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47자)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 지백솔

목요일 저녁⁠, 경로당 작은 방의 벽에 달력 뒷면 종이 여섯 장이 테이프로 붙었다⁠. 순애가 매직으로 한 장에 한 사람씩⁠, 연인이 보낸 문장을 옮겨 적었다⁠. 퇴직 간호사가 돋보기를 끼고 불러 주었고⁠, 미단이 글씨가 삐뚤어질 때마다 「⁠원장님 글씨 보소⁠」 하는 봉남을 째려보았다⁠.

케일런⁠: 「⁠이건 우리 둘만 알아요⁠. 딸한테도 말하지 마요⁠. 딸은 이해 못 해요⁠.⁠」 마이클⁠: 「⁠아들에게 말하면 아들은 질투할 거예요⁠. 우리 사랑을 깨려고 해요⁠.⁠」 엘레나⁠: 「⁠동료들은 당신을 부러워해요⁠. 말하면 방해할 거예요⁠.⁠」 빈센트⁠: 「⁠투자는 비밀이 생명이에요⁠. 가족이 알면 욕심을 내요⁠.⁠」 독일 의사⁠: 「⁠은행 직원이 물으면 손녀 학비라고 하세요⁠. 은행은 우리 사랑을 몰라요⁠.⁠」 대니얼⁠: 「⁠당신과 나 말고는 아무도 믿지 마요⁠.⁠」

여섯 장을 다 붙이고 나서 순애가 두 걸음 물러났다⁠. 다른 이름⁠, 다른 나라⁠, 다른 계급이 같은 말을 했다⁠.

“⁠이걸 은행에서는 고립이라고 불러요⁠.⁠” 순애가 매직 뚜껑을 닫았다⁠. “⁠돈을 보내기 전에 딱 한 사람한테만 말하면 대부분 안 보내요⁠. 그래서 저 사람들은 첫 달부터 그 한 사람을 끊어요⁠. 딸⁠, 아들⁠, 친구⁠, 은행 직원⁠. 창구에서 저는 「⁠누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것부터 물었어요⁠.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열이면 열이 당하고 있었어요⁠.⁠”

봉남이 엘레나의 종이를 오래 보았다⁠.

“⁠동료들이 부러워해서 방해한다꼬⁠.⁠” 봉남이 운동모를 벗었다⁠. “⁠내 기관사 동기들 다 죽었소⁠. 마지막 하나가 작년에 갔다⁠. 부러워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내가 말을 했겠지⁠.⁠”

방이 조용해졌다⁠. 미단이 일어나 봉남의 종이 귀퉁이에 매직으로 작게 적었다⁠. 「⁠봉남 씨 동료 여기 있음⁠.⁠」 그러고는 매직을 순애에게 돌려주었다⁠.

“⁠독일 의사 할매는 학비라고 했어예⁠?⁠”

“⁠세 번 그렇게 말했지⁠.⁠” 일흔한 살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은행 아가씨가 손녀 몇 살이냐고 묻길래 스물이라 했어⁠. 손녀는 아홉 살이야⁠.⁠”

이번에는 할머니가 먼저 웃었고⁠, 방이 따라 웃었다⁠.

*

웃음이 가라앉을 무렵 대화방이 울렸다⁠. 모두의 휴대전화가 한꺼번에 떨었다⁠. 「⁠탁 사장⁠」이었다⁠.

「⁠탁 사장⁠: 여러분 오늘 모임 못 가서 송구합니다⁠. 한 가지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탁 사장⁠: 감순애 지점장님이 경찰 신고를 자꾸 미루시는 데는 사정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족 중에 이 일과 얽힌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탁 사장⁠: 물론 소문입니다⁠. 지점장님 믿습니다⁠. 다만 우리 돈은 우리가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탁 사장⁠: 해외 계좌 회수 대행 착수금은 1인 오십만 원입니다⁠. 벌써 세 분이 맡기셨습니다⁠. 이심전심으로 함께해 주십시오⁠.⁠」

방 안의 눈이 순애에게 모였다⁠. 꽃집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점장님⁠, 진짜예요⁠? 가족 중에⁠?⁠”

순애는 벽의 종이를 보았다⁠. 케일런의 문장 옆에 자기 글씨가 있었다⁠. 대답하면 재빈의 이름이 나온다⁠. 재빈의 이름이 나오면 탁갑룡은 소롬의 버스로 간다⁠.

“⁠신고는 할 거예요⁠. 오늘 다 같이 경찰서에 가요⁠. 그리고 착수금은 보내지 마세요⁠. 돈을 찾아 준다고 또 돈을 받는 사람은⁠…⁠.⁠”

“⁠지점장님은 육백 날렸지⁠, 우리는 수천이에요⁠.⁠” 일흔 줄 남자 하나가 말했다⁠. “⁠찾아 준다는 사람이 있으면 해 봐야지⁠. 지점장님이 찾아 줄 거요⁠?⁠”

봉남이 벌떡 일어났다⁠.

“⁠어이⁠, 행님⁠. 그 착수금 보낼 계좌⁠, 이름 누구로 돼 있소⁠? 탁 사장 이름이오⁠?⁠”

남자가 휴대전화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꽃집 여자도 휴대전화를 보았다⁠. 둘 다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보낸 얼굴이었다⁠.

*

안산 경찰서 사이버수사팀은 사 층 끝 방이었다⁠. 반 경위는 마흔하나⁠, 짧은 머리에 운동화를 신었고⁠, 책상 위에 고소장을 열한 권 쌓아 두고 있었다⁠. 「⁠같은 목소리⁠」 사람 아홉이 들어가자 반 경위가 의자를 끌어다 동그랗게 놓았다⁠.

“⁠한 분씩 여쭙겠습니다⁠. 왜 보내셨어요⁠?⁠”

봉남이 먼저 말했다⁠. 「⁠사랑해서⁠」라고 했다가⁠, 다시 「⁠외로바서⁠」라고 고쳤다⁠. 미단은 「⁠돈 벌려고⁠」라고 했다⁠. 할머니는 「⁠손녀 학비라고 했으니까⁠」라고 했다⁠. 반 경위는 받아 적다가 펜을 멈췄다⁠.

“⁠다들 처음 물으면 「⁠몰라서⁠」라고 하세요⁠. 여기 분들은 이유를 아시네요⁠. 수사하기 좋습니다⁠.⁠”

반 경위가 고소장 하나를 펼쳤다⁠. 받는 계좌 목록이 있었다⁠. 시흥 노인의 계좌가 목록 가운데에 있었다⁠.

“⁠열한 건 가운데 일곱 건에 같은 계좌들이 나와요⁠. 돈은 이 계좌들로 들어가자마자 몇 분 안에 여러 갈래로 나가요⁠. 그리고 피해자 진술에 계속 나오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반 경위가 손가락으로 종이를 짚었다⁠. 「⁠하이리버⁠」 “⁠상담원이 실수로 한 말⁠, 녹음 뒤에서 들린 안내 방송⁠, 앱 회사 주소의 일부⁠. 메콩강 가 국경 도시에 있는 단지예요⁠. 외교부에서도 여행 경보를 낸 곳이고요⁠.⁠”

반 경위는 진술서를 다 받고 나서 순애에게 눈짓을 했다⁠. 둘은 복도 끝 자판기 앞으로 갔다⁠. 반 경위가 율무차를 두 잔 뽑아 하나를 내밀었다⁠.

“⁠지점장님 진술서에는 한국 쪽 사람 얘기가 없네요⁠. 지급 정지까지 혼자 거신 분이 한국에서 누가 돈을 받는지는 모르신다고요⁠?⁠”

“⁠모르는 건 쓰지 않았어요⁠.⁠”

“⁠아는 건요⁠?⁠”

순애는 율무차를 받았다⁠. 종이컵이 얇아서 손가락이 뜨거웠다⁠.

“⁠아직은 말 못 해요⁠.⁠”

반 경위가 율무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이라는 말은 피해자가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지점장님⁠. 저희 어머니도 아들 목소리로 걸려 온 전화에 천만 원을 보냈어요⁠. 다 보내고 나서야 저한테 전화하셨어요⁠. 왜 먼저 말 안 했냐고 물었더니⁠, 네가 알면 일이 커질까 봐 그랬대요⁠. 지금 지점장님 얼굴이 그때 저희 어머니 얼굴이에요⁠.⁠”

“⁠경위님 어머님은 지키려는 사람이 없었잖아요⁠.⁠”

“⁠있었어요⁠. 저요⁠.⁠” 반 경위가 빈 컵을 구겼다⁠. “⁠저희 어머니는 저를 지키려다가 돈을 잃었어요⁠. 지점장님은 누굴 지키려다 뭘 잃으실 건데요⁠?⁠”

순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 경위가 명함을 순애의 카디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명함 뒤에 휴대전화 번호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

같은 시각⁠, 반월공단 뒤편 화물차 주차장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시동을 켜 둔 채 세워져 있었다⁠. 재빈은 조수석에서 탁갑룡이 휴대전화 두 대를 번갈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에는 「⁠같은 목소리⁠」 대화방이⁠, 다른 하나에는 입금 알림이 떴다⁠.

「⁠입금 500⁠,000 꽃집⁠」 「⁠입금 500⁠,000 행님⁠」 「⁠입금 500⁠,000 간호사⁠」

“⁠봐라⁠, 재빈아⁠. 우공이산이다⁠. 한 숟가락씩 떠도 산을 옮겨⁠.⁠” 탁갑룡이 웃었다⁠. “⁠착수금은 법인 통장으로 받는다⁠. 알바 광고 보고 온 대학생 놈 이름으로 만든 거⁠. 내일 아침에 걔가 현금으로 뽑아서 가져온다⁠. 그놈은 자기가 무슨 채권 회수 알바하는 줄 알아⁠.⁠”

재빈은 창밖의 화물차들을 보았다⁠. 바퀴마다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실장님⁠, 그 할머니들 착수금까지 받으면⁠…⁠.⁠”

“⁠받으면 뭐⁠.⁠” 탁갑룡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재빈아⁠, 나도 빚이 있어⁠. 너보다 많아⁠. 내가 여기서 한 달 실적 못 채우면 위에서 나를 다시 강 건너로 부른다⁠. 너는 열한 달 있었지⁠? 나는 두 해 있었다⁠. 다시는 안 가⁠. 그러니까 너도 내 앞에서 한숨 쉬지 마라⁠. 위에서 지점장님은 특별히 챙기라고 했다⁠. 이유는 나도 몰라⁠. 위에서 그 이름만 나오면 목소리가 달라져⁠.⁠”

탁갑룡이 검은 휴대전화를 재빈의 무릎에 던졌다⁠.

“⁠일 전화⁠. 다시 준다⁠. 오늘 밤 케일런 굿나잇 세 개 넣어⁠. 지점장님한테는 「⁠경찰 가지 마⁠, 우리 사랑 끝나⁠」로⁠.⁠”

재빈은 휴대전화를 받아 가방 밑 지퍼 칸에 넣었다⁠. 승용차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소롬의 집으로 가는 버스였다⁠. 소롬은 오늘 막차 근무였다⁠. 재빈은 소롬의 원룸 현관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지퍼 칸을 닫지 않았다⁠. 문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돌아보았다⁠. 가방 입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

밤 열한 시 사십 분⁠, 안산 시내버스 차고지는 막차들이 하나씩 들어오며 불을 껐다⁠. 세차기에서 물 뿌리는 소리가 났고⁠, 정비 창고에서 공기 압축기가 쉭쉭거렸다⁠. 순애는 휴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의 정비 기사가 지나가다 순애를 알아보았다⁠.

“⁠추 기사 어머님이시죠⁠? 사진 봤어요⁠. 따님이 오늘 또 사이드 미러를 깼어요⁠. 전봇대가 먼저 들이받았대요⁠.⁠”

“⁠전봇대가 원래 성질이 급해요⁠.⁠”

정비 기사가 웃으며 창고로 들어갔다⁠. 순애는 딸이 전봇대 탓을 하는 얼굴을 떠올렸다⁠. 남편이 주차하다 화단을 긁을 때 하던 얼굴과 같았다⁠. 마지막 버스가 들어왔고⁠, 운전석에서 소롬이 내렸다⁠. 소롬은 엄마를 보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순애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

“⁠외삼촌이 그러더라⁠. 엄마가 피해자 모임에서 재빈 씨 얘기 흘리고 다닌다고⁠. 가족 중에 조직이랑 얽힌 사람이 있다고⁠.⁠”

“⁠엄마가 한 말 아니야⁠.⁠”

“⁠그럼 누가 했는데⁠?⁠”

“⁠외삼촌이⁠.⁠”

소롬이 멈췄다⁠. 휴게실 형광등 아래에서 딸의 얼굴이 하얗게 보였다⁠. 하루 열 시간 핸들을 잡은 손이 허리춤에서 쥐었다 펴졌다⁠.

“⁠엄마⁠, 진짜 그만해⁠. 외삼촌이 엄마 돈 찾아 주겠다고 뛰어다니는데⁠, 엄마는 외삼촌 욕하고 재빈 씨 의심하고⁠. 아빠 기일에 미군한테는 그렇게 길게 쓰면서⁠, 나한테는 왜 한 번도 안 물어봐⁠? 내가 이 사람이랑 왜 결혼하려는지⁠.⁠”

순애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소리를 냈다⁠.

“⁠왜 결혼하려고 하는데⁠?⁠”

소롬은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세차기가 멈추고⁠, 차고지가 조용해졌다⁠.

“⁠재빈 씨는 내 버스를 날마다 탔어⁠. 비 오는 날에도⁠, 눈 오는 날에도⁠. 같은 정류장에서 타서 종점까지 가⁠. 종점에서 내려서 다음 차로 돌아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내가 안내 방송 하는 목소리가 좋대⁠. 사람들이 내 목소리 듣고 잘못 내리지 않는 게 좋대⁠.⁠” 소롬이 코를 들이마셨다⁠. “⁠엄마는 내 목소리 좋다고 한 적 있어⁠?⁠”

순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딸의 안내 방송을 현관에서 들을 때마다 하지 말라고만 했다⁠.

“⁠이번 정류장은 차고지⁠, 차고지입니다⁠. 종점입니다⁠. 모두 내리세요⁠.⁠”

소롬이 혼잣말처럼 말하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

새벽 한 시 반⁠, 1204호 현관 벨이 울렸다⁠. 이번에도 소롬은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문을 열자 딸이 퇴근복 그대로 서 있었다⁠. 손에 검은 휴대전화 하나가 들려 있었다⁠. 처음 보는 기종이었다⁠.

“⁠재빈 씨 가방에서 나왔어⁠. 가방 밑에 지퍼 달린 칸이 하나 더 있더라⁠.⁠”

소롬이 화면을 켜서 내밀었다⁠. 잠금이 풀려 있었다⁠. 녹음 앱에 파일이 수백 개 쌓여 있었다⁠. 「⁠케일런_굿모닝_37⁠」⁠, 「⁠케일런_굿나잇_112⁠」⁠, 「⁠케일런_무릎걱정_01⁠」 연락처에는 한 사람뿐이었다⁠. 「⁠위⁠」

소롬이 맨 위 파일을 눌렀다⁠. 무릎 걱정 파일이었다⁠. 호수공원 벤치에서 숨을 참고 녹음한 목소리가 현관에 퍼졌다⁠.

“⁠엄마⁠.⁠” 소롬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 말이 맞아⁠?⁠”

순애는 휴대전화를 받지 않았다⁠. 딸의 손이 쥔 채로 두었다⁠. 대신 현관 센서등이 꺼지기 전에 딸의 손목을 잡아 안으로 들였다⁠.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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