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37자)

밤에 투함을 여는 사람

무림맹 민원실 · 하로운

3월 18일 해시⁠, 정문 앞 향나무는 사람 둘이 숨기에 딱 반만 한 크기였다⁠. 다름은 나무 둥치 뒤에 쪼그려 앉아 감자 자루를 끌어안았고⁠, 매향은 나뭇가지 위에 누워 수박씨를 깠다⁠. 껍질이 하나씩 다름의 사모 위로 떨어졌다⁠.

“⁠거기서 까시면 껍질이 저한테 떨어집니다⁠.⁠”

“⁠밑에서 받아⁠.⁠”

정문 옆 담에 박힌 투함은 달빛을 받아 희끄무레했다⁠. 술시에 석교촌에서 왔다는 사내 하나가 등짐을 진 채 와서 두루마리를 구멍에 밀어 넣고 갔다⁠. 사내는 투함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절을 한 번 하고 돌아갔다⁠. 다름은 사내의 등짐에 매달린 짚신 두 켤레를 보았다⁠. 하나는 올 때 신은 것이고 하나는 갈 때 신을 것이었다⁠.

“⁠석교촌이면 흑석곡에서 고개 하나 넘어야 해⁠.⁠” 매향이 나뭇가지 위에서 말했다⁠. “⁠우리 감자 사 가는 집이야⁠. 뭐라고 썼을까⁠.⁠”

“⁠읽으면 안 됩니다⁠. 남의 민원입니다⁠.⁠”

“⁠안 읽어⁠. 궁금하다고⁠.⁠”

자시가 되자 바람이 차가워졌다⁠. 삼월 숭산의 밤은 겨울이 덜 빠져 있었다⁠. 다름은 이가 딱딱 부딪는 소리를 감추려고 입속으로 『⁠대학⁠』 첫머리를 외웠다⁠.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 세 번째 외울 때 매향이 가지에서 망토를 벗어 내려보냈다⁠. 망토에서 수박씨 냄새와 장작 연기 냄새가 났다⁠.

“⁠숨소리 좀 줄여⁠. 너 숨 쉬는 소리가 대청 북소리만 해⁠.⁠”

“⁠어떻게 줄입니까⁠?⁠”

“⁠배로 쉬어⁠. 길게 들이쉬고⁠, 더 길게 내쉬고⁠.⁠”

다름은 배로 길게 들이쉬었다⁠. 내쉬다가 딸꾹질이 나왔다⁠. 한 번 나온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매향이 가지 위에서 부채로 얼굴을 덮고 소리 없이 웃었다⁠. 웃느라 가지가 흔들렸고⁠, 수박씨 껍질이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졌다⁠.

축시가 지나고 인시가 와도 투함 앞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동쪽 하늘이 희부옇게 밝아 올 때 다름은 망토를 뒤집어쓴 채 졸고 있었고⁠, 매향은 가지 위에서 팔베개를 하고 깨어 있었다⁠.

*

3월 19일 진시⁠, 다름은 정문 밖 돌계단에서 왕춘삼을 기다렸다⁠. 정직 중인 주사는 맹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왕춘삼이 점심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다가 다름을 보고 혀를 찼다⁠.

“⁠눈 밑이 더 시커메졌어⁠. 학이 아니라 너구리를 달아야겠다⁠.⁠”

“⁠오늘 아침 투함에 석교촌 민원이 있었습니까⁠?⁠”

왕춘삼이 고개를 저었다⁠. “⁠실장님이 열어서 나눠 주셨는데⁠, 석교촌은 없었어⁠. 안골도 없고⁠.⁠”

다름은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밤새 아무도 투함 앞에 오지 않았다⁠. 왕춘삼이 다름의 표정을 보고는 담에 박힌 투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마 밖에서 지켰냐⁠? 저건 구멍만 밖에 있고 문짝은 담 안에 있어⁠. 안에서 여는 거야⁠.⁠”

향나무 위에서 매향이 뛰어내렸다⁠. 밤새 깨어 있던 얼굴이 다름을 내려다보았다⁠.

“⁠너 바보야⁠?⁠”

“⁠향시도 세 번 떨어졌습니다⁠.⁠”

“⁠그거 자랑이야⁠?⁠”

“⁠아닙니다⁠. 그냥 사실입니다⁠.⁠”

“⁠사실이면 더 큰일이지⁠.⁠” 매향이 머리에 붙은 향나무 잎을 털었다⁠. “⁠밤새 남의 담벼락 바깥만 지킨 사람 둘이 여기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왕춘삼은 사파 여자를 보고 놀라 도시락을 떨어뜨릴 뻔했다가⁠, 두 사람이 밤새 같이 투함을 지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냥 혀만 찼다⁠. 그리고 들어가면서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담 안 투함 옆에 장작더미가 있지⁠. 사람 둘 들어갈 만해⁠.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

3월 19일 해시⁠, 매향은 다름의 허리띠를 쥐고 담 앞으로 갔다⁠.

“⁠숨 참아⁠.⁠”

“⁠얼마나 참습니까⁠?⁠”

“⁠담 넘을 때까지⁠.⁠”

다름이 숨을 들이쉬기도 전에 몸이 떠올랐다⁠. 담 기와가 발밑으로 지나갔고⁠, 맹 안마당 달빛이 눈앞에 쏟아졌다⁠. 매향은 다름을 장작더미 뒤에 내려놓고 자기도 옆에 내려앉았다⁠. 다름은 장작더미에 기대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속이 불편해서 장작을 붙들고 있었다⁠.

“⁠다음엔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말했잖아⁠. 숨 참으라고⁠.⁠”

투함 안쪽 문짝은 장작더미에서 열 걸음쯤 떨어진 담에 붙어 있었다⁠. 경첩이 두 개⁠, 놋쇠 자물쇠가 하나였다⁠. 술시에 누군가 밖에서 두루마리를 넣었는지⁠, 안쪽 문짝 너머로 종이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름은 장작더미 틈으로 눈만 내밀었다⁠.

기다리는 동안 매향이 작게 말했다⁠. 장작 냄새 속에서 목소리가 낮았다⁠.

“⁠아버지가 그랬어⁠. 사파는 줄을 안 선다고⁠. 줄 서는 건 약한 놈들이나 하는 거라고⁠.⁠” 매향이 부채 살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쓸었다⁠. “⁠산에서 내려와서 처음 등봉현 관아에 갔을 때⁠, 호적 올리려고 줄을 섰어⁠. 앞에 소금 장수⁠, 뒤에 떡 장수⁠. 반나절 섰는데 아무도 나를 안 무서워했어⁠. 떡 장수가 떡을 하나 줬어⁠. 그때 알았어⁠. 줄 서는 게 약한 게 아니라⁠, 줄에 서야 남들이 나를 사람으로 본다는 거⁠.⁠”

다름은 대답 대신 자루에서 감자를 꺼내 반으로 쪼갰다⁠. 매향은 반쪽을 받아 들고 웃었다⁠.

“⁠또 반이야⁠?⁠”

“⁠감찰관께서 수량을 다 적으십니다⁠. 반씩 드려야 나중에 덜 복잡합니다⁠.⁠”

매향이 감자를 베어 물다가 웃음이 터져 장작더미에 이마를 박았다⁠. 둘은 숨을 죽이고 한참 엎드려 있었다⁠.

자시 북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랑에서 발소리가 났다⁠. 등불은 없었다⁠. 사람 그림자 하나가 담을 따라 걸어와 투함 앞에 멈췄고⁠, 허리춤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놋쇠가 서로 부딪는 소리가 짤랑 났다⁠. 다름은 소리를 알아들었다⁠. 사흘 전 감찰원 창구 앞에서⁠, 이백삼 번 사내가 앉을 때 허리에서 나던 소리와 같았다⁠.

그림자는 투함을 열고 두루마리를 하나씩 꺼내 달빛에 비춰 보았다⁠. 끝에 쓴 마을 이름부터 보았다⁠. 몇 개는 도로 넣고⁠, 하나를 품에 넣었다⁠. 자물쇠를 다시 채우는 손놀림이 빨랐다⁠. 그림자는 회랑 끝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걸어간 방향은 북쪽이었다⁠.

매향이 장작더미를 짚고 일어서려 했다⁠. 다름이 매향의 소매를 붙들었다⁠.

“⁠쫓아가면 들킵니다⁠.⁠”

“⁠놓쳐⁠.⁠”

“⁠어디로 가는지는 압니다⁠. 북쪽 회랑 끝입니다⁠.⁠”

매향이 다시 앉았다⁠. 부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다름은 장작더미에 기대 숨을 골랐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축시가 되자 발소리가 다시 났다⁠.

이번 발소리는 느렸다⁠. 등불도 들었다⁠. 작은 키에 짧은 회색 수염⁠, 손에 찻잔 대신 빈 보자기를 든 사내였다⁠. 천무량은 투함 앞에 쪼그려 앉아 소매에서 열쇠를 꺼냈다⁠. 자물쇠를 열고 두루마리를 전부 꺼내 등불 아래 바닥에 늘어놓았다⁠. 마을 이름을 하나씩 확인하더니 그중 여섯 개를 보자기에 쌌다⁠. 나머지는 도로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보자기를 소매에 밀어 넣자 소매가 볼록해졌다⁠.

다름은 장작더미에서 걸어 나왔다⁠.

“⁠실장님⁠.⁠”

천무량의 등불이 흔들렸다⁠. 등불이 다름의 얼굴로 올라왔다가⁠, 다름 뒤에서 부채를 펴고 선 매향의 얼굴로 옮겨 갔다⁠.

“⁠정직 중인 주사가 밤에 맹 안에서 뭐 하나⁠?⁠”

“⁠실장님은요⁠?⁠”

“⁠나는 실장이다⁠. 투함 열쇠는 실장 거다⁠.⁠”

“⁠투함은 아침에 여는 겁니다⁠. 소매에 넣으시는 게 아니고요⁠.⁠”

천무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매향이 한 걸음 다가오며 부채를 들었다⁠. 천무량이 손을 들었다⁠.

“⁠부채 거두시오⁠, 아가씨⁠. 나는 무공이라곤 찻잔 드는 것밖에 못 하오⁠. 부채 한 번 맞으면 내일 출근을 못 해⁠.⁠”

“⁠흑석곡 근처 민원을 빼 가는 게 당신이야⁠?⁠”

“⁠빼 간다는 말은 맞고⁠, 흑석곡 근처라는 말은 틀렸소⁠.⁠” 천무량이 볼록한 소매를 가볍게 두드렸다⁠. “⁠따라오시오⁠. 둘 다⁠. 여기서 떠들면 순찰이 깬다⁠. 오늘 순찰은 서서 존다는 그 문지기요⁠.⁠”

관사로 가는 길에 회랑 기둥에 기대 선 순찰 문지기 옆을 지났다⁠. 문지기는 창을 끌어안고 서서 코를 골고 있었다⁠. 매향이 지나가며 문지기 코앞에서 부채를 한 번 부쳤는데⁠, 문지기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계속 잤다⁠.

*

실장 관사는 맹 동쪽 담 모퉁이에 붙은 방 두 칸짜리 집이었다⁠. 천무량이 등잔을 켜자 다름은 문지방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방 벽이 종이로 덮여 있었다⁠. 두루마리를 베낀 사본들이 벽에 압정 대신 밥알로 붙어 층층이 겹쳐 있었다⁠. 마을 이름이 보였다⁠. 안골⁠, 버들내⁠, 소금고개⁠, 돌다리⁠. 대부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사본마다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날짜와 「⁠지현께 편지⁠」⁠, 「⁠청하검문에 편지⁠」⁠, 「⁠답 없음⁠」⁠, 「⁠해결⁠」 같은 말이 붙어 있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유중함에 들어간 것들이다⁠.⁠” 천무량이 보자기를 풀어 오늘 밤 가져온 여섯 개를 탁자에 펼쳤다⁠. “⁠낮에 큰 문파 먼저 하고⁠, 밤에 이걸 한다⁠. 처분 도장은 못 찍는다⁠. 처분을 내리면 큰 문파들이 본다⁠. 대신 편지를 쓴다⁠. 지현한테⁠, 작은 문파 문주한테⁠, 마을 이장한테⁠. 편지는 도장이 없어도 가⁠.⁠”

다름은 벽 한가운데 붙은 사본 하나를 보았다⁠. 「⁠하촌 — 철우방·청하검문⁠, 둑 위 비무⁠」⁠. 귀퉁이에 「⁠3월 4일 지현께 편지 — 관아 인부로 둑 보수 청함⁠」⁠, 밑에 「⁠3월 6일 답 — 강호 일은 맹에서⁠」⁠.

다름은 사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둑 앞에서 무릎 꿇던 땅의 차가움이 다시 무릎으로 올라왔다⁠.

“⁠하촌 일도 하셨습니까⁠?⁠”

“⁠했다⁠. 안 됐다⁠.⁠” 천무량이 등잔 심지를 낮췄다⁠. “⁠편지는 도장이 없어서 가볍다⁠. 가벼우니 아무도 안 무서워해⁠.⁠”

천무량은 화로에 물을 올리고 찻잔 셋을 꺼냈다⁠. 하나는 이가 빠져 있었는데⁠, 이 빠진 잔을 자기 앞에 놓았다⁠. 매향 앞에 잔을 놓다가 손이 한 번 멈췄다⁠.

“⁠사파한테 차 내는 건 처음이오⁠.⁠”

“⁠양민이야⁠. 지현 관인 있어⁠.⁠”

“⁠감찰관이 무효라던데⁠.⁠”

“⁠감찰관은 맹 일만 본대⁠. 차는 맹 일이야⁠, 지현 일이야⁠?⁠”

천무량은 대답 대신 매향의 잔에 차를 가득 따랐다⁠. 자기 잔에는 반만 따랐다⁠. 탁자 끝에 원로당에서 돌린 종이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남궁태열이 원로들에게 보낸 글로⁠, 「⁠사파와 섞여 사는 마을을 맹이 그냥 두면 관군이 와서 산을 태운다⁠. 맹이 먼저 정리하자⁠」라는 말이 첫머리에 있었다⁠. 다름은 위소강의 방 벽에 붙어 있던 저보를 떠올렸다⁠. 같은 말이 맹 안에서 두 번째로 다름 앞에 놓였다⁠.

매향이 벽을 따라 걸으며 마을 이름을 하나씩 읽었다⁠.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벽 끝에서 멈췄다⁠.

“⁠석교촌이 없어⁠. 안골은 작년 것만 있고 올해 건 없어⁠. 흑석곡 둘레 마을 거는 올해 하나도 없어⁠.⁠”

“⁠없소⁠.⁠” 천무량이 탁자 위 여섯 개를 손등으로 밀었다⁠. “⁠내가 축시에 열면⁠, 그 동네 것은 이미 없소⁠. 몇 달째 그렇소⁠.⁠”

다름은 아까 자시의 열쇠 소리를 떠올렸다⁠. 놋쇠가 짤랑거리던 소리⁠, 북쪽으로 사라지던 그림자⁠.

“⁠나보다 먼저 여는 놈이 있다⁠.⁠” 천무량이 말했다⁠. “⁠너희도 봤겠지⁠. 자시에⁠.⁠”

“⁠감찰원 열쇠였습니다⁠.⁠”

천무량이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녹이 슨 열쇠 하나와⁠, 먼지 앉은 대추나무 도장 하나가 들어 있었다⁠. 천무량은 도장에는 손대지 않고 열쇠만 꺼내 등잔 불빛에 비췄다⁠. 열쇠 머리에 「⁠감찰 후고⁠」 네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감찰원 뒷방 열쇠다⁠. 30년 전 내가 야간 창구에 있을 때 받은 거다⁠.⁠” 천무량이 다름을 보았다⁠. “⁠맹은 30년 동안 자물쇠를 한 번도 안 바꿨다⁠. 돈이 아까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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