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532자)

접힌 자국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만세상회 대문 앞은 칼집 천지였다⁠. 왼편에는 흰옷의 화산파 제자 서른 명이 칼 손잡이에 손을 얹고 서 있었고⁠, 오른편에는 상회 표국의 표사 스무 명이 같은 자세로 마주 서 있었다⁠. 아무도 칼을 뽑지 않았다⁠. 손잡이를 쥔 손등에 핏줄만 돋았다⁠.

표사들이 칼을 못 뽑는 까닭을 나는 알았다⁠. 지난가을 표사 스무 명에게 직원 보험을 판 사람이 나였다⁠. 표사들의 약관에도 같은 다섯 번째 줄이 있었다⁠. 먼저 칼을 뽑아 생긴 다툼은 주지 않는다⁠. 대문 앞의 쉰 명이 한 줄의 글 때문에 쇠붙이 대신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고객님들⁠, 날이 덥지요⁠!⁠” 나는 대문 계단에 올라갔다⁠. “⁠칼에서 손 떼시면 더 시원합니다⁠!⁠”

두 줄이 동시에 나를 노려보았다⁠. 쉰 명의 눈길이 한꺼번에 닿으니 장포가 얇게 느껴졌다⁠. 두 줄 사이로 만두 장수가 찜통을 지고 지나갔다⁠. 만두 장수는 두 줄을 번갈아 보더니 한가운데에 찜통을 내려놓았다⁠.

“⁠고기만두 둘에 한 푼⁠! 칼 안 뽑는 손님은 하나 더⁠!⁠”

화산 제자 하나가 슬그머니 손을 칼에서 떼고 동전을 꺼냈다⁠. 표사 하나도 따라서 떼었다⁠. 철민은 내 뒤에서 만두 냄새에 코를 벌름거렸다⁠.

대문이 열리고 심제원이 나왔다⁠. 호두 두 알이 오른손 안에서 돌았다⁠. 화산 줄 맨 앞에는 위시목이 있었고⁠, 위시목 뒤에 엄순자가 나물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엄순자는 바구니를 내려놓지 않았다⁠. 화산에서 낙양까지 이틀 길을 바구니째 들고 온 손이었다⁠.

“⁠장문인⁠, 먼 길 오셨습니다⁠.⁠” 심제원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청구는 심사를 마쳤습니다⁠. 곽두열 공은 비무 중 입은 상처로 숨졌고⁠, 약관 일곱 번째 거절 사유가 비무 중 사고입니다⁠. 은은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줄을 본 적이 없소⁠.⁠”

위시목이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곽두열이 받은 약관 사본이었다⁠. 위시목이 두루마리를 대문 계단에 펼치자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두 달 동안 화산 제자 방 선반에 놓여 있던 종이는 햇볕에 누렇게 바래 있었다⁠. 맨 끝자락 손바닥 한 뼘만 하얬다⁠. 하얀 자리 위아래로 접혔던 금이 칼로 그은 것처럼 곧게 나 있었다⁠.

“⁠이 자리만 볕을 안 봤소⁠. 받던 날부터 접혀 있었다는 말이오⁠.⁠”

심제원이 호두를 멈췄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나를 보았다⁠. 대문 앞의 쉰 명과 만두 장수와 엄순자가 다 같이 나를 보았다⁠.

나는 이번에도 쉬운 대답을 골랐다⁠.

“⁠다 보여 드렸습니다⁠, 장문인⁠. 정월에 마당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 드렸습니다⁠. 접힌 것은 곽두열 고객님이 보관하시면서 끝을 말아 두신 자국입니다⁠.⁠”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매끄러워서 나도 놀랐다⁠. 위시목의 검이 칼집에서 한 마디 나왔다⁠. 화산 제자 서른 명의 손이 다시 손잡이로 갔다⁠. 만두를 먹던 제자는 만두를 입에 문 채 손잡이를 쥐었다⁠.

“⁠다섯 번째 줄입니다⁠!⁠” 내가 외쳤다⁠.

검은 한 마디에서 멈췄다⁠. 위시목은 이를 악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설계사⁠, 두열이는 끝을 말아 두는 아이가 아니었소⁠. 신발도 가지런히 벗는 아이였소⁠.⁠”

심제원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표사가 가져온 작은 상자를 열자 은이 반짝였다⁠.

“⁠곽두열 공이 낸 보험료 네 냥을 돌려 드리고⁠, 상회에서 조의금 다섯 냥을 얹겠습니다⁠. 화약 시대에 비무로 가신 분은 원수도 못 갚지요⁠. 상회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겠습니다⁠.⁠”

위시목은 상자를 보지도 않았다⁠. 상자를 받아 든 사람은 엄순자였다⁠. 엄순자는 은 아홉 냥을 하나씩 손바닥에 올려 세었다⁠. 하나⁠, 둘⁠, 아홉⁠. 다 세고 나서 상자에 도로 넣고 뚜껑을 닫아 심제원의 손에 돌려주었다⁠.

“⁠우리 애 목숨이 아홉 냥은 아니에요⁠.⁠”

엄순자는 바구니를 다시 들었다⁠. 위시목이 칼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보름이오⁠. 화산은 남시 청송객잔에서 기다리겠소⁠.⁠”

*

남시 거리를 걷는 동안 철민은 말이 없었다⁠. 철민이 말이 없으면 나쁜 징조였다⁠. 녹림에서 도망쳐 상회 견습이 된 지 한 해⁠, 철민은 입이 쉬면 손이 일을 했다⁠. 남의 주머니로 가는 손이었다⁠.

무림맹 방이 붙는 사거리 담벼락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림맹 서기가 이번 달 비무를 적은 방을 새로 붙이는 참이었다⁠. 「⁠삼월 비무⁠. 숭산 아래 물길을 두고 두 문파⁠, 북망산 땔감 숲을 두고 흑풍채와 소요문⁠, 낙수 나루를 두고 세 문파가 다투니⁠…⁠」 방은 담벼락 아래까지 길게 내려왔다⁠. 한 달에 열 판이 넘었다⁠. 방 앞에서 늙은 아낙 하나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며 아들 이름을 찾았다⁠.

“⁠누님⁠.⁠” 철민이 입을 열었다⁠. “⁠누님 정월에 화산 갔을 때⁠, 저는 산문 밖에서 노새 지켰잖아요⁠.⁠”

“⁠그랬지⁠.⁠”

“⁠그날 누님 내려오면서 엄지손가락을 자꾸 문질렀어요⁠. 녹림에서는 엄지 문지르는 놈을 조심하라고 했거든요⁠. 뭘 누르고 있던 손이래요⁠.⁠”

나는 엄지를 장포 소매 안으로 넣었다⁠.

“⁠너는 녹림 말 좀 그만해라⁠. 견습이 고객 앞에서 물건이 어쩌고 하면 보험방 문 닫는다⁠.⁠”

“⁠닫으면 저 다시 산에 가요⁠?⁠”

철민이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

내 방은 상회 뒷골목 이층 다락이었다⁠. 침상 밑에 쇠 상자가 있었고⁠, 쇠 상자 안에 열다섯 해 동안 모은 은이 있었다⁠. 전장 심부름꾼 시절의 품삯⁠, 수금원 시절의 웃돈⁠, 설계사가 된 뒤의 수수료⁠. 다 합쳐 은 서른한 냥이었다⁠. 그중 열 냥을 무명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생각보다 가벼웠다⁠. 열다섯 해를 넣었는데 손바닥이 꺾이지 않았다⁠.

청송객잔 앞마당에서는 화산 제자들이 검법을 익히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칼이 아니라 젓가락이었다⁠. 낙양 안에서 칼을 뽑았다가 다섯 번째 줄에 걸려들까 봐⁠, 대제자가 객잔 부엌에서 젓가락 서른 벌을 빌려 왔다고 했다⁠. 서른 명이 젓가락으로 허공을 찌를 때마다 빨랫줄의 객잔 수건이 펄럭였다⁠. 객잔 주인은 젓가락이 부러질 때마다 주판 대신 손가락을 꼽았다⁠.

위시목은 마당 끝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일어나 앞을 막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 밑이 검었다⁠. 밤새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설계사⁠, 두열이 위패를 객잔 방에 모셔 왔소⁠. 위패 앞에서도 아까 그 말을 하겠소⁠?⁠”

“⁠장문인⁠, 저는 위패 앞에서는 영업을 안 합니다⁠.⁠”

“⁠그럼 영업 말고 사람 말로 하시오⁠.⁠”

사람 말이 무엇인지 나는 잠깐 생각했다⁠. 열다섯 해 동안 영업 말만 해서 사람 말은 혀끝에서 맴돌기만 했다⁠. 위시목은 내 대답을 기다리다 마른기침을 했다⁠. 기침이 길었다⁠. 대제자가 달려와 등을 두드리려 하자 위시목은 손을 저어 물렸다⁠.

“⁠어머님을 뵈러 왔습니다⁠.⁠” 나는 위시목 옆을 돌아 지나갔다⁠. “⁠사람 말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등 뒤에서 젓가락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청송객잔 뒤채의 작은 방에는 등잔 하나가 켜져 있었다⁠. 엄순자는 침상 모서리에 앉아 바구니의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낙양 장에 내다 팔 것이라고 했다⁠. 아들이 죽었어도 나물은 시든다고 했다⁠.

“⁠어머님⁠, 이것부터 받으세요⁠.⁠”

엄순자는 주머니를 받아 끈을 풀었다⁠. 은 열 냥이 침상 위로 쏟아졌다⁠. 엄순자는 은을 한 닢씩 손바닥에 올렸다⁠. 하나를 들어 이로 깨물어 보고⁠, 등잔불에 비춰 보고⁠, 다시 내려놓았다⁠.

“⁠장에서 가짜 은을 하도 받아 봐서요⁠.⁠” 엄순자가 말했다⁠. “⁠이건 무슨 돈이에요⁠?⁠”

“⁠상회에서 먼저 드리는 겁니다⁠. 나머지는 심사를 다시 해서 보름 안에 드리고요⁠.⁠”

“⁠아까 그 대방이란 양반은 안 준다던데⁠.⁠”

“⁠대방님은 사람들 앞이라 그러신 겁니다⁠. 상회도 체면이 있어서요⁠.⁠”

거짓말에도 손버릇이 있다⁠. 한 번 하고 나면 다음 거짓말은 손이 먼저 간다⁠. 엄순자는 나를 한참 보다가 은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다섯에서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셌다⁠. 열까지 센 다음 은을 바구니 밑에 깔린 수건에 쌌다⁠.

“⁠우리 두열이가 그 종이에 도장 찍을 때 웃었어요⁠?⁠”

“⁠예⁠. 웃으셨습니다⁠.⁠”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곽두열은 도장을 찍고 나서 내게 물었다⁠. 은 이백 냥이면 어머니가 나물을 몇 해 안 팔아도 되느냐고⁠. 나는 주판을 튕겨 보고 열한 해라고 대답했다⁠. 곽두열은 열한 해⁠, 하고 따라 말하며 웃었다⁠.

“⁠우리 애가 칼을 잡은 건 열여섯부터예요⁠. 아비가 대전 때 표국 짐꾼으로 따라갔다가 안 돌아왔거든요⁠. 그때는 보험이라는 게 없어서 한 푼도 못 받았어요⁠.⁠” 엄순자는 나물 하나를 집어 시든 잎을 떼어 냈다⁠. “⁠두열이가 그랬어요⁠. 엄마⁠, 이번에는 받을 거야⁠. 종이가 있으니까⁠.⁠”

등잔불이 흔들렸다⁠. 나는 침상 모서리의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바구니 손잡이가 손때로 검게 빛났다⁠. 엄순자의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과 같은 모양이었다⁠.

“⁠설계사 양반⁠, 밥은 먹었어요⁠?⁠”

“⁠예⁠, 먹었습니다⁠.⁠”

먹지 않았다⁠. 엄순자는 나물 한 줌을 종이에 싸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데쳐서 간장에 무쳐 먹으라고 했다⁠. 받은 것을 그냥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

이튿날 아침⁠, 상회 대문 앞에 줄이 늘어서 있었다⁠. 화산 제자들이 아니었다⁠. 여자들이었다⁠. 늙은 아낙⁠, 아이를 업은 젊은 여자⁠, 머리에 상복 수건을 쓴 여자⁠. 줄은 대문에서 시작해 남시 사거리 무림맹 방 앞까지 이어졌다⁠. 여자들 손에는 하나같이 누렇게 바랜 약관이 들려 있었다⁠.

“⁠상회가 비무에도 은을 준다면서요⁠?⁠”

맨 앞의 여자가 표사에게 물었다⁠. 표사는 대답을 못 했다⁠. 여자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화산 장문인이 객잔 마당에서 그러더래요⁠. 상회가 어제 노인한테 열 냥을 먼저 줬다고⁠! 우리 집 양반도 작년 가을 비무에서 갔어요⁠!⁠”

나는 줄 옆을 지나 대문으로 들어갔다⁠. 여자들의 약관이 내 장포 소매를 스쳤다⁠. 종이마다 손때가 묻어 있었다⁠.

줄 중간에서 아이를 업은 여자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팔목에 흑풍채 문신이 희미하게 남은 여자였다⁠. 사파 졸개의 아내였다⁠.

“⁠설계사님이 우리 집 양반 손 잡아 보고 보험료 매기셨잖아요⁠. 작년 여름에요⁠. 손바닥이 두꺼워서 비싸다고 하셨죠⁠.⁠”

나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여자가 내민 약관을 보았다⁠. 끝자락에 접힌 자국은 없었다⁠. 흑풍채에서는 채주가 약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졸개들에게 도장을 찍게 했다⁠. 비무 줄도 다 읽었다⁠. 그래도 들었다⁠. 다른 데서는 죽어도 받으니까⁠, 하고⁠.

“⁠비무에서 갔어요⁠. 그래서 안 된대요⁠. 그런데 화산은 받았다면서요⁠?⁠”

여자 등에 업힌 아이가 내 붓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나는 붓을 빼서 아이 손에 쥐여 주고 대문으로 들어갔다⁠. 붓을 준 것은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한 일이었다⁠.

보험방 안쪽 방에서 심제원은 창가에 서 있었다⁠. 창 너머로 줄이 보였다⁠. 호두 두 알이 손바닥 안에서 천천히 돌다가 멈췄다⁠.

“⁠객잔에 은 열 냥 갖다 줬지⁠?⁠”

“⁠제 돈입니다⁠. 상회 은고에서는 한 푼도⁠…⁠”

“⁠사람들은 네 돈이라고 안 봐⁠. 상회 설계사가 들고 간 은은 상회 은이다⁠.⁠” 심제원이 창문을 닫았다⁠. “⁠저 줄에 몇 명이 섰는지 세어 봤냐⁠? 마흔 명이 넘는다⁠. 다 비무로 남편을 잃은 사람들이다⁠. 오늘 저 사람들한테 한 냥씩만 줘도 내일은 사백 명이 선다⁠.⁠”

딱⁠. 호두가 깨졌다⁠. 심제원은 껍데기를 털어 내고 알맹이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았다⁠.

“⁠설화야⁠. 너 열네 살에 전장 심부름 들어왔을 때⁠, 내가 처음 가르친 게 뭐였냐⁠?⁠”

“⁠남의 돈하고 내 돈을 한 주머니에 넣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억하는구나⁠.⁠”

심제원은 알맹이를 제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씹는 동안 창밖의 줄이 조금 더 길어졌다⁠.

“⁠내일 아침 대문에 방이 붙는다⁠. 미리 짐을 싸 둬라⁠.⁠”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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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빵2026.11.01· 2화

    칼 뽑으면 보험금 안 나오니까 다들 손잡이만 쥐고 눈싸움하는 거 너무 웃겨요ㅋㅋ 약관이 칼보다 세네요.

    • 기담오작가2026.11.01

      설화가 판 약관 한 줄이 오십 명을 묶어 두고 있었습니다. 다만 같은 약관이 설화 목도 조르기 시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