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93자)

찬 방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안 돼⁠.⁠”

“⁠누님⁠, 서안 둘째 서랍이래요⁠. 저 눈 감고도 열어요⁠.⁠”

“⁠훔친 걸 무림맹에 내밀면 그날로 재판이 끝나⁠. 상회는 도둑이 들었다고 하고⁠, 집법당주는 도둑이 가져온 종이를 안 읽어⁠. 너는 관아 옥에 가고⁠.⁠”

철민은 다락 바닥에 앉아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밤마다 남의 집 담을 넘던 손이 일하고 싶어서 근질거렸다⁠.

“⁠저는 이 손밖에 없어요⁠. 누님은 입이 있잖아요⁠. 고객 앞에서 웃으면 다들 도장 찍고⁠. 저는 웃으면 다들 주머니를 쥐어요⁠.⁠” 철민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녹림에서 처음 배운 게 남의 집 서랍이었어요⁠. 상회 와서 처음 배운 게 남의 집 문 두드리는 거였고요⁠. 이번엔 서랍으로 누님을 도우면 안 돼요⁠?⁠”

“⁠철민아⁠, 보험 약관에 거절 사유가 몇 개냐⁠?⁠”

“⁠일곱이요⁠.⁠”

“⁠너한테는 여덟 번째가 있어⁠. 상회 대방 서재 서랍을 열다 붙잡히면 아무것도 안 나온다⁠.⁠”

철민은 입을 다물었다⁠. 오래 다물고 있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속에서 웅얼거렸다⁠. 알았어요⁠, 누님⁠. 철민의 대답을 믿은 것이 내 실수였다⁠. 수금원 열다섯 해에 나는 빚진 사람의 「⁠알았어요⁠」를 한 번도 믿지 않았다⁠. 철민의 「⁠알았어요⁠」만 믿었다⁠.

*

만세상회 심사방은 보험방 뒤편에 붙은 돌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닥이 계단 세 칸만큼 낮았고⁠, 벽은 두꺼웠다⁠. 지하 빙고에서 올린 얼음 덩이가 돌 선반마다 놓여 있었다⁠. 청구가 들어오면 죽은 사람이 이 방으로 왔고⁠, 노영필이 몸과 손을 보았다⁠. 상회 사람들은 이 방을 찬 방이라고 불렀다⁠.

내가 들어갔을 때 노영필은 돌 평상 앞에 앉아 있었다⁠. 평상 위에 흰 천을 덮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천 밖으로 손 하나만 나와 있었다⁠. 노영필은 죽은 사람의 손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등잔 가까이 비춰 보고 있었다⁠.

“⁠모 설계사⁠. 문은 닫으시오⁠. 얼음이 녹소⁠.⁠”

나는 문을 닫았다⁠.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봄밤인데 찬 방 안은 섣달이었다⁠. 장포 소매 안으로 손을 넣었다⁠.

“⁠누구예요⁠?⁠”

“⁠표국 표사요⁠. 정주 가는 길에 수레가 벼랑으로 굴렀소⁠. 칼을 뽑지도 않았고 비무도 아니었소⁠. 이백 냥이 나가오⁠.⁠” 노영필은 표사의 손을 천천히 뒤집었다⁠. “⁠손바닥에 고삐 자국이 있소⁠. 마지막까지 고삐를 놓지 않았소⁠. 수레를 끄는 말을 살리려고 했겠지⁠.⁠”

“⁠손바닥만 보고 그걸 아세요⁠?⁠”

“⁠손바닥은 거짓말을 안 하오⁠. 사람 입이 하지⁠.⁠” 노영필은 표사의 손을 천 아래로 넣고 천을 여몄다⁠. “⁠마실 것 드리겠소⁠?⁠”

노영필은 돌 선반의 얼음 하나를 깨서 사발에 담고 주전자의 찻물을 부었다⁠. 사발 안에서 얼음이 짤그락 울렸다⁠. 나는 사발을 받아 들고 손이 시려 바로 내려놓았다⁠.

“⁠심사역님⁠, 무림맹 대청에서 말해 주세요⁠. 교본 이야기요⁠.⁠”

“⁠어제 골목에서 한 말이 다요⁠.⁠”

“⁠어제는 서랍까지만 말씀하셨어요⁠. 대청에서 서랍 얘기를 하시면 집법당주가 상회에 서랍을 열라고 할 수 있어요⁠. 도둑이 아니라 무림맹이 여는 거예요⁠.⁠”

노영필은 얼음 사발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가 시린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 방에서 열 해를 산 사람이었다⁠.

“⁠모 설계사⁠, 내가 처음 상회에 왔을 때 무엇을 했는지 아시오⁠?⁠”

“⁠모릅니다⁠.⁠”

“⁠대전 때 정파 진영에서 검시를 했소⁠. 죽은 사람이 정파인지 사파인지 손바닥을 보고 알아냈지⁠. 정파는 손바닥이 가볍고 사파는 무겁소⁠. 무거운 손은 묻지 않고 산에 버렸소⁠.⁠” 노영필이 말했다⁠. 날씨 이야기를 하듯 담담했다⁠. “⁠전쟁이 끝나자 나를 쓸 데가 없었소⁠. 손바닥이나 들여다보던 사람이니까⁠. 대방이 나를 찾아왔소⁠. 보험이라는 걸 만들 텐데⁠, 죽은 사람 손을 보고 은을 줄지 정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대방이 그랬소⁠. 이번에는 무거운 손도 산에 버리지 말고 집에 돌려보내자고⁠.⁠”

나는 사발을 쥐었다⁠. 얼음이 손바닥을 얼렸다⁠.

“⁠그 대방이 지금은 무거운 손을 산에 버리고 있잖아요⁠. 비무로 죽은 손은 다 무겁잖아요⁠.⁠”

노영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 등잔을 보다가 다른 말을 했다⁠.

“⁠교본 첫 장 말이오⁠. 세 해 전 보험방을 열던 날 대방이 직접 쓴 것이오⁠. 첫 줄은 이렇소⁠. 「⁠거절 사유는 손님이 묻기 전에 먼저 다 읽어 준다⁠.⁠」⁠”

“⁠먼저 다 읽어 준다고요⁠?⁠”

“⁠그 줄에 먹줄이 그어져 있소⁠. 화약 이듬해⁠, 비무 청구가 처음 들어온 달에 대방이 직접 그었소⁠. 그 옆에 새로 쓴 줄이 있소⁠. 「⁠거절 사유는 손님이 묻기 전에 먼저 꺼내지 말 것⁠. 물으면 빨리 읽을 것⁠.⁠」 두 줄이 한 장에 같이 있소⁠. 대방 글씨로⁠.⁠”

“⁠그래서 못 태우셨군요⁠.⁠”

“⁠대방이 태우라고 했소⁠. 내가 아궁이 앞에서 그 장을 펴 보이니 대방이 도로 가져갔소⁠. 첫 줄은 보험방을 연 까닭이라고 했소⁠.⁠” 노영필이 사발을 내려놓았다⁠. “⁠나는 대청에서 말하지 않소⁠. 내가 말하면 대방은 거짓말쟁이가 되오⁠. 대방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오⁠. 처음 쓴 줄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오⁠.⁠”

“⁠처음 쓴 줄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천 명의 약관을 쥐고 있어요⁠.⁠”

“⁠그래서 모 설계사가 접은 거요⁠?⁠” 노영필이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처음 배운 줄을 지키지 못해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영필은 다시 등잔을 보았다⁠. 흰 천 밖으로 나온 표사의 발끝에서 얼음 녹은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손을 보여 주시겠소⁠?⁠”

나는 망설이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노영필은 죽은 표사의 손을 받치던 손으로 내 손을 받쳤다⁠. 산 사람 손이라고 더 조심하지도 덜 조심하지도 않았다⁠. 등잔에 비춰 보고⁠, 엄지를 눌러 보고⁠, 손바닥을 뒤집었다⁠.

“⁠주판 알을 튕기는 검지 끝이 단단하오⁠. 붓을 쥐는 가운뎃손가락에 굳은 마디⁠. 열네 살부터 한 일이 다 여기 있소⁠.⁠” 노영필의 손가락이 내 엄지 첫마디에서 멈췄다⁠. “⁠엄지 바닥이 판판하오⁠. 무언가를 오래 누른 엄지요⁠. 인주를 많이 찍었거나⁠, 종이를 많이 눌렀거나⁠.⁠”

“⁠설계사 엄지는 다 그렇습니다⁠.⁠”

“⁠그렇소⁠.⁠” 노영필이 내 손을 놓았다⁠. “⁠그래서 손바닥만으로는 모르오⁠. 무엇을 눌렀는지는 입이 말해야 하오⁠.⁠”

나는 손을 거두어 소매 안에 넣었다⁠. 소매 안에서 엄지를 쥐었다⁠. 판판한 자리가 손가락에 닿았다⁠.

찬 방 문밖에서 고함이 들렸다⁠. 안채에서 나는 소리였다⁠. 도둑이야⁠, 하는 소리⁠. 쇠붙이 떨어지는 소리⁠. 여러 사람이 뛰는 발소리⁠.

노영필과 나는 동시에 일어났다⁠. 노영필의 얼굴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지나갔다⁠. 나는 노영필의 얼굴을 다 볼 틈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

안채 서재 앞 마당에 등불이 여럿 켜져 있었다⁠. 표국 표사 다섯이 한 사람을 땅바닥에 눌러 놓고 있었다⁠. 철민이었다⁠. 철민의 오른손에 책 한 권이 쥐어져 있었다⁠. 표지가 누렇게 바랜 얇은 책이었다⁠. 표사 하나가 철민의 손목을 비틀었지만 철민은 손을 펴지 않았다⁠.

서재 문턱에 심제원이 서 있었다⁠. 잠옷 위에 겉옷만 걸친 차림이었다⁠. 손에 호두가 없었다⁠. 대신 등불 하나를 들고 있었다⁠.

“⁠철민아⁠.⁠” 내가 소리쳤다⁠. “⁠손 펴⁠!⁠”

“⁠누님⁠, 안 돼요⁠. 펴면 뺏겨요⁠.⁠”

“⁠펴라니까⁠!⁠”

철민이 나를 보았다⁠. 땅바닥에 뺨이 눌린 채로 웃었다⁠. 녹림에서 붙잡힌 놈들이 짓는 웃음이었다⁠.

“⁠누님 말 안 듣길 잘했어요⁠. 이거 진짜 있었어요⁠. 둘째 서랍⁠. 자물쇠가 상회 은고 거보다 허술하던데요⁠.⁠”

심제원이 마당으로 내려왔다⁠. 철민 앞에 쪼그려 앉아 철민의 손에서 책을 빼냈다⁠. 철민은 끝까지 버텼지만 표사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심제원은 책을 받아 들고 첫 장을 펼쳤다⁠. 등불 아래에서 첫 장을 오래 보았다⁠. 나도 보았다⁠. 먹줄이 그어진 줄과 옆에 새로 쓴 줄이 같은 손 글씨로 나란히 있었다⁠.

“⁠관아에 사람을 보냈다⁠.⁠” 심제원이 책을 덮으며 말했다⁠. “⁠이 아이가 언제든 올 줄 알았다⁠. 지난 사흘 동안 서랍을 잠그지 않았거든⁠.⁠”

나는 숨이 막혔다⁠. 노영필이 골목에서 서랍 이야기를 한 것도⁠, 서랍을 잠그지 않은 것도⁠. 노영필을 돌아보았다⁠. 노영필은 찬 방 문턱에 서서 고개를 저었다⁠. 노영필은 몰랐다⁠. 심제원은 노영필이 말할 것까지 알았다⁠.

“⁠대방님⁠, 철민이는 제가 가르친 견습입니다⁠. 벌은 저한테 주세요⁠.⁠”

“⁠네 견습이 아니다⁠. 상회 견습이었지⁠. 상회에서 내보낸 뒤로는 북망산 녹림이다⁠.⁠”

대문이 열리고 관아 포졸 넷이 들어왔다⁠. 앞장선 포졸이 손에 든 방을 펼쳤다⁠. 북망산 기슭 돌기둥에 붙어 있던 것과 같은 수배 방이었다⁠. 「⁠북망산 녹림 무리를 잡아 오는 자에게 은 닷 냥⁠.⁠」 포졸은 철민의 얼굴과 방을 번갈아 보았다⁠. 방에는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얼굴도 없는 방으로 사람을 잡아가요⁠?⁠” 내가 따졌다⁠.

포졸이 방을 뒤집어 보았다⁠. 뒤에도 얼굴은 없었다⁠. “⁠녹림 얼굴은 다 비슷하오⁠.⁠”

철민이 땅바닥에서 고개를 들었다⁠. “⁠나리⁠, 저 녹림 중에선 잘생긴 편이에요⁠. 그건 방에 써 주셔야 돼요⁠.⁠”

“⁠이놈이 녹림이오⁠?⁠”

“⁠북망산 흑풍채 졸개였소⁠. 오늘 밤 상회 대방 서재에 들었소⁠.⁠” 심제원이 말했다⁠. “⁠닷 냥은 관아 옥에 이불이나 넣어 주시오⁠.⁠”

포졸들이 철민을 일으켜 세우고 오랏줄을 감았다⁠. 철민은 끌려가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누님⁠, 이번엔 함정 맞았어요⁠. 녹림 말이 다 틀린 건 아니에요⁠.⁠”

“⁠철민아⁠.⁠”

“⁠닭 다섯 마리요⁠. 낙수 나루 아주머니한테⁠. 이기면요⁠.⁠” 철민은 대문을 나서다 한 번 더 고개를 돌렸다⁠. “⁠누님⁠, 분산이요⁠. 분산⁠.⁠”

대문이 닫혔다⁠. 오랏줄 끌리는 소리가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

*

심제원은 마당에 서서 교본을 겉옷 안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호두를 꺼냈다⁠. 이번에는 굴리지 않았다⁠. 두 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려다보기만 했다⁠.

“⁠관아 사또가 무엇으로 먹고사는 줄 아냐⁠?⁠”

“⁠세금이요⁠.⁠”

“⁠남시 세금의 절반이 상회에서 나간다⁠. 보험 관인 하나에 얼마씩⁠. 사또는 상회 대방이 부탁하면 녹림 졸개 하나쯤 하루 만에 풀어 준다⁠. 부탁하지 않으면 사또는 녹림을 좋아하지 않지⁠.⁠” 심제원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은고에서 보여 준 자백서였다⁠. 접힌 자국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엄지 하나다⁠, 설화야⁠. 찍으면 철민이는 다락으로 돌아간다⁠.⁠”

나는 자백서를 보았다⁠. 앞줄은 맞고 뒷줄은 틀렸다⁠. 뒷줄을 틀리게 만든 책은 지금 심제원의 겉옷 안에 있었다⁠. 교본 첫 장의 먹줄 그어진 줄⁠. 손님이 묻기 전에 먼저 다 읽어 준다⁠.

“⁠대방님⁠. 처음에 쓰신 줄⁠, 그 줄대로 하셨으면 저는 안 접었을 겁니다⁠.⁠”

심제원의 손바닥에서 호두 한 알이 굴러떨어졌다⁠. 마당 돌바닥에 부딪쳐 깨지지 않고 튀었다⁠. 심제원은 줍지 않았다⁠.

“⁠그 줄대로 했으면 보험방은 세 해 전에 문을 닫았다⁠. 너도 철민이도 은고도 없었다⁠.⁠” 심제원은 자백서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내일 해 지기 전까지다⁠. 사또는 해 질 녘에 옥을 돈다⁠.⁠”

심제원은 서재로 들어갔다⁠. 마당에 등불만 남았다⁠. 노영필이 찬 방 문턱에서 걸어 나와 굴러떨어진 호두를 주웠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보았다⁠. 산 사람 손에서 떨어진 것을 노영필은 오래 보지 않던 사람이었다⁠. 노영필은 호두를 품에 넣고 찬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자백서를 쥔 채 마당에 서 있었다⁠. 종이가 손바닥 땀에 눅눅해졌다⁠. 엄지에 묻은 인주는 없었다⁠. 아직은⁠.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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