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71자)

무림맹 대청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무림맹 총단은 낙양 서쪽 성문 밖⁠, 낙수가 굽어 도는 언덕 위에 있었다⁠. 대청은 기둥이 마흔 개였다⁠. 정사 대전이 끝나던 해 정파와 사파의 문파 대표들이 이 대청에서 화약에 도장을 찍었다⁠. 도장 찍던 날의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왼편 긴 의자들은 정파⁠, 오른편 긴 의자들은 사파⁠. 가운데 높은 단 위에 집법당주의 자리가 있었고⁠, 단 아래 돌바닥에 향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월 초하루 아침⁠, 대청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정파와 사파의 문파 대표들이 제 자리에 앉았고⁠, 둘레의 기둥 사이로 구경꾼들이 빼곡했다⁠. 낙양 관아에서도 아전 하나가 나와 기둥 뒤에 서 있었다⁠. 상회가 문을 닫으면 남시 세금이 반으로 준다는 것을⁠, 관아는 누구보다 먼저 계산했다⁠.

향로 왼편에 마흔세 집이 앉았다⁠. 정파 과부와 사파 과부가 이번에는 우물 없이 한 줄로 섞여 앉았다⁠. 맨 앞자리에 엄순자가 있었다⁠. 손목에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 엄순자 곁에 화산 대제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종이를 들고 있었다⁠. 엄순자 대신 글을 읽어 줄 사람이었다⁠. 마흔세 집 끝자리에 엽대호가 앉았다⁠. 흰 무명옷에 돋보기를 쥐고 있었다⁠.

향로 오른편에 상회가 앉았다⁠. 심제원이 가운데⁠, 왼쪽에 노영필⁠, 오른쪽에 표국 행수⁠. 표국 행수 무릎 위에 두꺼운 종이 뭉치가 있었다⁠. 일곱 번째 줄을 지키자는 가입자 청원이었다⁠.

나는 향로 앞 한가운데의 작은 걸상에 앉아 있었다⁠. 무림맹 서기가 나를 데려와 거기 앉혔다⁠. 피고석이었다⁠. 화산에 약관을 접어 판 사람⁠, 상회의 자백서에 엄지를 찍은 사람⁠. 양쪽 어디에도 앉을 자리가 없어서 한가운데에 놓였다⁠.

철민은 구경꾼들 틈에서 대바구니를 안고 있었다⁠. 바구니에 닭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낙수 나루 과부에게 줄 닭이었는데⁠, 재판 끝나고 바로 갖다주겠다고 들고 온 것이었다⁠. 대청이 조용해질 때마다 닭이 꼬꼬댁 울었다⁠. 철민이 바구니를 끌어안고 닭 머리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

집법당주가 단 위에 앉았다⁠. 서기가 향통에서 향 한 대를 꺼내 향로에 꽂았다⁠.

“⁠상회부터 하시오⁠. 향 한 대요⁠.⁠”

심제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두를 쥐지 않은 빈손이었다⁠. 대청 가운데로 나와 단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이어서 왼편의 마흔세 집을 향해서도 허리를 굽혔다⁠. 엄순자 앞에서 한 번 더 굽혔다⁠. 엄순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집법당주⁠, 그리고 정사 문파 대표 여러분⁠. 상회가 드릴 말씀은 숫자입니다⁠.⁠” 심제원의 목소리는 느렸고⁠, 숫자에 닿을 때만 빨라졌다⁠. “⁠만세상회 보험방의 가입자는 천스무 명입니다⁠. 보험방 은고의 은은 큰 청구 서른 건을 갚을 만큼입니다⁠. 오늘 일곱 번째 줄이 깨지면⁠, 마흔세 집에 이백 냥씩 팔천육백 냥을 갚아야 합니다⁠. 은고는 그만한 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상회는 보험방 문을 닫고⁠, 남은 은을 천스무 명에게 두 냥씩 나눠 드리고 끝납니다⁠.⁠”

대청이 술렁였다⁠. 정파 의자의 숭산 문파 대표가 옆 사람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그리고 내일부터 강호에는 보험이 없습니다⁠. 표국 길에서 죽은 표사의 식구도⁠, 나루에서 빠져 죽은 뱃사공의 식구도⁠, 장터에서 칼에 맞은 장사꾼의 식구도 한 푼을 못 받습니다⁠. 대전 때 그랬듯이⁠.⁠”

심제원은 표국 행수에게서 종이 뭉치를 받아 단 아래에 내려놓았다⁠.

“⁠살아 있는 가입자 삼백열두 명이 일곱 번째 줄을 지켜 달라고 엄지를 찍었습니다⁠. 낙양에 사는 가입자는 거의 다입니다⁠.⁠”

이어서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은고에서⁠, 찬 방 앞 마당에서⁠, 해 질 녘 안쪽 방에서 내가 본 종이였다⁠. 붉은 지문이 등잔 대신 대청 창으로 든 햇빛에 비쳤다⁠.

“⁠화산파 계약에서 거절 사유가 숨겨진 것은 설계사 한 사람의 잘못입니다⁠. 설계사가 스스로 자백했습니다⁠. 상회는 다른 가입자 천여 명에게 약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 드렸습니다⁠. 일곱 번째 줄은 모두가 보고 도장을 찍은 줄입니다⁠. 마흔세 집 어른들의 약관도 접힌 데가 없습니다⁠.⁠”

심제원은 자백서를 단 위의 서기에게 건넸다⁠. 서기가 집법당주 앞에 펼쳤다⁠. 집법당주가 지문을 오래 보았다⁠.

“⁠마흔세 집이 딱하다는 것을 상회도 압니다⁠. 저도 대전에서 아들을 잃었습니다⁠. 며느리가 손주를 업고 국수를 팔았습니다⁠. 그래서 이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다 주려고 만들었는데⁠, 다 주면 다 못 줍니다⁠. 상회가 하나를 안 주는 것은 천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향이 다 탔다⁠. 심제원은 한 번 더 허리를 굽히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파 의자에서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 의자에서도 몇이 끄덕였다⁠. 비무를 걸어서 이긴 문파들이었다⁠. 이긴 문파는 과부를 남기지 않는다⁠.

집법당주가 단 위에서 손을 들었다⁠. 향이 꺼진 뒤였지만 서기는 새 향을 꽂지 않았다⁠. 집법당주가 묻는 말은 향 밖이었다⁠.

“⁠대방⁠, 은고의 은을 무림맹 서기가 세어 보아도 되겠소⁠?⁠”

“⁠언제든지 오십시오⁠. 시렁 세 줄 가운데 두 줄은 먼지만 셉니다⁠.⁠”

“⁠검시인⁠.⁠” 집법당주가 노영필을 보았다⁠. “⁠곽두열이 비무 중에 죽었소⁠?⁠”

노영필이 일어났다⁠. 소매를 걷어붙인 채였다⁠.

“⁠비무 이틀 뒤에 숨이 끊어졌소⁠. 가슴의 상처는 비무에서 입었소⁠.⁠”

“⁠그대 서류에는 비무 중 사고라 적혀 있소⁠.⁠”

“⁠상처는 비무 중이오⁠. 숨은 이틀 뒤요⁠. 약관은 둘 가운데 무엇을 말하는지 적지 않았소⁠. 나는 상처를 보고 적었소⁠.⁠” 노영필은 잠깐 말을 멈췄다⁠. “⁠심사역이 서류를 쓸 때는 대방이 정한 대로 읽소⁠. 대방은 상처를 보라고 했소⁠.⁠”

심제원이 노영필을 돌아보았다⁠. 노영필은 심제원을 보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처음으로⁠, 심사방 찬 방 밖에서 대방이 정한 것을 대방이 정했다고 말했다⁠. 상회 자리의 표국 행수가 노영필을 노려보았고⁠, 노영필은 소매를 내렸다⁠.

*

서기가 새 향을 꽂았다⁠. 왼편 차례였다⁠.

엄순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앉은 채로 대제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제자가 종이를 펴고 읽었다⁠. 엄순자가 지난밤 말하고 대제자가 받아 적은 것이었다⁠.

“⁠화산 아래 마을 엄순자입니다⁠. 저는 글을 모릅니다⁠.⁠”

대제자의 목소리가 대청에 퍼졌다⁠. 기둥 사이의 구경꾼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우리 애가 종이를 받아 왔을 때 저는 읽지 못했습니다⁠. 그 애가 읽어 줬습니다⁠. 은이 이백 냥 나온다고⁠. 종이에 무슨 줄이 있는지 그 애도 몰랐고 저도 몰랐습니다⁠. 저는 글을 몰라서 종이를 믿었습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써 준 종이니까요⁠.⁠”

대제자가 종이를 넘겼다⁠. 엄순자는 손목의 붉은 실을 만지고 있었다⁠.

“⁠여기 마흔세 집 가운데 글을 아는 집이 몇인지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글을 아는 집도 종이를 믿었습니다⁠. 남편이 비무장에 나갈 때 종이가 있으니 괜찮다고 했답니다⁠. 아무도 비무에서 죽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아니⁠, 알았는데도 종이가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으니까요⁠.⁠”

대제자는 거기서 읽기를 멈췄다⁠. 종이가 끝났다⁠. 엄순자가 고개를 들어 단 위의 집법당주를 보았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제 입으로 말했다⁠.

“⁠우리 애 목숨이 은 이백 냥은 아니에요⁠. 그래도 종이에 이백 냥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향이 반쯤 남았다⁠. 엽대호가 일어나 돋보기를 들었다⁠. 사파 과부 스물셋의 청구서와 거절 서류를 한 장씩 소리 내어 읽었다⁠. 이름⁠, 비무⁠, 날짜⁠, 거절 사유⁠. 일곱 번째 줄이 스물세 번 대청에 울렸다⁠. 대호는 정파 과부 스물의 것도 읽었다⁠. 정파 의자에서 누가 사파 채주가 왜 정파 것까지 읽느냐고 소리쳤고⁠, 대호는 돋보기를 내리지 않고 대답했다⁠.

“⁠같은 줄로 거절당했으니 같이 읽소⁠.⁠”

일곱 번째 줄이 마흔세 번째로 울릴 때 향이 다 탔다⁠.

*

서기가 다음 향을 꺼내려 할 때⁠, 정파 의자 끝에서 누군가 일어났다⁠. 위시목이었다⁠. 장문인 자리가 아니라 맨 끝 의자에 앉아 있었다⁠. 흰 도포 앞섶에 빨아도 빠지지 않은 얼룩이 그대로였다⁠.

“⁠집법당주⁠, 차례가 아니지만 말하겠소⁠.⁠”

집법당주가 위시목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서기에게 손짓했다⁠. 서기가 향 한 대를 꽂았다⁠.

위시목은 대청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허리의 검을 풀어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단 아래 돌바닥에 내려놓았다⁠. 칼집에서 검이 한 마디도 나와 있지 않았다⁠.

“⁠이월 그믐 흑풍채의 비무는 나에게 걸려 온 것이었소⁠. 나는 대전 때 입은 내상으로 반 시진을 버티지 못하오⁠. 그래서 삼대 제자 곽두열을 내보냈소⁠. 두열이가 자청했고⁠, 내가 허락했소⁠. 장문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제자는 비무장에 못 서오⁠. 광장에서 이미 말했지만 무림맹 앞에서 다시 말하오⁠. 두열이를 비무장에 세운 사람은 나 위시목이오⁠.⁠”

정파 의자가 술렁였다⁠. 화산 장문인이 무림맹 대청에서 자기 죄를 말한 것은 화약 다섯 해 동안 처음이었다⁠.

“⁠화산 장문인 자리는 내려놓겠소⁠. 오늘부터 나는 화산의 늙은 제자 하나일 뿐이오⁠.⁠” 위시목이 상회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대방⁠, 하나는 말해야겠소⁠. 두열이 손에 칼을 쥐여 준 사람은 나요⁠. 두열이 손에 종이를 쥐여 준 사람은 설계사요⁠. 그런데 그 종이를 만든 사람은 대방이오⁠. 칼은 내가 책임지겠소⁠. 종이는 누가 책임지오⁠?⁠”

대청의 눈이 심제원에게 몰렸다⁠. 심제원은 앉은 채로 위시목을 보았다⁠. 오래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장문인⁠, 그 종이 덕에 다섯 해 동안 표국 길에서 죽은 표사의 식구 아흔 집이 이백 냥씩 받았소⁠. 나루에서⁠, 장터에서⁠, 산길에서 죽은 사람의 식구가 아흔 집이오⁠. 대전 때는 한 집도 못 받았소⁠. 종이는 내가 책임지오⁠. 아흔 집을 먹인 것도 그 종이고⁠, 마흔세 집을 돌려보낸 것도 그 종이오⁠. 둘 다 내가 지오⁠.⁠”

위시목은 더 말하지 않았다⁠. 바닥에 내려놓은 검을 두고 정파 의자 끝으로 돌아갔다⁠. 검은 대청 한가운데에 남았다⁠. 내 걸상 바로 앞이었다⁠. 칼집의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다섯 해 동안 반쯤 뽑혔다 들어가기를 되풀이한 자리였다⁠.

향이 다 탔다⁠. 대청이 조용했다⁠. 철민의 바구니에서 닭이 한 번 울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

집법당주가 단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서기에게 손짓했다⁠. 서기가 향 한 대를 꺼내 내 걸상 앞 향로에 꽂고 불을 붙였다⁠.

“⁠피고 모설화⁠. 자백서가 그대 엄지요⁠?⁠”

“⁠예⁠.⁠”

“⁠앞줄도 뒷줄도⁠?⁠”

대청의 숨이 멎었다⁠. 심제원이 상회 자리에서 나를 보았다⁠. 노영필이 소매를 걷었다가 다시 내렸다⁠. 엄순자는 나를 보지 않았다⁠. 손목의 붉은 실만 만지고 있었다⁠.

“⁠엄지는 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집법당주의 흰 눈썹이 움직였다⁠. 대답이 아니라 대답을 비켜 간 말이라는 것을⁠, 대청의 모두가 알았다⁠. 집법당주는 나무라지 않았다⁠.

“⁠향 하나 탈 동안 말하시오⁠. 무엇이든⁠.⁠”

나는 걸상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떨렸다⁠. 허리의 주판을 풀어 두 손에 쥐었다⁠. 열네 살에 첫 품삯으로 산 주판이었다⁠. 알 하나가 이가 빠져 있었다⁠. 대청 창으로 든 햇빛이 주판 알 위에서 굴렀다⁠. 나는 열다섯 해 동안 손님 앞에서 하던 대로 한 음 높여 말했다⁠.

“⁠집법당주⁠, 그리고 정사 문파 대표 고객님들⁠.⁠”

대청에서 누가 픽 웃었다⁠. 고객님이라는 말을 무림맹 대청에서 들은 사람은 없었다⁠.

“⁠오늘 저는 보험을 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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