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53자)

자정의 도장

무림맹 민원실 · 하로운

6월 14일 자시⁠, 매향은 산등성이를 타고 흑석곡 쪽 골짜기로 내려가며 숨을 셌다⁠.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마다 발이 바위 하나씩을 짚었다⁠. 주태곤은 반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고르지 않게 잘린 머리가 바람에 엉켰고⁠, 허리띠에 끼운 감자가 달리는 내내 옆구리를 쳤다⁠.

골짜기 어귀가 보였다⁠. 횃불이 강물처럼 이어져 있었다⁠. 점창 제자 서른이 앞줄에⁠, 남궁 무사 이백이 뒷줄을 채웠다⁠. 맨 앞 바위 위에 분타주가 향시계를 들고 있었다⁠. 가는 향을 홈에 눕혀 태우는 나무 시계였다⁠. 향불이 자정 눈금까지 손가락 한 마디를 남겨 두고 있었다⁠. 분타주 옆에는 남궁 무사장이 칼자루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칼은 칼집에서 반쯤 나와 있었다⁠.

골짜기 안쪽에는 흑석곡 서른 가구 가운데 남은 사람들이 마을 어귀 망루 아래 모여 있었다⁠. 사내 절반이 야간 창구 줄에 가 있었다⁠. 남은 것은 아낙과 노인이었다⁠. 아낙들은 물동이를 엎어 놓고 위에 감자 자루를 쌓았다⁠. 담이라고 하기엔 낮았다⁠.

매향은 망루 꼭대기로 뛰어올랐다⁠. 빨랫줄이 발에 걸려 저고리 두 벌과 버선 한 켤레가 횃불 위로 날아갔다⁠. 점창 제자 하나가 버선을 얼굴에 맞고 뒤로 물러났다⁠. 횃불 줄이 잠깐 웅성였다⁠.

“⁠무림맹 처분이다⁠!⁠”

매향이 기름종이를 풀었다⁠. 처분서 사본이 바람에 펄럭였다⁠. 매향은 망루 난간을 한 손으로 잡고 읽었다⁠. 목소리가 골짜기 벽에 부딪혀 두 번씩 울렸다⁠.

“⁠점창 하남 분타의 흑석곡 땅 민원은 기각한다⁠! 땅 문서 사본은 날짜를 고친 것이다⁠! 흑석곡 서른 가구는 등봉현 양민이다⁠! 점창 분타는 막은 물길을 이레 안에 연다⁠! 이 처분에 칼을 뽑는 자는 맹규로 다스린다⁠!⁠”

분타주가 향시계를 들어 보였다⁠.

“⁠그 종이가 진짜인지 누가 아나⁠? 자정까지 한 마디 남았다⁠. 한 마디 지나면 맹은 묻지 않는다⁠.⁠”

“⁠진짜요⁠.⁠”

주태곤이 망루 아래로 걸어 나왔다⁠. 칼은 칼집째 손에 들었다⁠. 점창 제자들이 대사형을 보고 술렁였다⁠.

“⁠분타주님⁠. 저는 오늘 해시에 야간 창구에서 분타주님을 걸어 민원을 냈습니다⁠. 땅 문서 일로⁠. 남궁세가 사람들이 다녀간 다음 날 등봉현 서리에게 은을 준 일로⁠.⁠” 주태곤이 접수증을 펼쳐 보였다⁠. 붉은 야간 도장이 횃불에 번들거렸다⁠. “⁠오늘부터 이레⁠, 분타주님하고 저는 칼을 못 뽑습니다⁠. 분타주님이 칼을 뽑으시면⁠, 맹규로 다스리는 사람이 둘이 됩니다⁠. 흑석곡 일 하나⁠, 제 일 하나⁠.⁠”

분타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점창 제자들이 한 사람씩 칼자루에서 손을 내렸다⁠. 맨 앞줄 제자 하나가 횃불을 땅에 꽂고 물러났다⁠. 석 달 전 물길에 돌을 얹던 제자였다⁠.

남궁 무사장이 칼을 끝까지 뽑았다⁠.

“⁠남궁은 그 처분의 당사자가 아니오⁠. 남궁은 이레를 받은 적이 없소⁠.⁠”

“⁠처분서 끝줄 들었지⁠?⁠” 매향이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칼 뽑는 자는 누구든 맹규로 다스린대⁠. 당사자 아니어도⁠.⁠”

무사장의 칼이 먼저 왔다⁠. 매향의 부채가 칼날을 받아 옆으로 흘렸다⁠. 두 번째 칼이 부채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매향의 왼팔 소매를 찢었다⁠. 소매 속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아낙들이 비명을 삼켰다⁠. 매향은 물러나지 않았다⁠. 세 번째 칼이 오기 전에 부채를 접어 무사장의 손목을 쳤다⁠. 칼이 땅에 떨어졌다⁠. 매향은 칼을 발로 밟고 버텼다⁠. 왼팔에서 떨어진 피가 칼등에 방울졌다⁠.

무사장 뒤로 남궁 무사 이백이 웅성거렸다⁠. 앞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가주의 신호가 오지 않았다⁠. 신호 없이 칼을 들고 맹 처분을 넘으면⁠, 칼 한 자루 한 자루가 남궁세가가 맹규를 넘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분타주의 향시계에서 향불이 마지막 눈금에 닿았다⁠. 향이 끝까지 탔다⁠. 재가 홈에 떨어졌다⁠. 자정이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주태곤이었다⁠. 주태곤은 칼을 망루 기둥에 기대 세우고 골짜기 위 물길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하나⁠, 또 하나⁠. 석 달 전 돌을 얹던 맨 앞줄 제자가 횃불을 들고 뒤따라 올라갔다⁠. 이어서 점창 제자 둘이⁠, 다섯이 올라갔다⁠. 분타주는 향시계를 든 채 바위 위에 서서 제자들의 등을 보았다⁠. 아무도 분타주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참 뒤 골짜기 안에서 물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실 같은 소리였다⁠. 개울 바닥을 핥으며 내려오던 소리가 우물 돌 틈으로 떨어지는 소리로 바뀌었다⁠. 망루 아래 아낙 하나가 우물로 달려가 두레박을 내렸다⁠. 두레박이 물에 닿는 소리가 났다⁠. 아낙은 두레박을 올리지 않고 우물 가장자리를 붙들고 주저앉았다⁠.

매향은 무사장의 칼을 발로 밟은 채⁠, 왼팔을 오른손으로 누르고 물소리를 들었다⁠. 남궁 무사장이 떨어진 칼을 내려다보았다⁠. 매향이 발을 떼어 주었다⁠. 무사장은 칼을 주워 칼집에 넣고⁠, 이백 명에게 손짓을 했다⁠. 횃불 강이 천천히 골짜기 밖으로 흘러 나갔다⁠.

*

같은 시각 서쪽 담 밖 야간 창구에서⁠, 다름은 이백십이 번을 불렀다⁠. 돌다리 이장 부인이었다⁠. 콩 주머니를 탁자에 쏟더니 콩 한 알을 골라 만족 통에 넣고⁠, 나머지를 도로 담아 갔다⁠. 민원은 없었다⁠.

이백구 번부터 이백십일 번까지는 석교촌 사람들이었다⁠. 우돌이 셋을 대표해 창구에 앉더니⁠, 민원 대신 번호패를 하나 가져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아이들한테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다름은 맹 재산이라 안 된다고 했다⁠. 우돌이 시무룩해지자 왕춘삼이 옆에서 청송 나무패 하나를 꺼내 주었다⁠. 땔감 바구니에서 살아남은 것이었다⁠. 우돌은 「⁠줄 선 차례대로⁠」가 새겨진 나무패를 받아 들고 진짜보다 낫다며 품에 넣었다⁠.

“⁠이백십삼 번 손님⁠.⁠”

남궁태열이 일어났다⁠. 손바닥에 쥐었던 감자 껍질을 할멈 앞치마 주머니에 털어 넣고⁠, 창구 앞 의자에 앉았다⁠. 두루마리를 탁자에 올렸다⁠. 다름은 펼쳐 읽었다⁠. 이미 들은 민원이었다⁠. 무당파 장문이 흑풍채를 외문으로 받아 칼을 들게 하려 한 일⁠.

다름은 옛 야간 도장에 인주를 묻혔다⁠. 줄 끝에서 청송 진인이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다름은 도장을 찍었다⁠. 「⁠6월 14일 야간 접수⁠」⁠.

“⁠무당파 장문 청송⁠, 오늘부터 이레 동안 남궁세가와 칼을 뽑지 못합니다⁠. 처분 전인 민원이 걸렸으니 내일 아침 투표에 오르지 못합니다⁠.⁠”

청송 진인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남궁태열은 접수증을 받아 접고 일어나지 않았다⁠.

“⁠이백십사 번 손님⁠.⁠”

남궁태열이 의자에서 일어나 옆으로 비켰다⁠. 청송 진인이 빈 의자에 앉았다⁠. 청송의 두루마리가 탁자에 놓였다⁠. 감찰원 뒷방 상자⁠, 남궁세가 가주의 인장이 찍힌 편지⁠. 다름은 도장을 찍었다⁠. 같은 소리가 났다⁠.

“⁠남궁세가 가주 남궁태열⁠, 오늘부터 이레 동안 무당파와 칼을 뽑지 못합니다⁠. 처분 전인 민원이 걸렸으니 내일 아침 투표에 오르지 못합니다⁠.⁠”

대기 의자가 조용했다⁠. 등불 심지 타는 소리만 들렸다⁠. 청송 진인이 수염을 쓸지도 않고 다름을 보았다⁠.

“⁠빈도가 하나 늦었을 뿐인데⁠, 둘 다라니⁠.⁠”

“⁠하나 늦으셨습니다⁠. 그리고 둘 다 접수됐습니다⁠.⁠” 다름이 말했다⁠.

청송이 웃었다⁠. 허허 소리가 나지 않는 웃음이었다⁠.

“⁠무당이 흑석곡을 받으려 한 건 사실이오⁠. 칼이 필요했소⁠. 선거 뒤에 남궁이 산을 치러 오면 막을 칼⁠.⁠” 청송이 접수증을 집어 들었다⁠. “⁠빈도도 바보는 아니오⁠, 남 주사⁠. 다만 칼 든 사람 서른을 얻으려다⁠, 감자 든 사람 서른한테 진 것뿐이지⁠.⁠” “⁠처분은 이레 안에 실장님이 내리십니다⁠. 내일 아침 투표는 두 분 없이 하든지⁠, 미루든지⁠, 원로회가 정합니다⁠.⁠”

산길에서 등불 열 개가 내려왔다⁠. 위소강과 감찰원 서리들이 앞장섰고⁠, 맨 뒤에 총관이 있었다⁠. 총관은 숨이 차 있었다⁠. 창구 앞에 이르자마자 야간 접수 현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파면된 자의 도장은 무효요⁠. 오늘 밤 찍은 것은 전부⁠.⁠.⁠.⁠”

“⁠그만두시오⁠.⁠”

남궁태열이었다⁠. 총관이 말을 멈췄다⁠. 남궁태열은 총관을 보지 않고 다름의 탁자에 놓인 이백십삼 번 패를 보았다⁠.

“⁠나는 번호표를 뽑았소⁠. 이백열두 명 뒤에 앉아서 감자를 얻어먹었고⁠, 내 차례에 민원을 냈소⁠. 내 민원이 접수되고 나서 저쪽 민원도 접수됐소⁠.⁠” 남궁태열의 목소리는 원로당에서처럼 낮았다⁠. “⁠이제 와서 이 창구가 무효라고 하면⁠, 내 민원도 무효고 남궁이 반 시진 동안 줄 선 것도 무효요⁠. 나는 무효인 줄에 서지 않소⁠.⁠”

총관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위소강이 한 걸음 나서려 하자 남궁태열이 손바닥을 들었다⁠. 위소강이 멈췄다⁠.

“⁠감찰관⁠. 그 편지는 내가 썼소⁠.⁠” 남궁태열이 말했다⁠. 위소강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집사가 쓴 게 아니오⁠. 내 손으로 썼고⁠, 내 손으로 인장을 찍었소⁠. 원로회에서 한 말은 거짓이었소⁠. 이레 안에 처분이 나면 그대로 받겠소⁠.⁠”

안쪽 방문이 열렸다⁠. 천무량이 문지방에 서 있었다⁠. 남궁태열이 천무량을 보았다⁠. 둘은 한참 서로를 보았다⁠. 30년 전 가마 옆의 젊은 얼굴과 창구의 젊은 얼굴이 등불 아래 늙은 얼굴 둘로 마주했다⁠.

“⁠30년 전 그 밤 같구려⁠, 실장⁠.⁠”

“⁠그날 밤 가주님 아버님은 가마로 돌아가셨습니다⁠.⁠” 천무량이 말했다⁠. “⁠오늘 밤 가주님은 번호표를 쥐고 계십니다⁠.⁠”

남궁태열이 손에 쥔 이백십삼 번 패를 내려다보았다⁠. 엄지로 숫자를 한 번 쓸었다⁠.

“⁠남궁은 내일 맹을 나가겠소⁠. 그건 내 마음이오⁠. 따라올 문파가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구려⁠. 오늘 밤 이 줄을 본 사람들은 안 따라올 테니⁠.⁠” 남궁태열이 허리의 칼을 풀어 칼집째 탁자 옆에 세웠다⁠. 주태곤이 해시에 그랬던 것처럼⁠. “⁠칼은 안 뽑소⁠. 흑석곡에도 안 뽑소⁠. 무사장한테 가는 신호는 없을 것이오⁠.⁠”

새벽 축시⁠, 서쪽 산길에서 등불 하나가 흔들리며 내려왔다⁠. 주태곤이 매향을 등에 업고 오고 있었다⁠. 매향의 왼팔에 주태곤의 수건이 감겨 있었고⁠, 수건 끝에 피가 말라 있었다⁠. 매향은 업힌 채로 부채를 흔들었다⁠.

“⁠아무도 안 뽑았어⁠! 자정 지나고 향시계 다 탔는데⁠, 아무도⁠!⁠”

줄에 선 사람들이 일어났다⁠. 할멈이 일 번 패를 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름은 창구 탁자를 짚고 일어났다가 다리에 힘이 빠져 도로 앉았다⁠.

다름은 두 번째에야 일어나 창구를 왕춘삼에게 맡기고 매향에게 갔다⁠. 주태곤이 매향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다름은 매향의 왼팔에 감긴 수건을 풀어 보려다 손이 떨려 매듭을 못 풀었다⁠. 매향이 웃으며 오른손으로 매듭을 풀어 주었다⁠. 상처는 길었지만 깊지 않았다⁠.

“⁠칼 앞에 서는 거⁠, 이거 생각보다 아프다⁠.⁠”

“⁠그래서 저는 매번 엎드렸습니다⁠.⁠”

“⁠너는 엎드리고 나는 피 나고⁠. 공평하지 않아⁠.⁠” 매향이 다름의 관복 소매를 끌어다 상처에 댔다⁠. 학 한 마리가 붉게 물들었다⁠. “⁠물 내려왔어⁠. 우물에⁠. 두레박 소리 났어⁠.⁠”

다름이 창구로 돌아오자 남궁태열이 칼을 탁자 옆에 세워 둔 채 의자에 다시 앉았다⁠. 등불 아래서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처음으로 쉰일곱 살 얼굴이었다⁠.

“⁠선거는 없네⁠.⁠” 남궁태열이 말했다⁠. “⁠내일 아침에는⁠.⁠”

다름은 이백십삼 번 패와 이백십사 번 패를 나란히 통 옆에 놓았다⁠. 그리고 다음 번호를 불렀다⁠.

“⁠이백십오 번 손님⁠.⁠”

줄 끝에서 위소강이 손을 들었다⁠. 산길을 내려오다 통에서 뽑은 패를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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