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400자)
지점장님
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 지백솔
소롬은 새벽 내내 녹음 파일을 들었다. 식탁에 검은 휴대전화를 놓고 하나씩 눌렀다. 「케일런_굿모닝_37」, 「케일런_굿나잇_112」, 「케일런_생일축하_04」 같은 목소리가 같은 말을 조금씩 다르게 했다. 순애는 맞은편에 앉아 보리차를 두 번 끓였다. 두 번 다 식었다.
“이 사람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할 때랑 똑같아.” 소롬이 말했다. “숨 쉬는 데까지.”
“숨은 사람마다 달라. 재빈이 숨은 재빈이 거야. 저 사람들이 그걸 빌려다 쓴 거지.”
“엄마는 그걸 어떻게 알아?”
“창구에서 서른 해 동안 남의 숨만 들었어.”
소롬은 파일 하나를 끝까지 듣고 휴대전화를 엎었다. 엄마가 하던 버릇이었다. 순애는 그것을 보고도 말하지 않았다.
“재빈 씨한테는 내가 물어. 엄마는 끼지 마.”
“언제?”
“내가 정해. 핸들은 내가 잡아.”
소롬은 마침 휴무였다. 출근하지 않고 엄마 집 소파에 누웠다. 순애는 딸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소롬은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다시 누웠다. 이불 없이 자는 버릇은 어릴 때부터였다.
*
아홉 시, 청주 이모가 영상 통화를 걸어 왔다. 순애가 받자 화면 가득 콧구멍이 떴다. 이모는 휴대전화를 늘 아래에서 위로 들었다.
“순애야, 얼굴 좀 보자. 니 얼굴 봐야 내가 잠을 자지. 미군은 정리했나?”
“언니, 휴대폰 좀 눈높이로 들어.”
“이게 눈높이다. 내 눈이 원래 콧구멍 밑에 있다.” 화면이 흔들리더니 이번에는 천장이 떴다. “소롬이 거기 있나? 소롬아, 이모 봐라. 니 엄마 미군한테 육백 보냈다며. 이모가 오백 보태 줄 테니 엄마 너무 잡지 마라.”
소파에서 소롬이 손만 흔들었다. 화면 속 이모가 곰 이모티콘 대신 진짜 손을 흔들었다. 순애는 휴대전화를 들고 한참 언니의 천장을 보았다. 가족은 얼굴을 보여 달라고 하면 콧구멍까지 보여 준다. 열세 달 동안 얼굴 한 번 못 보여 준 사람은 가족이 될 생각이 없었다.
“언니, 고마워. 오백은 됐어.”
“그럼 사백.”
“언니.”
“삼백. 더는 못 깎는다.”
통화가 끊기고 나서 소롬이 소파에서 처음으로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웃었다.
*
열 시 반, 순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순애는 스피커를 켜고 식탁에 놓았다. 소롬이 소파에서 고개를 들었다.
“감순애 여사님 되십니까. 저는 케일런 로웰 소령님의 법률 대리인, 미셸 하트 법률 사무소의 한국 담당입니다.”
남자 목소리였다. 한국말을 하는데 받침마다 혀를 굴렸다. 교포 흉내였다. 흉내가 서툴러서 「법률」의 ㄹ이 세 번 다 다르게 났다.
“소령님께서 어젯밤 인천공항으로 입국하시다가 신고되지 않은 금괴 때문에 세관에 억류되셨습니다. 제대 퇴직금 일부를 금으로 가지고 오셨는데, 서류가 미비해서요. 오늘 오후 세 시까지 보석금과 벌금 이천만 원을 내지 않으면 군사 법원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소령님 군 경력은 끝나고 퇴직금도 몰수됩니다.”
“소령님이 지금 한국에 계세요?”
“예. 공항 세관 보호실에 계십니다. 여사님 이름만 부르십니다.”
“통화할 수 있을까요?”
“보안 때문에 안 됩니다. 억류 중에는 외부 통화가 금지입니다.”
순애는 소롬을 보았다. 소롬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보안. 순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님, 미 대사관에는 알리셨어요?”
“아, 여사님. 대사관에 연락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대사관이 알면 소령님이 개인적으로 금을 들여온 게 군에 보고됩니다. 그 순간 끝입니다. 이건 여사님과 저만 아셔야 합니다. 따님께도요.”
수화기 너머에서 아주 작게, 다른 소리가 났다. 여자 목소리였다. 속삭임이었다. 남자가 말하는 사이사이 끼어드는 소리라서 처음에는 전화선의 잡음 같았다.
「…무릎 얘기 해.」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여사님, 무릎이 불편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은행까지 가시기 힘드시면 저희 직원이 댁으로 가서 현금으로 받아 와도 됩니다.”
순애는 휴대전화 화면을 손가락 하나로 눌러 소리를 키웠다. 남자가 다음 말을 하는 동안 순애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뒤에 있는 숨을 들었다. 숨을 들이켤 때 코로 한 번, 입으로 한 번. 말을 하기 전에 혀로 이를 한 번 차는 소리.
열세 해 전 고잔지점 금고 앞에서 순애는 같은 소리를 들었다. 밤 열 시였고, 시재가 삼천만 원 비었고, 부지점장이 금고 문을 붙잡고 서서 혀로 이를 한 번 찼다. 「지점장님, 제가 내일 아침까지 맞춰 놓을게요.」
“변호사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메모 좀 하고요.”
순애는 음소거를 누르고 소롬에게 말했다.
“대사관 번호 찾아. 누리집에 있는 걸로. 문자로 온 번호 말고.”
*
소롬이 자기 휴대전화로 주한 미국 대사관 누리집을 열었다. 영사과 안내 번호를 눌렀다. 자동 응답이 영어로 나오다가 한국어로 바뀌었다. 상담원이 받자 소롬이 휴대전화를 엄마에게 넘겼다.
순애는 짧게 물었다. 미 육군 소령이 공항에서 억류됐고 보석금을 민간인 계좌로 내라고 한다. 상담원은 묻는 말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차분했다.
“미군은 휴가나 제대, 귀국 항공권, 통관, 보석금 때문에 민간인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군인 신분 확인은 저희가 개인에게 해 드릴 수 없지만, 말씀하신 내용은 전형적인 군인 사칭 연애 사기입니다. 송금하지 마시고 경찰에 신고하세요. 세관도 개인에게 보석금을 받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순애는 대사관 전화를 끊었다. 소롬이 화면에 뜬 대사관 누리집의 안내문을 엄마에게 보여 주었다. 「군인 사칭 연애 사기에 주의하십시오. 미군은 휴가·제대·이동을 위해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순애는 안내문을 끝까지 읽고 음소거를 풀었다.
“변호사님, 지금 미 대사관하고 통화했어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남자가 무언가 말하려 했고, 그보다 먼저 여자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속삭임이 아니었다.
“바꿔 줘.”
전화가 끊겼다. 삼십 초 뒤, 같은 번호에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
화면에 여자가 있었다. 쉰 남짓이었다.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었고, 흰 블라우스를 입었다. 순애가 입은 것과 비슷한 블라우스였다. 뒤로 커다란 창이 있었고, 창밖으로 누런 강물이 넓게 흘렀다. 어디선가 발전기가 웅웅거렸다. 여자가 웃었다. 창구 웃음이었다. 번호표를 든 손님에게 짓는, 입꼬리를 똑같은 높이로 올리는 웃음.
“지점장님, 오랜만이에요. 무릎은 좀 어떠세요?”
“구 부지점장.”
“기억해 주시네요. 열세 해 만이에요.” 구채봉이 혀로 이를 한 번 찼다. “케일런은 영상 통화를 못 하는데, 저는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지점장님은 얼굴 보고 말씀하시는 걸 좋아하셨잖아요. 저 해고할 때도 지점장실에서 얼굴 보고 하셨고요.”
소롬이 화면 밖에서 엄마의 팔을 잡았다. 순애는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화면 속 구채봉의 얼굴이 순애의 얼굴과 같은 높이가 되었다.
“케일런을 나한테 붙인 게 구 부지점장이에요?”
“케일런은 백 명도 넘게 연애하는데요, 뭐. 지점장님은 제가 직접 골랐어요. 퇴임 기사 났을 때요. 「서른 해 금융 사기 막은 감순애 지점장 명예 퇴임」 사진도 예쁘게 나왔더라고요. 남편분 돌아가셨다는 건 부고로 알았고요. 외로우실 때를 기다렸어요. 한 해 기다렸어요. 연꽃 사진 올리신 날 케일런이 댓글을 달았죠.”
순애의 손가락이 휴대전화 모서리를 눌렀다.
“그런데 지점장님은 혼자 사시고, 은행 사람이라 돈 얘기만 나오면 귀가 서요. 그래서 따님 곁에 하나 더 두었어요. 지점장님 정기예금 만기, 지점장님이 좋아하시는 드라마, 남편분 기일. 그런 건 가족 입에서 나오거든요.”
소롬의 손이 엄마 팔에서 떨어졌다.
“재빈이는 따님 버스를 날마다 탔죠. 같은 정류장에서 타서 종점까지. 제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목소리 좋은 애라서요. 기사님 안내 방송이 좋다고 하라고 했는데, 그 말은 걔가 스스로 지어서 하더라고요. 그건 칭찬해 줬어요.”
소롬이 소파 팔걸이를 붙잡았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순애는 화면 속 구채봉의 눈을 보았다. 구채봉은 소롬을 보려는 듯 화면 너머를 기웃거렸다.
“따님도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추 기사님. 저는 지점장님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에요. 지점장님은 규정을 참 잘 지키셨어요. 제 아들이 백혈병으로 무균실에 있을 때도요. 제가 고객 돈 삼천만 원을 빌렸다가 넉 달 뒤에 갚으려고 했는데, 지점장님은 규정대로 신고하셨어요. 저는 해고되고 징역 일 년 반을 살았고, 아들은 제가 안에 있을 때 갔어요. 규정은 지점장님을 지켜 줬어요. 저는 아무도 안 지켜 줬고요.”
“빌린 게 아니라 손을 댄 거예요.” 순애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리고 그 일이 지금 노인들 연금 통장을 털어 가는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지점장님은 여전히 정답만 말씀하시네요.” 구채봉이 다시 웃었다. “정답은 지점장님이 하세요. 저는 숫자를 할게요. 지점장님 정기예금 일억, 제 아들 병원비의 세 배 남짓이에요. 그 일억을 지점장님 손으로 보내시는 걸 보고 싶어요. 보내시면 따님 결혼식에 재빈이를 빌려 드릴게요. 안 보내시면 재빈이는 이 강가로 돌아와요. 걔 빚은 아직 많이 남았어요.”
“구 부지점장.”
“이제는 부지점장 아니에요. 여기서는 다들 저를 「은행」이라고 불러요.” 구채봉이 혀로 이를 찼다. “지점장님, 따님이 오늘 휴무라서 다행이에요. 내일은 첫차가 새벽 다섯 시 십 분이죠?”
화면이 꺼졌다.
*
순애는 휴대전화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화면이 꺼진 유리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흰머리, 은테 안경, 흰 블라우스. 방금 화면 속에 있던 블라우스와 같은 흰색이었다.
소롬은 소파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엄마.”
“응.”
“재빈 씨가 내 버스를 탄 게 시킨 거였대.”
“그래.”
“안내 방송 좋다는 말은 자기가 지어서 했대.”
순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어서 한 말이 거짓말인지 진짜 말인지 순애도 몰랐다. 딸도 몰랐다. 둘 다 재빈의 말을 반으로 갈라 들고 있었다.
소롬이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 신발을 신다가 멈췄다.
“엄마, 일억 보내지 마.”
“안 보내.”
“나 때문에라도 보내지 마. 보내면 나 그 사람이랑 결혼 못 해. 엄마 돈으로 빌려 온 남자랑 어떻게 살아.”
소롬이 문을 열었다. 순애는 딸의 등에 대고 물었다.
“어디 가?”
“종점.”
문이 닫혔다. 순애는 휴대전화를 들어 반 경위의 명함을 꺼냈다. 뒷면의 손글씨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텔레비전에서 낮 뉴스가 흘렀다. 소리를 줄인 화면 아래로 자막이 지나갔다. 「메콩강 국경 단지서 한국인 수십 명 탈출 시도… 현지 당국 “사실 확인 중”」
“반 경위입니다.”
“감순애예요. 아직이라고 했던 거, 이제 말할게요. 한국에서 돈 받는 사람 이름은 탁갑룡이에요. 포이산 단지에서 돈 쥔 사람은 구채봉. 둘 다 얼굴을 알아요. 하나는 우리 집 밥상에 앉았고, 하나는 우리 지점 금고 앞에 서 있었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펜 뚜껑 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내일 우리 사위 될 사람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데리고 갈 수 있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