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55자)

백팔십칠 번 손님

무림맹 민원실 · 하로운

3월 15일 묘시⁠, 다름이 민원실 문 앞에 닿았을 때 문간에는 벌써 사람이 하나 웅크려 있었다⁠. 검은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문짝에 등을 기댄 채였는데⁠, 망토 밖으로 매화 그린 흰 부채 끝이 삐죽 나와 있었다⁠. 다름이 헛기침을 하자 망토가 꿈틀했다⁠.

“⁠몇 시야⁠?⁠”

“⁠묘시입니다⁠. 진시에 엽니다⁠.⁠”

“⁠그럼 한 시진 더 잔다⁠.⁠” 매향이 망토를 다시 끌어 덮었다⁠. “⁠일 번 내 거야⁠. 뺏어 가면 부채로 맞는다⁠.⁠”

“⁠여기서 주무셨습니까⁠?⁠”

“⁠어제 해 지고 왔어⁠. 순번제 첫날이잖아⁠. 일 번이 사파면 재밌을 것 같아서⁠.⁠”

다름은 문 자물쇠를 열고 번호패 통에서 첫 패를 꺼내 망토 위에 올려놓았다⁠. 「⁠001⁠」⁠. 매향은 망토 밖으로 손만 내밀어 패를 집어 품에 넣었다⁠.

대청에 들어서자 안쪽 방문 앞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천무량의 글씨였다⁠. 「⁠왕 주사 허리⁠. 오늘 민원은 전부 남 주사 창구로⁠」⁠. 왕춘삼의 창구 탁자는 깨끗이 비어 있었고⁠, 의자 위에 「⁠담당자 부재중⁠」 패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다름은 쪽지를 떼어 들고 한참 보았다⁠. 순번제를 한 달 해 보라는 총관의 말을⁠, 천무량은 한 달 동안 혼자 다 해 보라는 말로 읽은 모양이었다⁠.

*

진시 북이 울리자 줄이 대청으로 들어왔다⁠. 아홉 대문파와 다섯 세가 사람들이 늘 하던 대로 줄 옆을 지나 앞으로 나왔다가⁠, 탁자 위 나무패를 보고 멈췄다⁠. 「⁠이 창구는 번호표 순서대로 받습니다⁠. 금칠 패는 쓰지 않습니다⁠」⁠.

남궁세가 집사가 금칠 패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비단 소매에서 향 냄새가 났다⁠.

“⁠남궁세가요⁠.⁠”

“⁠번호표 뽑으세요⁠.⁠”

“⁠남궁세가라 했소⁠.⁠”

“⁠들었습니다⁠. 번호표 뽑으세요⁠.⁠”

집사가 통에 손을 넣었다⁠. 나무패가 덜컥거렸다⁠. 꺼낸 패에는 「⁠187⁠」이 새겨져 있었다⁠. 집사는 패를 뒤집어 보았다⁠. 뒤에도 백팔십칠이었다⁠. 대기 의자 맨 끝⁠, 돼지 치는 사내 옆자리 하나만 비어 있었다⁠. 집사가 비단 도포 자락을 걷고 앉자 돼지 치는 사내가 반갑게 웃었다⁠.

“⁠처음 오셨소⁠? 여기 오래 걸려요⁠. 고구마 드실라우⁠?⁠”

집사는 고구마를 받지 않았다⁠. 대신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대기 의자 곳곳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다⁠. 사십 번 패를 쥔 소림 승려는 아까부터 눈을 감고 염주를 굴렸는데⁠, 기다리는 일이 수행이라 그런지 얼굴이 누구보다 편했다⁠.

“⁠일 번 손님⁠.⁠”

매향이 부채를 탁 펴며 창구 앞에 앉았다⁠. 망토는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고⁠, 연보라 옷자락에 아직 새벽 이슬이 묻어 있었다⁠. 매향은 품에서 두루마리 둘을 꺼냈다⁠. 하나는 지난번 반려된 우물 민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누런 종이였다⁠.

“⁠등봉현 호적 증서야⁠. 지난해 동짓달에 지현 나리가 흑석곡 서른 가구를 황책에 올렸어⁠. 나라에서 백성 호구를 적어 두는 그 누런 책⁠. 세금도 냈어⁠. 감자로⁠.⁠”

다름은 증서를 펼쳤다⁠. 등봉현 지현의 붉은 관인이 반듯하게 찍혀 있었고⁠, 흑석곡 서른 가구의 호주 이름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맨 앞이 연매향이었다⁠. 다름은 맹규를 머릿속으로 넘겼다⁠. 민원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맹에 속한 문파와 맹 둘레 고을의 양민⁠. 흑석곡은 맹에서 남쪽으로 서른 리 남짓⁠, 하촌 강 건너였다⁠. 둘레 고을이었다⁠. 호적이 있으니 양민이었다⁠.

“⁠흑풍채는 사파입니다⁠.⁠”

“⁠흑풍채는 2년 전에 깃발 내렸어⁠. 지금은 흑석곡 서른 가구야⁠.⁠” 매향이 부채를 접었다⁠. “⁠깃발도 보여 줄까⁠? 우리 집 부엌에서 행주로 쓰고 있어⁠.⁠”

다름은 두루마리를 받아 펼쳤다⁠. 「⁠점창 분타가 흑석곡 우물 물길을 막았다⁠. 물길을 열어 달라⁠」⁠. 다름은 도장에 인주를 묻혔다⁠. 대청이 조용해졌다⁠. 사파라는 말이 이미 줄을 한 바퀴 돌았고⁠, 대기 의자의 칼 찬 사람들이 다름의 손을 보고 있었다⁠. 남궁 집사가 코를 막던 손수건을 내렸다⁠.

도장이 종이에 닿았다⁠. 「⁠3월 15일 접수⁠」⁠. 이레째는 3월 21일이었다⁠.

“⁠흑석곡 서른 가구 민원⁠, 접수됐습니다⁠. 오늘부터 이레 동안 점창 분타와 흑석곡은 칼을 뽑지 못합니다⁠.⁠”

매향이 접수증을 받아 들고 한참 보았다⁠. 붉은 도장을 엄지로 쓸어 보았는데⁠, 인주가 손가락에 묻어나자 그대로 손등에 쓱 닦았다⁠.

“⁠처음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우리가 맹 종이에 이름 올라간 거⁠.⁠” 매향이 일어났다⁠. “⁠어디 안 가⁠. 저기 앉아서 다 볼 거야⁠.⁠”

*

구 번은 주태곤이었다⁠. 순번제 이야기를 듣고 금칠 패 대신 번호표를 뽑아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창구에 앉자마자 탁자 위 접수증 사본에서 「⁠점창 분타⁠」 네 글자를 보았다⁠. 칼이 뽑혔고⁠, 탁자에 꽂혔다⁠. 칼날은 지난번에 뚫린 구멍으로 정확히 다시 들어갔다⁠.

다름은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칼날이 꼭 맞게 들어가 있었다⁠.

“⁠같은 구멍에 꽂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탁자에 구멍이 하나 덜 났습니다⁠.⁠”

“⁠뭐요⁠?⁠”

다름은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칼 옆에 놓았다⁠. 「⁠맹 재산 손괴 — 창구 탁자 한 개⁠, 은 두 냥⁠」⁠. 아침에 미리 써 둔 것이었다⁠.

“⁠지난번 몫입니다⁠. 이번 것은 같은 구멍이라 안 받습니다⁠.⁠”

주태곤의 입이 벌어졌다⁠. 대기 의자 뒤에서 매향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떨었다⁠. 주태곤이 홱 돌아보았다⁠.

“⁠웃지 마라⁠, 사파⁠!⁠”

“⁠흑석곡 양민이야⁠. 방금 맹 도장 받았어⁠.⁠”

“⁠우리 분타 땅에서 솟는 물을 너희가 훔쳐 쓰는 거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 너희 분타 생기기 전부터 흘렀어⁠.⁠”

“⁠분타 생기기 전에 너희는 산에서 칼 들고 있었지⁠!⁠”

매향이 벌떡 일어났다⁠. 부채가 반쯤 펴졌다⁠. 주태곤이 탁자에서 칼을 뽑으려 했는데⁠, 다름이 두 손으로 칼자루를 덮었다⁠. 손등이 칼 손잡이 위에 포개졌다⁠. 주태곤의 손과 다름의 손이 맞닿았다⁠. 주태곤의 손은 굳은살이 박여 돌 같았고⁠, 다름의 손은 인주 때문에 붉었다⁠.

“⁠이레입니다⁠.⁠” 다름이 말했다⁠. “⁠3월 15일부터 이레⁠, 점창 분타와 흑석곡은 칼을 못 뽑습니다⁠. 대사형님 민원도 지금 받겠습니다⁠. 같은 물길 일이니 한 다툼으로 묶겠습니다⁠. 그러면 두 분 다 이레 동안 기다리셔야 합니다⁠.⁠”

주태곤은 다름의 붉은 손을 내려다보다가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두루마리를 탁자에 던지듯 놓았다⁠. 「⁠사파 무리가 분타 물을 훔쳐 쓴다⁠. 산에서 내보내 달라⁠」⁠. 다름은 도장을 찍었다⁠. 매향이 다시 앉았고⁠, 주태곤은 칼을 뽑아 칼집에 넣고는 대청 반대편 끝 의자에 가서 앉았다⁠. 둘은 처마 끝까지 서로를 노려보면서도 나가지 않았다⁠.

*

사시 무렵에는 지붕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정확히는 내려앉았다⁠. 줄 맨 끝에 있던 젊은 검객 하나가 기다리다 못해 경공으로 대청 들보를 타고 날아와 창구 바로 앞에 사뿐히 발을 디뎠다⁠. 도포 자락이 멋지게 펄럭였고⁠, 대기 의자의 몇 사람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번호표 몇 번이십니까⁠?⁠”

“⁠백오십육 번이오⁠. 앞이 비었길래⁠.⁠”

“⁠앞이 빈 게 아니고 지금 십이 번 손님이 뒷간에 가셨습니다⁠.⁠”

십이 번 손님이 바지춤을 여미며 돌아오다가 제자리에 선 검객을 보고 멈칫했다⁠. 검객은 얼굴이 붉어져 도로 들보로 뛰어올랐는데⁠, 이번에는 착지할 자리를 못 찾아 들보에 한참 매달려 있었다⁠. 다름은 붓을 뽑아 나무패에 새 글을 썼다⁠. 「⁠경공으로 줄 앞에 내려앉지 마십시오⁠」⁠. 패를 창구 옆에 세우자 들보에 매달린 검객이 패를 읽고 조용히 줄 끝으로 내려갔다⁠.

*

점심때 하숙집 주인이 개봉에서 온 편지를 들고 왔다⁠. 어머니의 편지는 언제나 두부 이야기로 시작했다⁠. 콩이 비싸져 한 모에 동전 하나를 더 받는데 손님이 줄지 않았다고 했다⁠. 그다음은 맹에서 관복 입은 아들이 장가를 언제 가느냐는 이야기였다⁠. 옆집 딸은 시집을 갔고⁠, 사위는 칼 차고 다니는 사람이라 무섭다고 했다⁠. 다름은 편지를 접어 품에 넣다가 대기 의자의 매향과 눈이 마주쳤다⁠. 매향이 부채로 편지를 가리켰다⁠.

“⁠어머니야⁠?⁠”

“⁠두부 값이 올랐답니다⁠.⁠”

“⁠장가가래지⁠?⁠”

다름은 대답 대신 감자를 꺼냈다⁠. 매향은 묻지 않고 만두 두 개를 탁자로 굴려 보냈다⁠.

*

백팔십칠 번이 불린 것은 신시가 가까워서였다⁠. 남궁 집사는 반나절 동안 돼지 치는 사내의 고구마를 두 번 거절하고 세 번째에 받아먹었다⁠. 창구에 앉으며 입가의 고구마 껍질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남궁세가 가주의 서신이오⁠. 민원으로 접수하시오⁠.⁠”

다름은 서신을 펼쳤다⁠. 「⁠민원실 남 주사가 사파 무리의 민원을 받은 일은 맹규에 어긋나니⁠, 감찰원이 살펴 주기를 청한다⁠. 남궁태열⁠」⁠.

다름은 서신을 두 번 읽었다⁠. 자기를 걸어서 낸 민원이 자기 창구로 들어왔다⁠. 접수 도장은 다름의 손에 있었다⁠. 집사가 턱을 들었다⁠.

“⁠찍기 싫으시오⁠?⁠”

“⁠접수는 순서대로 합니다⁠. 백팔십칠 번이시니 찍습니다⁠.⁠”

다름은 도장을 찍었다⁠. 「⁠3월 15일 접수⁠」⁠. 대기 의자에서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집사는 접수증을 받아 들고 나가면서 돼지 치는 사내에게 고구마 고맙다고 고개를 까딱했다⁠.

*

이백삼 번은 오후 늦게 줄에 붙은 사람이었다⁠. 마른 몸에 짙은 남색 관복을 입었고⁠, 허리에 칼 대신 놋쇠 열쇠 꾸러미를 찼다⁠. 대청에 들어와 통에서 번호패를 뽑고⁠, 아무 말 없이 맨 끝 의자에 앉아 두 시진을 기다렸다⁠. 줄이 줄어드는 동안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한 번도 다리를 꼬지 않았다⁠. 대기 의자에서 칼 찬 사람들이 사내 옆자리를 슬금슬금 비웠다⁠.

신시 북이 울리기 직전⁠, 다름이 이백삼 번을 불렀다⁠. 사내가 일어나 창구에 앉았다⁠.

“⁠맹 감찰관 위소강이오⁠. 맹규에 따르면 감찰관도 민원실에서는 번호표를 뽑아야 하오⁠. 그래서 뽑았소⁠.⁠” 위소강이 접힌 종이 한 장을 탁자에 놓았다⁠. “⁠맹규에 따르면⁠, 민원을 받은 주사가 감찰 대상이 되면 직접 출두하게 돼 있소⁠. 남궁세가의 민원은 방금 남 주사가 접수했고⁠.⁠”

종이에는 「⁠3월 17일 진시⁠, 감찰원 출두⁠」가 쓰여 있었다⁠. 감찰원 도장이 찍혀 있었다⁠.

“⁠번호표 순서를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맹규에 그렇게 돼 있으니까⁠.⁠” 위소강이 일어났다⁠. “⁠나는 맹규에 있는 일만 하오⁠, 남 주사⁠. 남 주사도 그러시오⁠.⁠”

위소강이 나가자 안쪽 방문이 열렸다⁠. 천무량이 찻잔을 들고 문지방에 서 있었다⁠. 하루 종일 문틈으로 보고 있었던 얼굴이었다⁠.

“⁠사파 민원을 받았다고⁠?⁠”

“⁠흑석곡 양민 민원입니다⁠. 지현 관인이 있습니다⁠.⁠”

“⁠맹은 지현 밑이 아니다⁠.⁠”

“⁠맹규에도 지현 밑이라는 말은 없지만⁠, 양민을 받지 말라는 말도 없습니다⁠.⁠”

천무량이 식은 차를 마셨다⁠. 대기 의자에서는 매향이 아직 부채를 부치고 있었고⁠, 반대편 끝에서는 주태곤이 팔짱을 끼고 졸고 있었다⁠. 둘 다 창구가 닫히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누가 먼저 나가는지 보려는 얼굴들이었다⁠.

“⁠감찰원은 북쪽 회랑 끝이다⁠.⁠” 천무량이 말했다⁠. “⁠길 잃지 마라⁠. 거기는 번호표 뽑고도 잘 안 불러 준다⁠.⁠”

다름은 탁자 구멍에 남은 나뭇조각을 손가락으로 털어 냈다⁠. 접수증 사본 둘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에는 흑석곡이⁠, 하나에는 점창 분타가 쓰여 있었고⁠, 두 장 다 「⁠3월 15일 접수⁠」였다⁠. 매향과 주태곤은 신시 북이 다 울릴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다름이 대청 등잔을 하나씩 끄기 시작하자⁠, 둘은 동시에 일어나 정문으로 걸어갔다⁠. 문턱에서 어깨가 부딪쳤고⁠, 둘 다 먼저 나가겠다고 버티다가 문지기가 문을 반쯤 닫는 바람에 한꺼번에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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