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30자)

비무를 거는 손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내 집이오⁠.⁠” 심제원이 말했다⁠. “⁠내 아들이 자란 집이오⁠. 아들이 표사가 되겠다고 처음 칼을 쥔 마당이 있는 집이오⁠.⁠”

엄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다는 끄덕임이었다⁠. 그러고는 손목의 붉은 실을 풀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매듭 하나⁠. 낙양 사람 열한 명이 놓고 간 일곱 냥⁠.

“⁠대방 양반⁠, 이거 보여요⁠? 이건 내가 이름을 아는 돈이에요⁠. 떡집이랑 뱃사공이랑⁠, 포목전 아낙⁠. 어디서 났는지 아니까 받았어요⁠.⁠” 엄순자는 붉은 실을 다시 손목에 감았다⁠. “⁠대방 양반 집 판 돈도 어디서 났는지는 알겠네요⁠. 아들이 자란 집⁠.⁠”

“⁠그렇소⁠.⁠”

“⁠그런데 그 돈을 내가 받으면⁠, 여기 마흔두 집은 대방 양반 집이 하나뿐이라서 못 받는 거잖아요⁠.⁠” 엄순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파 과부와 사파 과부가 섞여 앉은 줄이었다⁠. “⁠우리 애는 종이를 믿고 죽었어요⁠. 이 사람들 남편도 종이를 믿고 죽었고요⁠. 나만 집 판 돈을 받으면⁠, 우리 애가 믿은 건 종이가 아니라 대방 양반 마음이 되는 거예요⁠.⁠”

심제원은 무릎을 굽힌 채 오래 엄순자를 보았다⁠. 엄순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래도 안 받을게요⁠.⁠”

심제원이 천천히 일어났다⁠. 무릎이 소리를 냈다⁠. 마흔세 집에서 누군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숭산의 과부였다⁠. 아이 업은 흑풍채 과부가 엄순자의 등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엄순자는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설계사 양반이 아까 판다고 한 거⁠, 그거나 들어 봐요⁠. 사든 안 사든⁠.⁠”

*

서기가 향을 꽂았다⁠. 나는 주판을 두 손에 쥐고 대청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곽두열의 약관 사본이 아직 돌바닥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사본 옆에서 멈췄다⁠.

“⁠고객님들⁠, 대방님 말씀이 맞습니다⁠. 다 읽어 드렸더니 아무도 안 사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인한테 팔지 않겠습니다⁠. 문파한테 팔겠습니다⁠.⁠”

정사 의자의 대표들이 고개를 들었다⁠.

“⁠비무 보험입니다⁠. 비무를 거는 문파는 무림맹 서기에게 비무를 알릴 때 은 쉰 냥을 맡깁니다⁠. 비무가 끝나면 이긴 문파가 쉰 냥을 냅니다⁠. 거는 문파가 이기면 맡긴 돈이 그대로 들어가고⁠, 거는 문파가 지면 받은 문파가 대신 내고 거는 문파는 맡긴 돈을 돌려받습니다⁠. 쉰 냥은 상회 보험방으로 갑니다⁠. 그 판에서 누가 죽으면⁠, 정파든 사파든⁠, 이긴 사람이든 진 사람이든⁠, 식구에게 이백 냥이 나갑니다⁠.⁠”

대청이 술렁였다⁠. 숭산 문파 대표가 벌떡 일어났다⁠.

“⁠이긴 문파가 왜 내오⁠?⁠”

“⁠이긴 문파가 땅을 가지니까요⁠.⁠” 내가 말했다⁠. “⁠땅을 가지는 사람이 죽은 사람 식구 몫을 내는 겁니다⁠. 고객님 문파가 지난가을 물길을 얻으셨지요⁠. 물길에서 한 해 소출이 얼마나 나옵니까⁠? 쉰 냥보다 적습니까⁠?⁠”

숭산 대표가 입을 다물었다⁠. 물길 하나의 소출이 쉰 냥보다 적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청에 없었다⁠.

“⁠거절 사유도 미리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보험은 서기에게 알리지 않은 비무는 주지 않습니다⁠. 대신 나간 사람은⁠, 서기에게 대신 나간다고 알렸으면 줍니다⁠. 알리지 않았으면 맡긴 문파가 이백 냥을 다 냅니다⁠.⁠”

정파 의자 끝에서 위시목이 고개를 숙였다⁠.

심제원이 상회 자리에서 주판을 꺼냈다⁠. 보험방 안쪽 방 탁자에 늘 놓여 있던 커다란 흑단 주판이었다⁠. 대청에 주판 두 개가 나왔다⁠. 내 것은 알 하나가 이가 빠진 작은 주판⁠, 심제원의 것은 알마다 반들거리는 큰 주판⁠.

“⁠설화야⁠, 한 해에 비무가 몇 판이냐⁠?⁠”

“⁠무림맹 방에 붙은 것만 한 달에 열 판이 넘습니다⁠. 한 해에 백이십 판쯤입니다⁠.⁠”

차르륵⁠. 심제원의 알이 내려앉았다⁠.

“⁠그중 사람이 죽는 판은⁠?⁠”

“⁠지난 세 해 마흔세 집이니⁠, 한 해에 열다섯 판쯤입니다⁠. 대개는 다치고 끝나지요⁠. 여덟 판에 한 판꼴입니다⁠.⁠”

차르륵⁠. 내 알도 내려앉았다⁠. 대청의 정사 대표들이 두 주판 소리를 번갈아 들었다⁠.

“⁠백이십 판에 쉰 냥씩이면 육천 냥⁠. 열다섯 집에 이백 냥씩이면 삼천 냥⁠.⁠” 심제원이 알을 튕겼다⁠. “⁠남는다⁠. 네 계산으로는⁠.⁠”

“⁠네⁠.⁠”

“⁠그런데 이걸 하면 문파들이 비무를 덜 건다⁠.⁠” 심제원의 알이 거꾸로 올라갔다⁠. “⁠비무가 반으로 줄면 육천 냥이 삼천 냥이 된다⁠. 그래도 맞냐⁠?⁠”

“⁠비무가 반으로 줄면 죽는 사람도 반으로 줍니다⁠.⁠” 나는 알을 튕겼다⁠. “⁠열다섯 집이 일곱 집이 됩니다⁠. 천사백 냥⁠. 그래도 남습니다⁠. 그게 이 물건의 제일 좋은 점입니다⁠. 덜 팔리면 덜 죽습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웃음이 나왔다⁠. 철민이 닭 바구니를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산이요⁠, 하고 중얼거렸다⁠.

심제원은 웃지 않았다⁠. 알을 다시 털었다⁠.

“⁠문파들이 서기 몰래 비무를 하면⁠?⁠”

“⁠그럼 화약을 어긴 겁니다⁠. 집법당주 일이지요⁠. 알리지 않은 비무에서 죽은 사람은 보험이 없으니⁠, 식구들이 그 문파를 무림맹에 고합니다⁠. 몰래 하면 손해입니다⁠.⁠”

“⁠무림맹이 받아 주지 않으면⁠?⁠”

“⁠그럼 오늘처럼 대청이 꽉 찹니다⁠.⁠”

집법당주가 단 위에서 흰 수염을 쓸었다⁠. 웃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럼 마흔세 집은⁠?⁠” 심제원의 손이 멈췄다⁠. “⁠이건 앞으로의 일이다⁠. 지난 세 해에 죽은 사람은 이 물건으로 못 받는다⁠. 마흔세 집이 오늘 대청에 앉은 까닭이 그거다⁠.⁠”

내 손도 멈췄다⁠. 이것이 제일 큰 구멍이었다⁠. 심제원은 처음부터 이 구멍을 보고 있었다⁠. 나도 보았다⁠. 다만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늘은 내가 먼저 말해야 했다⁠. 거절 사유는 손님이 묻기 전에⁠.

“⁠지난 세 해 마흔세 집⁠, 팔천육백 냥은 셋이 나눠 냅니다⁠.⁠” 내가 말했다⁠. “⁠지난 비무에서 이긴 문파들이 하나⁠. 얻은 땅과 물길에서 세 해 동안 소출의 한 할씩⁠. 상회가 하나⁠. 비무 청구를 거절해서 남은 은고의 은으로⁠. 그리고⁠…⁠”

나는 말을 멈추고 숨을 쉬었다⁠.

“⁠접은 손이 하나입니다⁠. 저는 곽두열 고객님 몫만큼은 제 손으로 갚겠습니다⁠. 언제까지 걸리든⁠.⁠”

대청이 조용해졌다⁠. 엄순자가 처음으로 나를 보았다⁠.

“⁠설계사 양반⁠, 그 은은 어디서 나요⁠?⁠”

엄순자는 돈을 받기 전에 늘 먼저 물었다⁠. 무슨 돈이냐고⁠, 어디서 났냐고⁠. 이번에는 아직 오지도 않은 돈의 출처를 물었다⁠. 손바닥에 올려 셀 수 없는 돈이었다⁠.

“⁠제 손으로 벌겠습니다⁠, 어머님⁠. 보험은 이제 안 팔 생각입니다⁠.⁠”

“⁠장사꾼이 장사를 안 하면 뭘 해요⁠?⁠”

“⁠읽겠습니다⁠.⁠” 나는 주판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무림맹 서기 옆에서⁠, 비무를 알리러 오는 문파한테 약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주겠습니다⁠. 거절 사유부터요⁠. 서기가 써 주는 품삯을 받아서 화산으로 가져가겠습니다⁠.⁠”

엄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목의 붉은 실을 한 번 쓸었다⁠. 단 위에서 집법당주가 서기를 돌아보았고⁠, 서기가 무언가를 받아 적었다⁠. 대표 글자를 틀렸던 서기가 이번에는 붓끝을 오래 고르고 나서 썼다⁠.

*

사파 의자 끝에서 엽대호가 돋보기를 들고 일어났다⁠.

“⁠손바닥 아가씨⁠, 내가 하나 따지겠소⁠.⁠”

“⁠채주님은 다 읽으시니까요⁠. 따지셔야지요⁠.⁠”

“⁠사파는 대전에서 땅을 다 잃었소⁠. 화약은 땅을 비무로 찾으라고 했소⁠. 우리는 비무를 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오⁠. 그런데 걸 때마다 은 쉰 냥을 맡기라니⁠. 흑풍채에 쉰 냥이 있으면 비무를 걸 까닭이 없소⁠. 아가씨 물건은 가난한 문파의 비무를 막는 물건이오⁠.⁠”

사파 의자가 들끓었다⁠. 정파 의자의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도 작은 문파는 사정이 같았다⁠.

나는 주판을 내려다보았다⁠. 대호의 말이 맞았다⁠. 내 계산에 가난한 문파가 빠져 있었다⁠. 맡길 은이 없는 문파⁠.

심제원이 큰 주판을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내 편도 대호 편도 아닌 목소리로 말했다⁠.

“⁠맡기는 은을 상회 전장이 빌려주면 되오⁠.⁠”

대청의 눈이 심제원에게 몰렸다⁠. 나도 돌아보았다⁠.

“⁠비무를 걸 문파가 전장에서 쉰 냥을 빌려 서기에게 맡기오⁠. 지면 맡긴 돈을 돌려받으니 그대로 전장에 갚고⁠, 이기면 땅을 얻었으니 땅에서 갚소⁠. 이자는 비무 한 판에 반 할⁠.⁠” 심제원은 대호를 보았다⁠. “⁠흑풍채 이자보다 싸오⁠.⁠”

대호가 돋보기를 눈에 댔다⁠. 심제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눈이었다⁠. 오래 읽고 나서 돋보기를 내렸다⁠.

“⁠날짜는 쓰시오⁠. 지난번에는 빼먹었으니⁠.⁠”

“⁠쓰겠소⁠.⁠”

대호는 자리에 앉았다⁠. 사파 의자가 조용해졌다⁠.

나는 심제원을 보았다⁠. 심제원은 나를 보지 않았다⁠. 큰 주판의 알을 하나씩 제자리로 올리고 있었다⁠. 계산을 끝낸 사람의 손이었다⁠. 상회 전장이 문파에 은을 빌려주면 이자가 들어온다⁠. 상회 보험방에 비무 보험료가 들어온다⁠. 은고의 시렁이 다시 찬다⁠. 심제원은 내 물건에서 구멍을 찾다가⁠, 구멍을 메우는 데서 상회가 살 길을 찾았다⁠.

“⁠대방님은 처음부터 보셨지요⁠. 메울 데를⁠.⁠”

“⁠장사꾼은 남의 물건 구멍에서 제 물건을 찾는다⁠. 열네 살 때 가르쳤잖냐⁠.⁠” 심제원은 주판을 품에 넣었다⁠. “⁠네가 처음으로 끝까지 읽고 판 물건이다⁠. 구멍도 끝까지 읽어야지⁠.⁠”

향이 다 탔다⁠.

*

집법당주가 단 위에서 일어났다⁠. 대청의 모든 사람이 따라 일어나려 했고⁠, 집법당주가 손을 내려 앉혔다⁠.

“⁠양쪽 말을 다 들었소⁠. 상회는 천 명을 지키려 하고⁠, 마흔세 집은 화약이 가져간 것을 찾으려 하오⁠. 둘 다 옳소⁠.⁠” 집법당주는 향로의 재를 내려다보았다⁠. “⁠설계사의 물건은 둘을 다 살리자는 물건이오⁠. 문파는 비무를 걸 때 은을 맡기고⁠, 이긴 문파가 내고⁠, 비무 죽음은 식구에게 가오⁠. 무림맹은 이것을 화약에 넣을 수 있소⁠. 넣으면 화약 다섯 해 만에 처음 고치는 것이오⁠.⁠”

정사 의자가 술렁였다⁠. 화약을 고친다는 말은 대청에서 처음 나왔다⁠.

“⁠다만 이 물건은 상회가 받아야 돌아가오⁠. 보험방이 없으면 쉰 냥이 갈 데가 없소⁠.⁠” 집법당주가 심제원을 보았다⁠. “⁠대방⁠, 받겠소⁠?⁠”

대청이 숨을 죽였다⁠. 마흔세 집과 정사 의자와 피고석의 나와 기둥 뒤의 아전과 닭 두 마리까지⁠, 모두가 심제원을 보았다⁠.

심제원은 품에서 교본을 꺼냈다⁠. 첫 장을 펼쳐 먹줄 그어진 줄을 오래 보았다⁠. 손님이 묻기 전에 먼저 다 읽어 준다⁠. 그러고는 책을 덮었다⁠.

“⁠집법당주⁠, 하룻밤을 주시오⁠.⁠”

“⁠무엇을 하려고⁠?⁠”

“⁠은고를 세어 봐야겠소⁠. 마흔세 집의 셋 가운데 하나가 상회 몫이라면⁠, 내 손으로 세어 봐야 하오⁠. 그리고⁠…⁠” 심제원은 잠깐 말을 멈췄다⁠. 호두를 찾는 손이 품 안을 더듬다가 빈손으로 나왔다⁠. 노영필이 가져간 호두 한 알이 돌아오지 않은 품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한테 물어볼 것이 있소⁠.⁠”

집법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해 뜰 때 대청에서 듣겠소⁠.⁠”

사람들이 일어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철민이 닭 바구니를 안고 사람들 틈을 빠져나가며 내게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낙수 나루 과부에게 줄 닭이 세 마리 모자란다는 뜻이었다⁠. 바구니 속 닭 두 마리가 대청 문턱을 넘으며 동시에 울었다⁠. 나는 돌바닥에 펼쳐 둔 곽두열의 약관 사본을 감아올렸다⁠. 하얀 끝자락이 마지막으로 감겨 들어갔다⁠. 접히지 않고⁠, 둥글게⁠. 고개를 들자 노영필이 상회 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노영필의 손바닥에 호두 한 알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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