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99자)

실적표

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 지백솔

아침 아홉 시⁠, 하이리버 단지 정문의 쇠문이 반만 열렸다⁠. 경비원이 순애의 가방을 뒤졌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전원을 끈 뒤 바구니에 넣었다⁠. 바구니에는 이미 휴대전화가 여러 대 들어 있었다⁠. 경비원이 순애의 손목시계를 보고 손짓했다⁠. 순애는 시계를 풀었다⁠. 남편이 은퇴 기념으로 사 준 시계였다⁠.

“⁠나갈 때 돌려줘요⁠.⁠”

경비원은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얼굴로 바구니를 들고 갔다⁠.

정문 안은 정원이었다⁠. 야자수가 줄지어 심겨 있었고⁠, 수영장에 파란 물이 찰랑였다⁠. 아무도 수영하지 않았다⁠. 수영장 가장자리 의자에 젊은 남자 셋이 앉아 담배를 피우다 순애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셋 다 한국 사람 얼굴이었다⁠. 셋 다 눈 밑이 검었다⁠.

구채봉이 B동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흰 블라우스였다⁠.

“⁠지점장님⁠, 무릎 괜찮으세요⁠? 엘리베이터는 사람 다니는 시간에만 돌아요⁠. 오늘은 걸으셔야 해요⁠.⁠”

“⁠걷는 건 괜찮아요⁠.⁠”

계단은 콘크리트 그대로였다⁠. 층마다 철문이 있었고⁠, 철문마다 번호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이 층 철문 너머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빗소리 같았다⁠. 가까이 가자 사람 목소리였다⁠. 수백 개였다⁠.

구채봉이 번호를 눌렀다⁠. 철문이 열렸다⁠.

*

한 층이 통째로 하나의 방이었다⁠. 책상이 줄지어 놓였고⁠, 책상마다 사람이 앉았고⁠, 사람마다 앞에 휴대전화가 서너 대씩 놓였다⁠. 천장의 형광등이 빈틈없이 하얬다⁠. 창문은 검은 필름으로 막혀 있었다⁠. 에어컨이 세게 돌아서 순애는 카디건을 다시 꺼내 입었다⁠.

소리가 순애를 덮쳤다⁠. 순애는 귀를 열었다⁠. 열고 나서 후회했다⁠.

“⁠굿모닝⁠, 사랑하는 당신⁠.⁠” “⁠어머님⁠, 저 검찰청 수사관입니다⁠. 고객님 계좌가 범죄에 연루되어⁠…⁠.⁠” “⁠엄마⁠, 나야⁠. 엄마⁠, 사고 났어⁠…⁠.⁠” “⁠오늘 시장 좋아요⁠. 지금 넣으시면⁠…⁠.⁠” “⁠통관이 보류되어서 수수료를⁠…⁠.⁠”

말이 서로 겹쳐서 하나의 웅웅거림이 되었다⁠. 발전기 소리와 비슷했다⁠. 순애는 웅웅거림 속에서 낱말을 하나씩 떼어 들었다⁠. 군인⁠, 의사⁠, 수사관⁠, 딸⁠, 아들⁠. 바다 건너 어느 집 식탁에서 누군가 이 목소리를 듣고 은행 봉투를 꺼낼 것이다⁠.

책상 앞쪽 벽에 커다란 화이트보드가 붙어 있었다⁠. 실적표였다⁠. 조 이름이 세로로 적혀 있었다⁠. 「⁠연애 1⁠」 「⁠연애 2⁠」 「⁠투자⁠」 「⁠수사⁠」 「⁠가족⁠」 「⁠회수⁠」 사람 이름 옆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오늘 새로 말을 건 사람 수⁠, 돈을 보낸 사람 수⁠, 들어온 금액⁠. 맨 아래 이름 몇 개에는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실적표 앞에 사람 다섯이 서 있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었다⁠. 셋은 남자였고 둘은 여자였다⁠. 그중 하나는 스무 살을 겨우 넘긴 얼굴이었다⁠. 팔이 떨렸다⁠. 옆에서 덩치 큰 남자가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팔이 내려가면 발로 의자 다리를 툭 찼다⁠.

“⁠실적이 안 나온 사람들이에요⁠.⁠” 구채봉이 말했다⁠. “⁠어제 하루 한 명도 못 보냈어요⁠. 오늘 정오까지 서 있어요⁠.⁠”

“⁠사람이에요⁠.⁠”

“⁠여기선 다 사람이에요⁠. 그래서 실적이 있는 거고요⁠.⁠”

순애는 실적표 맨 위 줄을 보았다⁠. 「⁠연애 1⁠」 조의 맨 위에 「⁠케일런⁠」이 있었다⁠. 이름 옆 숫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쯤 길었다⁠. 케일런은 이 방에서 가장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아니라서⁠.

실적표 옆 벽에는 종이 몇 장이 압정으로 꽂혀 있었다⁠. 새로 온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쓰는 종이라고 구채봉이 말했다⁠. 맨 위 종이의 제목이 순애의 눈에 들어왔다⁠.

「⁠모범 사례 — 연애 1조 / 대상⁠: 60대 여성⁠, 전직 은행 지점장 / 기간⁠: 13개월⁠」

아래에 대화가 날짜순으로 옮겨져 있었다⁠.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사진⁠, 당신도 아름다워요⁠.⁠」 「⁠보안 때문에 미안해요⁠.⁠」 「⁠딸한테도 말하지 마요⁠.⁠」 문장마다 옆에 볼펜으로 짧은 풀이가 달려 있었다⁠. 「⁠사별 1주기 전후 접근⁠」 「⁠영상 요구 3회 → 음성으로 대체⁠」 「⁠가족 차단 문장은 송금 2주 전부터⁠」

맨 앞줄 책상에서 새로 온 듯한 청년이 종이를 보며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연습이었다⁠.

“⁠굿모닝⁠, 순애 씨⁠.⁠”

순애는 제 이름이 남의 입에서 대본으로 나오는 것을 들었다⁠. 청년의 발음은 서툴렀고⁠, 숨은 아무 데서나 쉬었다⁠.

“⁠숨이 틀렸네요⁠.⁠”

순애가 말하자 청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구채봉이 순애를 보았다⁠.

“⁠「⁠회수⁠」 조는 뭐예요⁠?⁠”

“⁠한 번 보낸 사람한테 돈 찾아 준다고 다시 받는 조요⁠. 탁 실장이 한국에서 하던 걸 여기서 크게 해요⁠. 처음 당한 사람이 두 번째에는 더 잘 보내요⁠. 찾고 싶은 마음이 크니까요⁠.⁠”

순애는 「⁠회수⁠」 조 책상을 보았다⁠. 젊은 여자 하나가 헤드셋을 쓰고 대본을 읽고 있었다⁠. 「⁠선생님⁠, 저희는 피해금 환급을 돕는 법률 사무소입니다⁠.⁠」 대본 옆에 손으로 쓴 쪽지가 붙어 있었다⁠. 「⁠울면 같이 울어 줄 것⁠」

순애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숨을 짧게⁠, 한 번⁠. 서울 말씨였다⁠. 대학을 갓 나온 목소리였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순애를 보았다⁠. 대본을 읽으며 입 모양으로 한 낱말을 만들었다⁠. 소리 없이⁠. 「⁠살려⁠.⁠」

순애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여자의 책상 모서리에 붙은 이름표를 읽었다⁠. 이름 석 자를 입속으로 세 번 되뇌었다⁠. 남편이 짬뽕집 이름을 틀리게 부르던 것처럼⁠, 틀리지 않으려고⁠.

*

유리방은 층 맨 끝에 있었다⁠. 콜센터 전체를 내려다보는 사무실이었다⁠. 유리는 바깥에서 안이 안 보이게 되어 있었다⁠. 안에서는 수백 개의 등과 실적표와 벌 서는 다섯이 한눈에 보였다⁠. 책상 위에 모니터 넷이 켜져 있었다⁠. 숫자가 위로 흘렀다⁠.

구채봉이 순애에게 의자를 권했다⁠. 자기는 창가에 서서 콜센터를 내려다보았다⁠.

“⁠지점장님⁠, 이 방에 숫자 들어오는 길이 몇 개인지 아세요⁠?⁠”

“⁠모르고 싶어요⁠.⁠”

“⁠한국 쪽은 지점장님이 다 막으셨어요⁠. 그 학생이랑 탁 실장이 잡히고 나서 한국 쪽 통장이 열두 개 묶였어요⁠. 이번 달 한국 실적이 반으로 줄었어요⁠.⁠” 구채봉이 몸을 돌렸다⁠. “⁠그래서 제안드려요⁠. 여기 오세요⁠. 자금 쪽을 같이 봐 주세요⁠. 한국 은행들이 어디서 무엇을 보고 막는지⁠, 지점장님만큼 아는 사람은 여기 없어요⁠. 오시면 재빈이 빚은 지워요⁠. 오늘 바로 비행기 태워 보내요⁠. 지점장님 돈 이천칠백도 돌려드리고요⁠. 따님 결혼식도 할 수 있어요⁠.⁠”

순애는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모니터의 숫자가 위로 흘렀다⁠. 저 숫자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정기예금⁠, 연금⁠, 딸 시집갈 돈이었다⁠.

“⁠구 부지점장⁠. 열세 해 전 금고 앞에서 내가 하룻밤을 미룬 건⁠, 내 마음 편하자고 그랬다고 했지요⁠.⁠”

“⁠네⁠.⁠”

“⁠맞아요⁠. 그 말이 맞아요⁠. 어젯밤 생각했는데 맞아요⁠.⁠” 순애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안 미룰게요⁠. 안 와요⁠. 재빈이 빚은 재빈이가 한국에서 감옥 가서 갚을 거예요⁠. 내 이천칠백은 안 받아요⁠. 그 돈 받으려고 여기 앉으면 나는 저 실적표에 이름이 올라가요⁠.⁠”

구채봉이 한참 순애를 보았다⁠. 혀로 이를 차지 않았다⁠.

“⁠지점장님은 끝까지 정답만 하시네요⁠.⁠”

“⁠정답이 아니라 내 대답이에요⁠. 구 부지점장도 구 부지점장 대답을 했잖아요⁠. 아들 병원비 앞에서 은행이 아무것도 안 해 줬다는 거⁠. 그건 나도 반박 못 해요⁠. 그때 은행은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나도요⁠.⁠”

구채봉의 손이 유리창 위에서 멈췄다⁠. 창밖 콜센터에서 벌 서던 여자 하나의 팔이 내려갔다⁠. 덩치 큰 남자가 의자 다리를 찼다⁠. 여자가 팔을 다시 올렸다⁠.

“⁠그런데 저 여자애는 구 부지점장 아들이 아니에요⁠. 저 애도 누구 딸이에요⁠.⁠”

구채봉이 유리창에서 손을 뗐다⁠. 책상의 내선 전화를 들었다⁠. 현지 말로 짧게 말했다⁠. 전화를 내려놓았다⁠.

“⁠지점장님⁠, 오늘은 여기서 주무세요⁠. 손님방이 있어요⁠. 에어컨도 좋고요⁠. 따님한테는 제가 연락드릴게요⁠. 지점장님 목소리로요⁠.⁠”

순애는 웃었다⁠. 소리 내어 웃었다⁠.

“⁠해 봐요⁠. 우리 딸은 암호 물어볼 거예요⁠.⁠”

“⁠암호요⁠?⁠”

“⁠우리 집엔 우리만 웃는 이름이 있어요⁠. 구 부지점장은 그 이름 몰라요⁠. 여기 있는 수백 명도 몰라요⁠. 녹음에 안 남아 있거든요⁠.⁠”

*

같은 시각⁠, 단지 정문에서 이백 미터 떨어진 강가 찻집⁠. 소롬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정문만 보고 있었다⁠. 아홉 시에 엄마가 들어간 뒤로 정문은 두 번 열렸다⁠. 한 번은 생수 트럭⁠, 한 번은 오토바이였다⁠. 반 경위와 주재관은 옆 탁자에서 지도를 펴 놓고 현지 경찰과 통화하고 있었다⁠. 주재관의 이마에서 땀이 지도 위로 떨어졌다⁠.

열한 시 사십 분⁠, 소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엄마⁠」가 떴다⁠. 엄마 번호였다⁠.

“⁠소롬아⁠, 엄마야⁠. 엄마 괜찮아⁠. 채봉이랑 얘기 잘됐어⁠.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갈게⁠. 경찰분들한테는 걱정 말라고 해⁠.⁠”

엄마 목소리였다⁠. 낮고 또박또박했다⁠. 소롬은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지 않았다⁠. 반 경위가 통화를 멈추고 소롬을 보았다⁠.

“⁠엄마⁠, 아빠 짬뽕집 이름 뭐였지⁠?⁠”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 오 초⁠.

“⁠얘는⁠, 그런 걸 지금 왜 물어⁠. 엄마 바빠⁠.⁠”

“⁠이름 대 봐⁠. 아빠가 틀리게 부르던 거⁠.⁠”

통화가 끊겼다⁠. 소롬은 휴대전화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눌러 통화 녹음 파일을 반 경위에게 보냈다⁠.

“⁠엄마 아니에요⁠. 엄마 휴대폰으로 엄마 목소리 흉내 냈어요⁠. 엄마는 「⁠얘는⁠」이라고 안 해요⁠. 그리고 엄마는 「⁠바빠⁠」라고 안 해⁠. 엄마는 바쁘면 말을 안 해요⁠.⁠”

주재관이 녹음을 듣고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들어간 한국인이 휴대전화를 뺏겼고⁠, 본인 의사와 다르게 붙잡혀 있다⁠. 이걸로 됩니다⁠. 현지 경찰한테 넘기겠습니다⁠.⁠”

반 경위가 소롬의 어깨를 한 번 짚었다⁠. 소롬은 정문을 보았다⁠. 정문은 닫혀 있었다⁠. 소롬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번 정류장은 하이리버⁠. 하이리버입니다⁠. 내리실 분은 미리 벨을 눌러 주세요⁠.⁠”

*

유리방 문이 열리고 경비원 둘이 들어왔다⁠. 순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소리를 냈다⁠. 경비원 하나가 순애의 팔을 잡으려 하자 순애가 손을 들어 막았다⁠.

“⁠걸을 수 있어요⁠.⁠”

유리방을 나와 복도로 가는 길은 콜센터 가장자리를 따라 나 있었다⁠. 순애는 천천히 걸었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다시 웅웅거렸다⁠. 실적표 앞의 다섯이 팔을 들고 있었다⁠. 「⁠회수⁠」 조의 여자가 대본을 읽고 있었다⁠.

복도 맞은편에서 남자 하나가 걸어왔다⁠. 두 팔에 플라스틱 상자를 안고 있었다⁠. 상자 안에 휴대전화가 수십 대 쌓여 있었다⁠. 휴대전화마다 번호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남자는 헤드셋을 목에 걸고 있었다⁠. 키가 순애보다 머리 하나 컸다⁠.

재빈이었다⁠.

재빈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경비원들이 재빈을 보지 않았다⁠. 상자 나르는 사람은 이 층에 수십 명이었다⁠. 순애와 재빈이 복도 한가운데에서 엇갈렸다⁠. 엇갈리는 한 걸음 동안 재빈이 순애를 보았다⁠.

재빈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다⁠. 순애는 입 모양을 읽었다⁠. 열세 달 동안 들은 말이었다⁠. 두 번⁠.

그러니까요⁠. 그러니까요⁠.

그리고 재빈이 숨을 짧게 두 번 들이켰다⁠. 이번에는 들렸다⁠. 일부러 들리게 쉬는 숨이었다⁠.

재빈이 상자를 안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철문이 있었다⁠. 지하 방이 있다고 했던 곳이었다⁠. 순애는 경비원들 사이에서 손님방으로 걸었다⁠. 걸으면서 이름 석 자를 입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회수⁠」 조 여자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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