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410자)

감찰원에도 번호표가 있다

무림맹 민원실 · 하로운

3월 17일 진시⁠, 북쪽 회랑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기둥마다 「⁠정숙⁠」 패가 붙어 있었고⁠, 걸을 때마다 마루가 한 번씩 삐걱 울어 정숙할 수가 없었다⁠. 회랑 끝 감찰원 문 앞에는 민원실 것과 똑같이 생긴 나무통이 있었다⁠. 통 위에 붙은 종이에는 「⁠피감찰인은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다름은 통에 손을 넣었다⁠. 꺼낸 패는 「⁠002⁠」였다⁠.

일 번은 문 옆 의자에 앉은 늙은 문지기였다⁠. 야간 순찰 중에 졸았다는 일로 왔다고 했다⁠. 문지기는 다름의 관복 흉배를 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학이시네⁠. 높은 분도 조사받으시오⁠?⁠”

“⁠구품입니다⁠.⁠”

“⁠학 다신 구품은 처음 보네⁠.⁠” 문지기가 하품을 했다⁠. “⁠나는 졸아서 왔는데⁠, 나리는 뭘 하셨소⁠?⁠”

“⁠사파 민원을 받았습니다⁠.⁠”

문지기의 하품이 반쯤에서 멈췄다⁠. 문지기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들어 의자 끝으로 옮겨 앉았다⁠.

기다리는 동안 감찰원 서리 둘이 검게 옻칠한 상자 하나를 맞들고 회랑을 지나갔다⁠. 상자에는 끈이 두 번 감겨 있었고⁠, 매듭 위에 밀랍 봉인이 붙어 있었다⁠. 서리들은 감찰원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돌아 뒤편 쪽문으로 사라졌다⁠. 다름은 상자가 사라진 모퉁이를 오래 보았다⁠. 민원실 유중함과 같은 옻칠이었다⁠.

일 번 문지기는 방에 들어갔다가 차 한 잔 식을 만큼도 안 돼서 나왔다⁠. 다름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했다⁠.

“⁠조는 건 맹규에 벌이 없대서 그냥 가래요⁠. 다음엔 서서 졸래요⁠.⁠”

*

위소강의 방은 좁고 깨끗했다⁠. 책상 위에 맹규 한 권이 펼쳐져 있었고⁠, 붓 세 자루가 길이 순서로 놓여 있었다⁠. 위소강은 다름이 앉기를 기다렸다가 맹규 한 장을 넘겼다⁠.

“⁠맹규에 따르면⁠, 감찰 조사는 묻는 말에 답하는 것으로 하오⁠. 연매향을 몇 번 만났소⁠?⁠”

“⁠창구에서 세 번⁠, 하촌에서 두 번입니다⁠.⁠”

“⁠하촌에서는 왜 만났소⁠?⁠”

“⁠둑이 무너지는 날 매향 채주가 철우방 방주의 칼을 쳐 냈습니다⁠.⁠”

“⁠그래서 둑이 무너졌소⁠?⁠”

다름은 입을 다물었다⁠. 튕겨 나간 칼이 둑 돌에 박히던 순간이 눈앞을 지나갔다⁠. 위소강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붓을 들어 무언가를 적었다⁠.

“⁠연매향에게서 받은 것이 있소⁠?⁠”

“⁠만두 다섯 개입니다⁠. 저는 감자 세 개 반을 드렸습니다⁠.⁠”

위소강의 붓이 멈췄다⁠. 고개를 들어 다름을 한참 보았다⁠.

“⁠반은 왜 반이오⁠?⁠”

“⁠하숙집에서 싸 준 감자가 셋이었는데 하나를 쪼개 드렸습니다⁠. 셋은 지난번에 드린 것과 더한 것입니다⁠.⁠”

“⁠만두가 다섯이고 감자가 셋 반이면⁠, 남 주사가 덜 받았구려⁠.⁠” 위소강이 그대로 적었다⁠. 농담인지 아닌지 얼굴로는 알 수 없었다⁠. “⁠만두는 무슨 소였소⁠?⁠”

“⁠부추와 돼지고기입니다⁠.⁠”

“⁠맹규에 따르면 받은 물건은 이름과 수량과 생김새를 모두 밝히게 돼 있소⁠.⁠”

방 밖 회랑에서 일 번 문지기가 웃음을 참다가 딸꾹질을 했다⁠. 위소강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랍에서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내 다름 앞에 놓았다⁠.

“⁠만력 19년 겨울⁠, 남궁세가가 안휘에서 하남으로 보내던 쌀 수레 셋이 숭산 남쪽 고갯길에서 털렸소⁠. 턴 무리가 흑풍채였소⁠. 남궁세가가 그때 맹에 올린 피해 신고요⁠.⁠”

종이에는 수레 셋⁠, 쌀 서른 섬⁠, 다친 마부 둘이 쓰여 있었다⁠. 맨 아래 「⁠흑풍채 채주의 딸이 부채를 썼다⁠」라는 한 줄이 있었다⁠. 다름은 마지막 줄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3년 전 일입니다⁠. 흑풍채는 2년 전에 깃발을 내렸습니다⁠.⁠”

“⁠깃발을 행주로 써도 행주를 쥔 손은 같은 손이오⁠.⁠” 위소강이 종이를 거두었다⁠.

위소강 뒤 벽에는 저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조선에서 돌아온 관군 일부를 하남과 호광의 산적 소탕에 돌린다는 소식이었다⁠. 위소강은 다름의 눈길이 저보에 머무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소식 한 줄을 짚었다⁠.

“⁠관군이 산을 치러 오면 산 밑 마을에 사파가 섞여 사는지 아닌지 가려 주지 않소⁠. 다 같이 불태우지⁠. 맹이 먼저 정리해 두는 게 흑석곡 사람들한테도 덜 아픈 길이오⁠.⁠”

“⁠정리가 무엇입니까⁠?⁠”

“⁠산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오⁠. 살아서⁠.⁠”

위소강의 목소리는 끝까지 평평했다⁠. 거짓말이 아니었고⁠, 그래서 다름은 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현이 호적을 올려 준 것은 관아의 일이오⁠. 맹은 강호의 일을 보오⁠. 맹규에 따르면 사파는 줄 밖이고⁠, 줄 밖 사람의 민원을 받은 주사는 맹규를 어긴 것이오⁠.⁠”

“⁠흑석곡 서른 가구 가운데 칼을 든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남 주사가 세어 봤소⁠?⁠”

다름은 대답하지 못했다⁠. 흑석곡에는 가 본 적이 없었다⁠. 강 건너에서 기와지붕만 보았을 뿐이었다⁠.

위소강이 처분서를 썼다⁠. 쓰는 동안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민원실 주사 남다름⁠, 오늘부터 열흘 정직⁠. 3월 15일에 접수한 흑석곡 민원은 줄 밖 사람의 민원이므로 무효⁠. 같은 날 묶어 받은 점창 분타의 민원도 함께 무효로 하고⁠, 점창 분타는 원하면 다시 내시오⁠.⁠”

“⁠무효가 되면 이레도 없어집니다⁠.⁠”

“⁠그렇소⁠. 맹규에 따르면⁠.⁠”

“⁠그러면 점창 분타와 흑석곡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맹 밖 사람과 맹 문파 사이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소⁠.⁠” 위소강이 처분서에 감찰원 도장을 찍었다⁠. 소리가 작았다⁠. “⁠남 주사가 잠깐 무언가를 만들었다가⁠, 지금 내가 원래대로 돌려놓은 것이오⁠.⁠”

*

민원실에 돌아오니 왕춘삼이 다름의 창구에 앉아 있었다⁠. 허리는 다 나았는지 의자에 꼿꼿이 앉아 번호패를 부르고 있었다⁠. 다름을 보자 목소리를 낮췄다⁠.

“⁠들었어⁠. 열흘이라며⁠.⁠”

천무량이 안쪽 방에서 나와 손을 내밀었다⁠. 다름은 한참 서 있다가 접수 도장을 천무량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천무량은 도장을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열흘 맡아 둔다⁠.⁠” 천무량은 한 마디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후에 주태곤이 창구에 왔다⁠. 오늘은 칼을 뽑지 않았다⁠. 왕춘삼 대신 창구 옆에 쪼그려 앉은 다름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었다⁠.

“⁠우리 분타 민원도 무효라던데⁠.⁠”

“⁠같이 묶어 받았으니 같이 무효가 됐습니다⁠. 다시 내시면 됩니다⁠.⁠”

“⁠다시 내면 이레가 또 생기오⁠?⁠”

“⁠생깁니다⁠. 흑석곡은 이제 낼 수 없으니⁠, 대사형님 혼자 내시는 이레가 됩니다⁠.⁠”

주태곤은 한참 서 있었다⁠. 장발 끝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했다⁠.

“⁠나는 이레 동안 칼 안 뽑으려고 했는데⁠.⁠” 주태곤이 중얼거렸다⁠. “⁠분타주님은 오늘 아침에 물길에 돌 하나 더 얹으라고 하시더군⁠. 이제 이레가 없다고⁠.⁠”

주태곤은 민원을 다시 내지 않고 돌아갔다⁠. 다름은 창구 옆에 쪼그린 채로 있었다⁠. 왕춘삼이 다음 번호를 부르는 사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요새 이상한 게 있어⁠. 투함 말이야⁠.⁠”

정문 옆 담에는 손바닥 너비로 구멍을 뚫은 나무 상자가 박혀 있었다⁠. 신시가 지나 창구가 닫힌 뒤에 온 사람은 두루마리를 구멍에 넣고 갔고⁠, 이튿날 아침 실장이 열쇠로 열어 창구에 나눠 주었다⁠.

“⁠흑석곡 근처 마을 사람들이 와서 그래⁠. 밤에 투함에 넣었는데 접수증이 안 왔다고⁠. 하촌⁠, 석교촌⁠, 안골⁠. 그런데 아침에 열어 보면 그 동네 건 하나도 없어⁠.⁠” 왕춘삼이 번호패를 통에 넣었다⁠. “⁠맹규에 투함 열쇠는 실장하고 감찰원만 갖게 돼 있어⁠. 22년 여기 있었는데⁠, 투함에서 두루마리가 걸어 나가는 건 못 봤어⁠.⁠”

다름은 담에 박힌 투함을 보았다⁠. 구멍 위에 비를 막는 작은 처마가 달려 있었고⁠, 옆에 「⁠신시 이후 민원은 이곳에⁠」라는 패가 비뚜름하게 박혀 있었다⁠. 글씨가 바래 「⁠민원⁠」 두 글자만 겨우 읽혔다⁠. 자물쇠는 놋쇠였는데⁠, 열쇠 구멍 둘레만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아침마다 한 번 여는 자물쇠치고는 닳은 자리가 넓었다⁠. 감찰원 서리들이 들고 가던 옻칠 상자가 떠올랐다⁠.

*

3월 17일 밤 하숙방 지붕에서 기왓장 하나가 들썩였다⁠. 다름이 촛불을 들고 올려다보자 서까래 사이로 매향의 얼굴이 거꾸로 내려왔다⁠. 머리 꽃비녀가 달랑거렸다⁠.

“⁠문으로 오시면 됩니다⁠.⁠”

“⁠문으로 오면 하숙집 주인이 사파 왔다고 소리 질러⁠.⁠” 매향이 지붕에서 방바닥으로 가볍게 내려왔다⁠. 부채는 이미 펴져 있었다⁠. “⁠흑석곡 민원⁠, 무효래⁠. 오늘 점창 놈들이 분타 아래 물길에 돌을 하나 더 얹었어⁠. 이레가 없어졌다고 대놓고⁠.⁠”

“⁠알고 있습니다⁠.⁠”

“⁠같은 줄에 세워 준다더니 줄째로 치웠네⁠.⁠”

“⁠제가 치운 게 아닙니다⁠.⁠”

“⁠네 도장이 찍혔다가 지워졌잖아⁠. 우리한테는 그게 그거야⁠.⁠”

다름은 촛불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려 촛농이 탁자에 떨어졌다⁠.

“⁠남궁세가 쌀 수레를 터셨습니까⁠?⁠”

방이 조용해졌다⁠. 매향의 부채가 천천히 접혔다⁠.

“⁠감찰관이 그 얘기를 했구나⁠.⁠”

“⁠3년 전 겨울 숭산 남쪽 고갯길⁠. 쌀 서른 섬⁠. 마부 둘이 다쳤다고 했습니다⁠. 부채를 쓴 사람이 채주의 딸이었다고⁠.⁠”

“⁠털었어⁠.⁠” 매향이 다름을 똑바로 보았다⁠. “⁠그해 겨울 산채에 먹을 게 없었어⁠. 아버지는 앓아누웠고⁠, 애들이 나무껍질을 삶아 먹었어⁠. 마부는 내가 친 게 아니야⁠. 우리 사내 하나가 쳤고⁠, 나는 그 사내를 그날로 산에서 내쫓았어⁠. 그래도 내가 턴 거야⁠.⁠”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네가 안 물었잖아⁠. 맹은 줄에 세우기 전에 그런 거 묻는 데야⁠?⁠” 매향이 웃었는데 웃음이 짧았다⁠. “⁠그래서 깃발 내렸어⁠. 그래서 감자 심고⁠, 그래서 지현한테 세금 내고⁠, 그래서 네 창구 앞에서 밤샌 거야⁠.⁠”

다름은 오래 서 있다가 의자에 앉았다⁠. 매향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 앞에 사서가 무릎 높이로 쌓여 있었고⁠, 맨 위에 붉은 먹으로 크게 「⁠낙⁠」 자가 찍힌 향시 답안 석 장이 겹쳐 있었다⁠. 매향이 맨 위 장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뭐야⁠?⁠”

“⁠향시 답안입니다⁠. 세 번 다 떨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붙은 줄 아십니다⁠. 관복을 입고 내려갔더니 떡을 돌리셨습니다⁠.⁠”

매향은 답안을 내려놓고 낙 자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그럼 너도 털었네⁠. 어머니 떡⁠.⁠”

다름은 웃었다⁠. 오늘 처음이었다⁠. 웃음이 가라앉자 매향의 말이 다시 돌아왔다⁠. 맹규 어디에도 3년 전 겨울 쌀 서른 섬을 턴 사람이 양민이 될 수 있는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될 수 없다는 말도 없었다⁠.

“⁠채주⁠.⁠”

“⁠매향이라고 해⁠. 채주는 깃발이랑 같이 내렸어⁠.⁠”

“⁠매향 씨⁠. 흑석곡 근처 마을 사람들이 밤에 투함에 민원을 넣었다고 합니다⁠. 하촌⁠, 석교촌⁠, 안골⁠. 그런데 아침에 열면 없답니다⁠.⁠”

매향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촌 사람들이 그랬어⁠. 수길이 장례 끝나고 할멈이 마을 사람들이랑 같이 썼대⁠. 흑석곡 사람들은 칼 안 든 이웃이라고⁠. 투함에 넣었는데 소식이 없대⁠.⁠”

“⁠누가 꺼내 갑니다⁠.⁠”

“⁠누가⁠?⁠”

“⁠열쇠가 있는 사람이요⁠.⁠” 다름은 품에서 위소강의 처분서를 꺼내 펼쳤다⁠. 열흘 정직⁠. 「⁠오늘부터⁠」에 감찰원 도장이 찍혀 있었다⁠. “⁠열흘 동안 낮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밤에 하겠습니다⁠.⁠”

“⁠밤에 뭘⁠?⁠”

“⁠투함을 지키겠습니다⁠.⁠”

매향이 부채를 다시 폈다⁠. 촛불이 부채 바람에 흔들렸다⁠.

“⁠무공 하나도 모르는 주사가 밤에 혼자⁠?⁠”

“⁠혼자 하겠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매향은 대답하지 않고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기왓장이 다시 들썩였고⁠, 서까래 사이로 얼굴이 한 번 더 거꾸로 내려왔다⁠.

“⁠내일 해시⁠. 정문 앞 향나무⁠. 감자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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