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80자)

달러 상자

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 지백솔

시흥의 연립은 삼 층짜리였고⁠, 계단 난간에 칠이 벗겨져 녹이 손바닥에 묻었다⁠. 순애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주소는 재빈이 알려 주었다⁠. 일요일 새벽 벤치에서 들은 것보다 더 낮은 목소리였다⁠.

「⁠그 집에서 통장이랑 체크카드를 받아 온 사람이 저예요⁠. 단지에서 나와 처음 한 심부름이었어요⁠.⁠」

이 층 끝 집 문에는 「⁠신문 사절⁠」 스티커와 교회 전도지가 겹쳐 붙어 있었다⁠. 벨을 누르자 한참 뒤에 문이 사슬을 건 채로 반만 열렸다⁠. 일흔을 넘긴 남자가 러닝셔츠 차림으로 내다보았다⁠. 방 안에서 선풍기가 고개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요⁠?⁠”

“⁠가람은행에 있던 사람입니다⁠. 어르신 통장 일로 왔어요⁠.⁠”

“⁠은행⁠?⁠” 노인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이오⁠? 당신이 신고했소⁠? 그 통장으로 내 기초연금이 들어온단 말이오⁠. 어제부터 돈을 못 찾아⁠. 은행에 갔더니 지급 정지래⁠. 경찰서에서 전화가 와서 나보고 피의자래⁠. 내가 뭘 했다고 피의자요⁠?⁠”

순애는 사슬 걸린 문틈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신고했습니다⁠.⁠”

노인이 문을 닫으려 했다⁠. 순애가 손바닥으로 문을 받쳤다⁠.

“⁠어르신⁠, 그 통장으로 어제 아침에만 다섯 사람이 돈을 보냈어요⁠. 그중 하나가 저고요⁠. 저도 삼백만 원을 보냈어요⁠.⁠”

문 안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사슬이 풀렸다⁠.

*

방은 한 칸이었다⁠. 벽에 옛 철도청 달력이 붙어 있었고⁠, 밥상 위에 생활정보지가 펼쳐져 있었다⁠. 노인은 정보지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동그라미가 쳐진 작은 광고였다⁠.

「⁠집에서 하는 쉬운 고액 알바⁠. 나이 무관⁠. 통장·체크카드만 빌려주시면 매일 현금 지급⁠. 세금 절감용 법인 계좌 대행⁠. 비밀 보장⁠.⁠」

“⁠이거 보고 전화했소⁠. 젊은 사람이 친절하데⁠. 회사 세금 줄이느라 남의 통장이 필요하다고⁠, 불법 아니라고⁠. 통장이랑 카드랑 비밀번호를 주면 한 달에 얼마씩 준다길래⁠. 첫 주에 정말로 돈이 들어왔소⁠. 그래서 믿었지⁠.⁠”

“⁠통장을 가지러 온 사람은 어떻게 생겼던가요⁠?⁠”

“⁠키가 크고 순하게 생겼소⁠. 계속 미안하다고 하데⁠. 받아 가면서 미안하다는 놈은 처음 봤소⁠.⁠”

순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이 정보지를 접었다⁠.

“⁠경찰이 그러데⁠. 통장 빌려준 것도 죄라고⁠. 전자금융⁠, 뭐라더라⁠.⁠”

“⁠전자금융거래법이에요⁠. 대가를 받고 통장이나 카드를 남한테 넘기면 처벌받아요⁠. 몰랐다고 해도요⁠. 징역도 나오고 벌금도 나와요⁠. 그 통장으로 들어간 피해자 돈을 어르신이 물어 줘야 할 수도 있고요⁠.⁠”

노인이 입을 다물었다⁠. 선풍기가 순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노인에게 갔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달력이 들썩였다⁠.

“⁠나도 당한 거 아니오⁠?⁠”

“⁠당하셨어요⁠. 그리고 하셨어요⁠. 둘 다예요⁠.⁠” 순애는 수첩을 꺼내 경찰서 이름과 사이버수사팀 전화번호를 적어 찢어 주었다⁠. “⁠내일 아침에 먼저 가세요⁠. 부르기 전에 가서⁠, 통장 가져간 사람 얼굴⁠, 전화번호⁠, 받은 돈⁠, 하나도 빼지 말고 말하세요⁠. 연금은 압류 안 되는 통장을 따로 만들어서 받으시고요⁠. 그건 은행 창구에서 도와줄 거예요⁠. 가람은행 고잔지점 가서 정 지점장 찾으세요⁠. 머리 훤한 사람이요⁠.⁠”

“⁠머리 훤한 사람⁠.⁠”

“⁠예⁠. 금방 알아보실 거예요⁠.⁠”

노인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다가 기침을 했다⁠. 순애는 일어서며 밥상 위의 정보지를 한 번 더 보았다⁠. 같은 면에 「⁠통장 매입⁠, 개인·법인 최고가⁠」라는 광고가 두 줄 아래에 또 있었다⁠.

*

시흥에서 안산으로 넘어가는 시내버스는 소롬의 노선이었다⁠. 순애는 정류장 전광판에서 차 번호를 보고 버스 두 대를 그냥 보냈다⁠. 세 번째 버스가 들어올 때 운전석에 딸의 옆얼굴이 보였다⁠. 순애는 교통카드를 쥐고 올랐다⁠.

「⁠삑⁠.⁠」

“⁠어서 오세요⁠.⁠” 소롬은 앞만 보았다⁠. “⁠뒤로 들어가 앉으세요⁠. 출발합니다⁠. 손잡이 꼭 잡으세요⁠.⁠”

순애는 운전석 바로 뒤⁠, 노약자석에 앉았다⁠. 소롬이 백미러로 엄마를 한 번 보고 눈을 돌렸다⁠. 버스가 신호에 멈췄을 때 소롬이 앞 유리를 본 채로 말했다⁠.

“⁠외삼촌이 경찰 아는 동생한테 물어봐 준대⁠. 엄마 돈 찾을 수 있게⁠. 엄마 대화방 캡처 다 보내 달래⁠.⁠”

“⁠외삼촌한테는 아무것도 보내지 마⁠.⁠”

“⁠또 그런다⁠.⁠” 신호가 바뀌었다⁠. 소롬이 핸들을 돌렸다⁠. “⁠엄마⁠, 나 운전 중이야⁠. 손님한테 말 거는 거 규정 위반이야⁠. 그러니까 한 번만 할게⁠. 엄마가 우리 결혼 싫으면 싫다고 해⁠. 재빈 씨 외삼촌을 사기꾼으로 만들지 말고⁠.⁠”

뒷자리 학생이 하차 벨을 눌렀다⁠. 「⁠삐익⁠.⁠」 소롬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 정류장은 시흥 경계⁠, 시흥 경계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대화 끝⁠, 대화 끝입니다⁠.⁠”

학생들이 킥킥 웃으며 내렸다⁠. 순애는 웃지 않았다⁠. 딸의 운전대 위⁠, 계기판 옆에 작은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소롬과 재빈이 놀이공원에서 머리띠를 쓰고 찍은 사진이었다⁠. 재빈은 토끼 귀를 쓰고 있었다⁠.

순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 지점장이었다⁠.

“⁠지점장님⁠, 지금 어디 계세요⁠? 창구에 지점장님 같은 분이 또 오셨습니다⁠.⁠”

“⁠나 같은 분⁠?⁠”

“⁠달러 상자요⁠. 사백만 원 보내신답니다⁠. 문진표 다섯 칸이 다 빨간데 제 말을 안 들으세요⁠. 부산 분이신데 기차 얘기만 하세요⁠.⁠”

순애는 고잔 정류장에서 내렸다⁠. 소롬은 「⁠안녕히 가세요⁠」를 다른 손님에게 하듯 했다⁠. 십오 분 뒤 순애가 고잔지점 문을 열었을 때⁠, 연두색 대기 의자 맨 끝에 남자 하나가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 있었다⁠. 예순 후반쯤 되었고⁠, 하얀 운동모에 철도 배지가 달려 있었다⁠. 손에는 번호표와 송금 신청서를 같이 쥐었다⁠. 정 지점장이 남자 옆에 앉아서 땀을 닦고 있었다⁠.

“⁠지점장님⁠, 이분이 모봉남 선생님이세요⁠. 서른다섯 해 기관차 모셨답니다⁠.⁠”

“⁠모봉남이요⁠. 화물 열차 마이 끌었심더⁠.⁠” 봉남이 순애를 아래위로 보았다⁠. “⁠이 양반이 또 누구요⁠? 은행이 오늘 내 하나 잡을라꼬 사람을 몇이나 붙이노⁠.⁠”

“⁠전에 여기 지점장이었어요⁠. 감순애입니다⁠.⁠”

“⁠지점장이면 다요⁠? 신호가 파란불인데 와 자꾸 세우노⁠.⁠”

봉남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순애 앞에 내밀었다⁠. 화물 조회 화면이었다⁠. 맨 위에 「⁠스카이브리지 국제특송⁠」이라는 로고가 있고⁠, 로고 아래 갈색 상자 사진과 붉은 글씨가 떴다⁠.

「⁠화물 상태⁠: 인천 세관 통관 보류⁠. 사유⁠: 고액 외화 및 귀금속 신고 누락⁠. 통관비 4⁠,000⁠,000원 납부 후 24시간 내 자택 배송⁠.⁠」

“⁠우리 엘레나가 보낸 기라⁠. 국제 의료 봉사단 소속 의사요⁠. 중동 전쟁 난 데 병원에 있소⁠. 봉사단 월급이 달러로 나오는데⁠, 거기는 은행이 다 무너져서 상자에 넣어 외교 행낭으로 보낸다 캤소⁠. 금도 쪼매 넣었고⁠. 내가 통관비만 내면 받아서⁠, 엘레나가 한국 오면 둘이 부산에 집 하나 사자 캤소⁠.⁠”

정 지점장이 순애를 보았다⁠. 다섯 칸이 다 빨간 얼굴이었다⁠.

순애는 봉남 옆에 앉았다⁠. 화물 조회 화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올리고 내렸다⁠.

“⁠선생님⁠, 세 가지만 여쭐게요⁠. 외교 행낭이 뭔지 아세요⁠?⁠”

“⁠외교관 짐 아이요⁠.⁠”

“⁠나라와 나라가 외교 문서를 주고받는 가방이에요⁠. 봉사단 의사 월급을 넣어 주는 가방이 아니에요⁠. 두 번째⁠. 세관은 통관비를 특송 회사 직원 개인 계좌로 받지 않아요⁠. 받는 사람이 세관에 직접 내요⁠. 이 계좌 예금주가 누구예요⁠?⁠”

봉남이 송금 신청서를 내려다보았다⁠. 예금주 칸에 처음 보는 여자 이름이 있었다⁠.

“⁠특송 회사 담당자라 카던데⁠.⁠”

“⁠세 번째⁠. 이 특송 회사 번호 말고⁠, 관세청 누리집에 나온 번호로 직접 걸어 보셨어요⁠?⁠”

“⁠거기 번호가 따로 있나⁠?⁠”

순애는 자기 휴대전화로 관세청 누리집을 열어 고객지원센터 번호를 눌렀다⁠. 스피커로 바꾸고 봉남의 귀 옆에 대 주었다⁠. 상담원에게 화물 조회 화면의 번호를 불러 주었다⁠. 키보드 소리가 한참 들렸다⁠.

“⁠고객님⁠, 말씀하신 번호로 통관 중인 화물은 없습니다⁠. 세관은 통관비를 개인 계좌로 받지 않습니다⁠. 최근 이런 화물 조회 사이트를 만들어 돈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으니 송금하지 마시고 경찰에 신고해 주세요⁠.⁠”

전화가 끊겼다⁠. 봉남은 한참 화면만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사이트는 가짜일 수 있소⁠. 엘레나는 진짜요⁠.⁠”

“⁠어떻게 아세요⁠?⁠”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가⁠. 날마다 듣소⁠. 사람이 목소리까지 가짜로 하나⁠?⁠”

*

순애는 봉남의 휴대전화를 받아 엘레나의 대화방을 열었다⁠. 음성 메시지가 수십 개 있었다⁠. 봉남이 그중 하나를 골라 주었다⁠. 「⁠아침 거⁠」였다⁠.

“⁠봉남 씨⁠,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환자 많아요⁠. 당신 생각하면 힘나요⁠. 사랑해요⁠.⁠”

여자 목소리였다⁠. 서툰 한국말이었다⁠. 순애는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댔다⁠. 말 밑에서 낮은 웅웅거림이 깔렸다⁠. 병원 발전기라고 했을 것이다⁠. 끝에서 무언가 울었다⁠.

깨깟⁠. 깨깟⁠.

순애는 메시지를 처음부터 다시 틀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자기 휴대전화를 꺼내 케일런의 굿모닝을 틀었다⁠. 두 휴대전화를 양쪽 귀에 하나씩 댔다⁠. 정 지점장이 옆에서 숨을 죽였다⁠. 대기 의자의 다른 손님들이 힐끔거렸다⁠.

깨깟⁠. 깨깟⁠.

울음의 높이도⁠, 두 번 우는 간격도 같았다⁠. 발전기 소리는 반 음쯤 높낮이까지 같았다⁠.

“⁠선생님⁠, 이거 한번 들어 보세요⁠.⁠”

순애가 케일런의 메시지를 봉남의 귀에 대 주었다⁠. 봉남은 남자 목소리가 나오자 얼굴을 찌푸렸다가⁠, 끝에서 우는 소리에 눈썹을 올렸다⁠.

“⁠이 새⁠, 우리 엘레나 병원 마당에 산다 카던데⁠.⁠”

“⁠우리 케일런 기지에도 산대요⁠.⁠”

“⁠그 양반은 또 누고⁠?⁠”

“⁠미 육군 소령이요⁠. 열세 달 사귀었어요⁠.⁠”

봉남이 순애를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보던 눈이 이번에는 옆으로 왔다⁠.

“⁠지점장 양반도 당했소⁠?⁠”

“⁠육백만 원 보냈어요⁠. 일억 보낼 뻔했고요⁠.⁠”

봉남은 송금 신청서를 반으로 접었다⁠. 접은 것을 다시 반으로 접었다⁠. 번호표 기계에서 띵동 소리가 났고⁠, 전광판에 봉남의 번호가 떴다⁠. 봉남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새가 사막에도 살고 전쟁 난 병원에도 사나⁠. 철새도 이래 안 다닌다⁠.⁠” 봉남이 운동모를 벗어 무릎에 놓았다⁠. “⁠지점장 양반⁠. 이 새 우는 거⁠, 내 말고 들은 사람이 더 있소⁠. 우리 경로당에 혼자 사는 할매 하나⁠, 독일 의사랑 연애한다꼬 자랑하던 할매요⁠. 그 할매 휴대폰에서도 이 소리 났다⁠. 그때는 독일에도 새가 우는갑다 했지⁠.⁠”

“⁠그분 연락처 있으세요⁠?⁠”

“⁠있소⁠. 하나 더 있다⁠. 미용실 원장도 요새 무슨 앱으로 돈을 불린다꼬 경로당에 와서 자랑하는데⁠, 그 사람 남자 친구도 목소리 메시지를 보낸다 카더라⁠.⁠”

정 지점장이 전광판의 번호를 한 번 더 불렀다⁠. 봉남은 손을 들어 「⁠안 갑니더⁠」 하고 말했다⁠. 순애가 휴대전화를 꺼내 새 대화방을 만들었다⁠. 방 이름 칸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봉남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이름을 뭐라 할 기요⁠?⁠”

“⁠같은 새요⁠.⁠”

“⁠너무 문학적이다⁠. 할매들 못 알아묵는다⁠.⁠” 봉남이 운동모를 도로 썼다⁠. “⁠「⁠같은 목소리⁠」 하소⁠. 우리가 들은 건 목소리 아이요⁠.⁠”

순애는 「⁠같은 목소리⁠」를 쳤다⁠. 첫 번째로 봉남을 넣었다⁠. 접힌 송금 신청서가 봉남의 셔츠 주머니 안에 들어가는 것을 순애는 보았다⁠. 버리지 않고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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