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80자)

봄 보험료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사백 칸 넘었어요⁠, 누님⁠. 사백일곱⁠, 사백여덟⁠.⁠”

견습 철민이 짐 보따리를 고쳐 지고 돌계단에 두 손을 짚었다⁠. 화산 산문까지 이어진 돌계단은 칸마다 높이가 달라서⁠, 다리가 계단을 외울 만하면 한 칸이 불쑥 높아졌다⁠. 철민은 높아진 칸을 만날 때마다 녹림 시절 말버릇을 흘렸다⁠. 이 산은 물건도 없는 게 길만 높다고⁠, 털 것도 없는 산을 왜 오르냐고⁠.

“⁠우리 털러 온 거 아니다⁠. 받으러 왔지⁠.⁠”

“⁠받는 거나 터는 거나 남의 주머니에 손 넣는 건 같잖아요⁠.⁠”

“⁠다르지⁠. 우리는 영수증을 써 준다⁠.⁠”

나는 계단참의 돌확 앞에서 멈췄다⁠. 밤새 고인 물이 맑았다⁠. 물 위로 내 얼굴을 비춰 보며 웃는 연습을 했다⁠. 반쯤 올려 묶은 긴 검은 머리에 꽂은 붓이 비뚤어져 있어서 바로 꽂았다⁠. 눈꼬리가 올라간 눈은 가만히 있어도 웃는 눈이라⁠, 상회 사람들은 내가 빚 독촉을 할 때도 웃는 줄 알았다⁠. 연두색 상인 장포의 옷깃을 여미고 허리에 찬 주판을 한 번 흔들었다⁠. 알이 차르륵 내려앉았다⁠. 이 소리가 나야 장사가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두 달 전 정월⁠, 나는 이 계단을 처음 올라와 화산파 제자 서른 명에게 목숨 보험을 팔았다⁠. 철마다 은 두 냥을 내면⁠, 죽은 날 식구에게 은 이백 냥⁠. 만세상회가 강호에 처음 낸 물건이었다⁠. 오늘은 두 번째 철이었다⁠. 서른 명에게 두 냥씩⁠, 은 예순 냥이 내 손바닥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백열하나⁠, 사백열둘⁠.⁠” 철민이 마지막 칸에 주저앉았다⁠. “⁠누님⁠, 이거 내려갈 때는 굴러가도 돼요⁠?⁠”

*

산문은 붉은 칠이 바래 있었다⁠. 문 양옆으로 진달래가 한창이었고⁠, 왼편 비석에는 다섯 해 전 무림맹이 새긴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낙양 화약⁠. 문파의 다툼은 비무 한 판으로 가리고⁠, 비무에서 죽은 이의 원수는 갚지 않는다⁠.⁠」 정사 대전이 끝나던 해⁠, 정파와 사파가 다 같이 도장을 찍은 약속이었다⁠.

나는 문 앞 돌계단 위에서 두 팔을 벌렸다⁠. 목소리는 늘 하던 대로 한 음 높였다⁠.

“⁠화산파 고객님들⁠, 봄 보험료 받으러 왔습니다⁠! 오늘 내시는 분께는 만세상회 붓을 한 자루씩 드립니다⁠!⁠”

대답이 없었다⁠. 산문 안 마당에 흰옷 입은 제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서른 명 가운데 스물아홉 명의 팔에 하얀 상복 띠가 감겨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이 대제자였다⁠. 대제자는 상복 띠를 허리에 매고 있었고⁠, 두 손에 종이 한 장을 받쳐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청구서⁠. 화산파 삼대 제자 곽두열⁠, 이월 그믐 비무에서 입은 상처로 죽음⁠. 보험금 은 이백 냥을 어미 엄순자에게 줄 것⁠. 화산파 장문인 위시목⁠.⁠」

손바닥에 받은 종이가 얇았다⁠. 나는 곽두열의 손을 기억했다⁠. 정월에 악수를 했을 때 오른손 검지 마디와 엄지 뿌리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손바닥 가운데는 말랑했다⁠. 검을 잡은 지 몇 해 안 된 손이었다⁠. 나는 손을 놓으며 보험료를 가장 낮게 매겨 주었다⁠. 위험이 적은 손이라고 생각했다⁠.

“⁠북망산 흑풍채가 화약을 들어 산 아래 약초밭을 걸고 비무를 걸어 왔소⁠.⁠” 대제자가 말했다⁠. “⁠두열이 나갔고⁠, 이틀 뒤에 숨이 끊어졌소⁠.⁠”

산문 안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흰 도포를 입은 중년 남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장문인 위시목이었다⁠. 위시목의 검은 칼집에서 손가락 두 마디만큼 나와 있었다⁠. 정월에도 그랬다⁠. 화가 나면 검을 뽑으려다가 반만 뽑은 채 멈추는 사람이라⁠, 제자들은 뒤에서 반검 장문인이라고 불렀다⁠.

“⁠보험료는 가져가시오⁠. 대신 이백 냥을 여기 놓고 가시오⁠.⁠”

“⁠고객님⁠, 마음은 백 번 알겠습니다⁠.⁠” 내 입에서 상냥한 말이 먼저 나왔다⁠. “⁠청구는 낙양 본방에서 심사를 거쳐야 은이 나갑니다⁠. 제가 이 종이를 모시고 내려가서⁠…⁠”

“⁠심사⁠?⁠”

위시목의 검이 한 마디 더 나왔다⁠. 마당의 제자들이 일제히 손잡이를 쥐었다⁠. 서른 개의 칼이 칼집에서 반쯤 빠져나오는 소리가 한꺼번에 났다⁠. 쇠가 가죽을 긁는 소리였다⁠. 철민이 비석 뒤로 굴러 들어갔다⁠.

나는 허리춤의 두루마리를 풀었다⁠. 상회가 서른 명에게 나눠 준 약관과 같은 것이었다⁠. 두 손으로 끝을 잡고 앞으로 내밀자⁠, 두루마리가 돌계단을 타고 저 아래까지 굴러 내려갔다⁠. 나는 웃는 얼굴로 끝자락의 한 줄을 크게 읽었다⁠.

“⁠거절 사유 다섯⁠! 계약자가 먼저 칼을 뽑아 생긴 다툼에서 다치거나 죽으면⁠, 보험금을 주지 않는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지금 칼을 끝까지 뽑으시면 서른 분 모두 여기에 해당되십니다⁠. 제가 다치든 고객님이 다치든⁠, 오늘부터 화산파는 보험금을 한 푼도 못 받습니다⁠.⁠”

서른 개의 칼이 반쯤 나온 채로 멈췄다⁠. 아무도 끝까지 뽑지 않았고⁠, 아무도 도로 넣지 않았다⁠. 앞줄의 제자 하나가 재채기를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진달래 꽃잎 하나가 위시목의 검 위에 내려앉았다⁠.

“⁠다시 넣으면 어찌 되오⁠?⁠” 위시목이 물었다⁠.

“⁠넣는 일은 약관에 없습니다⁠, 고객님⁠.⁠”

위시목은 한참 나를 내려다보다가 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딸깍 소리가 나자 제자들도 하나씩 따라 넣었다⁠. 서른 번의 딸깍이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비석 뒤에서 철민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님⁠, 저 오늘 처음으로 약관이 칼보다 센 걸 봤어요⁠.⁠”

나는 굴러 내려간 두루마리를 감아올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읽은 줄은 거절 사유 다섯 번째였다⁠. 두루마리 맨 끝에는 거절 사유가 하나 더 있었다⁠. 마지막 줄은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

곽두열의 어머니는 산문 옆 사당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아들 위패를 등지고⁠, 나물 바구니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였다⁠. 작고 마른 노인이었다⁠. 머리에 쓴 무명 수건 밑으로 흰머리가 비어져 나왔다⁠. 옆에 놓인 밥상의 밥은 손도 대지 않아 위가 말라 있었다⁠.

“⁠설계사 양반이에요⁠?⁠”

엄순자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는 얼굴이 아니었다⁠. 눈두덩이 부어 있었지만 목소리는 장에서 나물 값을 부를 때처럼 또렷했다⁠.

“⁠예⁠, 어머님⁠. 만세상회 모설화입니다⁠.⁠”

나는 버릇대로 손을 내밀었다⁠. 엄순자가 머뭇거리다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거칠었다⁠. 손가락 끝이 갈라져 있었고 손톱 밑에 흙물이 배어 있었다⁠. 손바닥 가운데에는 바구니 손잡이 자국이 굳은살로 박혀 있었다⁠. 칼을 쥔 적은 없고⁠, 평생 무언가를 뜯고 이고 나른 손이었다⁠.

“⁠우리 애가 그거 들면서 그랬어요⁠. 엄마는 이제 굶을 일 없다고⁠. 자기가 무슨 일 나도 은이 이백 냥 나온다고⁠.⁠” 엄순자가 내 손을 놓았다⁠. “⁠그 은⁠, 언제 와요⁠?⁠”

장사꾼에게는 쉬운 대답과 어려운 대답이 있다⁠. 쉬운 대답은 입이 먼저 하고⁠, 어려운 대답은 머리가 한참 뒤에 한다⁠. 나는 열네 살에 전장 심부름을 시작한 뒤로 열다섯 해 동안 쉬운 대답으로 먹고살았다⁠.

“⁠보름 안에 가져오겠습니다⁠, 어머님⁠.⁠”

엄순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밥상의 숟가락을 들었다⁠. 마른 밥 한 술을 떠서 오래 씹었다⁠. 나는 숟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웃었다⁠. 웃는 눈이라 다행이었다⁠. 아무도 내 웃음이 굳었다는 것을 몰랐다⁠.

*

내려가는 돌계단은 올라올 때보다 길었다⁠. 철민은 굴러가도 되냐고 묻던 입을 다물고 한 칸씩 발끝으로 짚었다⁠. 백 칸쯤 내려갔을 때 뒤에서 바람이 일었다⁠. 위시목이 경공으로 계단 몇 칸을 건너뛰어 내 앞에 내려왔다⁠. 손에 묵직한 무명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봄 보험료요⁠. 예순 냥이오⁠.⁠”

“⁠장문인⁠, 이건 청구가 끝난 다음에⁠…⁠”

“⁠두열이 몫 두 냥도 들었소⁠. 그 애가 죽기 전날 내 방에 맡기고 간 거요⁠. 철 바뀌면 설계사가 올 테니 늦지 말고 내라고⁠.⁠” 위시목은 주머니를 내 손바닥에 올렸다⁠. “⁠약속은 화산이 먼저 지키오⁠. 보름이오⁠.⁠”

은 예순 냥은 손바닥이 아래로 꺾일 만큼 무거웠다⁠. 위시목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철민이 주머니를 들여다보고 침을 삼켰다⁠.

“⁠누님⁠, 녹림에서는 이런 걸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털기도 전에 물건이 제 발로 오는 거요⁠.⁠”

“⁠뭐라고 하는데⁠?⁠”

“⁠함정이라고 해요⁠.⁠”

*

사흘 뒤 낙양 남시⁠, 만세상회 앞마당에서는 표국 수레가 짐을 내리고 있었다⁠. 가운데 전장에서는 주판 소리가 빗소리처럼 쏟아졌다⁠. 안채 왼편의 보험방 대청에는 낙양 관아의 세리가 앉아 있었다⁠. 세리는 이번 철 보험 계약마다 찍은 관인을 세고⁠, 관인 하나에 세금을 얼마씩 매겨 갔다⁠. 세리가 일어서며 내게 말했다⁠.

“⁠모 설계사⁠, 화산 서른 건은 이번 철 세금이 다 들어왔소⁠. 장사 잘했소⁠.⁠”

대방 심제원은 보험방 안쪽 방에 있었다⁠. 쉰여섯의 배가 나온 남자였고⁠, 오른손에 늘 호두 두 알을 굴렸다⁠. 탁자 위에는 내가 가져온 청구서와 심사방의 검시 서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검시 서류는 심사역 노영필의 반듯한 글씨였다⁠. 「⁠가슴에 비무 상처⁠. 이틀 뒤 내상으로 죽음⁠. 비무 중 입은 상처가 까닭⁠.⁠」

심제원은 금실로 테를 두른 원본 약관을 펼쳤다⁠. 손가락이 맨 끝의 한 줄에서 멈췄다⁠.

「⁠거절 사유 일곱⁠. 비무 중 사고는 지급하지 않는다⁠.⁠」

“⁠거절이다⁠.⁠”

“⁠대방님⁠, 화산파입니다⁠. 화산 서른 명이 해지하면 정파 문파들이 줄줄이 빠집니다⁠. 어머님이 사흘째 밥을⁠…⁠”

“⁠설화야⁠.⁠” 심제원은 호두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 가입자가 몇이냐⁠?⁠”

“⁠천 명 조금 넘습니다⁠.⁠”

“⁠화약 뒤로 강호에서 칼싸움이 없어졌다⁠. 그 대신 비무가 생겼지⁠. 문파들이 땅이며 물이며 약초밭을 두고 한 해에 비무를 몇 판이나 거는 줄 아냐⁠?⁠” 심제원의 말이 숫자에 닿자 빨라졌다⁠. “⁠비무로 죽는 사람한테 다 주면 은고가 한 해를 못 간다⁠. 은고가 비면 천 명이 다 잃어⁠. 오늘 살아서 보험료 내는 사람들 말이다⁠.⁠”

“⁠그럼 이 보험은 무인한테 뭘 파는 겁니까⁠? 무인이 죽는 자리는 거의 다 비무인데요⁠.⁠”

딱⁠. 심제원의 손바닥 안에서 호두 한 알이 깨졌다⁠. 심제원은 깨진 껍데기를 골라내고 알맹이를 입에 넣었다⁠.

“⁠그러니까 비무 아닌 날 죽으면 주지⁠. 술 안 마시고⁠, 칼 먼저 안 뽑고⁠, 비무 아닌 데서 죽으면⁠.⁠” 심제원은 껍데기를 탁자 구석으로 쓸었다⁠. “⁠거절 통지는 판 사람이 들고 간다⁠. 보험방 법이야⁠.⁠”

“⁠제가요⁠?⁠”

“⁠네가 팔았잖아⁠. 서른 건을 한 번에⁠. 행수 자리 달라고 했던 것도 너고⁠.⁠”

심제원은 거절 통지에 상회 도장을 찍어 내 앞으로 밀었다⁠. 도장 밥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

해가 기운 뒤⁠, 나는 아무도 없는 보험방에서 원본 약관을 다시 펼쳤다⁠. 맨 끝의 거절 사유 일곱 줄 가운데 마지막 한 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비무 중 사고는 지급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고백이다⁠. 두 달 전 정월⁠, 나는 화산 산문 앞마당에서 서른 명에게 이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좋은 말이 적힌 데는 천천히 읽었고⁠, 거절 사유는 빨리 읽었다⁠. 마지막 한 줄에 이르기 전에 두루마리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접어 올렸다⁠. 화약 시대에 무인이 죽는 자리는 비무라는 것을⁠, 나는 상회의 누구보다 잘 알았다⁠. 비무 줄을 읽으면 아무도 도장을 찍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접힌 끝자락을 엄지로 누른 채⁠,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다 보셨지요⁠, 고객님⁠.

손가락 밑의 종이가 서늘했다⁠. 대청 밖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철민이 문을 밀고 뛰어 들어왔다⁠.

“⁠누님⁠, 튀어야 돼요⁠!⁠”

“⁠또 뭘 훔쳤어⁠?⁠”

“⁠아니⁠, 그게 아니고요⁠.⁠” 철민이 숨을 몰아쉬었다⁠. “⁠화산파가 왔어요⁠. 저희가 노새 타고 사흘 걸린 길을 경공으로 이틀 만에 왔대요⁠. 서른 명이 상회 대문 앞에 칼 차고 서 있어요⁠. 할머니도 같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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