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85자)

마흔세 집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엄순자는 둑길에서 돌아와 있었다⁠. 객잔 뒤채 툇마루에서 냉이 뿌리의 흙을 털고 있었다⁠. 나는 무명 주머니를 엄순자 앞에 내려놓았다⁠.

“⁠어머님⁠, 은 일곱 냥입니다⁠. 이번 것은 제 돈도 아니고 빌린 돈도 아닙니다⁠.⁠”

“⁠그럼 무슨 돈이에요⁠?⁠”

“⁠광장 비무에 화산을 걸었다가 잃은 낙양 사람들 돈입니다⁠. 떡집 주인이 한 냥⁠, 뱃사공 둘이 한 냥씩⁠, 포목전 아낙이 반 냥⁠…⁠” 나는 술집 칠판에서 외워 온 것을 하나씩 말했다⁠. 일곱 냥을 놓고 간 사람이 열한 명이었다⁠. 열한 사람의 장사와 얼굴을 다 말하는 동안 엄순자는 냉이를 내려놓고 들었다⁠.

“⁠떡집은 어디 있어요⁠?⁠”

“⁠남시 사거리 무림맹 방 앞입니다⁠. 흰 떡⁠, 검은 떡 반씩 쪄서 파는 집이요⁠.⁠”

엄순자는 주머니를 풀어 은을 손바닥에 올렸다⁠. 이번에는 깨물어 보지 않았다⁠. 허리춤에서 무명실 대신 붉은 실을 꺼냈다⁠. 붉은 실에 매듭을 하나 짓고⁠, 흰 실의 매듭 여섯 개 옆에 나란히 묶었다⁠.

“⁠이건 받을게요⁠. 어디서 났는지 아니까⁠.⁠”

엄순자는 실을 다시 허리춤에 넣었다⁠. 흰 매듭 여섯⁠, 붉은 매듭 하나⁠. 붉은 매듭이 흰 매듭들보다 작았는데⁠, 엄순자는 붉은 매듭을 한 번 더 손가락으로 쓸었다⁠.

“⁠나중에 떡 사러 가야겠네요⁠.⁠”

*

무림맹 서기에게서 마흔세 집의 청원서를 베껴 왔다⁠. 서기는 처음에 안 된다고 했다가⁠, 광장에서 대표 글자를 틀린 일을 철민이 세 번째 꺼내자 붓을 내주었다⁠.

마흔세 집은 낙양 성안에 열둘⁠, 성 밖에 서른하나가 흩어져 있었다⁠. 나는 철민과 이레 동안 집집을 돌았다⁠. 낙수 나루의 뱃집⁠, 숭산 아래 물길 마을⁠, 북망산 움막⁠, 남시 뒷골목 셋방⁠. 한 집에 들어갈 때마다 같은 것을 물었다⁠. 남편이나 아들이 언제 무슨 비무에서 갔는지⁠. 청구서는 언제 냈고 무엇이라고 거절당했는지⁠. 무림맹 재판에 나와 줄 수 있는지⁠.

숭산 아래 물길 마을의 과부는 정파 소요문 사람의 아내였다⁠. 남편은 지난가을 흑풍채와 땔감 숲을 두고 비무를 하다 갔다⁠. 과부는 문간에서 내 얼굴을 보더니 문을 닫으려 했다⁠.

“⁠사파 여자들도 청원을 냈다면서요⁠? 우리 양반 죽인 놈들 마누라랑 같은 줄에 서라고요⁠?⁠”

“⁠같은 줄은 아닙니다⁠. 같은 종이에 같은 줄로 거절당하셨지요⁠.⁠” 나는 문틈에 발을 넣었다⁠. 수금원 시절의 버릇이었다⁠. “⁠일곱 번째 줄⁠. 비무 중 사고⁠. 정파 과부님 약관에도⁠, 사파 과부님 약관에도 글자 하나 안 다릅니다⁠.⁠”

과부는 문을 닫지 않았다⁠. 대신 문간에 앉아 한참 울었다⁠. 나는 발을 문틈에 둔 채 기다렸다⁠. 울음이 그치자 과부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땔감을 묶느라 갈라져 있었다⁠. 남편이 하던 일이었다⁠.

낙수 나루의 뱃집에서는 철민이 쫓겨났다⁠. 과부가 철민을 보자마자 빗자루를 들었다⁠. 삼 년 전 녹림 시절에 이 집 닭을 훔쳐 간 놈이라고 했다⁠. 철민은 나루터 끝까지 도망쳤다가 돌아와서 무릎을 꿇었다⁠.

“⁠아주머니⁠, 그때 닭 세 마리였죠⁠. 제가 지금 은이 없어서 닭으로는 못 갚고요⁠, 재판에서 이기면 제가 닭을 다섯 마리 사 드릴게요⁠.⁠”

“⁠이기면⁠?⁠”

“⁠이기면요⁠.⁠”

과부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청원에 엄지를 찍었다⁠. 닭 다섯 마리라는 말을 두 번 되묻고 나서였다⁠.

하루가 끝날 때마다 다락에서 나는 하루 동안 만난 집들을 손가락으로 세었다⁠. 정파가 스물⁠, 사파가 스물셋⁠. 남편이 셋⁠, 아들이 열둘⁠, 형제가 둘⁠, 나머지는 남편이었다가 아들이었다가 하는 집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을 둘 다 비무에서 잃은 집이 하나 있었다⁠. 화약 첫해에 아버지⁠, 세 번째 해에 아들⁠. 같은 물길을 두고 같은 문파와 두 번 비무를 했다⁠. 두 번 다 졌고⁠, 두 번 다 거절당했다⁠. 이레째 밤 손가락은 마흔셋에서 멈췄다⁠. 철민이 옆에서 하품을 하며 말했다⁠.

“⁠누님⁠, 우리 보험 팔러 다닐 때보다 더 많이 돌았어요⁠.⁠”

“⁠팔 때는 쉰 집 돌면 마흔 집이 문을 닫았지⁠. 이번엔 마흔세 집이 다 열었어⁠.⁠”

“⁠문 연 게 좋은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흔세 집이 문을 연 까닭은 다른 데서 열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

여드레째 날⁠, 마흔세 집이 청송객잔 앞마당에 모였다⁠. 무림맹 재판에 나설 대표를 정하는 자리였다⁠. 마당이 두 줄로 갈렸다⁠. 우물 왼편에 정파 과부 스물⁠, 오른편에 사파 과부 스물셋⁠. 두 줄 사이에 우물이 있었고⁠, 아무도 우물을 넘어가지 않았다⁠. 객잔 주인이 젓가락 서른 벌 대신 이번에는 의자를 빌려주지 않겠다고 해서 다들 서 있었다⁠.

“⁠대표는 정파에서 내야지요⁠. 정파가 무림맹 일을 알잖아요⁠.⁠” 소요문 과부가 말했다⁠.

“⁠사파가 셋이 더 많은데요⁠.⁠” 아이 업은 흑풍채 과부가 받았다⁠. “⁠숫자로 하면 우리가 대표지⁠.⁠”

“⁠사파는 셋이 더 죽었으니까 그렇지요⁠. 비무를 더 걸었으니까⁠.⁠”

“⁠땅이 없으니까 걸었지⁠! 정파가 다 가져갔잖아⁠!⁠”

두 줄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올라갔다⁠. 우물을 사이에 두고 과부 마흔세 명이 정사 대전을 다시 하고 있었다⁠. 객잔 담장 너머에서 화산 제자 열여덟이 고개를 내밀고 구경했다⁠. 대제자가 어떻게든 말려 보려고 우물가로 걸어갔다가⁠, 양쪽 과부가 동시에 노려보자 그대로 물러났다⁠.

대문이 열리고 엽대호가 들어왔다⁠. 찢어진 어깨를 그제야 꿰맨 검은 장포였다⁠. 대호는 돋보기를 손에 쥐고 우물가에 자리를 잡았다⁠.

“⁠대표는 내가 하겠소⁠. 약관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강호에 나 하나뿐이오⁠.⁠”

정파 줄이 한꺼번에 들끓었다⁠.

“⁠우리 양반을 죽인 칼이 대표를 해요⁠?⁠”

“⁠남의 아들 죽여 놓고 은을 받아 주겠다고요⁠?⁠”

대호는 아무 말 못 하고 돋보기만 만지작거렸다⁠. 사파 줄도 대호를 감싸지 않았다⁠. 아이 업은 과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채주님은 상회 대표로 나가서 이긴 사람이잖아요⁠. 대호는 우물가에서 두 걸음 물러났다⁠.

누군가 내 이름을 말했다⁠. 숭산의 과부였다⁠. 이레 동안 집집을 돌며 청원을 모은 사람이니⁠, 약관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대표를 하라고⁠. 숭산 과부의 말에 우물 양쪽에서 똑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접은 여자잖아요⁠!⁠”

정파와 사파가 처음으로 한목소리를 냈다⁠. 철민이 내 뒤에서 작게 박수를 쳤다⁠. 화해는 화해라고 했다⁠. 나는 철민의 발을 밟았다⁠.

대문이 다시 열렸다⁠. 엄순자가 둑길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물 바구니를 이고 있었다⁠. 마당이 두 줄로 갈려 있는 것을 보고 엄순자는 걸음을 멈췄다⁠. 우물 왼편을 보고⁠, 오른편을 보고⁠,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마흔세 명이 엄순자를 보았다⁠. 화산 아래 마을의 나물 장수⁠. 정파도 사파도 아닌 사람⁠. 화산 제자의 어미이면서 화산파 사람은 아닌 사람⁠. 아들을 사파 칼에 잃었고⁠, 아들을 비무장에 세운 정파 장문인 앞에서 끝까지 물은 사람⁠.

숭산의 과부가 먼저 말했다⁠. “⁠저 어른이 하시면 어때요⁠?⁠”

아이 업은 흑풍채 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씩⁠, 우물 양쪽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엄순자는 영문을 몰라 나를 보았다⁠. 내가 다가가 무엇을 정하는 자리인지 말했다⁠. 엄순자는 한참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글을 몰라요⁠.⁠”

마당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도 몰랐다⁠. 엄순자는 손바닥으로 바구니 손잡이를 쥐었다⁠.

“⁠우리 두열이가 종이를 받아 왔을 때도 몰랐어요⁠. 그 애가 읽어 줬지⁠. 은이 이백 냥이라고⁠. 무슨 줄이 있는지는 그 애도 모르고 나도 몰랐고⁠.⁠” 엄순자는 나를 보았다⁠. “⁠대표를 할게요⁠. 대신 설계사 양반이 옆에서 종이를 읽어 줘요⁠.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쉬운 대답도 어려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고개가 끄덕여졌다⁠.

*

이튿날 심제원이 상회 마당에 가입자들을 모았다⁠. 살아서 보험료를 내는 사람들이었다⁠. 마당에 다 들어오지 못해 대문 밖까지 사람이 찼다⁠. 표국 표사들⁠, 비단 장수⁠, 뱃사공⁠, 숭산 아래 문파 제자들⁠, 남시 장사꾼들⁠. 천 명 가운데 낙양에 사는 사람은 거의 다 온 얼굴이었다⁠.

심제원은 표국 짐수레 위로 올라갔다⁠. 호두는 손에 없었다⁠. 두 손을 펴서 사람들에게 보였다⁠.

“⁠가입자 여러분⁠, 무림맹 재판에서 일곱 번째 줄이 깨지면⁠, 마흔세 집에 이백 냥씩 갚아야 하오⁠. 팔천육백 냥이오⁠. 우리 보험방 은고에는 그만한 은이 없소⁠. 상회가 보험방 문을 닫으면 여러분이 받을 것은 은 두 냥 남짓이오⁠. 철마다 두 냥씩 몇 해를 내 온 분들이 두 냥을 받고 끝나는 거요⁠.⁠”

마당이 술렁였다⁠. 심제원은 손을 들어 사람들을 가라앉혔다⁠.

“⁠마흔세 집이 딱하다는 것을 나도 아오⁠. 나도 아들을 잃었소⁠. 그러나 여러분의 식구도 딱하오⁠. 여러분이 내일 표국 길에서⁠, 나루에서⁠, 장터에서 죽으면 누가 여러분 식구를 먹이겠소⁠? 일곱 번째 줄이 있어야 여러분 식구가 이백 냥을 받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사 하나가 소리쳤다⁠. “⁠줄을 지킵시다⁠!⁠” 다른 표사가 따라 외쳤다⁠. 표국 행수가 종이를 펼쳤다⁠. 「⁠일곱 번째 줄을 지키자는 가입자 청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엄지를 찍기 시작했다⁠.

나는 대문 기둥 옆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다가 짐수레 앞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길을 열었다⁠. 길을 열어 준 것이 아니라 피한 것이었다⁠.

“⁠대방님⁠. 비무로 죽는 사람이 무인이라서 다른 분들은 상관없다고 여기시는 것 같은데⁠, 표사님들은 표국 길에서 산적이 덤비면 칼을 뽑지요⁠. 칼을 먼저 뽑은 다툼은 다섯 번째 줄입니다⁠. 뱃사공님들은 나루터 비무 구경하다 떠밀려 물에 빠지면 일곱 번째 줄이고요⁠. 비무장 근처에서 다쳤으니까요⁠.⁠”

“⁠설화야⁠, 너는 이제 가입자가 아니다⁠. 상회 사람도 아니고⁠.⁠” 심제원이 짐수레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러분⁠, 이 사람이 화산에 약관을 접어서 판 사람이오⁠. 오늘 여러분께 줄을 설명하겠다는 사람이 바로 줄을 숨긴 사람이오⁠.⁠”

마당에 웃음이 퍼졌다⁠. 비웃음이었다⁠. 누군가 내 발 앞에 침을 뱉었다⁠. 표국 행수가 청원 종이를 들고 내 앞을 지나며 일부러 어깨를 부딪쳤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웃는 눈을 하고 있었다⁠. 웃는 눈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청원 종이에 엄지를 찍는 줄은 해가 기울도록 끊이지 않았다⁠.

*

가입자들이 흩어진 밤⁠, 다락 아래 골목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노영필이었다⁠. 소매를 내리고 있었다⁠. 노영필이 소매를 내린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오늘 마당에 있었소⁠.⁠”

“⁠보셨으면 아시겠네요⁠. 저는 줄을 숨긴 사람입니다⁠.⁠”

“⁠줄을 숨기라고 가르친 사람도 있소⁠.⁠” 노영필이 말했다⁠. 날씨 이야기를 하듯 담담했다⁠. “⁠판매 교본 말이오⁠. 견습들이 외우는 사본은 지난 사흘 동안 대방이 다 거두어 불태웠소⁠. 심사방 아궁이에서⁠. 내가 불을 지켰소⁠.⁠”

“⁠다 태웠으면 이제 없는 거네요⁠.⁠”

“⁠원본이 하나 남았소⁠. 대방 서재 서안 둘째 서랍⁠. 대방의 글씨로 쓴 첫 번째 교본이오⁠. 태우려다 못 태웠소⁠. 대방이 쓴 첫 줄이 보험방을 연 까닭이라서⁠.⁠” 노영필은 골목 어둠 속에서 잠깐 나를 보았다⁠.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오⁠. 대방은 전쟁 뒤에 갈 데 없는 나를 거둔 사람이오⁠.⁠”

노영필은 돌아서 골목을 빠져나갔다⁠. 다락 창문에서 철민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몰랐다⁠. 철민의 손이 창틀을 쥐었다 폈다 했다⁠. 남의 집 담을 넘기 전의 손이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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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발2026.11.01· 9화

    떡집 주인 한 냥, 뱃사공 한 냥씩… 열한 사람 얼굴을 다 말해 주는 설화가 좋았어요. 순자 어머니가 어디서 난 돈인지 묻는 것도요.

    • 기담오작가2026.11.01

      순자 어머니는 돈보다 돈을 낸 사람을 먼저 보는 분입니다. 설화가 그걸 배워 가는 이야기이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