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460자)

대방의 은고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비무 전날 아침⁠, 남시의 모든 입이 같은 말을 했다⁠. 화산 장문인이 직접 나온다⁠. 만두 장수는 찜통 뚜껑에 「⁠장문인 만두⁠」라고 써 붙였고⁠, 떡집 주인은 흰 떡과 검은 떡을 반씩 쪄서 팔았다⁠. 흰 떡은 화산⁠, 검은 떡은 흑풍채였다⁠. 검은 떡이 먼저 동났다⁠. 장터 술집 칠판의 숫자는 아침에 셋 대 둘이었다가 점심에 셋 대 하나 반이 되었다⁠. 장문인이 대전 뒤로 다섯 해 동안 한 번도 칼을 뽑지 않았다는 소문이 숫자를 깎았다⁠.

철민은 술집 앞을 지날 때마다 칠판을 보고 내게 와서 보고했다⁠.

“⁠누님⁠, 하나 반이요⁠. 화산 거는 손님들이 누님 보험을 더 사겠대요⁠. 오늘만 은 두 냥 더 들어왔어요⁠.⁠”

“⁠장문인이 지면 그만큼 더 물어 줘야 해⁠.⁠”

“⁠그러니까요⁠. 누님은 지금 장문인이 이겨야 사는 사람이에요⁠.⁠” 철민이 손가락을 꼽았다⁠. “⁠장문인이 이기면 화산이 이백 냥 받고⁠, 누님은 술집 손님들한테 안 물어 줘도 되고⁠, 흑풍채 과부 넷은 못 받고⁠. 장문인이 지면 그 반대고요⁠. 녹림에서는 이런 걸 양다리라고 해요⁠.⁠”

“⁠녹림 말 말고⁠.⁠”

“⁠상회 말로는 뭐라고 해요⁠?⁠”

“⁠분산이라고 해⁠.⁠”

철민은 분산⁠, 분산 하고 두 번 따라 말했다⁠. 산적 말보다 점잖은 소리가 나서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흑풍채 빚은 오늘로 엿새째였다⁠. 나흘 뒤면 쉰 냥이 쉰다섯 냥이 된다⁠. 나는 주판을 튕기지 않았다⁠. 튕기지 않아도 알이 저절로 머릿속에서 내려앉았다⁠.

*

무림맹 서기가 머무는 사거리 작은 관사 앞에서 노영필을 만났다⁠. 노영필은 서기에게 도장 찍힌 종이를 받아 들고 나오는 참이었다⁠. 상회 검시인으로 비무장에 들어간다는 허가였다⁠. 비무에서 사람이 죽으면 비무장에서 바로 상회 심사역이 몸을 보고 서류를 써야 했다⁠.

“⁠모 설계사⁠.⁠”

“⁠이제 설계사 아니라니까요⁠.⁠”

“⁠버릇이오⁠.⁠” 노영필은 소매를 걷어붙인 팔로 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냈다⁠. “⁠보시겠소⁠?⁠”

종이는 둘 다 검시 서류였다⁠. 날짜는 내일이었다⁠. 한 장에는 「⁠화산파 장문인 위시목⁠」⁠, 다른 한 장에는 「⁠흑풍채 채주 엽대호⁠」라고 쓰여 있었고⁠, 죽은 까닭 칸은 비어 있었다⁠. 맨 아래 결론만 두 장 다 미리 적혀 있었다⁠. 「⁠비무 중 사고⁠. 지급하지 않는다⁠.⁠」

“⁠미리 써 두셨어요⁠?⁠”

“⁠내일 누가 죽든 쓸 말은 같소⁠. 바쁠 때 쓰면 글씨가 흔들리오⁠.⁠”

노영필이 진지한 얼굴로 말해서 나는 웃어야 할지 몰랐다⁠. 철민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혀를 찼다⁠.

“⁠심사역 나리⁠, 둘 다 안 죽으면 이거 버려요⁠?⁠”

“⁠다음 비무에 쓰오⁠. 이름만 고치면 되니까⁠.⁠”

노영필은 서류를 접어 품에 넣었다⁠. 돌아서다가 멈추고⁠, 나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모 설계사⁠, 곽두열의 손을 기억하시오⁠?⁠”

“⁠오른손 검지 마디와 엄지 뿌리에 굳은살⁠. 손바닥 가운데는 말랑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보았소⁠. 이월 그믐에 상회 찬 방으로 왔을 때도 같았소⁠.⁠” 노영필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두 달 동안 비무를 준비한 손이 그렇게 말랑할 수는 없소⁠.⁠”

“⁠무슨 말씀이세요⁠?⁠”

노영필은 대답 대신 소매를 내렸다⁠. 그러고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

밤이 되자 상회 심부름꾼이 다락 문을 두드렸다⁠. 대방이 부른다고 했다⁠. 밤에 부르는 일은 열다섯 해 동안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전장 금고에서 은이 비었을 때⁠, 한 번은 내게 보험방을 맡길 때였다⁠.

심제원은 상회 안채 뒤의 쇠문 앞에서 등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쇠문 아래로 돌계단이 지하로 내려갔다⁠. 은고였다⁠. 상회 사람 가운데 은고에 내려가 본 사람은 대방과 전장 행수 둘뿐이라고 했다⁠.

“⁠내려가자⁠.⁠”

계단은 서른 칸쯤이었다⁠. 화산 돌계단 사백열두 칸에 대면 발치도 안 되었다⁠.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고 쇠 냄새가 났다⁠. 바닥에 닿자 심제원이 벽의 등잔들에 차례로 불을 붙였다⁠. 불빛이 번지면서 은고가 드러났다⁠.

생각보다 넓었고⁠, 생각보다 비어 있었다⁠. 벽을 따라 나무 시렁이 세 줄 있었는데⁠, 은괴가 쌓인 것은 앞줄 하나뿐이었다⁠. 뒤의 두 줄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다⁠. 나는 버릇대로 주판에 손을 얹고 은괴를 세었다⁠. 한 줄에 스무 개⁠, 다섯 단⁠.

“⁠놀랐냐⁠?⁠”

“⁠전장 은까지 합쳐서 이게 다입니까⁠?⁠”

“⁠전장 은은 전장 손님 거다⁠. 손대면 전장이 무너진다⁠. 이건 보험방 몫이다⁠.⁠” 심제원은 은괴 하나를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아래로 꺾였다⁠. “⁠큰 청구 서른 건⁠. 이백 냥짜리 서른 건을 갚으면 이 시렁이 빈다⁠. 비무 과부 마흔세 집에 다 주면 시렁이 비고도 모자란다⁠.⁠”

심제원은 은괴를 시렁에 내려놓고 호두를 꺼냈다⁠. 은고의 찬 벽이 호두 굴리는 소리를 되받았다⁠.

“⁠설화야⁠, 내 아들 얘기 한 적 있냐⁠?⁠”

“⁠표사였다고만 들었습니다⁠.⁠”

“⁠대전 셋째 해에 군량 수레를 지키다 죽었다⁠. 사파가 수레를 쳤지⁠. 그때 상회는 표사 식구한테 은 한 푼도 안 줬다⁠. 줄 법이 없었으니까⁠. 며느리가 손주를 업고 남시 장에서 국수를 팔았다⁠. 내가 시아비인데⁠, 상회 대방인데⁠, 내 며느리한테 줄 은이 상회 법에 없었다⁠.⁠” 호두 소리가 멈췄다⁠. “⁠그래서 만들었다⁠. 죽으면 식구한테 은이 가는 물건을⁠. 다 주려고 만들었다⁠.⁠”

“⁠그런데 비무 줄은 왜 넣으셨습니까⁠?⁠”

“⁠화약이 났으니까⁠.⁠” 심제원이 말했다⁠. 숫자를 말할 때처럼 빨라졌다⁠. “⁠보험방을 연 첫해에는 전쟁 끝물이라 칼싸움이 드물었다⁠. 다들 지쳤지⁠. 둘째 해부터 비무가 늘었다⁠. 문파들이 땅이며 물길을 비무로 찾아가기 시작했으니까⁠. 한 달에 열 판⁠, 한 판에 하나씩 죽으면 한 해에 백이 넘는다⁠. 은 이백 냥씩 백 집이면 이 은고가 석 달이다⁠. 석 달 뒤에 천 명이 다 빈손이 된다⁠. 내 며느리 같은 사람이 천 명이 된다고⁠.⁠”

심제원은 다시 호두를 굴렸다⁠. 딱⁠. 하나가 깨졌다⁠. 알맹이를 꺼내 이번에는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나는 받았다⁠. 손바닥에 놓인 호두 알맹이가 은괴보다 가벼웠다⁠.

“⁠다 주면 다 못 준다⁠. 그래서 하나를 안 준다⁠. 그게 일곱 번째 줄이다⁠.⁠”

나는 호두 알맹이를 쥐었다⁠. 심제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 않아서 반박할 데가 없었다⁠. 은괴 백 개가 말없이 심제원 편을 들었다⁠.

*

심제원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등잔불 아래에 펼쳤다⁠.

「⁠자백서⁠. 화산파에 약관을 보일 때 거절 사유 끝자락을 접은 것은 모설화 혼자의 일이다⁠. 만세상회는 설계사에게 거절 사유를 숨기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모설화⁠.⁠」

“⁠내일 비무가 끝나면 무림맹이 움직인다⁠. 장문인이 지든 이기든 화산은 가만있지 않을 거고⁠, 흑풍채 과부들⁠, 정파 과부들 다 무림맹 문을 두드린다⁠. 그때 이 종이가 있어야 상회가 산다⁠. 상회가 살아야 천 명이 산다⁠.⁠”

나는 종이를 두 번 읽었다⁠. 앞의 문장은 맞았다⁠. 접은 것은 나였다⁠. 내 엄지였다⁠. 뒤의 문장에서 눈이 멈췄다⁠. 보험방 판매 교본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견습 첫날 외워야 하는 교본이었고⁠, 대방의 글씨로 쓰여 있었다⁠. 「⁠거절 사유는 손님이 묻기 전에 먼저 꺼내지 말 것⁠. 물으면 빨리 읽을 것⁠.⁠」 나는 교본을 외웠고⁠, 외운 데서 한 걸음 더 나가 접었다⁠.

“⁠앞줄은 맞습니다⁠. 뒷줄은 틀립니다⁠.⁠”

“⁠뒷줄이 있어야 앞줄이 산다⁠.⁠”

“⁠교본이 있잖아요⁠. 대방님 글씨로요⁠.⁠”

심제원은 놀라지 않았다⁠. 호두 껍데기를 은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교본에는 접으라는 말이 없다⁠. 빨리 읽으라고 했지⁠. 너는 접었다⁠. 무림맹 앞에서 그 둘이 같은 소리로 들릴 것 같냐⁠?⁠”

“⁠같은 소리는 아닙니다⁠. 그래도 같은 데서 나왔습니다⁠.⁠”

“⁠설화야⁠.⁠” 심제원은 목소리를 낮췄다⁠. “⁠이 종이에 엄지를 찍으면 상회는 너를 고소하지 않는다⁠. 화산 노모한테 준 예순 냥⁠, 내가 갚아 주마⁠. 흑풍채 빚 말이다⁠. 알고 있다⁠. 남시에 소문 안 나는 빚은 없다⁠.⁠”

손바닥의 호두 알맹이가 땀에 젖었다⁠. 예순 냥⁠. 흑풍채 빚 쉰 냥과 불어날 이자⁠. 술집 손님들에게 물어 줄지도 모를 서른 냥⁠. 빚도 이자도 물어 줄 돈도 엄지 하나로 사라진다⁠. 대신 교본 이야기도 사라진다⁠. 일곱 번째 줄은 천 명의 약관에 그대로 남는다⁠. 줄 선 과부 마흔세 집은 무림맹 앞에서 「⁠설계사 한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못 찍겠습니다⁠.⁠”

심제원은 종이를 접지 않고 그대로 들고 있었다⁠. 오래 나를 보다가 다른 손으로 등잔을 들었다⁠.

“⁠철민이 말이다⁠. 북망산 흑풍채 졸개였지⁠. 관아 수배 방에 녹림 무리 하나 잡아 오면 은 닷 냥이라고 붙어 있더구나⁠. 닷 냥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한테는⁠.⁠” 심제원이 말했다⁠. “⁠철민이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겠지⁠. 관아 옥은 녹림한테 후하지 않다⁠.⁠”

“⁠철민이는 상회 견습이었습니다⁠. 대방님이 받아 주셨잖아요⁠.⁠”

“⁠그래서 안다⁠. 어디서 왔는지⁠.⁠”

나는 호두 알맹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껍데기들 옆에 알맹이 하나가 놓였다⁠.

“⁠철민이는 제가 지킵니다⁠.⁠”

“⁠어떻게⁠?⁠”

대답이 없었다⁠. 심제원은 자백서를 품에 넣고 등잔을 하나씩 껐다⁠. 마지막 등잔 하나만 남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어둑해진 은고에 남아 시렁을 보았다⁠. 은괴 백 개⁠. 먼지 앉은 두 줄⁠. 천 명이 기대고 있는 은이 생각보다 낮게 쌓여 있었다⁠.

계단 위에서 심제원이 말했다⁠.

“⁠내일 비무 끝나고 하루 준다⁠. 무림맹이 움직이기 전까지⁠.⁠”

다락에 돌아오니 자정이 넘어 있었다⁠. 철민은 이불을 걷어차고 자고 있었다⁠. 머리맡에 광대에게 돌려줄 말총 수염이 씻겨서 마르고 있었다⁠. 철민은 자면서도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녹림에서 밤마다 남의 집 담을 넘던 손버릇이라고 했다⁠.

나는 등잔을 낮추고 철민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상회에 들어올 때 처음 쥐어 본 손이었다⁠. 손가락 끝이 유난히 부드러웠고⁠, 손바닥 아래쪽 두툼한 살에만 굳은살이 있었다⁠. 담장 기와를 짚고 몸을 끌어 올리는 자리였다⁠. 칼을 쥔 적이 없는 손⁠. 지난봄 나는 보험료를 가장 싸게 매겨 주었다⁠. 담 넘는 손은 칼 쥔 손보다 오래 산다고⁠, 철민이 웃으며 말했다⁠.

철민이 잠결에 중얼거렸다⁠. 분산⁠, 분산⁠. 나는 이불을 끌어다 철민의 어깨를 덮었다⁠. 관아 옥에 녹림을 위한 이불은 없었다⁠.

*

비무 날 아침⁠, 남시 광장은 새벽부터 사람으로 찼다⁠. 무림맹 서기가 광장 한가운데에 흰 줄을 쳐서 네모난 비무장을 만들었다⁠. 네 귀퉁이에 관아 포졸이 하나씩 창을 들고 서 있었다⁠. 관아는 비무를 막지 않았다⁠. 구경꾼이 비무장으로 밀려드는 것만 막았다⁠.

비무장 동편에 흑풍채가 자리를 잡았다⁠. 엽대호는 검은 장포에 큰 칼을 등에 메고 있었고⁠, 품에서 돋보기를 꺼내 서기가 붙인 비무 방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틀린 글자를 찾았는지 서기를 불러 손가락으로 짚었다⁠. 서기는 얼굴이 빨개져서 붓을 꺼냈다⁠.

비무장 서편은 화산파 차지였다⁠. 위시목은 흰 도포에 검 하나만 찼다⁠. 얼굴이 닷새 전 우물가에서 본 얼굴보다 하얬다⁠. 대제자가 곁에서 무언가 속삭였고⁠, 위시목은 고개를 저었다⁠.

엄순자는 화산 제자들 뒤에 있었다⁠. 나물 바구니를 들지 않은 손으로 무명실을 쥐고 있었다⁠. 매듭 여섯 개가 손가락 사이에서 흔들렸다⁠.

철민이 내 옆에서 떡을 하나 내밀었다⁠. 흰 떡이었다⁠.

“⁠누님⁠, 드세요⁠. 오늘은 흰 떡 먹어야 해요⁠. 분산이요⁠.⁠”

나는 떡을 받았지만 먹지 못했다⁠. 서기가 비무장 한가운데 향로에 향 한 대를 꽂았다⁠. 향 한 대가 다 타는 동안이 한 판이었다⁠. 서기가 향에 불을 붙였다⁠. 가는 연기가 곧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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