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98자)

돌아온 은

무림 보험설계사 · 기담오

관아 옥은 남시 북쪽 끝 돌담 안에 있었다⁠. 새벽에 옥졸에게 은 한 푼을 쥐여 주자 창살 앞까지 들어가게 해 주었다⁠. 옥 안은 찬 방보다 냄새가 고약했고⁠, 찬 방보다 시끄러웠다⁠.

철민은 옥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둘레에 사내 대여섯이 쪼그리고 앉아 철민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다들 얼굴에 산이 묻어 있었다⁠. 녹림이었다⁠.

“⁠그러니까 형님들⁠, 옥에서 나갈 때까지 안 죽으면 제가 떡을 사 드리는 거예요⁠. 흰 떡 하나⁠. 대신 지금 밥 한 숟가락씩만 저 주시면 돼요⁠. 그게 보험료예요⁠.⁠”

“⁠죽으면⁠?⁠”

“⁠죽으면 떡 못 드시죠⁠.⁠”

“⁠그럼 우리만 손해잖아⁠.⁠”

“⁠그러니까 안 죽으시면 되잖아요⁠. 안 죽는 게 제일 남는 장사예요⁠.⁠”

사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 얼굴을 보았다⁠. 하나가 밥그릇의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철민에게 건넸다⁠. 두 번째⁠, 세 번째 사내가 따라 건넸다⁠. 철민은 숟가락을 받아먹다가 창살 밖의 나를 보았다⁠. 눈이 커졌다⁠.

“⁠누님⁠!⁠”

철민이 창살로 기어 왔다⁠. 이마에 멍이 하나 들어 있었다⁠. 오른 손목에 오랏줄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맞았어⁠?⁠”

“⁠아니요⁠, 이건 어제 서재 서랍 모서리에 박은 거예요⁠. 녹림 형님들은 착해요⁠. 다들 아는 얼굴이에요⁠. 저 흑풍채에 있을 때 같이 굶었던 형님들이라⁠.⁠” 철민이 목소리를 낮췄다⁠. “⁠누님⁠, 저 보험 팔았어요⁠. 다섯 건이요⁠. 상회 없이도 팔리네요⁠.⁠”

“⁠떡 보험을 누가 팔래⁠?⁠”

“⁠누님한테 배운 대로 했어요⁠. 끝까지 읽어 줬어요⁠. 죽으면 못 받는다는 것도요⁠.⁠” 철민이 웃었다⁠. 이마의 멍이 같이 일그러졌다⁠. “⁠형님들이 그러는데⁠, 끝까지 들으니까 오히려 믿음이 간대요⁠.⁠”

나는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 철민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끝이 차고⁠, 손바닥 아래쪽 굳은살이 거칠었다⁠. 담장 기와를 짚던 자리가 이번에는 서재 서랍 손잡이를 쥐었다⁠.

“⁠사또는 해 질 녘에 옥을 돈대⁠.⁠”

“⁠알아요⁠. 대방이 부탁하면 나간다면서요⁠.⁠” 철민이 내 손을 쥐었다⁠. “⁠누님⁠, 그거 하지 마요⁠. 무슨 종이인지 저 몰라도 알아요⁠. 대방이 누님한테 엄지 내놓으라고 하는 종이잖아요⁠.⁠”

“⁠너는 신경 쓰지 마⁠.⁠”

“⁠저는 녹림이에요⁠. 옥은 고향 같은 데예요⁠.⁠” 철민이 창살에서 손을 뺐다⁠. “⁠닭 다섯 마리요⁠, 누님⁠. 재판에서 이기면요⁠. 그거나 잊지 마요⁠.⁠”

*

해가 높이 올랐을 때 청송객잔 앞마당에 엽대호가 들어왔다⁠. 혼자였다⁠. 검은 장포 대신 흰 무명옷을 입었고⁠, 등에 칼이 없었다⁠. 졸개 대신 제 어깨에 쌀 한 가마를 지고 있었다⁠. 마당의 화산 제자 열여덟이 대호를 보고 일어났다⁠. 손이 칼집으로 갔다가 멈췄다⁠. 대호가 칼을 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순자는 뒤채 툇마루에서 냉이를 다듬고 있었다⁠. 대호는 쌀가마를 툇마루 아래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큰 덩치가 접히는 데 한참이 들었다⁠.

“⁠흑풍채 엽대호요⁠. 이월 그믐 비무에서 곽두열을 친 사람이오⁠.⁠”

엄순자는 냉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시든 잎을 하나 떼어 바구니 밖으로 던졌다⁠.

“⁠광장에서 봤어요⁠. 그 덩치를 어떻게 잊어요⁠?⁠”

“⁠조문이 늦었소⁠. 이레째에 졸개 편에 보낸 것은 조문이 아니었소⁠. 사람이 와야 조문이오⁠.⁠” 대호는 고개를 숙였다⁠. “⁠화약대로라면 어르신은 내 원수를 못 갚소⁠. 그래도 원수가 누군지는 아셔야 하오⁠. 내가 그 원수요⁠.⁠”

엄순자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냉이 한 줌을 다 다듬고 나서야 손을 털었다⁠.

“⁠채주님이 우리 애를 쳤어요⁠?⁠”

“⁠그렇소⁠.⁠”

“⁠우리 애가 물러서지 않았다면서요⁠.⁠”

“⁠그렇소⁠. 내 칼에 몸을 밀어 넣었소⁠.⁠”

“⁠그 애가 그런 애예요⁠. 신발도 가지런히 벗는 애가⁠,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지를 못해⁠.⁠” 엄순자가 쌀가마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가져가요⁠. 우리 애 목숨 대신 받는 쌀은 안 먹어요⁠.⁠”

“⁠목숨 대신이 아니오⁠. 그냥 쌀이오⁠. 쌀은 사람이 먹는 거라 이자를 안 받소⁠.⁠” 대호가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어르신⁠, 설계사한테 빌려준 쉰 냥은 잘 받으셨소⁠? 그땐 내 이름을 대지 말라 했는데⁠, 이제는 다 드러난 일이라 상관없겠지 싶어서⁠…⁠”

엄순자의 손이 멈췄다⁠.

나는 마침 객잔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호의 목소리가 마당 건너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엄순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엄순자의 눈과 내 눈이 만났다⁠. 엄순자는 바구니를 툇마루에 내려놓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대호가 무릎을 꿇은 채 나를 돌아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제야 안 얼굴이었다⁠. 대호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돋보기를 품에서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끝까지 읽는 사람이⁠, 이번에는 말 끝을 읽지 못했다⁠.

*

엄순자가 방에서 나왔다⁠. 손에 수건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와 내 앞에서 멈췄다⁠. 대호가 일어나 한 걸음 물러났고⁠, 화산 제자들이 담장 앞으로 물러났다⁠. 위시목이 뒤채 위패 방 문턱에서 나왔다가 멈췄다⁠.

엄순자는 꾸러미를 풀었다⁠. 은이 햇빛에 반짝였다⁠. 허리춤에서 실을 꺼냈다⁠. 흰 실에 매듭 여섯⁠, 붉은 실에 매듭 하나⁠.

“⁠손 내밀어요⁠.⁠”

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엄순자가 흰 실의 첫 번째 매듭을 풀었다⁠. 매듭 하나를 풀 때마다 은 열 냥을 세어 내 손바닥에 올렸다⁠. 하나⁠, 둘⁠, 열⁠. 손바닥이 아래로 내려갔다⁠. 두 번째 매듭을 풀었다⁠. 열하나⁠, 열둘⁠, 스물⁠. 손목이 꺾였다⁠. 나는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받쳤다⁠. 세 번째⁠, 네 번째⁠. 은이 손바닥 가장자리로 흘러넘쳐 마당 돌바닥에 떨어졌다⁠. 엄순자는 떨어진 은을 주워 다시 올렸다⁠.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다섯 번째 매듭을 풀며 엄순자가 말했다⁠.

“⁠이 쉰 냥은 우리 애 죽인 사람 돈이에요⁠.⁠”

여섯 번째 매듭은 맨 처음에 지은 것이었다⁠. 청송객잔에서 처음 받은 열 냥⁠.

“⁠이 열 냥은 거짓말한 사람 돈이고요⁠.⁠”

은 예순 냥이 내 두 손바닥 위에 쌓였다⁠. 무거웠다⁠. 화산 계단에서 위시목이 올려 준 예순 냥과 같은 무게였는데⁠, 그때보다 훨씬 무거웠다⁠. 손바닥 굳은살 사이로 은의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어머님⁠, 제 열 냥은 제가 번 돈입니다⁠. 열다섯 해 동안⁠…⁠”

“⁠알아요⁠. 설계사 양반이 번 돈이죠⁠. 거짓말이랑 같이 왔어요⁠.⁠” 엄순자는 흰 실을 땅에 떨어뜨렸다⁠. 붉은 실은 손목에 감았다⁠. “⁠이건 떡집이랑 뱃사공이랑⁠,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들 돈이라 가지고 있을게요⁠.⁠”

엄순자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화산 사당 툇마루에서 은이 언제 오냐고 묻던 눈과 같았다⁠.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설계사 양반⁠. 하나만 물을게요⁠. 그 줄⁠, 접었어요⁠?⁠”

마당이 조용했다⁠. 화산 제자 열여덟과 대호와 위시목과 객잔 주인과 우물이 다 같이 조용했다⁠. 쉬운 대답은 이번에는 혀끝까지도 오지 않았다⁠. 올 데가 없었다⁠.

“⁠접었습니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엄순자가 들었는지 몰라 한 번 더 말했다⁠.

“⁠정월에 화산 마당에서⁠, 두열 고객님 앞에서⁠, 비무 줄을 엄지로 접어 눌렀습니다⁠. 그 줄을 읽으면 도장을 안 찍을 것 같아서요⁠. 제가 접었습니다⁠, 어머님⁠.⁠”

엄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손목의 붉은 실을 한 번 쓸었다⁠.

“⁠무림맹에는 나갈게요⁠. 마흔세 집이 기다리니까⁠.⁠” 엄순자가 말했다⁠. “⁠종이는 다른 사람이 읽어 줘요⁠. 설계사 양반 말고⁠.⁠”

엄순자는 바구니를 들고 객잔 대문을 나갔다⁠. 둑길로 가는 걸음이었다⁠. 나는 은 예순 냥을 손바닥에 올린 채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손을 내리면 은이 쏟아지고⁠, 들고 있으면 팔이 떨렸다⁠. 위시목이 위패 방 문턱에서 나를 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닫지 않았다⁠.

*

북망산 기슭 산채 대청에서 엽대호는 차용증을 탁자에 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객잔에서 먼저 돌아와 있었다⁠. 나는 은 예순 냥을 무명 주머니에 담아 탁자에 올렸다⁠.

“⁠쉰 냥에 열흘 이자 다섯 냥⁠. 쉰다섯 냥입니다⁠. 여드레 남았지만 오늘 갚겠습니다⁠.⁠”

“⁠아가씨⁠, 내가 입을 잘못 놀렸소⁠.⁠” 대호가 돋보기를 들지 않고 말했다⁠. “⁠이자는 안 받겠소⁠.⁠”

“⁠차용증에는 열흘에 한 할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채주님이 끝까지 소리 내어 읽어 주셨잖아요⁠. 저는 들었고요⁠.⁠”

대호는 오래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돋보기를 들고 차용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소리 내어 읽었다⁠. 이자⁠, 기한⁠, 담보⁠, 못 갚을 때⁠. 다 읽고 나서 쉰다섯 냥을 세었다⁠. 열 냥씩 다섯 번⁠, 다섯 냥 한 번⁠. 차용증을 반으로 찢어 나에게 건넸다⁠. 주머니에는 은 다섯 냥이 남았다⁠.

“⁠끝까지 읽어 주는 사람한테서 끝까지 갚는 사람이 나오는구려⁠.⁠” 대호가 말했다⁠. “⁠아가씨⁠, 남은 다섯 냥은 어디 쓰오⁠?⁠”

“⁠술집에 네 냥 외상이 있습니다⁠. 한 냥은 닭을 사야 하고요⁠.⁠”

“⁠닭⁠?⁠”

“⁠낙수 나루요⁠. 닭 다섯 마리 약속이 있어서요⁠. 한 냥으로는 두 마리밖에 안 되지만⁠.⁠”

대호는 웃지 않았다⁠. 돋보기를 탁자에 내려놓고 찢은 차용증 반쪽을 한참 보았다⁠.

“⁠아가씨⁠, 얼굴이 돈 빌리러 왔을 때보다 나쁘오⁠. 빚을 갚은 사람 얼굴이 아니오⁠.⁠”

“⁠빚은 갚았는데⁠, 갚을 데가 하나 더 남았습니다⁠.⁠”

산채를 내려오는 길에 나는 무덤 사이에서 손가락을 꼽았다⁠. 흑풍채 빚 쉰다섯 냥⁠, 갚았다⁠. 엄순자에게 준 은⁠, 다시 내 손에 돌아왔다가 다섯 냥만 남았다⁠. 이백 냥 가운데 엄순자 손에 남은 것은 낙양 사람들이 놓고 간 일곱 냥뿐이었다⁠. 한 달 동안 은을 들고 화산과 낙양과 북망산을 오르내렸는데⁠, 손가락은 처음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처음보다 뒤였다⁠. 처음에는 엄순자가 나를 믿었다⁠.

*

해 질 녘 상회 안쪽 방에서 심제원은 자백서를 탁자에 펴 놓고 인주 그릇을 옆에 두었다⁠. 호두는 없었다⁠. 노영필이 가져간 호두 한 알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심제원은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나는 자백서를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화산파에 약관을 보일 때 거절 사유 끝자락을 접은 것은 모설화 혼자의 일이다⁠. 만세상회는 설계사에게 거절 사유를 숨기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모설화⁠.

“⁠앞줄은 맞습니다⁠. 뒷줄은 틀립니다⁠.⁠”

“⁠안다⁠.⁠”

“⁠아시면서 찍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천 명 때문이다⁠.⁠”

나는 엄지를 인주에 눌렀다⁠. 붉은 인주가 엄지 바닥에 고루 묻었다⁠. 노영필이 판판하다고 한 자리였다⁠. 무언가를 오래 누른 엄지⁠. 정월에 약관 끝자락을 누르던 엄지가⁠, 이번에는 자백서 끝자락에 닿았다⁠. 종이 위에 붉은 지문이 앉았다⁠. 소용돌이 무늬가 또렷했다⁠.

심제원은 자백서를 집어 들고 지문을 등잔에 비춰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상회 심부름꾼을 불러 관아로 보냈다⁠.

밤이 깊어 관아 옥 문이 열렸다⁠. 철민이 돌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마의 멍이 등불 아래 푸르렀다⁠. 철민은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내 오른손을 보았다⁠. 엄지 바닥에 붉은 인주가 아직 남아 있었다⁠. 씻어도 금방 빠지지 않는 상회 인주였다⁠.

“⁠누님⁠, 뭐 주고 나왔어요⁠?⁠”

나는 엄지를 손바닥 안으로 말아 쥐었다⁠. 철민은 더 묻지 않았다⁠. 옥 문 안에서 녹림 사내 하나가 소리쳤다⁠. 철민아⁠, 떡⁠! 철민은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다⁠. 안 죽으면요⁠, 형님⁠!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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