날이 없어요⁠.⁠”

“⁠남편 제삿날에 아들을 장가보내라고⁠?⁠” 모용란이 말했다⁠. “⁠아침에 제사상을 차리고 저녁에 혼례상을 차리란 말이냐⁠?⁠”

“⁠상은 하나로 하셔도 됩니다⁠. 과일은 같이 쓰시고요⁠.⁠”

“⁠매파⁠!⁠”

“⁠아들 기일에 성녀를 내보내라는 것이오⁠, 매파⁠?⁠” 사마철의 목소리가 낮았다⁠. “⁠준이가 죽은 날에⁠, 준이를 벤 집안으로⁠.⁠”

모용란이 사마철을 돌아보았다⁠. “⁠벤 집안⁠? 우리 남궁가 가주를 벤 손이 그 말을 하오⁠?⁠”

“⁠먼저 벤 건 남궁창이오⁠.⁠”

“⁠먼저 칼을 든 건 너희다⁠!⁠”

두 혼주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열두 해 동안 각자의 집에서 혼자 하던 말을 처음으로 상대의 얼굴에 대고 했다⁠. 소화는 두 사람 사이에 달력 세 권을 쌓았다⁠. 탁자 한가운데 책이 탑처럼 솟았다⁠.

“⁠두 분⁠. 날은 달력이 골랐습니다⁠. 싸움은 날을 받고 나서 하셔도 늦지 않아요⁠. 청기는 신랑 집이 날을 알리고 신부 집이 받는 례입니다⁠. 받으실지 말지는 신부 집에서 초나흘까지 답하시면 돼요⁠.⁠”

모용란이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사마철은 탁자 위 달력 탑을 한참 보다가 내려갔다⁠. 장금옥이 남은 찻잔을 들이켜고 말했다⁠.

“⁠관매 서른 해에 이런 날짜는 처음이오⁠.⁠”

“⁠관매님 책력이 고르신 날이에요⁠.⁠”

장금옥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올라오는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무림맹 총관 당설희였다⁠. 당설희는 장금옥에게 눈인사도 하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와 탁자 위 달력 탑을 내려다보았다⁠. 춘매가 적은 붉은 글씨를 읽었다⁠.

“⁠스무엿새라⁠.⁠”

“⁠망산 싸움이 난 날입니다⁠. 두 집안 기일이고요⁠.⁠”

“⁠알고 있소⁠.⁠” 당설희는 달력 탑 맨 위 소화의 공책을 손가락으로 한 장 넘겼다⁠. 비 올 날이라고 적힌 자리에 노인 무릎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기일에 화친이라⁠. 맹주께서 좋아하시겠소⁠. 강호에 돌 이야깃거리로는 더할 나위가 없지⁠.⁠”

“⁠두 집안 어른은 안 좋아하십니다⁠.⁠”

“⁠어른들 좋자고 하는 혼사가 아니오⁠.⁠” 당설희가 공책을 덮었다⁠. “⁠열흘 가운데 사흘 남았소⁠. 초나흘에 날을 받는다니 맹은 기다리겠소⁠. 그날 날을 못 받으면 매파를 바꾸오⁠.⁠”

“⁠차 한 잔 하시겠어요⁠?⁠”

“⁠안 마시오⁠.⁠”

당설희가 내려간 뒤 춘매가 빈 찻잔을 들고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저분은 혹시 물도 안 드세요⁠?⁠”

“⁠독 쓰는 집 사람은 제 손으로 길은 물만 마셔⁠. 허리에 물병 차고 다니는 거 못 봤어⁠?⁠”

“⁠그건 술병인 줄 알았어요⁠.⁠”

*

한낮에 소화는 날을 적은 붉은 종이를 들고 낙수를 건넜다⁠. 이번 배삯도 사공이 받지 않았다⁠. 장터 내기는 혼례 날 혼주가 나타나느냐 안 나타나느냐로 판이 바뀌어 있었다⁠. 마교 객관 대문 앞 무사들이 소화를 보고 길을 텄다⁠. 마당 한가운데에 양 서른 마리가 매여 있었다⁠. 남궁가 예물에 대한 답례로 별원에 보낼 양이었는데⁠, 다리에서 정파 청년들이 다시 막겠다고 해서 이틀째 마당에 묶여 울고 있었다⁠.

객관 안채 대청에서 사마철이 가린과 마주 앉아 있었다⁠. 구양추가 문간에서 소화를 막으려다 사마철이 손짓하자 비켜섰다⁠.

“⁠매파도 들으시오⁠. 어차피 매파 귀에 다 들어가오⁠.⁠”

소화는 문간에 섰다⁠. 가린은 무릎 위에 진의 예물 목록을 펴 두고 있었다⁠. 맨 끝 줄에 손가락을 얹고 있었다⁠.

“⁠대장로님⁠. 묻겠습니다⁠. 왜 나였습니까⁠?⁠”

“⁠무엇이⁠.⁠”

“⁠성녀⁠. 마교에 고아가 나 하나였습니까⁠? 망산에서만 아이 열이 부모를 잃었다고 유모가 그랬습니다⁠. 왜 나를 거둬 성녀로 세웠습니까⁠? 쓸모 있어 보여서였습니까⁠?⁠”

사마철의 염주가 손안에서 멈췄다⁠. 사마철은 가린을 보지 않고 대청 바닥을 보았다⁠.

“⁠사월 스무이레 아침⁠, 망산에 올라갔다⁠. 준이를 찾으러⁠. 시신이라도 찾아 서쪽으로 데려가려고⁠. 언덕마다 뒤졌는데 준이는 없었다⁠. 불탄 수레 곁 재 더미 속에서 손 하나가 나와 있었다⁠. 살아 있는 손이었다⁠.⁠”

가린이 숨을 멈췄다⁠.

“⁠재를 걷어 내니 너였다⁠. 얼굴에 그을음이 덮여 눈만 하얬다⁠. 내가 안아 올리자 너는 울지 않고 내 염주를 잡아당겼다⁠. 염주 줄이 끊어졌다⁠. 나는 그날 아들을 못 찾고 너를 찾았다⁠. 쓸모를 볼 정신은 없었다⁠.⁠”

“⁠그럼 성녀로 세운 것은요⁠?⁠”

“⁠장로회는 대장로가 길에서 주운 아이를 곁에 둘 명분을 원했다⁠. 성녀 자리는 명분이었다⁠. 너를 내 곁에 두려고⁠.⁠”

가린은 예물 목록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맨 끝 줄을 천천히 쓸었다⁠.

“⁠그럼 내 생일은 사월 스무이레입니다⁠.⁠”

사마철이 고개를 들었다⁠.

“⁠생일은 신부가 고르는 날이라고 남궁진이 적었습니다⁠. 대장로님이 나를 찾은 날로 고르겠습니다⁠.⁠”

“⁠그날을 고르면 너는 평생 준이 기일 다음 날에 생일상을 받는다⁠.⁠”

“⁠그래서 고릅니다⁠. 하루 울고 하루 먹으면 됩니다⁠.⁠”

사마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대장로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스무엿새에 정파로 가면 마교 사람들이 너를 무릎 꿇은 성녀로 기억한다⁠. 준이 기일에 원수 집에 절하러 간 성녀로⁠. 백 년 동안 마두 소리를 듣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내가 그 무릎을 꺾을 수는 없다⁠.⁠”

“⁠꺾는 게 아니라 펴는 겁니다⁠. 매파가 그랬습니다⁠. 무릎은 다시 펴진다고⁠.⁠”

사마철이 문간의 소화를 보았다⁠. 소화는 부채를 접은 채 서 있었다⁠.

“⁠매파가 우리 집 성녀에게 말을 많이 가르쳤구려⁠.⁠”

“⁠사례는 안 받았습니다⁠.⁠”

*

소화가 붉은 종이를 구양추에게 건넸다⁠. 구양추는 종이를 받고 날짜를 읽더니 소화를 노려보았다⁠.

“⁠스무엿새라⁠. 유모 서른 해에 기일에 시집보내는 건 처음이다⁠.⁠”

“⁠관매님도 서른 해에 처음이라고 하셨어요⁠. 오늘 처음이 많네요⁠.⁠”

구양추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마당의 양 서른 마리가 한꺼번에 울었다⁠. 구양추가 마당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시끄럽다⁠! 너희는 사위 집에 갈 몸이다⁠. 체통을 지켜라⁠!⁠”

양들이 잠깐 조용해졌다가 다시 울었다⁠. 가린이 대청에서 나와 소화 곁에 섰다⁠.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 꺼내 소화에게 보였다⁠. 끊어진 염주 줄이었다⁠. 알이 다섯 개만 꿰여 있었다⁠.

“⁠대장로님 염주에서 끊어진 줄이다⁠. 열두 해 동안 갖고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

“⁠이제 아시네요⁠.⁠”

“⁠남궁진한테 보낸 상자 안에 이걸 넣을 걸 그랬다⁠.⁠”

“⁠상자 안에는 무엇을 넣으셨는데요⁠?⁠”

가린은 대답하지 않고 이마의 불꽃 문양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오늘은 땀이 나지 않았는데도 문질렀다⁠.

*

해 질 녘 월하원 계단이 두 번 울렸다⁠. 모용란이 먼저 올라왔고⁠, 숨 열 번쯤 뒤에 사마철이 올라왔다⁠. 두 사람은 서로가 올 줄 몰랐다는 얼굴로 문간에서 마주쳤다⁠. 소화가 의자 둘을 내밀었다⁠. 두 혼주는 앉지 않았다⁠.

“⁠청기에 답하러 왔다⁠.⁠” 모용란이 말했다⁠. “⁠스무엿새를 받겠다⁠. 조건이 있다⁠.⁠”

“⁠마교도 날을 받겠소⁠.⁠” 사마철이 말했다⁠. “⁠조건이 있소⁠.⁠”

두 사람이 서로를 보았다⁠. 모용란이 턱을 들었다⁠.

“⁠진이가 마교 사위가 되겠다면 남궁가 소가주로는 안 된다⁠. 소가주 검을 내려놓고 가라⁠. 남궁가 소가주가 원수 집에 절하는 꼴은 못 본다⁠.⁠”

사마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같은 말을 하러 온 얼굴이었다⁠.

“⁠성녀가 정파 며느리가 되겠다면 성녀로는 안 되오⁠. 성녀 관을 벗고 가시오⁠. 마교 성녀가 정파 사당에 절하는 꼴은 못 보오⁠.⁠”

소화가 부채를 천천히 폈다⁠. 두 혼주는 백 년 만에 처음으로 같은 말을 했다⁠. 둘 다 자식이 이 조건을 듣고 물러설 것이라 믿는 얼굴이었다⁠.

“⁠초나흘에 날을 받으신다고 하셨지요⁠. 그럼 초나흘에 두 분이 직접 받으세요⁠. 이 방에서요⁠. 검과 관은 그날 내려놓는 걸로 전하겠습니다⁠.⁠”

“⁠전하지 않아도 된다⁠.⁠”

문간에서 목소리가 났다⁠. 진이 계단 맨 위에 서 있었다⁠. 진의 품에서 작은 나무 상자 모서리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진은 어머니를 보고⁠, 사마철을 보았다⁠.

“⁠들었습니다⁠. 초나흘에 오겠습니다⁠.⁠”

모용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모용란이 아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진아⁠. 검을 내려놓으면 소가주는 율이다⁠. 네 형이 받았어야 할 검을 율이가 찬다⁠.⁠”

“⁠압니다⁠.⁠”

“⁠네 아버지 검이다⁠.⁠”

“⁠압니다⁠, 어머니⁠.⁠”

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모용란은 아들의 얼굴을 오래 보다가⁠, 찾던 것을 찾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발소리가 올라올 때보다 무거웠다⁠. 사마철은 진을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고 염주를 한 알 넘겼다⁠.

“⁠남궁 소가주⁠. 성녀도 같은 대답을 할 거라 믿소⁠?⁠”

“⁠성녀한테 물어보시지요⁠. 나는 내 검만 압니다⁠.⁠”

사마철이 계단을 내려갔다⁠. 소화는 진 곁에 섰다⁠. 진의 품에서 비어져 나온 상자 모서리를 부채 끝으로 가리켰다⁠.

“⁠열어 보셨어요⁠?⁠”

“⁠열어 봤다⁠.⁠”

“⁠무엇이 들었는데요⁠?⁠”

진은 상자를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매파는 몰라도 된다⁠. 사례 안 낸 건 안 가르쳐 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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