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22자)

감찰원 뒷방의 상자

무림맹 민원실 · 하로운

3월 20일 인시⁠, 실장 관사의 등잔 기름이 바닥을 드러냈다⁠. 천무량은 심지를 한 번 더 돋우고⁠, 서랍에서 꺼낸 녹슨 열쇠를 탁자 위에 놓았다⁠. 매향은 벽에 기대 팔짱을 꼈고⁠, 다름은 식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밤새 아무도 자지 않았다⁠.

“⁠가정 43년 6월 14일이었다⁠.⁠” 천무량이 말했다⁠. “⁠선거 전날 밤⁠.⁠”

가정 43년에 천무량은 스물둘이었다⁠. 서쪽 담 밖 야간 창구 담당이었다⁠. 해가 지면 낮 창구가 닫히고⁠, 밤에 걸어서 오는 사람들은 서쪽 담 밖으로 돌아와 등불 하나 켠 창구 앞에 줄을 지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걸어오는 사람들이었다⁠. 선거 전날 밤 줄 맨 앞에는 영하 상류 마을 갈대울 사람들이 있었다⁠. 남궁세가 무사들이 마을 우물을 막고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민원이었다⁠.

“⁠줄 중간쯤에 남궁세가 가주가 왔다⁠. 지금 가주의 아버지다⁠. 맹주 후보였지⁠. 다른 후보를 걸어 민원을 내러 왔다⁠.⁠” 천무량이 찻잔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돌렸다⁠. “⁠맹규에 처분 전인 민원이 걸린 후보는 투표에 못 오른다⁠. 둘 다 그걸 알았다⁠. 먼저 찍히는 민원이 이기는 밤이었다⁠.⁠”

“⁠번호표가 있었습니까⁠?⁠”

“⁠있었다⁠. 갈대울이 앞이었다⁠. 남궁 가주는 뒤였다⁠. 나는 순서대로 찍었다⁠. 갈대울 민원이 먼저 찍혔고⁠, 갈대울 민원에는 남궁세가가 걸려 있었다⁠. 남궁 가주는 투표에 못 올랐다⁠.⁠”

매향이 팔짱을 풀었다⁠.

“⁠그래서⁠?⁠”

“⁠이튿날 남궁세가가 맹을 나갔다⁠. 따르는 문파 일곱이 같이 나갔다⁠. 맹이 갈라지자 사파가 산에서 내려왔고⁠, 남궁이 사파를 치러 갔고⁠, 우리 남은 맹은 어느 편도 못 막았다⁠. 3년이었다⁠. 가정 말년 대란이라고 부른다⁠.⁠” 천무량이 열쇠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지금 남궁 가주의 형 남궁태원이 숭산 남쪽 고개에서 죽었다⁠. 갈대울은 대란 2년째 불탔다⁠. 우물 하나 때문에 찍은 도장이 우물 있는 마을까지 태웠다⁠.⁠”

다름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남은 온기가 금방 식었다⁠.

“⁠후회하십니까⁠?⁠”

“⁠순서대로 찍은 건 후회 안 한다⁠. 갈대울 사람들은 해 질 녘부터 줄에 있었다⁠.⁠” 천무량이 수염을 쓸었다⁠. “⁠이튿날 아침이 어떻게 올지 몰랐던 걸 후회한다⁠. 도장 하나 찍는 손이 맹을 쪼갤 수 있다는 걸⁠, 스물둘에는 몰랐다⁠.⁠”

“⁠그 밤 줄에 섰던 갈대울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처분은 났다⁠. 우물은 열렸다⁠. 대란 2년째에 남궁을 쫓던 사파 무리가 우물 있는 마을을 먼저 털었다⁠.⁠” 천무량이 찻잔을 엎어 놓았다⁠. “⁠우물을 열어 준 처분서가 마을 사당에 걸려 있었다더라⁠. 불에 타서 재가 됐다고⁠.⁠”

“⁠야간 창구는 그날로 닫혔다⁠. 나는 낮 창구로 옮겼다⁠. 그때부터 큰 문파 먼저다⁠. 큰 문파가 맹을 안 나가야 작은 마을 일도 볼 맹이 남는다⁠.⁠” 천무량이 벽에 붙은 사본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낮에는 큰 문파고⁠, 밤에는 이거다⁠.⁠”

창밖이 희부옇게 밝아 왔다⁠. 매향이 벽에서 등을 뗐다⁠.

“⁠그 얘기를 왜 지금 해⁠?⁠”

“⁠오늘 밤 감찰원 뒷방에 들어갈 거니까⁠. 들어가면 나는 실장이 아니고 도둑이다⁠. 도둑질하러 같이 가는 사람한테는 이유를 말해 줘야지⁠.⁠”

천무량은 열쇠를 다름 앞으로 밀었다⁠. 다름은 열쇠를 집지 않았다⁠. 녹슨 열쇠는 탁자 위에서 등잔 불빛을 받아 붉게 보였다⁠.

“⁠자시 손님이 다녀간 뒤에⁠, 축시에 들어간다⁠. 매향 씨는 담을 넘고⁠, 너는 매향 씨 허리띠에 매달리고⁠, 나는 문으로 간다⁠. 나는 실장이라 문으로 간다⁠.⁠”

*

해가 뜨자 다름은 하숙방으로 돌아가 쓰러지듯 잤다⁠. 정오쯤 눈을 떴을 때 매향은 이미 석교촌에 다녀와 있었다⁠. 지붕 아닌 문으로 들어와서⁠, 하숙집 주인이 사파가 왔다고 소리 지를 틈도 없이 주인 손에 감자 한 자루를 쥐여 주었다고 했다⁠.

“⁠석교촌 사내 이름은 우돌이야⁠. 3월 18일 술시에 투함에 넣었대⁠. 내용은 흑석곡 사람들한테서 감자 씨를 사 와서 심었는데⁠, 점창 분타가 그 감자를 사파 감자라고 장터에서 못 팔게 한다는 거⁠.⁠” 매향이 다름의 이불 위에 털썩 앉았다⁠. “⁠웃기지⁠? 사파 감자⁠. 감자가 무슨 무공을 써⁠.⁠”

“⁠우돌 씨가 증언해 주겠답니까⁠?⁠”

“⁠맹이 불러 주면⁠. 근데 맹이 부르는 거 무섭대⁠. 칼 찬 사람들이 많아서⁠.⁠” 매향이 다름의 사모를 집어 제 머리에 써 보았다⁠. 사모가 매향의 꽃비녀에 걸려 비스듬히 얹혔다⁠. “⁠나 학 달면 어울려⁠?⁠”

다름이 대답하기 전에 매향이 표정을 바꿨다⁠.

“⁠점창 놈들이 오늘 아침 물길에 돌을 셋 더 얹었어⁠. 이제 우물 바닥이 보여⁠. 우리 사람들이 강까지 내려가서 물을 길어 와⁠. 하촌 둑이 무너진 자리를 지나서⁠. 지게에 물동이 둘 지고 고개 하나를 넘어⁠.⁠” 매향이 손바닥으로 이불을 꾹 눌렀다⁠. “⁠주태곤이 돌 얹는 걸 보고 있었는데⁠, 지 손으로는 안 얹더라⁠. 팔짱만 끼고⁠.⁠”

“⁠흉배는 관복에 답니다⁠.⁠”

“⁠그럼 관복도 줘⁠.⁠”

“⁠구품입니다⁠.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매향은 사모를 벗어 다름의 머리에 거꾸로 씌워 주고 웃었다⁠.

*

3월 20일 축시⁠, 감찰원 뒤편 쪽문 앞에 셋이 모였다⁠. 자시에 서리 그림자가 투함을 열고 북쪽으로 돌아간 지 반 시진이 지나 있었다⁠. 감찰원 창은 다 꺼져 있었다⁠. 천무량이 녹슨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열쇠는 반 바퀴에서 멈췄다⁠.

“⁠안 돌아가오⁠.⁠”

“⁠30년 됐다며⁠. 녹슬었겠지⁠.⁠” 매향이 속삭였다⁠.

천무량은 열쇠를 빼서 퉤 침을 뱉고⁠, 소매로 닦은 뒤 다시 꽂았다⁠. 이번엔 끝까지 돌았다⁠. 철컥 소리가 밤공기에 크게 울렸다⁠. 셋은 동시에 숨을 멈췄다⁠. 회랑 끝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30년 전에도 이렇게 열었다⁠.⁠” 천무량이 중얼거렸다⁠.

뒷방은 길고 좁았다⁠. 문을 닫자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무량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젖혔고⁠, 재채기가 터지기 직전 매향이 손가락으로 천무량의 콧등을 꽉 집었다⁠. 천무량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재채기를 삼켰다⁠. 콧등을 놓아주자 천무량이 작게 말했다⁠.

“⁠사파한테 코 잡히는 것도 처음이오⁠.⁠”

“⁠양민이라니까⁠.⁠” 양쪽 벽에 시렁이 천장까지 짜여 있었고⁠, 시렁마다 검게 옻칠한 상자가 빼곡했다⁠. 다름이 손에 든 작은 등불을 낮추자 상자 앞면의 종이 띠가 보였다⁠. 「⁠만력 십팔 년 감찰⁠」⁠, 「⁠만력 이십 년 감찰⁠」⁠. 대부분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먼지 없는 걸 찾아⁠.⁠” 매향이 말했다⁠.

맨 안쪽 시렁 아래 칸에 상자 하나만 먼지가 없었다⁠. 끈이 두 번 감겨 있었고 밀랍 봉인이 붙어 있었다⁠. 사흘 전 감찰원 회랑에서 서리 둘이 맞들고 가던 상자였다⁠. 다름은 봉인을 들여다보았다⁠. 감찰원 도장이었다⁠.

“⁠봉인을 뜯으면 뜯은 줄 압니다⁠.⁠”

“⁠뜯었다고 아는 사람이 이 상자를 어디다 고발하겠소⁠?⁠” 천무량이 말했다⁠. “⁠감찰원에 고발하겠소⁠?⁠”

매향이 손톱으로 밀랍을 들어 올렸다⁠. 봉인은 깨지지 않고 통째로 떨어졌다⁠. 끈을 풀고 뚜껑을 열자 두루마리 냄새가 확 올라왔다⁠. 먹과 종이와 습기가 섞인 냄새였다⁠.

다름은 두루마리를 하나씩 꺼내 등불 아래 끝을 확인했다⁠. 석교촌⁠. 3월 18일⁠. 우돌⁠. 안골⁠. 소금고개⁠. 돌다리⁠. 버들내⁠. 다름의 손이 하나에서 멈췄다⁠. 「⁠하촌⁠」⁠. 글씨가 삐뚤빼뚤했고⁠, 맨 아래 손도장이 마흔 개쯤 찍혀 있었다⁠. 「⁠흑석곡 사람들은 칼 안 든 이웃이다⁠. 수길이 장례 때 장작을 지고 강을 건너왔다⁠. 점창 분타가 막은 물길을 열어 주시라⁠」⁠. 맨 위에 「⁠버들객잔 곽씨⁠」가 있었다⁠.

“⁠할멈이야⁠.⁠” 매향의 목소리가 낮았다⁠.

다름은 두루마리를 셌다⁠. 열두 마을⁠, 마흔 건이었다⁠. 날짜는 지난해 동짓달부터 어제까지였다⁠. 흑석곡이 지현의 호적에 오른 달부터였다⁠. 두루마리 마흔 건이 한 목소리였다⁠. 흑석곡 사람들은 이웃이고⁠, 점창 분타가 물길을 막았고⁠, 사파 감자라고 장터에서 내쫓았다⁠. 안골 두루마리 하나는 웃음이 날 만큼 구체적이었다⁠. 「⁠점창 제자 셋이 흑석곡 닭을 사파 닭이라며 잡아갔다⁠. 사파 닭이면 맹이 처분하고⁠, 양민 닭이면 닭값을 물어 달라⁠」⁠. 다름은 웃으려다 말았다⁠. 닭 주인의 손도장이 종이 끝에서 번져 있었다⁠.

“⁠이걸 맹이 받았으면⁠,⁠” 다름이 말했다⁠. “⁠흑석곡 민원은 무효가 안 됐습니다⁠. 둘레 열두 마을이 흑석곡을 이웃이라고 하는데⁠, 감찰관이 줄 밖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받은 거지⁠.⁠” 매향이 이를 물었다⁠.

천무량은 상자 뚜껑을 뒤집어 보고 있었다⁠. 뚜껑 안쪽에 접힌 종이 한 장이 풀로 붙어 있었다⁠. 천무량이 손톱으로 떼어 내 펼쳤다⁠. 등불을 가까이 대자 글씨가 드러났다⁠. 반듯하고 단단한 글씨였다⁠.

「⁠흑석곡 일은 선거 전날 밤에 끝낸다⁠. 그때까지 흑석곡 편을 드는 민원은 맹에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하라⁠. 선거 전날 자정이 지나면 점창 분타가 할 일을 할 것이고⁠, 맹주는 다음 날 아침 그 일을 정리한 사람이 될 것이다⁠. 감찰원이 수고해 주면 총관 자리는 그대의 것이다⁠」⁠.

종이 맨 아래에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남궁세가 가주의 인장이었다⁠.

셋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등불 심지가 지직 소리를 냈다⁠. 다름은 편지를 두 번 읽었다⁠. 「⁠선거 전날 자정⁠」에서 눈이 멈췄다⁠. 이레의 끝이 자정이었다⁠. 누군가 선거 전날 흑석곡을 걸어 민원을 내고⁠, 이레째 자정까지 처분이 나지 않으면⁠, 이후의 칼부림은 맹이 묻지 않았다⁠. 맹규 그대로였다⁠. 흑석곡 편을 드는 민원이 한 건도 없으면 처분할 이유도 없었다⁠.

“⁠선거 전날 밤⁠.⁠” 천무량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30년 만에 또 선거 전날 밤이구나⁠.⁠”

“⁠이 편지 하나면 남궁은 끝이야⁠.⁠” 매향이 편지를 집으려 했다⁠.

“⁠편지 하나로는 위조라고 합니다⁠.⁠” 다름이 말했다⁠. “⁠두루마리 마흔 건하고 같이 가야 합니다⁠. 마흔 건을 낸 사람들이 직접 와서 자기가 냈다고 해야 합니다⁠.⁠”

회랑 마루가 삐걱 울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놋쇠 열쇠 꾸러미가 짤랑거렸다⁠. 천무량이 등불을 불어 껐다⁠. 어둠 속에서 매향이 편지를 낚아채 품에 넣고⁠, 시렁을 밟아 천장 들보로 소리 없이 올라갔다⁠. 다름은 상자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굳었다⁠. 두 손에 하촌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쪽문이 열렸다⁠. 등불 하나가 문틀에 걸린 것처럼 멈췄다⁠. 등불 뒤에서 위소강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색 관복 위에 겉옷을 걸쳤고⁠, 한 손에 열쇠 꾸러미를 쥐고 있었다⁠. 등불이 천천히 바닥의 상자로⁠, 뚜껑으로⁠, 떨어진 봉인으로⁠, 다름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로⁠, 천무량의 회색 수염으로 옮겨 갔다⁠.

“⁠자물쇠를 바꿨어야 했소⁠.⁠” 위소강이 말했다⁠. 목소리는 조사실에서처럼 평평했다⁠. “⁠30년 동안 돈이 아까워서 안 바꿨는데⁠, 이제 보니 그 돈이 훨씬 싸게 먹혔겠구려⁠.⁠”

천무량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름도 일어나지 않았다⁠. 들보 위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름의 손에서 하촌 두루마리 끝이 바스락거렸다⁠. 위소강의 등불 아래 마흔 개 손도장이 붉게 떠올랐다가⁠, 두루마리를 쥔 다름의 손가락 그림자에 반쯤 가려졌다⁠.

“⁠맹규로 따지면⁠,⁠” 위소강이 등불을 조금 들어 올렸다⁠.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위에서 비췄다⁠. “⁠두 분은 지금 도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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