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80자)

돋보기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북망산은 낙양 사람들이 죽으면 가는 산이었다⁠. 기슭부터 꼭대기까지 무덤이 층층이 앉아 있었고⁠, 무덤 사이로 난 길은 산 사람보다 상여가 더 많이 다녔다⁠. 흑풍채는 산 중턱⁠, 무덤이 끝나는 자리에 있었다⁠. 관아도 무덤 너머까지는 포졸을 잘 보내지 않았다⁠. 기슭 길목의 돌기둥에는 관아의 수배 방이 비에 젖어 붙어 있었다⁠. 「⁠북망산 녹림 무리를 잡아 오는 자에게 은 닷 냥⁠.⁠」 방 귀퉁이를 누가 찢어서 담배를 말아 피운 자국이 있었다⁠.

철민은 턱에 말총 수염을 붙이고 갓을 깊이 눌러썼다⁠. 수염은 남시 광대에게 한 푼 주고 빌린 것이었다⁠. 길을 오르는 동안 수염 한쪽이 자꾸 떨어져서 철민은 침을 발라 다시 붙였다⁠.

“⁠누님⁠, 저 이 수염이면 못 알아보겠죠⁠?⁠”

“⁠네 걸음걸이를 보면 알아본다⁠. 남의 집 담 넘을 때처럼 걷잖아⁠.⁠”

“⁠그럼 걸음도 바꿔요⁠?⁠”

철민은 무릎을 펴고 팔을 휘두르며 걸었다⁠. 관아 나리 걸음을 흉내 낸 것인데⁠, 무덤 사이 좁은 길에서는 술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상여를 메고 내려오던 일꾼들이 길을 비켜 주며 혀를 찼다⁠.

철민의 보따리에는 돋보기가 들어 있었다⁠. 놋쇠 테에 유리알을 박은 것으로⁠, 서역 상인에게서 사 온 물건이라고 했다⁠. 한 해 전 철민이 산채에서 도망칠 때 들고 나온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왜 하필 돋보기였냐고 물었더니⁠, 채주가 제일 아끼는 것이라서 그랬다고 했다⁠. 철민은 그것을 팔지도 못하고 한 해 동안 다락에 숨겨 두었다⁠.

“⁠채주가 그거 없으면 글을 못 읽어요⁠. 제가 없어진 날부터 산채에 글 읽는 사람이 없어서 졸개들이 다 굶었을지도 몰라요⁠.⁠”

“⁠글 못 읽는다고 굶냐⁠.⁠”

“⁠채주는 약관 안 읽고는 아무것도 안 해요⁠. 밥도 계약하고 먹어요⁠.⁠”

산채 바로 아래 비탈에 움막 네 채가 붙어 있었다⁠. 움막 앞마다 쌀자루가 하나씩 놓였고⁠, 자루에는 검은 바람 풍 자가 찍혀 있었다⁠. 흑풍채의 쌀이었다⁠. 움막 하나에서 여자가 나와 빨래를 널다가 나를 보고 손을 멈췄다⁠. 이틀 전 상회 대문 앞 줄에서 내 소매를 붙잡았던 여자였다⁠. 등에 업힌 아이가 아직도 내 붓을 쥐고 있었다⁠. 붓털은 아이가 하도 빨아서 뾰족하게 뭉쳐 있었다⁠.

“⁠설계사님이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쫓겨나셨다면서요⁠.⁠”

“⁠소문이 빠르네요⁠.⁠”

“⁠북망산은 상여가 하루에 열 번 지나가요⁠. 상여꾼들이 다 남시 사람이에요⁠.⁠” 여자는 빨래를 털었다⁠. “⁠채주님 뵈러 가요⁠? 돈 빌리러 가는 얼굴이네⁠.⁠”

“⁠그런 얼굴이 따로 있어요⁠?⁠”

“⁠있어요⁠. 우리 넷이 다 그 얼굴로 올라갔다가 쌀자루 하나씩 받아서 내려왔거든요⁠. 채주님은 쌀은 그냥 주고 돈은 이자를 받아요⁠. 쌀은 사람이 먹는 거고 돈은 사람이 쓰는 거라서 다르대요⁠.⁠”

아이가 붓을 휘둘러 철민의 수염을 쳤다⁠. 수염이 통째로 떨어져 진흙에 박혔다⁠. 철민은 수염을 주워 들고 진흙을 털어 낸 다음 침을 발라 다시 붙였다⁠. 광대에게 돌려줄 때는 씻어서 줄 생각이라고 했다⁠.

*

산채 대청은 산적 소굴이라기보다 서당 같았다⁠. 벽에 서책이 쌓여 있었고⁠, 탁자 위에 붓과 벼루가 있었다⁠. 큰 덩치의 사내가 탁자 앞에 앉아 종이 한 장을 팔 길이만큼 멀리 들고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흑풍채 채주 엽대호였다⁠. 마흔쯤 되어 보였고⁠, 어깨가 문짝만 했다⁠. 대호는 종이를 멀리 들었다가 가까이 당겼다가 다시 멀리 들었다⁠.

“⁠어느 놈이냐⁠.⁠” 대호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내 산채에 기별도 없이 들어온 놈이⁠.⁠”

“⁠만세상회⁠… 아니⁠, 전에 만세상회에 있던 설계사 모설화입니다⁠. 작년 여름에 채주님 부하 백 명 보험을 맡았던⁠.⁠”

“⁠아⁠, 손바닥 아가씨⁠.⁠” 대호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우리 애들 손을 하나씩 다 쥐어 보고 보험료를 매겼지⁠. 그런데 옆에 그 수염 단 놈은 누구냐⁠?⁠”

철민이 갓을 더 눌러썼다⁠. 수염 한쪽이 또 떨어졌다⁠. 대청 기둥에 기대 있던 졸개들이 철민을 보고 웅성거렸다⁠. 하나가 철민의 걸음을 흉내 내며 팔을 휘둘렀다⁠.

“⁠철민이다⁠! 돋보기 들고 튄 철민이⁠!⁠”

철민은 갓을 벗고 보따리를 풀었다⁠. 두 손으로 돋보기를 받쳐 들고 탁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채주님⁠, 한 해 동안 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안 썼어요⁠. 유리알에 침 한 번 안 묻혔습니다⁠.⁠”

대호는 돋보기를 받아 소매로 닦았다⁠. 눈에 대고 아까의 종이를 비췄다⁠. 얼굴이 환해졌다⁠. 한 해 만에 글자가 크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철민아⁠. 한 해 빌린 이자는 알지⁠?⁠”

“⁠그게⁠… 사파 이자요⁠, 정파 이자요⁠?⁠”

졸개 셋이 소매를 걷고 다가왔다⁠. 술 냄새가 먼저 왔다⁠. 대낮인데 셋 다 얼굴이 붉었다⁠. 나는 철민 앞으로 나서서 웃었다⁠.

“⁠고객님들⁠! 지금 철민이를 치시면 흑풍채 보험 약관 거절 사유 여섯 번째입니다⁠. 술에 취해 다친 일⁠. 철민이가 다치는 건 철민이 사정이고⁠, 철민이가 맞받아쳐서 고객님들이 다치시면⁠, 취하셨으니 한 푼도 안 나갑니다⁠.⁠”

졸개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하나가 제 입에 손바닥을 대고 숨을 내쉬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셋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대호가 크게 웃었다⁠.

“⁠손바닥 아가씨는 여전하구나⁠. 약관 한 줄로 내 애들을 물리다니⁠. 철민이 이자는 오늘 탕감한다⁠. 돋보기가 돌아왔으니⁠.⁠”

*

대호는 돋보기를 쥔 채 아까의 종이를 내게 보여 주었다⁠. 만세상회 비무 대표 계약서였다⁠. 심제원의 도장이 찍혀 있었고⁠, 여백에 붉은 먹으로 고친 자국이 군데군데 있었다⁠.

“⁠상회 서기가 글자를 세 군데나 틀렸소⁠. 대표를 대포라고 썼더군⁠. 내가 대포처럼 나가란 말이오⁠?⁠” 대호는 붉은 먹 자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틀린 글자는 못 참소⁠. 틀린 글자가 있는 종이는 뒤에 무슨 짓을 해도 할 말이 없거든⁠.⁠”

“⁠채주님⁠, 그 비무 물려 주십시오⁠.⁠”

“⁠왜⁠?⁠”

“⁠화산 장문인이 나옵니다⁠. 아니면 제자가 나옵니다⁠. 누가 죽어도 아무도 못 받습니다⁠.⁠”

“⁠알고 있소⁠.⁠” 대호는 돋보기를 내려놓았다⁠. “⁠우리 애들 넷이 그렇게 갔소⁠. 작년 가을부터 올봄까지 땔감 숲⁠, 낙수 나루⁠, 숭산 물길⁠. 비무 넷에 넷이 갔소⁠. 넷 다 상회에 청구를 넣었고⁠, 넷 다 일곱 번째 줄로 거절당했소⁠. 나는 그 줄을 알고 들었소⁠. 다른 데서 죽으면 받으니까⁠. 그런데 화약 뒤로 우리 같은 사파가 죽는 데는 비무 말고는 없더군⁠.⁠”

대호는 계약서 맨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붉은 먹으로 덧붙인 한 줄이 있었다⁠. 대호의 글씨였다⁠.

「⁠상회가 이 비무에서 이기면⁠, 흑풍채의 비무 청구 네 건을 다시 심사한다⁠.⁠」

“⁠이것 때문에 나가는 거요⁠. 백 냥은 덤이고⁠.⁠” 대호가 말했다⁠. “⁠아가씨⁠, 화약이 우리한테 남긴 게 뭔지 아시오⁠? 사파는 대전에서 땅을 다 잃었소⁠. 화약은 땅을 다시 가지려면 비무로 가지라고 했소⁠. 우리는 비무를 걸 수밖에 없고⁠, 비무를 걸면 누가 죽소⁠. 죽으면 원수도 못 갚고 은도 못 받소⁠. 과부 넷이 산채 아래 움막에서 내가 주는 쌀로 사오⁠.⁠”

나는 대호의 손을 보았다⁠. 오른손 바닥 전체에 굳은살이 판처럼 덮여 있었다⁠. 칼자루를 서른 해 쥔 손이었다⁠. 작년 여름 이 손을 쥐었을 때 나는 흑풍채에서 가장 비싼 보험료를 매겼다⁠.

“⁠채주님이 이기시면 화산 노모는 이백 냥을 영영 못 받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면 우리 과부 넷이 못 받지⁠.⁠” 대호는 웃지 않았다⁠. “⁠누가 이기든 누군가는 못 받소⁠. 그게 상회 대방이 짠 판이오⁠.⁠”

*

“⁠채주님⁠,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나는 허리를 펴고 영업할 때의 목소리를 냈다⁠. “⁠은 쉰 냥만 빌려주십시오⁠.⁠”

대청이 조용해졌다⁠. 철민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녹림에서 돈을 빌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손이었다⁠.

“⁠어디 쓰려고⁠?⁠”

“⁠화산 노모께 드리려고요⁠.⁠”

대호의 눈썹이 올라갔다⁠. 돋보기로 나를 비춰 보기라도 할 것처럼 한참 보았다⁠.

“⁠그 어른은 내가 보낸 조의금을 산문 밖에 던졌소⁠. 두열이 죽고 이레째에 졸개 편에 은 열 냥을 보냈는데⁠, 주머니째 계단 아래로 굴러 내려왔다더군⁠.⁠” 대호는 붓을 들어 벼루에 적셨다⁠. “⁠쉰 냥 빌려주겠소⁠. 내 이름은 대지 마시오⁠. 그 어른이 또 던지면 이번에는 계단이 사백 칸이라 졸개가 주우러 가다 죽소⁠.⁠”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이자를 듣고 하시오⁠. 열흘에 한 할이오⁠.⁠”

철민이 뒤에서 숨을 들이켰다⁠. 열흘에 한 할이면 한 달에 세 할⁠, 쉰 냥이 한 달 뒤 예순다섯 냥이 된다⁠. 나는 주판을 튕겨 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튕겨 보면 고개가 굳어 버릴 것을 알았다⁠.

“⁠하나 묻겠소⁠.⁠” 대호가 붓을 멈췄다⁠. “⁠아가씨는 상회에서 쫓겨났소⁠. 그 노인한테 은을 줄 까닭이 이제 없소⁠. 보험을 판 사람이 왜 제 돈을 내시오⁠?⁠”

“⁠약속을 팔았으니까요⁠.⁠”

“⁠약속 파는 사람은 강호에 널렸소⁠. 정파는 의리를 팔고 사파는 겁을 팔지⁠.⁠” 대호가 붓끝으로 벼루를 톡톡 쳤다⁠. “⁠그런데 판 약속을 제 돈으로 갚겠다는 사람은 처음 보오⁠.⁠”

“⁠갚는 게 아니라 메우는 겁니다⁠. 제가 판 물건에 구멍이 있어서요⁠.⁠”

철민이 끼어들었다⁠. “⁠채주님⁠, 저도 한 해 일하면 열 냥은 모아요⁠. 누님 이자는 제가 반 내겠습니다⁠.⁠”

“⁠너는 돋보기 이자부터 갚아라⁠.⁠”

“⁠아까 탕감한다고 하셨잖아요⁠!⁠”

“⁠말로 한 건 계약이 아니다⁠. 차용증을 써야지⁠.⁠” 대호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나서 혼자 웃었다⁠. 졸개들도 따라 웃었다⁠. 철민만 웃지 않고 손가락으로 제 이자를 꼽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두었다⁠. 엄순자에게 준 은이 열 냥⁠, 여기서 쉰 냥이 더해지면 예순 냥⁠. 이백 냥까지 백마흔 냥이 남는다⁠. 그리고 내가 진 빚은 오늘부터 쉰 냥에서 시작해 열흘마다 다섯 냥씩 불어난다⁠. 갚을수록 빚이 생기는 장사였다⁠.

“⁠담보는⁠?⁠”

“⁠제가 담보입니다⁠. 한 달 안에 못 갚으면 한 해 동안 흑풍채 설계사를 하겠습니다⁠. 정파 문파에 가서 흑풍채 보험을 팔아 오겠습니다⁠.⁠”

졸개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호도 웃었다⁠. 대호는 차용증을 쓰고⁠, 다 쓴 다음 돋보기를 대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읽었다⁠. 이자⁠, 기한⁠, 담보⁠, 못 갚을 때⁠. 한 줄도 건너뛰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 차용증을 내 앞에 놓았다⁠.

“⁠아가씨⁠, 도장 찍기 전에 끝까지 들었소⁠?⁠”

“⁠예⁠.⁠”

“⁠그럼 찍으시오⁠. 나는 들려주고 파는 사람이오⁠.⁠”

나는 엄지에 인주를 묻혀 찍었다⁠. 엄지가 차용증 끝자락에 닿았다⁠. 정월에 화산 산문에서 약관 끝자락을 접어 누르던 엄지였다⁠.

*

은 쉰 냥은 주머니 둘에 나눠 담았다⁠. 철민이 하나⁠, 내가 하나를 들었다⁠. 대청을 나서는데 대호가 뒤에서 불렀다⁠.

“⁠손바닥 아가씨⁠. 화산 장문인 손은 쥐어 봤소⁠?⁠”

“⁠정월에 한 번요⁠.⁠”

“⁠어땠소⁠?⁠”

“⁠굳은살이 단단했습니다⁠. 그런데 손바닥이 찼어요⁠. 봄인데도요⁠.⁠”

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돋보기를 눈에서 떼고 창밖의 무덤들을 내다보았다⁠.

“⁠두열이라는 애는 그날 손을 떨었소⁠. 처음 칼을 잡은 애처럼 칼끝이 흔들렸지⁠. 나는 세 합 만에 끝내려고 했는데⁠, 그 애가 물러서지를 않았소⁠. 물러서면 안 되는 사람처럼⁠.⁠” 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원래 그 자리에 나올 사람이 따로 있었거든⁠.⁠”

“⁠누구요⁠?⁠”

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돋보기를 탁자에 내려놓고⁠, 붓을 들어 계약서의 틀린 글자 하나를 더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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