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613자)

두 사람의 죄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이튿날 아침 청송객잔 앞마당에는 짐 보따리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화산 제자 스물아홉 가운데 열하나가 보따리를 쌌다⁠. 상복 띠는 그대로 팔에 감고 있었다⁠. 보따리를 싼 제자들은 우물가에 앉은 위시목 앞에 나란히 줄을 지었다⁠. 맨 앞의 제자가 입을 열었다⁠. 두열과 같은 해에 산문에 들어온 제자였다⁠.

“⁠사부님⁠, 저희는 화산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가거라⁠.⁠”

“⁠사부님이 두열이를 죽였습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대제자가 앞으로 나서려 했고⁠, 위시목이 손을 들어 막았다⁠.

“⁠흑풍채 채주의 칼이 두열이를 쳤다⁠. 화약대로라면 원수가 없는 죽음이다⁠.⁠” 위시목이 말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그런데 네 말이 맞다⁠. 두열이를 비무장에 세운 것은 나다⁠.⁠”

제자는 할 말을 잃었다⁠.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몰라도⁠, 사부가 그렇다고 할 줄은 몰랐던 얼굴이었다⁠. 제자는 보따리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가⁠, 결국 들고 객잔 문을 나갔다⁠. 열하나가 따라 나갔다⁠. 마당에 남은 것은 열여덟 명과 위시목과 빈 우물이었다⁠.

대제자가 우물가에 와서 사부 곁에 앉았다⁠.

“⁠사부님⁠, 저는 남습니다⁠.⁠”

“⁠너도 가라⁠.⁠”

“⁠사부님이 화산 돌아가실 때 업어 드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계단이 사백열두 칸입니다⁠.⁠”

위시목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제자도 더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빈 두레박이 흔들리는 것을 오래 보고 있었다⁠.

*

나는 비무 이튿날 낮을 장터 술집에서 보냈다⁠. 화산에 걸었다가 잃은 손님들이 내 보험 종이를 들고 하나씩 찾아왔다⁠. 술집 주인이 칠판을 뒤집어 손님 이름 대신 건 돈을 적어 두었고⁠, 나는 칠판을 보며 은을 내주었다⁠. 다락 쇠 상자에 남은 스물한 냥과 사흘 동안 받은 보험료 다섯 냥을 다 들고 왔다⁠.

첫 손님은 떡집 주인이었다⁠. 떡집 주인은 은 한 냥을 받아 들고 한참 보더니 내 손에 도로 놓았다⁠.

“⁠아가씨⁠, 이거 화산 노인한테 주쇼⁠. 장문인이 끝까지 말하는 거 보고 나니⁠, 내가 돈을 걸었다는 게 창피해서 말이야⁠.⁠”

“⁠사장님⁠, 이건 약속이라서요⁠. 약속은 받으셔야 합니다⁠.⁠”

“⁠그럼 받았다 치고⁠. 받은 걸 내가 화산 노인한테 주는 거요⁠. 아가씨가 심부름 좀 해 주쇼⁠.⁠”

떡집 주인은 그렇게 말하고 나갔다⁠. 다음 손님은 뱃사공이었다⁠. 뱃사공은 은을 받아 갔다⁠. 그다음 손님은 받아 갔다⁠. 그다음 손님은 반만 받고 반은 화산 노인 몫이라고 했다⁠. 받아 가는 사람과 놓고 가는 사람이 섞였다⁠. 해가 질 무렵 쇠 상자는 비었고⁠, 칠판에는 아직 은 네 냥이 남아 있었다⁠. 따로 놓인 무명 주머니에는 손님들이 놓고 간 은 일곱 냥이 들어 있었다⁠. 화산 노인 몫이었다⁠.

술집 주인이 칠판을 닦으며 말했다⁠.

“⁠남은 네 냥은 외상으로 해 두지⁠. 아가씨는 보름 안에 갚을 사람이니까⁠.⁠”

“⁠보름이라는 말은 이제 무섭습니다⁠.⁠”

“⁠그럼 열엿새로 하지⁠.⁠”

철민이 술집 문턱에 앉아 손가락을 꼽았다⁠. 흑풍채 쉰 냥⁠, 이자 다섯 냥⁠, 술집 네 냥⁠. 꼽다가 손가락이 모자라자 발가락을 꼽으려고 신을 벗었다⁠. 술집 주인이 발 냄새가 난다며 철민을 밖으로 내쫓았다⁠.

*

밤에 나는 무명 주머니를 들고 객잔 뒤채로 갔다⁠. 엄순자의 방에 불이 꺼져 있었다⁠. 객잔 주인이 말하기를⁠, 노인은 해 지기 전에 둑길로 나물을 뜯으러 나갔다가 아직 안 돌아왔다고 했다⁠. 광장에서 돌아온 뒤로 한마디도 안 했다고 했다⁠. 밥은 먹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먹었다고⁠.

나는 위패를 모신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이 열려 있었다⁠. 위시목이 위패 앞에 앉아 있었다⁠. 흰 도포를 갈아입었는데 앞섶에 피 얼룩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빨아도 빠지지 않은 자국이었다⁠.

“⁠들어오시오⁠.⁠”

나는 들어가 위시목 옆에 앉았다⁠. 위패에는 화산파 삼대 제자 곽두열이라고 쓰여 있었다⁠. 향로의 향이 다 타고 재만 남아 있었다⁠. 위시목이 새 향을 꽂고 불을 붙였다⁠.

“⁠설계사⁠, 광장에서 내가 끝까지 말하는 걸 보았소⁠?⁠”

“⁠보았습니다⁠.⁠”

“⁠나는 칼을 반쯤 뽑는 버릇이 있소⁠. 뽑다 말고⁠, 넣지도 못하고⁠. 다섯 해 동안 그랬소⁠. 끝까지 뽑으면 내상이 터질까 봐 반만 뽑았지⁠.⁠” 위시목이 향 연기를 보았다⁠. “⁠말도 그렇게 했소⁠. 두열이 일을 한 달 동안 반쯤만 말했소⁠. 제자들한테는 흑풍채가 걸어온 비무라고만 했지⁠. 누구한테 걸어온 건지는 말하지 않았소⁠.⁠”

나는 무명 주머니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손님들이 놓고 간 은 일곱 냥이 무릎을 눌렀다⁠.

“⁠장문인⁠, 저도 반쯤만 한 말이 있습니다⁠.⁠”

위시목은 돌아보지 않았다⁠. 향 연기가 위패 앞에서 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정월에 산문 앞마당에서 약관을 펼쳐 보일 때⁠, 거절 사유 마지막 줄을 접었습니다⁠. 비무 중 사고는 지급하지 않는다⁠. 그 줄을 읽으면 아무도 도장을 안 찍을 것 같아서요⁠. 서른 건을 한 번에 팔면 행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끝자락을 엄지로 누르고⁠, 다 보셨지요 고객님⁠, 했습니다⁠.⁠”

말을 다 하고 나니 방 안이 넓어졌다⁠. 한 달 동안 내 입 안에 무엇이 가득 차 있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두열이가 그 줄을 읽었으면 비무에 안 나갔겠소⁠?⁠”

“⁠모르겠습니다⁠.⁠”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장문인 방 앞에 무릎 꿇은 사람이면요⁠. 그런데 나가기 전에 한 번은 생각했을 겁니다⁠. 어머님한테 은이 안 간다는 걸 알았으면요⁠.⁠”

위시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뒤에 말했다⁠.

“⁠나는 두열이를 비무장에 세웠고⁠, 설계사는 두열이 손에서 종이 한 줄을 접었소⁠. 두열이는 둘 다 모르고 나갔소⁠.⁠”

“⁠예⁠.⁠”

“⁠둘 중에 누구 죄가 크오⁠?⁠”

“⁠장문인 죄가 큽니다⁠.⁠” 내가 말했다⁠. “⁠장문인은 칼을 쥐여 주셨고⁠, 저는 종이를 쥐여 줬으니까요⁠. 그런데 어머님께는 제 죄가 더 클 겁니다⁠. 장문인은 두열이 목숨을 걸었고⁠, 저는 어머님 밥을 걸었으니까요⁠.⁠”

위시목이 처음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웃지 않았다⁠. 화난 얼굴도 아니었다⁠.

“⁠그 말⁠, 노모 앞에서 하시오⁠.⁠”

“⁠장문인은 광장에서 하셨지요⁠.⁠”

“⁠설계사는 아직이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위시목은 칼을 끝까지 뽑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말은 끝까지 했다⁠. 나는 종이를 접는 사람이었고⁠, 오늘 위패 앞에서 접힌 데를 처음 폈다⁠. 다 펴려면 위패 앞이 아니라 엄순자 앞이어야 했다⁠. 나는 은 일곱 냥 주머니를 위패 앞에 내려놓았다⁠.

“⁠떡집 주인이 어머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손님들이 놓고 간 돈이에요⁠. 제 돈은 아닙니다⁠.⁠”

“⁠설계사가 주시오⁠. 노모가 돌아오면⁠.⁠”

“⁠제가 주면 어머님은 또 어디서 났냐고 물으실 겁니다⁠. 이번엔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돈이라서⁠, 제가 드리겠습니다⁠.⁠”

*

사흘 뒤 아침⁠, 만세상회 마당에 무림맹 사람들이 들어왔다⁠. 앞장선 사람은 흰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노인이었다⁠. 무림맹 집법당주였다⁠. 화약을 지키고⁠, 화약을 어긴 문파를 벌주는 자리의 우두머리였다⁠. 집법당주 뒤에서 젊은 서기가 향통을 받쳐 들고 따랐다⁠. 광장 비무 때 대표 글자를 틀렸던 서기였다⁠.

남시 사람들이 대문 밖에 몰려들었다⁠. 나도 사람들 틈에 섞여 마당을 들여다보았다⁠. 철민이 내 뒤에서 까치발을 들었다⁠.

심제원은 마당 한가운데에서 집법당주를 맞았다⁠. 허리를 깊이 굽혔다⁠.

“⁠집법당주께서 상회에 몸소 오실 일이 무엇입니까⁠?⁠”

집법당주는 대답하기 전에 서기에게 손짓했다⁠. 서기가 향통에서 향 한 대를 꺼내 마당 돌에 꽂고 불을 붙였다⁠. 집법당주는 남의 말을 들을 때 향을 피웠다⁠. 향 한 대가 탈 동안만 듣는다고 했다⁠. 강호 사람들은 말이 길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해가 진다고⁠.

“⁠무림맹에 청원이 들어왔소⁠. 비무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집이 마흔셋이오⁠. 정파가 스물⁠, 사파가 스물셋⁠. 모두 상회 보험에 들었고⁠, 모두 일곱 번째 줄로 거절당했소⁠.⁠” 집법당주가 말했다⁠. 느렸고⁠, 한 마디마다 끝을 눌렀다⁠. “⁠광장 비무로 가린 것은 화산과 상회의 다툼이오⁠. 화산 장문인의 체면이지⁠, 어미의 은이 아니오⁠. 곽두열의 어미는 화산파 사람이 아니니 광장 비무에 묶이지 않소⁠.⁠”

“⁠집법당주⁠, 상회는 장사꾼입니다⁠. 무림맹 문파가 아닙니다⁠. 상회의 약관은 상회와 손님 사이의 약속이고요⁠.⁠”

“⁠표국을 두었다고 비무를 받지 않았소⁠?⁠”

마당 밖에서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떡집 주인이었다⁠. 심제원은 웃지 않았다⁠. 호두 굴리는 손이 멈췄다⁠.

“⁠화약이 비무를 만들었소⁠. 비무에서 죽은 사람의 원수를 못 갚게 한 것도 화약이오⁠. 그런데 비무에서 죽은 사람의 식구가 은도 못 받는다면⁠, 화약은 과부한테서 원수와 은을 둘 다 가져간 것이 되오⁠.⁠” 집법당주가 향을 보았다⁠. 향은 절반쯤 탔다⁠. “⁠과부들이 원수를 갚겠다고 칼을 들면 화약은 깨지오⁠. 무림맹은 그걸 보고만 있을 수 없소⁠. 보름 뒤 무림맹 대청에서 일곱 번째 줄을 두고 재판을 열겠소⁠. 상회는 대방이 나오고⁠, 가입자는 대표를 세우시오⁠.⁠”

“⁠재판에서 줄이 깨지면 어찌 됩니까⁠?⁠”

“⁠그건 재판에서 들읍시다⁠.⁠”

향이 다 탔다⁠. 집법당주는 몸을 돌렸다⁠. 서기가 향 재를 손바닥으로 쓸어 담고 뒤를 따랐다⁠. 대문을 나서던 집법당주가 사람들 틈의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대가 접은 사람이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집법당주는 더 묻지 않고 지나갔다⁠.

*

집법당주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엽대호였다⁠. 검은 장포의 찢어진 어깨를 꿰매지도 않은 채였다⁠. 대호는 마당 한가운데의 심제원 앞에 멈추고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붉은 먹으로 고친 비무 대표 계약서였다⁠.

“⁠대방⁠, 광장에서 이겼소⁠. 흑풍채 과부 넷의 청구를 다시 심사하기로 했지⁠.⁠”

“⁠재판이 끝나면 하겠소⁠. 지금 일곱 번째 줄을 두고 무림맹이 재판을 연다는데⁠, 심사를 다시 하면 상회가 먼저 줄을 버리는 꼴이 되지 않소⁠.⁠”

“⁠계약서에는 이기면 한다고 쓰여 있소⁠. 재판이 끝나면 한다는 말은 없소⁠.⁠”

“⁠언제 한다는 말도 없지⁠.⁠”

대호의 얼굴이 굳었다⁠. 돋보기를 꺼내 제 계약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읽는 동안 마당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대호는 마지막 줄에서 돋보기를 내렸다⁠. 날짜가 없었다⁠. 틀린 글자는 세 군데나 고쳤으면서⁠, 빠진 날짜는 보지 못했다⁠.

“⁠대방은 글자를 틀리지 않는구려⁠. 빼먹기만 하지⁠.⁠”

대호는 계약서를 접지 않고 돌돌 말아 품에 넣었다⁠. 대문을 나가다가 사람들 틈의 나를 보았다⁠. 돋보기를 쥔 손을 들어 보이고 말없이 지나갔다⁠. 끝까지 읽은 사람도 빈 데는 못 읽는다는 것을⁠, 대호의 등이 말하고 있었다⁠.

*

집법당주가 다녀간 저녁⁠, 상회 대문 오른편 기둥에 새 방이 붙었다⁠. 나를 내쫓는 방 위에 덧붙였다⁠. 심제원의 글씨를 서기가 옮긴 것이었다⁠.

「⁠가입자 여러분께⁠. 무림맹 재판에서 일곱 번째 줄이 깨지면⁠, 만세상회는 비무 청구를 다 갚을 수 없으므로 보험방 문을 닫는다⁠. 남은 은은 가입자 수대로 나눠 돌려준다⁠. 한 사람 몫은 은 두 냥 남짓이다⁠. 만세상회 대방 심제원⁠.⁠」

방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살아서 보험료를 내는 가입자들이었다⁠. 표국 표사들⁠, 비단 장수⁠, 뱃사공⁠, 숭산 아래 문파 제자들⁠. 사람들은 방을 읽고⁠, 손에 든 약관을 내려다보고⁠, 다시 방을 읽었다⁠. 은 두 냥⁠. 이백 냥을 약속받았던 종이가 두 냥이 된다⁠.

누군가 말했다⁠.

“⁠접은 여자 때문에 다 날아가게 생겼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나를 찾는 눈길이었다⁠. 철민이 내 소매를 끌어당겨 골목으로 숨겼다⁠. 골목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는 동안⁠, 방 앞에서 누군가 약관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찢자 둘이 찢었다⁠. 찢어진 종이 조각이 바람에 날려 골목 안까지 들어왔다⁠. 내 발 앞에 떨어진 조각 하나에 거절 사유 일곱 번째 줄이 반쯤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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