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05자)

다음 명목

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 지백솔

봉남은 경로당 작은 방 바닥에 종이를 한 장씩 늘어놓았다⁠. 은행 송금 영수증이었다⁠. 첫 장을 놓고⁠, 손바닥으로 펴고⁠, 다음 장을 첫 장 옆에 놓았다⁠. 손이 기차 승무원이 표를 개찰하듯 반듯했다⁠.

“⁠지점장 양반⁠, 내가 지난번에 거짓말했소⁠.⁠”

순애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이 아팠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통관비⁠, 다음 날 보냈소⁠. 다른 은행 가서⁠. 정 지점장이 또 막을까 봐⁠.⁠” 봉남이 첫 장을 가리켰다⁠. 사백만 원⁠. “⁠그다음 날 특송 회사가 연락 왔소⁠. 상자에 달러가 너무 많아서 돈세탁 아닌 거 증명하는 세금을 내야 된다꼬⁠.⁠” 두 번째 장⁠. 팔백만 원⁠. “⁠그다음에는 금이 깨질 수 있다고 배송 보험을 들어야 된다꼬⁠.⁠” 세 번째 장⁠. 천이백만 원⁠. “⁠그다음에는 엘레나가 한국 오려면 봉사단 계약 해지 위약금이 있다꼬⁠. 그건 엘레나가 직접 울면서 음성으로 보냈소⁠.⁠”

네 번째 장은 송금 영수증이 아니라 대출 약정서였다⁠. 아파트를 담보로 받은 대출 삼천만 원⁠.

순애는 종이 네 장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받는 사람 이름이 네 번 다 달랐다⁠. 남자⁠, 여자⁠, 처음 보는 법인⁠, 다시 남자⁠.

“⁠선생님⁠, 받는 이름이 매번 바뀌었는데 이상하지 않으셨어요⁠?⁠”

“⁠이상했지⁠. 근데 처음 사백을 보내고 나니까⁠, 그 사백이 아까버서 못 멈추겠더라⁠. 세금 안 내면 사백이 날아간다 카고⁠, 보험 안 들면 천이백이 날아간다 카고⁠. 앞에 보낸 돈이 뒤에 보낼 돈을 끌고 가더라⁠. 화물 열차처럼⁠. 기관차가 앞에서 끄는 게 아이라⁠, 뒤에 실은 짐이 무거버서 못 서는 기라⁠.⁠”

“⁠은행에서는 그걸 매몰 비용이라고 해요⁠. 이미 보낸 돈을 살리려고 더 보내는 거요⁠. 창구에서 그런 손님은 영수증을 꼭 쥐고 오세요⁠. 영수증이 돈인 줄 알고요⁠.⁠”

“⁠영수증이 돈이 아이면 뭐요⁠?⁠”

“⁠그 사람들이 다음 명목을 정할 때 보는 거요⁠. 이 사람은 사백을 냈으니 팔백도 낸다⁠, 팔백을 냈으니 천이백도 낸다⁠. 선생님이 낸 돈이 다음 요구의 크기를 정해요⁠.⁠”

봉남은 대출 약정서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운동모를 벗어 무릎에 놓았다⁠.

“⁠집사람이 남긴 집이오⁠. 대출 받는 날 은행 직원이 용도가 뭐냐 묻길래 집수리라 캤소⁠. 엘레나가 그래 말하라 캤소⁠.⁠”

방 문이 열리고 미단이 들어왔다⁠. 휴대전화를 흔들며 들어오다가 바닥의 영수증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탁 사장이 착수금 낸 사람들한테 공탁금을 또 내래요⁠. 해외 법원에 돈을 걸어 둬야 계좌가 풀린대⁠. 일 인당 이백⁠.⁠”

“⁠거 봐라⁠.⁠” 봉남이 영수증 네 장을 모아 반으로 접었다⁠. “⁠내 열차가 탁 사장 열차랑 같은 철로 위에 있네⁠.⁠”

봉남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봉남의 무릎이 소리를 냈다⁠.

“⁠지점장 양반⁠, 내가 이거 들고 경찰 가겠소⁠. 대화방에도 다 올리고⁠. 늙은이가 창피한 거보다 다른 늙은이가 집 날리는 게 더 창피하다⁠.⁠”

봉남은 앉은 자리에서 영수증 네 장을 찍어 「⁠같은 목소리⁠」에 올리고⁠, 사진 밑에 짧게 썼다⁠. 「⁠통관비 다음 세금 다음 보험료 다음 위약금⁠. 다음 역은 없습니더⁠. 탁 사장 공탁금 보내지 마이소⁠.⁠」 오 분 만에 대화방 사람 셋이 「⁠저도요⁠」라고 썼다⁠. 탁 사장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

같은 날 오후 봉남은 고잔지점 지점장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정 지점장이 영수증 네 장을 복사하며 하나씩 짚었다⁠.

“⁠선생님⁠, 지급 정지는 보낸 날 바로 거는 게 제일 좋지만 늦었다고 못 하는 건 아닙니다⁠. 받는 계좌마다 피해 구제 신청을 넣겠습니다⁠. 계좌에 남은 돈이 있으면 나중에 피해자분들한테 나눠서 돌려드려요⁠. 많이는 아니어도요⁠.⁠”

“⁠많이는 아이고⁠.⁠”

“⁠예⁠. 대부분은 이미 빠져나갔을 겁니다⁠.⁠” 정 지점장이 대출 약정서를 집었다⁠. “⁠이건 따로 상담해 드릴게요⁠. 갚는 기간을 늘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집은 지켜야지요⁠.⁠”

봉남이 운동모를 만지작거렸다⁠.

“⁠지점장 양반⁠. 이 사람이 원래 이래 친절했소⁠?⁠”

“⁠제가 가르쳤어요⁠.⁠” 순애가 말했다⁠. “⁠처음에는 시재 천 원 때문에 밤새 울던 사람이에요⁠.⁠”

“⁠지점장님⁠, 그건 비밀이라고 하셨잖아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은 사기꾼만 하는 거래⁠. 오늘 배웠잖아⁠.⁠”

정 지점장이 정수리를 쓸었다⁠. 봉남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웃다가 영수증 복사본을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지난번 송금 신청서가 들어 있던 주머니였다⁠. 이번에는 영수증이 아니라 지급 정지 접수증이 같이 들어갔다⁠.

*

밤 열한 시 이십 분⁠, 소롬의 막차는 고잔역 앞 정류장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재빈이 올랐다⁠. 언제나 타던 정류장⁠, 언제나 앉던 자리⁠, 운전석 대각선 뒤 두 번째 좌석⁠. 버스에는 둘뿐이었다⁠.

소롬은 안내 방송을 하지 않았다⁠. 재빈이 앉자 문을 닫고 출발했다⁠. 정류장 여섯 개를 지나는 동안 아무도 타지 않았고⁠, 아무도 하차 벨을 누르지 않았다⁠. 종점 회차지에 들어서자 소롬은 시동을 끄고 실내등을 켰다⁠. 형광등이 깜빡이다 켜졌다⁠.

“⁠재빈 씨⁠, 일어나⁠.⁠”

재빈이 일어났다⁠. 소롬이 운전석에서 내려 통로로 걸어왔다⁠. 둘 사이에 손잡이가 몇 개 매달려 흔들렸다⁠.

“⁠처음 내 버스 탄 거⁠, 시킨 거야⁠?⁠”

재빈은 손잡이 하나를 잡았다⁠.

“⁠네⁠.⁠”

“⁠안내 방송 좋다는 말도⁠?⁠”

“⁠그건 제가 했어요⁠. 시킨 건 버스를 타라는 거였고요⁠. 처음 한 달은 시켜서 탔어요⁠. 소롬 씨 노선⁠, 퇴근 시간⁠, 어머님 사시는 데⁠. 위에 올렸어요⁠.⁠” 재빈이 숨을 들이켰다⁠. 짧게 두 번⁠. “⁠두 번째 달부터는 아무도 안 시켰는데 탔어요⁠. 위에서 이제 됐다고 했는데도 탔어요⁠. 종점까지 가서 다음 차로 돌아오면서⁠, 소롬 씨가 「⁠이번 정류장은⁠」 하는 걸 하루에 마흔 번 들었어요⁠. 단지에서는 하루에 수백 번 거짓말을 녹음했는데⁠, 소롬 씨 버스에서는 아무도 거짓말을 안 했어요⁠. 다음 정류장이 진짜로 다음에 나왔어요⁠.⁠”

소롬은 통로 바닥을 보았다⁠. 누군가 흘린 껌 종이가 있었다⁠.

“⁠엄마 일억은 왜 미뤘어⁠?⁠”

“⁠소롬 씨 어머님이니까요⁠.⁠”

“⁠나 때문에 다른 사람 엄마들 돈은 계속 받고⁠?⁠”

재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이 하얗게 되었다⁠.

“⁠재빈 씨⁠, 나 운전할 때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사고가 아니야⁠. 사고 낸 다음에 그냥 가는 거⁠. 뺑소니⁠. 재빈 씨는 지금 뺑소니야⁠. 엄마 돈만 피해 가고⁠, 다른 데서는 계속 치고 가⁠.⁠”

“⁠알아요⁠.⁠”

“⁠그럼 세워⁠.⁠” 소롬이 운전석 열쇠를 재빈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버스 열쇠였다⁠. “⁠나는 내 핸들 잡아⁠. 재빈 씨도 재빈 씨 핸들 잡아⁠. 내일 아침에 엄마랑 경찰서 가⁠. 거기서부터는 같이 갈지 말지 내가 다시 정할 거야⁠.⁠”

“⁠소롬 씨⁠, 제가 경찰 가면 위에서 소롬 씨를⁠…⁠.⁠”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나 하루에 버스 승객 수백 명 태워⁠. 그중에 이상한 사람 골라내는 거 엄마보다 내가 더 잘해⁠.⁠”

재빈이 손바닥 위의 열쇠를 보았다⁠. 한참 뒤에 열쇠를 소롬에게 돌려주었다⁠.

“⁠가겠습니다⁠.⁠”

소롬은 열쇠를 받아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시동을 걸고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 정류장은 회차지⁠, 회차지입니다⁠. 이 버스는 차고지로 들어갑니다⁠. 손님은 내리세요⁠.⁠”

재빈은 내리지 않았다⁠. 소롬도 다시 말하지 않았다⁠.

*

이튿날 아침⁠, 안산 경찰서 사이버수사팀 조사실⁠. 반 경위 맞은편에 재빈이 앉았고⁠, 순애는 문 옆 의자에 앉았다⁠. 반 경위가 녹음기를 켜기 전에 말했다⁠.

“⁠윤재빈 씨⁠, 지금부터 하시는 말은 피의자 진술이에요⁠. 피해자 진술이 아니고요⁠. 아시죠⁠?⁠”

“⁠압니다⁠.⁠”

“⁠왜 오셨어요⁠?⁠”

재빈이 순애를 한 번 보았다⁠.

“⁠버스 열쇠를 받아서요⁠.⁠”

반 경위가 펜을 멈췄다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녹음기를 켰다⁠.

재빈은 세 시간 동안 말했다⁠. 「⁠고액 해외 취업⁠」 광고⁠, 공항에서 걷어 간 여권⁠, 하이리버 단지 여섯 동⁠, 층마다 다른 조⁠. 연애 조⁠, 투자 조⁠, 수사 기관 사칭 조⁠. 대본과 실적표⁠, 실적을 못 채운 사람이 끌려가던 지하 방⁠.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 일⁠. 생활정보지와 문자로 「⁠통장 빌려주면 고액 알바⁠」 광고를 돌려 모은 통장과 체크카드를 노인들 집에서 받아 온 일⁠. 「⁠채권 회수 알바⁠」라는 말에 속아 현금을 뽑아 나르는 대학생들을 탁갑룡에게 데려간 일⁠. 돈이 계좌 하나에 머무는 시간이 몇 분이라는 것⁠, 이후로 어디로 가는지는 위에서만 안다는 것⁠.

반 경위는 받아 적다가 한 번 물었다⁠.

“⁠탁갑룡이 착수금을 받는 계좌는요⁠?⁠”

“⁠알바 광고 보고 온 대학생 이름으로 만든 법인 통장이에요⁠. 그 학생은 자기 이름이 어디 쓰이는지 몰라요⁠. 잡히면 그 학생부터 잡혀요⁠.⁠”

“⁠잡혀요⁠. 통장을 빌려준 사람도⁠, 현금을 나른 사람도⁠.⁠” 반 경위가 펜으로 종이를 두드렸다⁠. “⁠몰랐다는 말로는 안 빠져요⁠. 윤재빈 씨처럼요⁠.⁠”

“⁠압니다⁠.⁠”

“⁠구채봉은요⁠?⁠”

“⁠단지에서는 「⁠은행⁠」이라고 불러요⁠. 저는 얼굴을 한 번도 못 봤어요⁠. 실적 회의 때 스피커로 목소리만 나왔어요⁠. 말하기 전에 혀로 이를 한 번 차요⁠. 그 소리가 나면 다들 고개를 숙였어요⁠.⁠” 재빈이 문 옆의 순애를 보았다⁠. “⁠어머님 이름이 나온 것도 그 회의였어요⁠. 「⁠이 사람은 내가 직접 본다⁠」고 했어요⁠.⁠”

순애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쥐었다 폈다⁠. 반 경위가 순애의 손을 한 번 보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창밖에서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조사실 에어컨은 바람만 세고 시원하지 않았다⁠.

조사가 끝나자 반 경위는 재빈의 검은 휴대전화를 압수하지 않고 증거 사진만 찍었다⁠. 재빈이 이상한 얼굴로 보자 반 경위가 말했다⁠.

“⁠지금 이 전화가 꺼지면 위에서 바로 알아요⁠. 켜 두세요⁠. 대신 「⁠위⁠」에서 오는 건 저한테도 같이 보내세요⁠. 도망가시면 그때 잡으러 갑니다⁠.⁠”

순애는 복도로 나와 휴대전화를 켰다⁠. 소롬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갔어⁠?⁠」 순애는 「⁠갔어⁠. 세 시간 말했어⁠」라고 보냈다⁠. 답이 왔다⁠. 「⁠잘했네⁠. 이번 정류장은 경찰서입니다⁠」

*

오후 네 시⁠, 순애는 버스에서 내려 호수마을 7단지로 걸었다⁠. 햇빛이 아파트 외벽에 하얗게 부딪쳤다⁠. 단지 정문 앞 주차 칸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 두고 있었다⁠. 운전석 문에 탁갑룡이 기대어 있었다⁠. 손에 수박 한 통을 들고 있었다⁠.

“⁠어머님⁠, 다녀오셨군요⁠.⁠”

탁갑룡이 수박을 들어 보였다⁠. 웃는 얼굴이었다⁠. 금테 안경 너머 눈은 웃지 않았다⁠.

“⁠재빈이가 오늘 아침부터 전화를 안 받습니다⁠. 혹시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외삼촌으로서 걱정이 돼서요⁠.⁠”

순애는 탁갑룡 앞 세 걸음에서 멈췄다⁠. 경비실 창문 안에서 경비 아저씨가 고개를 들었다⁠.

“⁠모르는 건 말 안 해요⁠. 아는 것도 아직은 말 안 하고요⁠.⁠”

“⁠어머님은 늘 아직이시네요⁠.⁠” 탁갑룡이 수박을 차 지붕에 올려놓았다⁠. “⁠노파심에 말씀드리는데⁠, 경찰서 사 층 끝 방 창문은 남향입니다⁠. 오늘 볕이 좋았지요⁠. 세 시간이나 계시면 덥지 않으셨습니까⁠?⁠”

차 지붕 위의 수박이 햇빛에 반들거렸다⁠. 순애는 대답하지 않고 탁갑룡을 지나쳐 단지 정문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고⁠, 비상등이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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