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65자)

내쫓는 방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방은 대문 오른편 기둥에 붙어 있었다⁠. 아침 이슬에 먹물이 조금 번졌지만 글씨는 또렷했다⁠. 심제원이 쓰고 상회 서기가 옮겨 적은 글씨였다⁠.

「⁠알림⁠. 보험방 설계사 모설화는 화산파에 보험을 팔면서 약관 끝자락을 접어 거절 사유 한 줄을 숨겼다⁠. 상회는 이를 몰랐으므로 오늘 모설화를 내쫓는다⁠. 화산파 서른 건은 처음부터 없던 계약으로 하고⁠, 낸 보험료 백스무 냥은 모두 돌려준다⁠. 만세상회 대방 심제원⁠.⁠」

나는 방 앞에서 내 이름을 세 번 읽었다⁠. 세 번 읽어도 글자가 바뀌지 않았다⁠. 어제 대문 앞에서 다 보여 드렸다고 한 내 말이 방 한 장 밑에 납작하게 깔려 있었다⁠. 심제원은 위시목이 내민 하얀 자국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다⁠. 알고도 어제는 말하지 않았다⁠. 하룻밤 동안 접힌 자국을 어디에 쓸지 궁리했다⁠.

방 앞에 사람이 불어났다⁠. 어제 줄을 섰던 과부들만이 아니었다⁠. 살아서 보험료를 내는 가입자들이 몰려왔다⁠. 표국 표사⁠, 남시 비단 장수⁠, 낙수 나루의 뱃사공⁠, 숭산 아래 작은 문파의 제자들⁠. 다들 품에서 약관을 꺼내 펼쳤다⁠.

“⁠내 것도 접혔나⁠? 이봐⁠, 끝을 좀 봐 줘⁠!⁠”

“⁠여기 하얀 데 있잖아⁠! 아⁠, 이건 만두 기름이네⁠.⁠”

비단 장수 하나는 약관을 볕에 비춰 보았고⁠, 뱃사공 하나는 종이 끝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떡집 주인은 떡판을 가져와 약관을 올려놓고 다듬이 방망이로 두드려 폈다⁠. 접힌 자국을 펴면 거절 사유가 없어지는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철민이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손을 내저었다⁠.

“⁠어르신들⁠, 진정하세요⁠! 접혀도 글자는 그대로 있어요⁠! 펴도 그대로고요⁠!⁠”

“⁠그럼 접힌 사람은 손해 아니냐⁠!⁠”

“⁠접힌 사람은⁠… 누님⁠, 접힌 사람은 어떻게 돼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대문 계단을 올랐다⁠. 연두색 장포 소매에 손을 넣고 허리를 폈다⁠. 어제 사파 졸개의 아이에게 붓을 주어서 머리에는 새 붓을 꽂았다⁠. 보험방 서랍에 판촉용 붓이 백 자루쯤 있었다⁠. 붓은 많고 거짓말은 하나였다⁠.

대문이 열리고 심제원이 나왔다⁠. 호두는 왼손에 있었다⁠. 오른손은 비워 두었다⁠. 사람들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려는 것이었다⁠.

“⁠대방님⁠.⁠”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접은 것은 저 맞습니다⁠. 거절은 상회가 했고요⁠.⁠”

“⁠그러니까 너를 내보낸다⁠.⁠” 심제원도 낮게 말했다⁠. 사람들을 향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가입자 여러분⁠! 상회는 오늘 거짓으로 판 계약을 바로잡습니다⁠. 여러분의 약관은 접힌 데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드린 것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박수가 나왔다⁠. 떡집 주인이 다듬이 방망이를 내려놓고 박수를 쳤다⁠. 사람들은 손가락질할 데가 생기자 마음이 놓였다⁠. 손가락은 나를 향했다⁠.

박수를 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어제부터 줄을 선 과부들이었다⁠. 과부들은 방을 다시 읽고⁠, 손에 든 약관의 끝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과부들의 약관은 접힌 데가 없었다⁠. 비무 줄이 처음부터 펴져 있었고⁠, 펴진 채로 거절당했다⁠. 아이를 업은 흑풍채 졸개의 아내가 나를 보지 않고 줄에서 빠져나갔다⁠. 등에 업힌 아이가 어제 받은 붓을 입에 물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주판이 움직였다⁠. 화산 서른 건을 없던 계약으로 하면 곽두열의 청구도 처음부터 없는 것이 된다⁠. 거절할 일도⁠, 다툴 일도 없다⁠. 보험료 백스무 냥을 돌려주는 대신 이백 냥과 줄 선 과부들을 한꺼번에 지운다⁠. 심제원은 내 거짓말 하나로 상회의 구멍을 막았다⁠.

*

사람들 뒤에서 흰옷이 갈라졌다⁠. 위시목이 걸어 나왔다⁠. 뒤에 엄순자가 있었다⁠. 위시목은 방을 끝까지 읽고 나서 나를 보았다⁠. 어제 객잔 마당에서 사람 말로 하라던 얼굴이었다⁠.

“⁠어제 대문 앞에서 다 보여 줬다고 했소⁠.⁠”

“⁠예⁠.⁠”

“⁠어제 객잔에서는 사람 말은 나중에 하겠다고 했소⁠.⁠”

“⁠예⁠.⁠”

“⁠나중이 오늘이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사람 말은 혀끝까지 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위시목의 검이 칼집에서 한 마디 나왔다가⁠, 이번에는 위시목이 스스로 밀어 넣었다⁠. 다섯 번째 줄을 외칠 틈도 주지 않았다⁠. 칼을 넣는 얼굴이 칼을 뽑을 때보다 무서웠다⁠.

엄순자가 앞으로 나왔다⁠. 품에서 수건에 싼 꾸러미를 꺼내 풀었다⁠. 어젯밤의 은 열 냥이었다⁠. 엄순자는 은을 손바닥에 올려 보이고⁠, 방을 보고⁠, 나를 보았다⁠.

“⁠이것도 상회 돈이 아니었네요⁠.⁠”

“⁠제 돈입니다⁠, 어머님⁠.⁠”

“⁠설계사 양반 돈이면⁠, 왜 상회 돈이라고 했어요⁠?⁠”

이번에도 쉬운 대답이 혀끝에 와 있었다⁠. 체면 때문에⁠, 절차 때문에⁠. 나는 두 말을 다 삼켰다⁠. 삼키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엄순자는 은을 다시 수건에 싸서 품에 넣었다⁠. 돌려주지 않았다⁠. 손바닥에 올려 세어 본 것을 함부로 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름이라고 했으니 보름은 기다려요⁠.⁠”

*

위시목이 심제원 앞으로 걸어갔다⁠. 대문 계단 아래와 위에서 두 사람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대방⁠. 보험료는 받지 않겠소⁠. 계약을 없던 일로 하면⁠, 두열이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들지 않은 아이가 되오⁠. 두열이는 보험을 들었고⁠, 들고 나서 죽었소⁠.⁠”

“⁠장문인⁠, 계약은 거짓으로 판 사람의 잘못이라⁠…⁠”

“⁠그러니 화약대로 하겠소⁠.⁠” 위시목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문 앞의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화산파는 낙양 화약에 따라 만세상회에 비무를 건다⁠! 화산이 이기면 상회는 두열의 은 이백 냥을 내고 서른 건을 되살린다⁠. 상회가 이기면 화산은 다시는 이 일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심제원이 호두를 멈췄다⁠.

“⁠장문인⁠, 상회는 문파가 아닙니다⁠. 화약은 문파끼리의 약속이지요⁠.⁠”

“⁠서기를 부르시오⁠.⁠”

무림맹 방 앞에서 이번 달 비무 방을 붙이던 서기가 사람들 손에 이끌려 왔다⁠. 소매에 먹물이 묻은 젊은 남자였다⁠. 서기는 품에서 화약 사본을 꺼내 한참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갔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서기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화약 넷째 대목입니다⁠. 문파와 문파⁠, 또는 문파와 무림에 몸담은 자의 다툼은 비무로 가린다⁠.⁠” 서기가 고개를 들었다⁠. “⁠만세상회는 표국을 두고 있고⁠, 표국의 표사는 무림에 몸담은 자로 칩니다⁠. 상회는 비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심제원이 표국 마당을 돌아보았다⁠. 표사 스무 명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폈다⁠. 상회가 표국을 차린 것이 이런 날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심제원의 머릿속에서 주판이 돌았다⁠. 열다섯 해 곁에서 들은 주판이라 소리가 없어도 나는 알았다⁠. 비무를 받지 않으면 상회는 화약 앞에서 물러난 장사꾼이 된다⁠. 받아서 이기면 화산의 청구는 영원히 끝나고⁠, 과부들의 줄도 흩어진다⁠. 지면 이백 냥⁠. 이백 냥은 은고를 흔들지 못한다⁠. 흔드는 것은 이백 냥 뒤에 줄 선 마흔 명이었다⁠.

“⁠받겠습니다⁠.⁠” 심제원이 말했다⁠. “⁠상회는 대표를 세우겠습니다⁠.⁠”

서기가 붓을 꺼냈다⁠. 「⁠삼월 열사흘⁠, 남시 광장⁠. 화산파와 만세상회⁠. 무림맹 서기 심판⁠.⁠」 열흘 뒤였다⁠. 서기는 사람들 앞에서 방을 한 장 더 써서 상회 대문 왼편 기둥에 붙였다⁠. 오른편에는 나를 내쫓는 방⁠, 왼편에는 비무 방⁠. 대문이 양쪽 기둥에 종이를 하나씩 달고 서 있었다⁠.

방을 다 읽은 뒤에야 나는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터져 나와서 막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고객님들⁠,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계단 위에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열흘 뒤 이 비무에서 누가 죽든⁠, 화산 제자든 상회 표사든⁠, 약관 일곱 번째 줄입니다⁠. 비무 중 사고⁠. 아무도 못 받습니다⁠.⁠”

대문 앞이 조용해졌다⁠. 앞줄의 표사 하나가 칼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제 약관을 꺼내 끝자락을 확인했다⁠. 떡집 주인이 다듬이 방망이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비무 때문에 생긴 다툼을 비무로 가리는데⁠, 비무에서 죽으면 비무라서 안 준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상회가 파는 물건입니다⁠.⁠”

심제원이 나를 보았다⁠. 처음으로 호두를 쥔 손이 멈춘 채 오래 있었다⁠.

“⁠설화야⁠, 너는 이제 상회 사람이 아니다⁠. 우리 물건을 네가 설명할 까닭이 없다⁠.⁠”

*

심제원은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탁자 위에는 어제 깨진 호두 껍데기가 그대로 있었다⁠.

“⁠제 거짓말을 쓰셨네요⁠.⁠”

“⁠네가 판 구멍을 네가 막는 거다⁠. 장사꾼 계산으로는 그게 맞다⁠.⁠”

심제원은 서랍에서 무명 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소리로 보아 은 스무 냥쯤이었다⁠.

“⁠열다섯 해 일한 품이다⁠. 받아 가라⁠. 대신 하나만 지켜라⁠. 보험방 안에서 배운 것은 보험방 밖에서 말하지 마라⁠. 판매 교본도⁠, 심사 서류도⁠, 은고도⁠.⁠”

“⁠입막음입니까⁠?⁠”

“⁠퇴직금이다⁠. 입은 네가 막는 거고⁠.⁠”

나는 주머니를 보았다⁠. 스무 냥이면 엄순자에게 갖다 줄 은이 서른 냥이 된다⁠. 손이 먼저 주머니로 가려 했다⁠. 거짓말이 손버릇이라면 돈 받는 것도 손버릇이었다⁠. 나는 두 손을 장포 소매 안에 넣었다⁠.

“⁠제가 이걸 받아서 어머님께 드리면⁠, 어머님은 이번에도 어디서 난 돈이냐고 물으실 겁니다⁠. 그때는 상회가 제 입 막으려고 준 돈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해라⁠.⁠”

“⁠그건 못 하겠습니다⁠.⁠”

심제원은 주머니를 서랍에 도로 넣었다⁠. 호두를 한 알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가 깨지 않고 내려놓았다⁠.

“⁠설화야⁠, 넌 좋은 설계사였다⁠. 손님 손바닥을 한 번 쥐면 그 사람이 몇 해를 살지 알았지⁠. 그런데 네 손바닥은 한 번도 안 쥐어 봤구나⁠.⁠”

*

짐은 많지 않았다⁠. 보험방 서랍의 붓 백 자루는 상회 것이라 두고 나왔다⁠. 주판은 내 것이었다⁠. 열네 살에 전장에 들어와 첫 품삯으로 산 것이라⁠, 알 하나가 이가 빠져 있었다⁠. 철민도 같이 짐을 쌌다⁠. 거짓말한 설계사의 견습은 견습이 아니라고⁠, 상회 서기가 철민의 견습 문서를 돌려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누님⁠. 저는 쫓겨나는 게 익숙해요⁠. 녹림에서도 쫓겨났고⁠, 녹림 가기 전에는 고향에서도 쫓겨났어요⁠.⁠”

“⁠위로가 안 된다⁠.⁠”

“⁠위로하려던 거 아니에요⁠. 자랑이에요⁠.⁠”

보험방 뒤 심사방 문이 열려 있었다⁠. 심사역 노영필이 문턱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마흔다섯⁠, 늘 소매를 걷어붙인 남자였다⁠. 심사방의 찬 방에서 죽은 사람의 몸과 손을 보고 지급과 거절을 정하는 사람이었다⁠. 곽두열의 검시 서류도 노영필의 글씨였다⁠.

“⁠모 설계사⁠.⁠”

“⁠이제 설계사 아닙니다⁠.⁠”

노영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결국 다른 말을 했다⁠.

“⁠짐이 가볍구려⁠.⁠”

노영필은 문을 닫았다⁠. 찬 바람이 문틈으로 한 번 빠져나왔다⁠.

해 질 무렵 상회 뒷골목 다락으로 짐을 옮기고 있을 때⁠, 철민이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상회 표국에 남은 친구 표사에게 들은 소식이라고 했다⁠.

“⁠누님⁠, 대방이 상회 대표를 정했대요⁠.⁠”

“⁠표국 행수겠지⁠.⁠”

“⁠아니에요⁠.⁠” 철민의 얼굴이 하얬다⁠. “⁠흑풍채 채주래요⁠. 엽대호요⁠. 은 백 냥 주고 사 왔대요⁠.⁠”

나는 주판을 내려놓았다⁠. 엽대호⁠. 북망산 흑풍채의 채주⁠. 이월 그믐⁠, 화산 아래 약초밭 비무에서 곽두열과 맞붙은 사람이었다⁠.

철민은 계단참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큰일 났어요⁠. 저 산에서 튈 때 채주 돋보기를 훔쳐 갖고 나왔거든요⁠.⁠”

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내쫓는 방 · 무림 보험설계사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