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23자)
강
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 지백솔
손님방에는 침대 하나와 에어컨 하나, 창문 없는 벽이 넷 있었다. 에어컨이 덜덜거렸다. 순애는 침대에 앉지 않고 문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목에 시계가 없어서 시간을 몰랐다. 대신 소리로 셌다. 복도 끝 콜센터에서 새어 나오는 웅웅거림이 한 번 커졌다 작아지는 것이 점심이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계단으로 내려가는 발소리, 식판 부딪는 소리, 다시 올라오는 발소리.
웅웅거림이 다시 차오르고 한참 뒤였다. 멀리서 사이렌이 울었다. 하나, 둘, 셋. 겹쳤다.
그리고 웅웅거림이 멎었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끊기는 소리를 순애는 처음 들었다. 끊기는 순간 공기가 한 번 출렁였다. 그다음에 오는 것은 고요가 아니었다. 의자 끄는 소리, 휴대전화 떨어지는 소리, 누군가 현지 말로 외치는 소리, 그리고 한국말.
“경찰이다! 경찰 왔어!”
누군가 웃었다. 누군가 울었다. 순애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손잡이를 잡았다. 잠겨 있었다.
*
사이렌이 처음 울렸을 때 재빈은 B동 지하 계단에 있었다. 상자를 안고 철문 앞에 서 있었다. 「은행」의 지시는 짧았다. 「연애 1」 업무폰을 전부 지하 창고로 내리고, 창고 열쇠는 자기한테 가져올 것.
지하 철문 옆에 번호 자물쇠가 있었다. 재빈은 아침에 상자를 나르며 경비원의 손가락을 두 번 보았다. 여섯 자리였다. 재빈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번호를 눌렀다. 손가락이 떨려서 한 번 틀렸다. 두 번째에 문이 열렸다.
지하 방은 창고가 아니었다. 매트리스 여섯 장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사람이 열한 명 앉아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다. 물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가장 안쪽에 앉은 남자가 재빈을 알아보았다. 열한 달 동안 같은 층에서 일하던 남자였다. 남자의 왼쪽 손목에 재빈과 같은 줄 자국이 있었다.
“재빈아, 너 한국 갔잖아.”
“다시 왔어요. 나가요. 위에 경찰 왔어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다들 알았다. 재빈은 철문을 끝까지 밀어 열고, 문틀에 상자를 끼워 닫히지 않게 했다. 휴대전화가 든 상자가 문을 받쳤다.
“진짜예요. 사이렌 들리잖아요. 이번엔 대본 아니에요.”
가장 안쪽의 남자가 먼저 일어났다. 다음 사람이 일어났다. 열한 명이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재빈은 문 옆에서 숫자를 셌다. 열하나. 재빈은 상자를 다시 안아 들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은행」의 사무실 대신 손님방 번호를 떠올렸다. 아침 복도에서 경비원들이 순애를 데려간 방이었다.
*
밖에서 번호 자물쇠 누르는 소리가 났다. 삑, 삑, 삑, 삑. 문이 열렸다. 재빈이 서 있었다. 두 팔에 플라스틱 상자를 안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수십 대 담긴 상자였다. 헤드셋은 목에 없었다.
“어머님.”
“그러니까요, 두 번. 봤어요.”
“지하 방 열었어요. 상자 나르면서 번호 봤어요. 열한 명 있었어요. 다 나왔어요.” 재빈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에는 숨이 길고 거칠었다. “이 상자는 「연애 1」 조 업무폰이에요. 케일런도 여기 들어 있어요. 열세 달치 대화도요. 「은행」이 이거 먼저 치우라고 해서 들고 내려가다가, 어머님한테 왔어요.”
“구 부지점장은?”
“나루터로 갔어요. 노트북 가방 들고요. 강 건너가 다른 나라예요. 거기는 여기 경찰이 못 따라가요.”
순애는 상자에 든 휴대전화들을 내려다보았다. 스티커 번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K-01」 케일런이었다.
“재빈 씨, 이 상자 경위님한테 직접 줘요. 남한테 맡기지 말고.”
“어머님은요?”
순애는 카디건 소매를 걷었다.
“나는 나루터.”
*
B동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순애의 무릎이 계단마다 소리를 냈다. 순애는 난간을 잡고 한 칸씩 내려갔다. 이 층 철문이 열려 있었다. 콜센터 안에서 현지 경찰들이 사람들을 벽 앞에 줄 세우고 있었다. 실적표 앞에서 벌 서던 다섯이 팔을 내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중 스무 살 남짓한 얼굴이 순애를 보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회수」 조 책상 앞에 여자가 서 있었다. 헤드셋을 벗어 손에 들고 있었다. 순애는 걸음을 멈추고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아침에 이름표에서 읽고 입속으로 되뇐 이름 석 자였다.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한국 경찰분들 금방 와요. 이름 물어보면 이 이름 대요. 내가 먼저 말해 둘게요.”
여자는 대답 대신 헤드셋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대본 옆 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울면 같이 울어 줄 것」 여자가 쪽지를 밟고 울었다. 이번에는 대본에 없는 울음이었다.
정원으로 나오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수영장 물이 하얗게 번쩍였다. 정문에서 반 경위가 뛰어왔다. 재빈이 상자를 안고 반 경위에게 갔다. 순애는 반 경위의 외침을 등 뒤로 들으며 단지 뒷문으로 걸었다. 뒷문은 열려 있었다. 뒷문 밖으로 흙길이 강으로 이어졌다.
*
소롬은 찻집 앞에 세워진 주재관의 승합차 열쇠를 쥐고 있었다. 주재관이 정문으로 뛰어가며 「차 좀 봐 주세요」 하고 던져 준 열쇠였다. 소롬은 열쇠를 보다가 강가 흙길을 보았다. 흰 블라우스 하나가 흙길을 따라 강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회색 카디건 소매가 걷혀 있었다. 무릎을 끌며 걷는 걸음이었다.
흙길 아래, 나루터에 작은 배가 한 척 매여 있었다. 배 위에서 사공이 시동 줄을 당기고 있었다. 나루터로 이어지는 강변 도로 저편에서 베이지색 바지의 여자가 가방을 안고 뛰어가고 있었다.
소롬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처음 타는 차였다. 핸들이 오른쪽에 있었다. 소롬은 짧게 욕을 하고 기어를 넣었다.
“출발합니다. 손잡이 꼭 잡으세요.”
승합차가 강변 도로를 달렸다. 길은 좁았고, 바퀴 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소롬은 바퀴 자국 사이로 차를 몰았다. 버스로 비 오는 날 언덕길 굽이를 하루 마흔 번 돌던 손이었다. 나루터 입구에서 소롬이 핸들을 크게 꺾었다. 승합차가 옆으로 미끄러지며 나루터로 내려가는 경사로를 가로막았다. 흙먼지가 일었다.
구채봉이 경사로 앞에서 멈췄다. 승합차 옆구리가 가로막고 있었다. 배는 경사로 아래에 있었다. 구채봉이 차 앞으로 돌아가려 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이번 정류장은 나루터입니다. 이 차는 강을 건너지 않습니다.”
*
순애가 나루터 경사로 위에 닿았을 때, 구채봉은 승합차 앞 범퍼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노트북 가방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숨이 찼다. 묶은 머리가 반쯤 풀려 흰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었다. 배 위의 사공은 시동 줄을 놓고 담배를 꺼냈다. 경사로를 막은 승합차를 보고, 오늘은 손님을 태우지 않기로 한 얼굴이었다. 사공이 밧줄을 말뚝에 한 번 더 감았다. 강 건너는 가까웠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보였다.
순애는 구채봉 앞 세 걸음에서 멈췄다. 무릎을 짚었다. 숨을 골랐다.
“구 부지점장.”
“지점장님, 걸음 빠르시네요. 무릎 아프시다면서.”
“아파요. 지금도 아파요.”
구채봉이 가방을 고쳐 안았다.
“이 안에 지점장님 돈 이천칠백이 어디로 갔는지 다 있어요. 다른 사람들 돈도요. 저를 보내 주시면 지점장님 몫은 돌려드릴게요. 강 건너서 바로요. 저는 숫자 틀리는 사람 아니에요.”
“알아요. 구 부지점장은 숫자를 안 틀려요.” 순애가 허리를 폈다. “그래서 그 가방은 경찰한테 가야 해요. 그 숫자가 나 혼자 거면 받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거기 봉남 선생님 집이 있고, 미단 원장 딸 시집갈 돈이 있고, 시흥 어르신 연금이 있어요. 그걸 나 혼자 돌려받으면 나는 구 부지점장이랑 같은 사람이 돼요.”
“은행은요?” 구채봉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이었다. “은행은 제 아들 병원비 앞에서 아무것도 안 해 줬어요. 지점장님도요. 대출은 안 됐고, 연체는 쌓였고, 규정은 지점장님 편이었어요. 은행이 지켜 주지 않은 돈을 저는 제 손으로 지켰어요. 그게 죄면, 은행이 저를 버린 건 뭐예요?”
“그것도 잘못이에요.” 순애가 말했다. “은행도 잘못했고, 나도 잘못했어요. 그날 밤 금고 앞에서 내가 할 일은 하룻밤을 미뤄 주는 게 아니었어요. 같이 병원에 가서 무균실 앞에서 대출 서류를 같이 쓰는 거였어요. 나는 그걸 안 했어요. 열세 해 동안 그 생각을 안 하고 살았어요.”
구채봉이 순애를 보았다. 강바람이 둘 사이로 지나갔다. 강물 냄새, 기름 냄새, 흙냄새.
“그런데 구 부지점장. 은행이 구 부지점장을 버린 걸로, 구 부지점장이 저 담장 안 사람들 여권을 뺏어도 되는 건 아니에요. 지하 방에 열한 명이 있었어요. 아침에 실적표 앞에 팔 들고 서 있던 애가 스무 살이었어요. 그 애는 구 부지점장 아들 나이예요.”
구채봉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가방이 가슴에서 조금 미끄러졌다. 강변 도로에서 사이렌이 가까워졌다. 현지 경찰 트럭 두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왔다.
구채봉이 혀로 이를 한 번 찼다. 마지막이었다.
“지점장님. 그날 밤 하룻밤 미뤄 주신 거요. 저는 그 밤에 아들 옆에 있었어요. 마지막 밤은 아니었는데, 아들이 제일 많이 웃은 밤이었어요. 그건 고마웠어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경찰들이 경사로로 내려왔다. 구채봉이 노트북 가방을 순애에게 내밀었다. 순애는 받지 않았다. 손으로 경찰을 가리켰다. 구채봉이 가방을 경찰에게 건넸다. 수갑이 채워졌다. 구채봉은 끌려가며 한 번 돌아보았다. 순애가 아니라 승합차 운전석을 보았다. 소롬이 핸들에 두 손을 얹고 앞을 보고 있었다.
“기사님, 안내 방송 좋네요.”
소롬은 대답하지 않았다.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
해가 강 위로 기울 무렵, 단지 정문 앞에 한국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마흔 명이 넘었다. 주재관이 한 사람씩 이름을 받아 적었다. 「회수」 조 여자가 순애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경비원이 정문 바구니를 통째로 들고 나왔다. 주재관이 휴대전화와 손목시계를 하나씩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순애의 손목시계도 있었다. 순애는 시계를 손목에 차고 시각을 보았다. 다섯 시 십 분이었다. 소롬이 안산 차고지에서 첫차를 몰고 나가는 시각과 숫자가 같았다.
재빈은 정문 옆에 혼자 서 있었다. 상자는 이미 반 경위의 차에 실려 있었다. 반 경위가 수첩을 들고 재빈 앞으로 갔다. 재빈이 반 경위를 보았다. 그다음 소롬을 보았다. 소롬은 승합차에서 내려 엄마 옆에 서 있었다.
재빈이 두 손을 모아 반 경위에게 내밀었다. 손목에 흐릿한 줄 자국이 있었다.
“체포해 주세요. 한국에서요.”
반 경위가 재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갑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재빈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비행기에서 수갑은 안 채워요. 인천에 내리면 채울게요. 도망가지 마세요.”
“안 갑니다.”
재빈이 소롬을 보았다. 소롬이 재빈 앞으로 걸어갔다. 둘 사이에 한 걸음이 남았다. 소롬은 남은 한 걸음을 건너지 않았다.
“재빈 씨. 비행기 안에서 무슨 말 할지 정해 와. 인천 내리기 전까지. 나 다시 정할 거야.”
“네.”
“이번엔 숨 넣지 말고.”
재빈이 웃었다. 웃다가 울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