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29자)

산문까지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해 뜰 무렵 무림맹 대청은 어제보다 비어 있었다⁠. 정사 문파 대표들은 반쯤만 나왔고⁠, 구경꾼은 기둥 사이에 드문드문 서 있었다⁠. 밤새 남시에 소문이 돌았다⁠. 대방이 은고를 세다가 쓰러졌다⁠, 대방이 밤에 낙양을 떴다⁠, 대방이 며느리 집에 갔다⁠. 세 번째 소문만 맞았다⁠.

심제원은 대청 가운데에 혼자 서 있었다⁠. 노영필도 표국 행수도 상회 자리에 앉아 있었고⁠, 대방만 걸어 나왔다⁠. 눈 밑이 검었다⁠. 잠을 자지 않은 얼굴이었다⁠. 손에 호두가 없었다⁠.

“⁠집법당주⁠, 하룻밤 동안 은고를 셌습니다⁠.⁠” 심제원이 말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앞줄 시렁의 은괴는 백 개입니다⁠. 마흔세 집의 셋 가운데 상회 몫을 내면 쉰 개가 남습니다⁠. 쉰 개로 천 명을 받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더 보탭니다⁠.⁠”

심제원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남시 집문서였다⁠.

“⁠제 집을 팝니다⁠. 상회 몫은 집 판 은으로 먼저 냅니다⁠. 은고 시렁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시렁은 천 명 것입니다⁠.⁠”

대청이 술렁였다⁠. 집법당주가 흰 눈썹을 올렸다⁠.

“⁠어제 대방이 한 사람한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소⁠. 물어보았소⁠?⁠”

“⁠며느리한테 물었습니다⁠. 아들이 자란 집을 팔아도 되겠냐고⁠.⁠” 심제원은 집문서를 접지 않고 들고 있었다⁠. “⁠며느리가 그랬습니다⁠. 그 집에서 아버님이 국수 그릇 받으러 한 번도 안 오셨는데⁠, 팔아서 남의 집 국수 그릇에 은이 들어가면 그게 낫겠다고⁠.⁠”

심제원은 집문서를 서기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품에서 교본을 꺼냈다⁠. 첫 장을 펴지 않고 표지만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대방 자리도 내놓습니다⁠. 이 책에 먹줄을 그은 사람이 비무 보험의 은을 맡을 수는 없습니다⁠. 상회 대방은 전장 행수가 잇습니다⁠. 숫자는 저보다 느리지만 먹줄은 안 긋는 사람입니다⁠.⁠”

심제원은 상회 자리로 걸어가 노영필 앞에서 멈췄다⁠. 교본을 노영필에게 내밀었다⁠.

“⁠심사방 찬 방 선반에 두게⁠. 얼음 옆에⁠. 녹지 않게⁠.⁠”

노영필은 교본을 받아 들었다⁠. 품에서 호두 한 알을 꺼내 심제원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찬 방 앞 마당에서 굴러떨어졌던 호두였다⁠. 심제원은 호두를 오래 보다가 손에 쥐었다⁠. 깨지 않았다⁠.

*

집법당주가 단 위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아무도 앉히지 않았다⁠. 대청의 사람들이 다 같이 일어났다⁠.

“⁠무림맹은 오늘 낙양 화약에 새 대목을 넣소⁠. 비무를 거는 문파는 무림맹 서기에게 은 쉰 냥을 맡기고⁠, 비무가 끝나면 이긴 문파가 내오⁠. 은은 만세상회 보험방으로 가고⁠, 비무에서 죽은 사람의 식구에게 이백 냥이 가오⁠. 대신 나가는 사람은 서기에게 알려야 하오⁠.⁠”

정파 의자 끝에서 위시목이 고개를 숙였다⁠.

“⁠지난 세 해의 마흔세 집은 셋이 나누어 갚소⁠. 지난 비무에서 이긴 문파들이 세 해 동안 소출의 한 할⁠. 상회가 대방의 집으로 하나⁠. 그리고 남은 하나⁠.⁠” 집법당주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곽두열의 몫 가운데 쉰 냥은 접은 손이 갚소⁠. 기한은 두지 않소⁠. 갚을 때까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쉰 냥⁠. 흑풍채에서 빌렸던 것과 같은 액수였다⁠. 이번에는 이자가 없었고⁠, 빌린 데도 없었다⁠.

“⁠화산파 서른 건은 처음부터 없던 일이 아니오⁠. 상회는 되살리시오⁠. 그리고 피고 모설화⁠.⁠” 집법당주가 서기에게서 종이 한 장을 받았다⁠. 어제 대청에서 서기가 붓끝을 오래 고르고 받아 적은 종이였다⁠. “⁠그대는 다시 보험을 팔지 마시오⁠. 그대가 스스로 그리 말했소⁠. 대신 무림맹 서기 곁에서⁠, 비무를 알리러 오는 문파에게 약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시오⁠. 품삯은 무림맹이 주오⁠. 한 번 읽을 때마다 엽전 열 닢⁠.⁠”

철민이 구경꾼들 틈에서 손가락을 꼽았다⁠. 엽전 열 닢⁠. 쉰 냥⁠. 꼽다가 손가락이 모자라서 닭 바구니를 내려놓고 발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신을 벗지 않았다⁠.

*

남은 일은 손으로 했다⁠.

장터 술집에 외상 네 냥을 갚았다⁠. 술집 주인은 칠판을 닦고 새로 「⁠무림맹 비무 방⁠」을 붙였다⁠. 이제 내기는 안 받는다고 했다⁠. 비무에 쉰 냥이 붙으니 문파들이 비무를 덜 걸어서⁠, 걸 데가 없다고 했다⁠. 대신 흰 떡과 검은 떡을 반씩 팔기 시작했다고 떡집 주인이 일러 주었다⁠.

철민은 낙수 나루 과부에게 닭 다섯 마리를 갖다주었다⁠. 두 마리는 대청에 데리고 갔던 닭이었고⁠, 세 마리는 내가 남은 한 냥을 보태고 철민이 반 달 동안 품을 팔아 샀다⁠. 과부는 닭을 세어 보고⁠, 한 마리를 철민에게 도로 내밀었다⁠. 삼 년 이자라고 했다⁠. 철민은 닭을 안고 울었다⁠. 녹림에서 이자를 받아 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새 대방은 철민을 상회 전장 금고지기 견습으로 받았다⁠. 서랍을 여는 손은 서랍을 지키는 데 쓴다는 것이었다⁠. 철민은 첫날 금고 자물쇠 셋을 다 열어 보이고 나서 더 좋은 자물쇠를 사 오라고 했다⁠. 전장 행수들이 철민을 무서워했다⁠.

엽대호는 흑풍채 과부 넷의 이백 냥을 받아 움막에 나누어 주었다⁠. 지난가을 땔감 숲 비무에서 흑풍채가 이긴 일이 있어서⁠, 흑풍채도 세 해 동안 땔감 소출의 한 할을 내야 했다⁠. 대호는 무림맹이 보낸 고지서를 돋보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틀린 글자를 하나 찾아 붉은 먹으로 고친 다음 냈다⁠. 소출을 소줄로 적은 글자였다⁠. 대호는 고지서와 함께 서기에게 쪽지를 보냈다⁠. 「⁠무림맹이 받는 은에는 틀린 글자가 없어야 하오⁠.⁠」 서기는 대호의 쪽지를 받고 사흘 동안 붓을 바꿔 쥐었다고 했다⁠.

위시목은 화산으로 돌아갔다⁠. 늙은 제자 하나로⁠. 객잔을 떠나던 아침 대제자가 사부를 등에 업으려 했고⁠, 위시목은 화산 아래 마을까지는 걷겠다고 했다⁠. 사백열두 칸은 계단 앞에 가서 정하자고⁠.

나는 무림맹 총단 서기 곁에 작은 걸상을 놓았다⁠. 비무를 알리러 온 문파 사람이 걸상 앞에 앉으면⁠, 약관을 펴고 처음부터 읽었다⁠. 보험료⁠, 이백 냥⁠, 관인⁠, 그리고 거절 사유⁠. 일곱 줄을 다 읽고 나면 비무를 물리고 돌아가는 사람이 열에 셋이었다⁠. 서기가 비무를 걸러 온 문파보다 돌아가는 문파를 더 반겼다⁠. 나도 그랬다⁠. 돌아가는 사람의 손바닥을 볼 때마다 엽전 열 닢이 아깝지 않았다⁠.

첫날 걸상 앞에 앉은 사람은 숭산 문파 대표였다⁠. 지난가을 얻은 물길 아래의 물길을 두고 또 비무를 걸러 왔다고 했다⁠. 나는 약관을 펴고 처음부터 읽었다⁠. 숭산 대표는 다섯 번째 줄에서 하품을 했고⁠, 여섯 번째 줄에서 웃었고⁠, 일곱 번째 줄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다 읽고 나서 쉰 냥 이야기를 하자 숭산 대표는 손가락을 꼽았다⁠. 물길 소출 한 할⁠, 쉰 냥⁠, 반 할 이자⁠.

“⁠설계사⁠, 아니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하오⁠? 아무튼 물길은 내년에 다투겠소⁠.⁠”

“⁠내년에도 제가 여기서 읽어 드립니다⁠, 고객님⁠.⁠”

“⁠고객은 무슨⁠.⁠” 숭산 대표는 일어나다가 멈칫하더니 도로 앉았다⁠. “⁠그런데 아까 다섯 번째 줄 말이오⁠. 먼저 칼을 뽑은 다툼⁠. 그거 한 번만 더 읽어 주시오⁠. 우리 제자들이 하도 칼부터 뽑아서⁠.⁠”

나는 다섯 번째 줄을 한 번 더 읽었다⁠. 서기가 옆에서 엽전 열 닢을 세어 내 앞에 놓았다⁠. 한 번 더 읽은 몫은 쳐 주지 않았다⁠. 덤이었다⁠.

*

한 달 뒤⁠, 철쭉이 질 무렵 나는 화산 아래 마을에 닿았다⁠. 노새를 빌려 사흘 길을 왔다⁠. 허리의 주판 옆에 무명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한 달 동안 서기 곁에서 약관을 일흔두 번 읽었다⁠. 엽전 칠백스무 닢⁠. 은으로 바꾸니 세 냥이 조금 넘었다⁠.

엄순자의 나물 좌판은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 있었다⁠. 바구니에는 취나물과 고사리가 담겨 있었다⁠. 봄이 깊어 냉이는 들어갔다고 했다⁠. 엄순자는 손님에게 고사리 한 줌을 팔면서 덤을 얹고 있었다⁠. 이번에도 손님이 망설임을 다 끝내기 직전이었다⁠.

나는 좌판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엄순자가 나를 보았다⁠. 놀라지 않았다⁠. 손목에 붉은 실이 그대로 감겨 있었고⁠, 붉은 실 옆에 새 실 하나가 더 감겨 있었다⁠. 파란 실이었다⁠. 매듭이 하나 있었다⁠.

“⁠상회에서 먼저 보낸 은이에요⁠. 대방 양반 집 판 돈⁠.⁠” 엄순자가 파란 매듭을 만졌다⁠. “⁠사람이 직접 들고 왔어요⁠. 그 심사역이라는 사람이⁠. 찬 방에 산다던 사람이 해를 보니 얼굴이 하얗더라고요⁠.⁠”

나는 무명 주머니를 좌판 위에 내려놓았다⁠.

“⁠어머님⁠, 은 세 냥입니다⁠.⁠”

“⁠이건 무슨 돈이에요⁠?⁠”

“⁠무림맹 서기 옆에서 약관을 읽고 받은 품삯입니다⁠. 한 달에 일흔두 번 읽었습니다⁠. 일곱 번째 줄도 일흔두 번 읽었습니다⁠. 듣고 나서 비무를 물리고 돌아간 사람이 스물하나였습니다⁠.⁠”

엄순자는 주머니를 풀었다⁠. 은 세 냥과 엽전 몇 닢이 좌판 위로 굴렀다⁠. 엄순자는 은을 한 닢씩 손바닥에 올렸다⁠. 깨물어 보지 않았다⁠. 등잔에 비춰 보지도 않았다⁠. 손바닥 위의 은이 셋이 되자 손을 오므려 무게를 가늠했다⁠. 가벼웠다⁠. 예순 냥에 대면 손바닥도 꺾이지 않는 무게였다⁠.

엄순자는 허리춤에서 새 실을 꺼냈다⁠. 흰 실이었다⁠. 처음 매듭을 지었던 실과 같은 무명실이었다⁠. 엄순자는 흰 실에 아주 작은 매듭을 하나 지었다⁠. 열 냥 매듭보다 훨씬 작았다⁠.

“⁠쉰 냥이라고 했지요⁠.⁠”

“⁠예⁠.⁠”

“⁠이걸로는 열일곱 달쯤 걸리겠네요⁠.⁠”

“⁠예⁠. 열일곱 달 오겠습니다⁠.⁠”

“⁠노새 빌리는 값이 더 나오겠어요⁠.⁠” 엄순자는 흰 실을 손목에 감았다⁠. 붉은 실⁠, 파란 실⁠, 흰 실⁠. 세 가닥이 나란히 손목을 돌았다⁠. “⁠이건 설계사 양반 손에서 난 돈이네요⁠. 받을게요⁠.⁠”

엄순자는 고사리 한 줌을 종이에 싸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데쳐서 들기름에 볶아 먹으라고 했다⁠. 엄순자는 누구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설계사 양반⁠, 밥은 먹었어요⁠?⁠”

“⁠아니요⁠. 아직 안 먹었습니다⁠.⁠”

엄순자가 처음으로 웃었다⁠. 작게⁠, 입꼬리만⁠.

“⁠거짓말 안 하네⁠.⁠”

*

엄순자는 좌판을 거두고 바구니를 이었다⁠. 산문 옆 사당에 두열의 위패가 돌아와 있다고 했다⁠. 위시목이 늙은 제자 걸음으로 이고 올라갔다고 했다⁠. 대제자가 업겠다는 것을 물리고⁠, 사백열두 칸을 쉬어 가며 혼자 올랐다고⁠.

우리는 같이 돌계단을 올랐다⁠. 엄순자가 앞서고 내가 뒤를 따랐다⁠. 엄순자의 걸음은 느리지 않았다⁠. 평생 산을 오르내린 걸음이었다⁠. 나는 숨이 찼다⁠. 철민이 사백 칸 넘었다고 헐떡이던 계단참의 돌확에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지나가며 물에 얼굴이 비쳤다⁠. 반쯤 올려 묶은 머리에 붓은 꽂혀 있지 않았다⁠. 판촉용 붓은 다 상회에 두고 왔고⁠, 마지막 하나는 북망산 움막의 아이가 가져갔다⁠. 눈꼬리 올라간 눈은 그대로 웃고 있었다⁠. 웃는 눈이 이번에는 원망스럽지 않았다⁠.

산문이 가까워지자 위에서 목검 소리가 들렸다⁠. 화산 제자들이 마당에서 검법을 익히고 있었다⁠. 젓가락 대신 목검이었다⁠. 산문 문턱에 흰 도포를 입은 늙은 제자가 앉아 있었다⁠. 위시목은 우리를 보고 일어나려다 말고 그대로 앉아 손을 들었다⁠. 검은 허리에 없었다⁠.

엄순자가 계단 끝에서 멈추고 돌아보았다⁠. 아래로 돌계단이 길게 내려가고 있었다⁠. 마을과 느티나무와 약초밭이 작게 보였다⁠. 흑풍채가 걸어 왔던 약초밭은 화산 것으로 남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약초밭의 약초로 겨울 약을 짓는다고 했다⁠.

엄순자가 손목의 실 세 가닥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나는 마지막 돌계단에 발을 올렸다⁠. 허리의 주판이 흔들려 알이 차르륵 내려앉았다⁠. 산문 옆 진달래는 다 지고⁠, 철쭉 꽃잎 하나가 엄순자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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