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17자)

한 줄도 접지 않고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보험을 팔기 전에⁠, 약관부터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엄순자 곁의 대제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제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곽두열의 약관 사본이었다⁠. 화산 제자 방 선반에서 두 달 동안 볕을 받아 누렇게 바랬고⁠, 끝자락 손바닥 한 뼘만 하얀 종이⁠. 위시목이 상회 대문 계단에 펼쳤던 사본을 화산은 지금까지 품고 다녔다⁠.

나는 두루마리를 대청 돌바닥에 펼쳤다⁠. 향로 앞에서 시작해 단 아래까지 종이가 굴러갔다⁠. 정월의 화산 산문 돌계단처럼⁠. 끝자락이 위시목이 내려놓은 검의 칼집에 닿아 멈췄다⁠.

“⁠만세상회 목숨 보험⁠. 철마다 은 두 냥을 낸다⁠. 가입한 사람이 죽은 날⁠, 식구에게 은 이백 냥을 준다⁠.⁠”

나는 처음 줄부터 읽었다⁠. 천천히 읽었다⁠. 정월에는 이 줄을 노래하듯 읽었다⁠. 좋은 말이라서⁠. 오늘은 노래하지 않았다⁠. 대청의 정사 문파 대표들이 지루한 얼굴을 했다⁠. 다 아는 말이었다⁠.

“⁠보험료는 설계사가 가입한 사람의 손을 보고 매긴다⁠. 계약마다 낙양 관아의 관인을 찍고⁠, 관아가 세금을 걷는다⁠.⁠”

기둥 뒤의 관아 아전이 헛기침을 했다⁠. 구경꾼 몇이 아전을 돌아보았다⁠.

“⁠청구가 들어오면 상회 심사방이 몸과 손을 보고 지급과 거절을 정한다⁠. 거절하는 까닭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 나는 숨을 한 번 쉬었다⁠. 정월에는 여기서부터 빨라졌다⁠. 교본대로⁠, 물으면 빨리 읽을 것⁠.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나는 빨라졌었다⁠. 오늘은 숨을 쉬고 나서 더 천천히 읽었다⁠.

“⁠거절 사유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

대청이 조용했다⁠.

“⁠둘⁠. 내공을 닦다 기운이 거꾸로 흘러 몸이 상한 일⁠. 주화입마⁠.⁠”

정파 의자의 늙은 도사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 의자의 누군가가 작게 말했다⁠. 그건 정파가 더 많이 걸리지⁠. 정파 의자에서 누군가 받았다⁠. 사파는 내공이 없어서 안 걸리는 거고⁠. 집법당주가 단 위에서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두 줄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셋⁠. 가입하기 전에 이미 입은 상처⁠.⁠”

위시목이 정파 의자 끝에서 눈을 감았다⁠. 우물가의 두레박에서 풀리던 붉은 실을 나는 떠올렸다⁠.

“⁠넷⁠. 관부에 붙잡혀 처형된 일⁠.⁠”

기둥 뒤의 아전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철민이 닭 바구니 뒤로 몸을 낮췄다⁠.

“⁠다섯⁠. 가입한 사람이 먼저 칼을 뽑아 생긴 다툼에서 다치거나 죽은 일⁠.⁠”

정월 화산 산문에서 이 줄을 크게 외쳤다⁠. 서른 개의 칼이 반쯤 뽑힌 채 멈췄다⁠. 오늘 대청에서 이 줄을 읽자 표국 행수가 제 칼 손잡이에서 슬그머니 손을 뗐다⁠.

“⁠여섯⁠. 술에 취해 다친 일⁠.⁠”

사파 의자에서 한꺼번에 신음이 터졌다⁠. 흑풍채 졸개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북망산 산채에서 내가 이 줄로 철민을 구해 낸 것을 기억하는 얼굴들이었다⁠. 엽대호가 돋보기를 내리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대청에 웃음이 퍼졌다⁠. 짧게⁠.

나는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하얀 끝자락이 내 발 앞에 있었다⁠. 두 달 동안 볕을 보지 못한 종이⁠. 위아래로 접힌 금이 곧게 나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하얀 자리를 펴서 눌렀다⁠. 엄지가 금 위에 닿았다⁠. 정월에 이 자리를 누르던 엄지였다⁠. 오늘은 누르지 않고 폈다⁠.

엄순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순자는 손목의 붉은 실을 만지던 손을 멈추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엄순자를 보며 읽었다⁠. 대청이 아니라 엄순자에게⁠.

“⁠일곱⁠. 비무 중 사고는 지급하지 않는다⁠.⁠”

대청이 숨을 죽였다⁠. 닭도 울지 않았다⁠.

“⁠어머님⁠, 이게 접었던 줄입니다⁠. 두열 고객님은 이 줄을 듣지 못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제가 읽지 않았습니다⁠.⁠”

엄순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 나를 보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다는 끄덕임이었다⁠. 용서는 아니었다⁠. 나는 두 끄덕임이 어떻게 다른지 알았다⁠. 손님이 고개를 끄덕일 때 어느 끄덕임이 도장으로 가는지⁠, 열다섯 해 동안 손바닥보다 먼저 눈으로 알았다⁠.

*

나는 일어나 집법당주를 향했다⁠. 향이 반쯤 남아 있었다⁠.

“⁠집법당주⁠, 아까 앞줄도 뒷줄도 제 엄지냐고 물으셨지요⁠. 지금 대답하겠습니다⁠. 엄지는 제 것이고⁠, 앞줄은 맞습니다⁠. 화산에서 약관을 접은 것은 저 혼자입니다⁠. 뒷줄은 틀립니다⁠.⁠”

상회 자리의 표국 행수가 벌떡 일어났다⁠. 심제원이 손을 들어 앉혔다⁠.

“⁠상회 보험방에는 판매 교본이 있습니다⁠. 견습이 첫날 외우는 책입니다⁠. 거기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거절 사유는 손님이 묻기 전에 먼저 꺼내지 말 것⁠. 물으면 빨리 읽을 것⁠. 대방님 글씨입니다⁠. 저는 그 책을 외웠고⁠, 외운 데서 한 걸음 더 나가 접었습니다⁠. 상회가 접으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빨리 읽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한 걸음은 제 죄고⁠, 그 앞의 걸음들은 상회의 것입니다⁠.⁠”

“⁠자백서에는 엄지를 찍지 않았소⁠?⁠” 집법당주가 물었다⁠.

“⁠찍었습니다⁠. 견습 하나가 관아 옥에 있었습니다⁠. 대방님이 엄지를 찍으면 꺼내 준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꺼내려고 찍었습니다⁠. 뒷줄이 틀린 줄 알면서 찍었습니다⁠.⁠”

대청이 다시 술렁였다⁠. 기둥 뒤의 관아 아전이 구경꾼들 틈의 철민을 찾았다⁠. 철민이 닭 바구니를 머리 위로 들어 얼굴을 가렸다⁠. 바구니 안에서 닭 두 마리가 동시에 울었다⁠. 아전이 바구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전⁠.⁠”

심제원이었다⁠. 상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했다⁠.

“⁠녹림 졸개는 상회 일이오⁠. 상회가 풀어 달라 했으니 그만이오⁠. 대방이 한 번 한 부탁은 한 번이오⁠.⁠”

아전은 걸음을 멈추고 심제원을 보았다가⁠, 기둥 뒤로 돌아갔다⁠. 남시 세금의 절반이었다⁠. 철민이 바구니를 내리고 심제원을 쳐다보았다⁠. 무슨 얼굴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집법당주가 상회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대방⁠, 그런 책이 있소⁠?⁠”

심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집법당주의 눈이 심제원 왼쪽으로 옮겨 갔다⁠.

“⁠검시인⁠. 상회 사람이니 알 것이오⁠. 그런 책이 있소⁠?⁠”

노영필이 일어났다⁠. 소매를 걷지도 내리지도 않았다⁠. 손바닥을 바지에 한 번 문질렀다⁠. 노영필이 산 사람 앞에서 그렇게 머뭇거리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노영필은 심제원의 뒷모습을 보았다⁠. 전쟁 뒤에 갈 데 없는 노영필을 찾아온 사람의 등이었다⁠.

“⁠있소⁠.⁠” 노영필이 말했다⁠. “⁠대방 품에 있소⁠.⁠”

*

심제원은 천천히 일어났다⁠. 겉옷 안에 손을 넣어 얇은 책 한 권을 꺼냈다⁠. 누렇게 바랜 표지⁠. 서재 두 번째 서랍⁠, 철민의 오른손⁠, 등불 아래 마당⁠. 심제원은 책을 서기에게 건네지 않았다⁠. 제 손으로 첫 장을 펼쳤다⁠.

“⁠제가 읽겠습니다⁠.⁠”

심제원은 첫 장을 들고 대청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내 걸상 옆⁠, 곽두열의 약관 사본이 펼쳐진 돌바닥 옆이었다⁠. 심제원의 목소리는 숫자를 말할 때처럼 빨라지지 않았다⁠.

“⁠만세상회 보험방 판매 교본⁠. 첫째⁠, 거절 사유는 손님이 묻기 전에 먼저 다 읽어 준다⁠.⁠” 심제원은 잠깐 멈췄다⁠. “⁠이 줄에는 먹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화약 이듬해⁠, 비무 청구가 처음 들어온 달에 제가 그었습니다⁠. 옆에 새로 썼습니다⁠. 거절 사유는 손님이 묻기 전에 먼저 꺼내지 말 것⁠. 물으면 빨리 읽을 것⁠.⁠”

심제원은 책을 덮었다⁠. 대청을 둘러보았다⁠. 정파 의자⁠, 사파 의자⁠, 마흔세 집⁠, 피고석⁠, 기둥 사이의 구경꾼들⁠.

“⁠내가 썼소⁠. 둘 다⁠.⁠”

대청은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 줄대로 해 보았소⁠. 보험방을 연 첫해에 설계사들이 거절 사유를 먼저 다 읽어 주었소⁠. 화약 이듬해 비무가 늘었고⁠, 일곱 번째 줄을 넣었소⁠. 그 줄을 먼저 읽어 주자 무인들이 다 일어나 나갔소⁠. 비무에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안 샀소⁠. 표사도 뱃사공도 장사꾼도⁠, 저 줄이 자기한테도 올까 봐 안 샀소⁠. 석 달 동안 새 가입자가 열둘이었소⁠. 은고는 줄고 있었고⁠.⁠” 심제원이 말했다⁠. “⁠그래서 줄을 그었소⁠. 먹줄 하나로 가입자가 천이 되었고⁠, 아흔 집이 은을 받았소⁠.⁠”

“⁠그리고 마흔세 집이 못 받았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래⁠. 다 읽어 주면 아무도 안 산다⁠. 아무도 안 사면 아무도 못 받는다⁠. 설화야⁠, 너는 오늘 줄을 다 읽어 줬다⁠. 이 대청에 지금 보험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냐⁠?⁠”

심제원이 대청을 향해 팔을 벌렸다⁠. 정사 문파 대표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구경꾼들도 들지 않았다⁠. 일곱 줄을 다 들은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엽대호만 돋보기를 쥔 손을 반쯤 들었다가 내렸다⁠. 대호는 이미 든 사람이었다⁠.

내 무릎이 다시 떨렸다⁠. 심제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대청이 그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다 읽어 주니 아무도 사지 않았다⁠.

집법당주가 단 위에서 말했다⁠. 향이 거의 다 탔다⁠.

“⁠양쪽 다 옳은 말을 하는구려⁠. 다 주면 다 망하고⁠, 안 주면 화약이 과부한테서 원수와 은을 둘 다 가져가오⁠.⁠” 집법당주는 흰 수염을 쓸었다⁠. “⁠무림맹은 둘 중 무엇을 골라도 화약이 흔들리오⁠.⁠”

정파 의자에서 숭산 문파 대표가 일어났다⁠. 지난가을 물길 비무에서 이긴 문파였다⁠.

“⁠집법당주⁠, 비무는 화약이 정한 길이오⁠. 이긴 문파가 땅을 가지고⁠, 진 문파가 물러나오⁠. 과부의 은은 진 문파가 챙길 일이지⁠, 상회가 챙길 일도 무림맹이 챙길 일도 아니오⁠.⁠”

사파 의자에서 늙은 사파 문주 하나가 받았다⁠. 지난겨울 나루 비무에서 진 문파였다⁠. “⁠진 문파는 땅도 잃고 사람도 잃었는데 은까지 내라고⁠? 이긴 문파는 땅을 얻었는데 아무것도 안 내고⁠?⁠”

“⁠비무에 지면 그런 것이오⁠.⁠”

“⁠그러니 비무가 전쟁이랑 뭐가 다르오⁠? 칼싸움 대신 줄 친 데서 칼싸움 하는 것뿐이지⁠!⁠”

두 대표가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정사 의자가 함께 들썩였다⁠. 화약을 찍은 대청에서 정파와 사파가 다시 맞서고 있었다⁠. 집법당주가 손가락 하나를 들자 두 대표가 입을 다물었지만⁠, 앉지는 않았다⁠. 둘 다 서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긴 문파와 진 문파가⁠, 같은 줄 하나를 두고 다르게 읽고 있었다⁠.

*

향이 꺼졌다⁠. 서기가 새 향을 꺼내려 하자 심제원이 손을 들었다⁠.

“⁠집법당주⁠,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향은 필요 없습니다⁠. 짧습니다⁠.⁠”

심제원은 마흔세 집 앞으로 걸어갔다⁠. 엄순자 앞에 멈췄다⁠. 무릎을 굽혀 엄순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배가 나온 몸이 굽히기 힘들어 보였다⁠.

“⁠어르신⁠. 남시에 내 집이 있소⁠. 팔면 이백 냥은 넘소⁠. 상회 은고가 아니라 내 집이오⁠. 두열 공의 은은 내 손으로 드리겠소⁠. 어르신 몫 이백 냥⁠, 내일이라도⁠.⁠”

마흔세 집이 술렁였다⁠. 과부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숭산의 과부가 무언가 말하려다 멈췄다⁠.

“⁠대신 일곱 번째 줄은 두게 해 주시오⁠. 천 명을 위해서⁠. 어르신이 오늘 청원을 물리시면⁠, 나머지 마흔두 집의 청원도 대표를 잃소⁠.⁠” 심제원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대청 전체에 들리게 말했다⁠. “⁠나는 어르신을 속이지 않겠소⁠. 이건 거래요⁠. 어르신 한 집을 사서 마흔두 집을 돌려보내는 거래⁠.⁠”

엄순자는 심제원을 보았다⁠. 손목의 붉은 실을 만졌다⁠. 대청의 모든 눈이 엄순자의 손으로 갔다⁠. 나도 보았다⁠. 거칠고 갈라진 손⁠, 바구니 손잡이 자국이 굳은살로 박힌 손바닥⁠. 평생 무언가를 뜯고 이고 나른 손이⁠, 이번에는 이백 냥과 마흔두 집 사이에 놓여 있었다⁠.

엄순자가 입을 열었다⁠.

“⁠대방 양반⁠, 그 이백 냥은 어디서 나는 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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