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48자)

목소리

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 지백솔

1월의 법정은 난방이 약했다⁠. 방청석 나무 의자가 엉덩이 밑에서 차가웠다⁠. 순애는 회색 카디건 위에 겨울 외투를 입고 앉아 있었다⁠. 왼쪽에 봉남이 철도 배지 달린 모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앉았고⁠, 오른쪽에 미단이 손톱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은 손으로 수첩을 쥐고 앉았다⁠. 뒷줄에는 「⁠같은 목소리⁠」 사람들이 스무 명 넘게 앉아 있었다⁠. 꽃집 여자가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왔다가 법정 경위에게 밖에 두고 오라는 말을 들었다⁠.

피고인석에 셋이 앉았다⁠. 탁갑룡은 금테 안경 대신 뿔테 안경을 썼다⁠. 머리가 많이 셌다⁠. 구채봉은 십이월 초에 포이산에서 송환되었다⁠. 단정히 묶은 머리는 그대로였고⁠, 흰 블라우스 대신 연한 하늘색 수의를 입었다⁠. 재빈은 가장 끝에 앉았다⁠. 탁갑룡과 구채봉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재빈은 증인석에도 앉았다⁠. 자기 재판의 피고인이면서 두 사람 재판의 증인이었다⁠. 검사가 물었고 재빈이 대답했다⁠. 「⁠고액 해외 취업⁠」 광고⁠, 여권⁠, 실적표⁠, 지하 방⁠, 케일런⁠. 생활정보지 광고로 모은 통장⁠, 「⁠채권 회수 알바⁠」로 데려간 대학생들⁠. 검사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증인은 피해자 감순애 씨의 송금을 세 번 미뤘다고 했습니다⁠. 다른 피해자들의 송금은 왜 미루지 않았습니까⁠?⁠”

재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숨을 짧게 두 번 들이켰다⁠. 방청석에서 순애는 재빈의 숨을 들었다⁠.

“⁠못 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얼굴을 몰랐습니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 돈은 숫자로만 보였습니다⁠. 그게 제 죄입니다⁠.⁠”

검사가 「⁠이상입니다⁠」라고 했다⁠. 피고인석에서 구채봉이 혀로 이를 한 번 찼다⁠. 아무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선고는 같은 날 오후에 났다⁠. 구채봉은 범죄 단체를 조직하고 사기를 저지른 죄로 징역 십오 년⁠. 탁갑룡은 징역 구 년⁠. 재빈은 수사에 협조하고 지하 방의 열한 명을 데리고 나온 것이 참작되어 징역 이 년 육 개월⁠. 시흥 노인은 통장을 넘긴 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채권 회수 알바⁠」를 하던 대학생은 집행 유예와 사회봉사를 받았다⁠. 판사가 판결문 끝에 짧게 덧붙였다⁠.

“⁠통장을 빌려준 사람과 현금을 나른 사람이 없었다면 이 범죄는 바다를 건너지 못했습니다⁠.⁠”

봉남이 순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판사 양반이 철로를 아네⁠.⁠”

법정을 나서는 복도에서 피고인들이 교도관을 따라 걸어 나왔다⁠. 탁갑룡이 먼저 지나갔다⁠. 순애 앞에서 걸음을 늦추고 고개를 숙였다⁠.

“⁠어머님⁠. 개과천선하겠습니다⁠.⁠”

“⁠이번엔 맞았네요⁠.⁠”

“⁠감옥에서 사자성어 책 한 권 뗐습니다⁠. 아홉 해면 두 권은 떼겠지요⁠.⁠”

탁갑룡이 교도관에게 팔을 잡혀 지나갔다⁠. 다음이 구채봉이었다⁠. 구채봉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순애 옆을 지나며 앞만 보고 말했다⁠.

“⁠지점장님⁠, 이천칠백이 어디 있는지 저는 알아요⁠. 말 안 할 거예요⁠.⁠”

“⁠말하지 마요⁠.⁠”

구채봉이 한 걸음 더 가다가 멈췄다⁠. 교도관이 팔을 당겼다⁠. 구채봉이 고개만 돌렸다⁠.

“⁠왜요⁠?⁠”

“⁠그 돈은 내가 열세 달 동안 외로웠던 대가로 할게요⁠. 내가 낸 거예요⁠. 구 부지점장이 가져간 게 아니라⁠.⁠” 순애는 외투 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구 부지점장⁠, 금고 앞의 밤 얘기는 이제 서로 안 해요⁠. 구 부지점장은 십오 년 동안 그 밤을 혼자 가지고 있어요⁠. 나는 내 몫을 가지고 살게요⁠.⁠”

구채봉이 혀를 차려다 말았다⁠. 입술만 한 번 움직이고 고개를 바로 했다⁠. 교도관을 따라 복도 끝 철문으로 들어갔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길게 울렸다⁠.

*

돈은 반쯤 돌아왔다⁠.

순애가 호수공원 주차장에서 파란 모자에게 건넨 오천만 원은 그대로 돌아왔다⁠. 계좌로 보낸 오천만 원 가운데 묶인 이천삼백만 원도 피해 구제 절차를 거쳐 돌아왔다⁠. 코인과 상품권으로 바다를 건넌 이천칠백만 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케일런에게 보낸 육백만 원과 처음 미끼로 보낸 삼백만 원 가운데 빠져나간 백팔십만 원도⁠.

구채봉의 노트북은 포이산 경찰에서 한국 경찰로 넘어왔다⁠. 반 경위가 노트북에서 다른 피해자 백여 명의 돈길을 찾아냈다⁠. 봉남은 오천사백만 원 가운데 천백만 원을 돌려받았다⁠. 정 지점장이 아파트 담보 대출의 상환 기간을 늘려 주었다⁠. 봉남은 아내가 남긴 집에 그대로 살았다⁠. 미단은 삼천만 원 가운데 육백만 원을 돌려받았다⁠. 딸 결혼식에 돌려받은 돈으로 한복을 맞춰 주었다고 했다⁠. 꽃집 여자는 탁갑룡에게 보낸 착수금과 공탁금 이백오십만 원을 전부 돌려받았다⁠. 탁갑룡은 착수금을 아직 쓰지 않고 있었다⁠.

「⁠같은 목소리⁠」는 삼백 명이 넘었다⁠. 봄부터는 상록구 복지관 이 층 교실 하나를 빌려 한 달에 두 번 모였다⁠. 교실 문에는 봉남이 매직으로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목소리 듣는 법 — 강사 감순애·모봉남·염미단⁠」

첫 수업에서 봉남은 칠판에 기차를 그렸다⁠. 맨 앞에 기관차⁠, 뒤에 화물칸 넷⁠. 화물칸마다 글씨를 썼다⁠. 통관비⁠, 세금⁠, 보험료⁠, 위약금⁠.

“⁠앞에 보낸 돈이 뒤에 보낼 돈을 끌고 갑니더⁠. 첫 칸에서 내리이소⁠. 첫 칸에서 못 내리면 다음 정류장에서라도 내리이소⁠. 다음 정류장은 112입니더⁠.⁠”

미단은 휴대전화를 들고 수강생들 사이를 돌며 사진을 거꾸로 찾는 법을 가르쳤다⁠. 「⁠길게 누르고⁠, 사진으로 찾기⁠. 소방관 나오면 손 드세요⁠.⁠」 할머니 하나가 손을 들었다⁠. 화면에 노란 방화복이 떠 있었다⁠. 교실 안 사람들이 다 같이 웃었다⁠. 할머니가 먼저 웃었다⁠.

세 번째 수업 날⁠, 교실 뒷문이 열리고 반 경위가 들어왔다⁠. 운동화 대신 구두를 신었고⁠, 일흔 줄의 여자 한 사람을 부축하고 있었다⁠. 반 경위의 어머니였다⁠. 반 경위가 맨 뒷줄 의자를 빼 어머니를 앉히고 순애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강 신청은 안 했는데요⁠.⁠”

“⁠여기는 신청 안 받아요⁠. 들어오면 수강생이에요⁠.⁠” 순애가 말했다⁠. “⁠어머님⁠, 앞으로 오세요⁠. 뒤는 안 들려요⁠.⁠”

반 경위의 어머니가 앞줄로 옮겨 앉았다⁠. 봉남이 사탕을 하나 건넸다⁠. 정 지점장이 고잔지점 창구에서 한 바구니를 통째로 보내 준 박하사탕이었다⁠.

“⁠우리 딸이 경찰인데도 나는 당했어요⁠. 아들 목소리였어요⁠.⁠”

“⁠여기 다 그래요⁠.⁠” 미단이 말했다⁠. “⁠딸이 미용실 하는데 나도 당했어⁠. 머리 하는 사람이 머리 털렸지⁠.⁠”

교실이 웃었다⁠. 반 경위의 어머니도 웃었다⁠. 반 경위는 웃지 않고 어머니의 웃음을 들었다⁠. 순애는 반 경위의 얼굴을 알았다⁠. 열세 달 동안 거울에서 본 얼굴의 반대편이었다⁠.

순애는 마지막 순서였다⁠. 순애는 칠판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휴대전화로 음성 메시지 두 개를 틀었다⁠. 하나는 케일런의 굿모닝이었다⁠. 하나는 「⁠같은 목소리⁠」 사람 하나가 손자에게 받은 진짜 음성 메시지였다⁠.

“⁠둘 다 들어 보세요⁠. 목소리는 흉내 낼 수 있어요⁠. 숨은 못 흉내 내요⁠. 그리고 진짜 가족은 돈 얘기를 할 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고 안 해요⁠. 끊고⁠, 다시 걸고⁠, 우리만 아는 걸 물어보세요⁠. 그 집만 웃는 이름 하나씩 정해 두세요⁠. 오늘 숙제예요⁠.⁠”

수강생 하나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 집은 뭐로 정했어요⁠?⁠”

“⁠그건 말 못 해요⁠. 암호니까요⁠.⁠”

교실이 웃었다⁠. 순애는 웃는 소리를 하나씩 떼어 들었다⁠. 숨 쉬는 자리가 다 달랐다⁠.

*

구치소 접견실은 좁았다⁠. 유리 한 장이 방을 반으로 갈랐다⁠. 유리 양쪽에 수화기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순애는 의자에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유리 너머 문이 열리고 재빈이 들어왔다⁠. 연두색 수의를 입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 손목에는 이제 줄 자국 대신 시계 자국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재빈이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어머님⁠.⁠”

서툰 발음이 아니었다⁠. 영어 억양도 없었다⁠. 숨은 「⁠어머님⁠」을 다 말하고 나서 쉬었다⁠. 일부러 넣은 자리가 아니었다⁠. 말이 끝난 자리에 숨이 왔다⁠.

순애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댔다⁠. 열세 달 동안 녹음으로 들은 목소리와⁠, 다섯 달 동안 진짜로 들은 목소리 사이에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걸러 내지 않고 들었다⁠.

“⁠밥은 먹어요⁠?⁠”

“⁠먹습니다⁠. 단지보다 낫습니다⁠. 쌀이 다 익었어요⁠.⁠”

순애가 웃었다⁠. 재빈도 웃었다⁠. 웃다가 재빈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어머님⁠, 비행기에서 할 말 정해 오라고 소롬 씨가 그랬잖아요⁠. 인천 내리기 전에 정했어요⁠. 소롬 씨한테는 그날 했어요⁠. 어머님께는 오늘 하려고요⁠.⁠”

“⁠해 봐요⁠.⁠”

“⁠굿모닝⁠, 순애 씨⁠.⁠”

순애의 손이 수화기 위에서 멈췄다⁠.

“⁠이 말을 제 목소리로 한 번은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열세 달 동안 남의 이름으로 했으니까요⁠. 한 번만 제 이름으로요⁠. 그리고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머님이라고만 부르겠습니다⁠.⁠”

순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에 자기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단정하게 짧게 자른 흰머리⁠, 가는 은테 안경⁠. 유리 너머 재빈의 얼굴이 순애의 얼굴과 겹쳤다⁠.

“⁠소롬이는 뭐래요⁠?⁠”

“⁠출소하는 날 첫차로 데리러 오겠대요⁠. 버스로요⁠. 그날 결혼 날짜를 다시 정하재요⁠. 그때까지는 매주 수요일에 와서 십 분씩 안내 방송을 해 줘요⁠. 「⁠이번 정류장은 접견실⁠, 접견실입니다⁠」⁠”

“⁠걔가 그걸 여기서 해요⁠?⁠”

“⁠교도관님이 웃으세요⁠. 매번요⁠.⁠”

접견 시간이 끝났다는 안내가 나왔다⁠. 재빈이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에 한 번 더 말했다⁠.

“⁠어머님⁠. 다음엔 무릎 얘기 해 주세요⁠. 수술하신다면서요⁠.⁠”

“⁠누가 그래요⁠?⁠”

“⁠소롬 씨가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요⁠.⁠”

순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웃었다⁠. 유리 너머에서 재빈이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혔다⁠.

*

이튿날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호수마을 정류장에는 서리가 내려 있었다⁠. 호수공원 연못은 얼어서 하얬다⁠. 연꽃 줄기 몇 개가 얼음 위로 마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순애는 회색 카디건 위에 외투를 여미고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 수술은 다음 달이었다⁠. 오늘은 정 지점장이 정기예금 재가입 서류를 준비해 놓겠다고 한 날이었다⁠. 칠천삼백만 원짜리 통장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가족 단톡방이었다⁠.

「⁠청주 이모⁠: 순애야 굿모닝⁠」 「⁠청주 이모⁠: (⁠해 뜨는 곰 이모티콘⁠)⁠」 「⁠청주 이모⁠: (⁠해 뜨는 곰 이모티콘⁠)⁠」 「⁠소롬⁠: 이모 굿모닝 금지어임⁠. 엄마 앞에서 하지 마⁠」 「⁠청주 이모⁠: 그럼 좋은 아침⁠」 「⁠청주 이모⁠: (⁠해 뜨는 곰 이모티콘⁠)⁠」

순애는 「⁠좋은 아침⁠」이라고 쳤다⁠. 암호는 치지 않았다⁠. 대신 남편이 틀리게 부르던 짬뽕집 이름을 입속으로 한 번 불러 보았다⁠. 소리 내지 않아도 웃음이 났다⁠. 소롬이 해 뜨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 다초점 안경을 코끝으로 내리지 않고도 글자가 보였다⁠. 화면을 껐다⁠.

도로 끝에서 시내버스가 모퉁이를 돌아왔다⁠. 사이드 미러 하나에 새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버스가 정류장 앞에 멈추고 문이 열렸다⁠. 운전석의 소롬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 정류장은 호수마을⁠, 호수마을입니다⁠. 우리 엄마 타십니다⁠. 손잡이 꼭 잡으세요⁠.⁠”

순애는 의자에서 일어나 손을 들었다⁠.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댔다⁠. 「⁠삑⁠.⁠」 노약자석에 앉지 않고 운전석 바로 뒤 손잡이를 잡았다⁠. 버스가 출발했다⁠. 백미러 속에서 딸이 엄마를 한 번 보고 앞을 보았다⁠. 얼어붙은 연못이 창밖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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