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35자)

포이산

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 지백솔

비행기 문이 열리자 공기가 먼저 들어왔다⁠. 뜨겁고 무겁고 젖은 공기였다⁠. 순애는 트랩을 내려오며 카디건을 벗었다⁠. 흰 블라우스가 등에 달라붙었다⁠. 소롬이 엄마의 가방을 뺏어 들었다⁠.

“⁠엄마⁠, 무릎⁠.⁠”

“⁠무릎은 비행기에 두고 왔어⁠.⁠”

“⁠거짓말⁠. 기내식 먹을 때도 문질렀잖아⁠.⁠”

공항은 작았다⁠. 입국 심사대 위로 선풍기 날개가 느리게 돌았다⁠. 반 경위가 앞에서 걸었다⁠. 출국 전 날 반 경위는 순애에게 짧게 말했다⁠. 「⁠저는 출장 명령으로 가요⁠. 현지에 나와 있는 우리 경찰 주재관이랑 현지 경찰이 같이 움직여요⁠. 지점장님은 민간인이에요⁠. 아무것도 약속 못 해요⁠.⁠」 순애는 「⁠알아요⁠」라고만 했다⁠.

공항 밖에서 현지에 나와 있는 한국 경찰 주재관이 승합차를 대 놓고 기다렸다⁠. 마흔 중반의 남자였고⁠, 햇볕에 그을린 목덜미에 땀띠가 돋아 있었다⁠. 반 경위와 악수를 하고 순애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점장님 얘기 들었습니다⁠. 고향이 안산이시라고요⁠. 저도 단원구 살았습니다⁠.⁠”

“⁠여기는 얼마나 계셨어요⁠?⁠”

“⁠두 해요⁠. 그동안 단지에서 빠져나온 한국 사람 마흔 명쯤 집에 보냈습니다⁠. 들어간 사람은 그보다 많고요⁠.⁠”

승합차는 세 시간을 달렸다⁠. 처음 한 시간은 논이었다⁠. 물을 댄 논에 하늘이 비쳤고⁠, 물소가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 다음 한 시간은 공사장이었다⁠. 짓다 만 건물들이 철근을 하늘로 내밀고 있었다⁠. 마지막 한 시간은 간판이었다⁠. 카지노⁠, 호텔⁠, 환전소⁠. 간판마다 중국어와 영어와 한국어가 섞였다⁠. 「⁠한국인 상담원 모집 월 800 숙식 제공⁠」 순애는 차창에 붙은 전단을 보았다⁠. 재빈이 말한 광고와 문구가 같았다⁠.

“⁠경위님⁠, 이런 광고에 한국 사람들이 아직도 와요⁠?⁠”

“⁠와요⁠. 한국에서 광고를 보면 여기가 어딘지 안 써 있어요⁠. 리조트⁠, 고객 상담⁠, 항공권 지원⁠. 비행기에서 내리면 그때 알아요⁠.⁠”

포이산은 강가에 있었다⁠. 메콩강은 누렇고 넓었다⁠. 강 건너는 다른 나라였다⁠. 강물 위로 작은 배들이 오갔고⁠, 배마다 사람이 서 있었다⁠. 강가를 따라 리조트처럼 꾸민 건물들이 이어졌다⁠. 그중 여섯 동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장 위에 철조망이 감겨 있었다⁠. 정문 간판에 「⁠HIGH RIVER⁠」라고 쓰여 있었다⁠. 정문 앞에 경비원 둘이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순애는 차창에 이마를 대고 담장을 보았다⁠. 저 안 어디에 재빈이 있었다⁠. 저 안 어디에서 열세 달 동안 누군가 「⁠굿모닝⁠, 순애 씨⁠」를 쳤다⁠.

*

강가 호텔 방은 사 층이었다⁠. 에어컨이 덜덜거리며 찬 바람을 뱉었다⁠. 짐을 풀고 나서 순애는 창문을 열어 보았다⁠. 습한 열기가 밀려 들어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강물이 주홍색으로 물들었다⁠.

멀리서 발전기가 웅웅거렸다⁠. 강가 건물마다 지붕 위에 발전기가 있었다⁠. 순애는 발전기 소리를 알았다⁠. 반 음 높이까지 알았다⁠.

해가 강물에 반쯤 잠길 무렵⁠, 창틀 바로 옆 벽에서 무언가 울었다⁠.

깨깟⁠. 깨깟⁠.

순애는 고개를 돌렸다⁠. 벽에 손바닥만 한 도마뱀이 붙어 있었다⁠. 회색 몸에 주황 반점이 박혀 있었다⁠. 목이 부풀었다 꺼지면서 소리를 냈다⁠. 깨깟⁠. 깨깟⁠.

“⁠엄마⁠, 왜 그래⁠?⁠”

소롬이 욕실에서 나오다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순애는 벽을 가리켰다⁠. 소롬이 도마뱀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도마뱀은 꿈쩍도 안 했다⁠.

“⁠이거야⁠.⁠” 순애가 말했다⁠. “⁠케일런 기지에 산다던 사막의 새⁠. 엘레나 병원 마당에 산다던 새⁠. 미단 원장 빈센트 사무실에도 살았지⁠.⁠”

소롬이 비명을 멈추고 도마뱀을 다시 보았다⁠.

“⁠도마뱀이 새 소리를 내⁠?⁠”

“⁠열세 달 동안 새인 줄 알았어⁠. 사막에 사는 새⁠.⁠” 순애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지 않았다⁠. “⁠봉남 선생님한테 사진 보내 줘⁠. 철새도 이렇게는 안 다닌다더니⁠, 도마뱀은 벽에 붙어서 다 다녔네⁠.⁠”

소롬이 휴대전화로 도마뱀을 찍어 「⁠같은 목소리⁠」에 올렸다⁠. 「⁠이게 그 새임⁠」 일 분 만에 봉남의 답이 왔다⁠. 「⁠이 짐승이 내 집을 날려 묵었나⁠」 미단이 웃는 이모티콘을 세 개 보냈다⁠. 꽃집 여자가 「⁠징그러워요⁠」라고 썼다⁠. 청주 이모는 가족 단톡방에 곰 이모티콘을 두 번 보냈다⁠. 암호였다⁠. 순애는 「⁠짬뽕집⁠」 이름으로 답했다⁠. 남편이 틀리게 부르던 이름으로⁠.

*

구채봉을 기다리는 동안 둘은 침대 하나씩에 걸터앉아 있었다⁠. 에어컨이 덜덜거렸다⁠. 소롬이 먼저 말했다⁠.

“⁠엄마⁠, 그 연꽃 사진⁠. 왜 올렸어⁠?⁠”

순애는 창밖을 보았다⁠. 강 위의 하늘이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빠 생일이었어⁠. 작년 유월⁠. 아빠가 연꽃 필 때 생일이라고 맨날 자랑했잖아⁠. 꽃이 자기 생일 알고 핀다고⁠.⁠”

“⁠알지⁠. 「⁠연꽃은 내 생일 축하하러 피는 거다⁠」⁠”

“⁠그날 혼자 호수공원 가서 찍었어⁠. 누구한테 보여 줄 데가 없어서 거기 올렸어⁠. 너한테 보내면 너 바쁜데 또 울까 봐⁠.⁠”

소롬이 손톱으로 침대 시트를 긁었다⁠.

“⁠나 그날 엄마한테 전화 안 했어⁠. 운행 열두 시간 잡혀 있어서⁠. 밤에 하려다 잤어⁠.⁠”

“⁠알아⁠.⁠”

“⁠케일런이 그날 댓글 달았지⁠. 「⁠아름다운 꽃⁠」⁠”

“⁠응⁠.⁠”

“⁠나는 아무것도 안 달았고⁠.⁠”

순애는 딸을 보았다⁠. 소롬은 시트만 보고 있었다⁠. 하루 열 시간 핸들을 잡는 손이 시트 위에서 하얗게 쥐어졌다⁠.

“⁠소롬아⁠. 아빠가 짬뽕집 이름 틀리게 부르던 거⁠, 그게 왜 암호가 됐는지 알아⁠?⁠”

“⁠우리만 아니까⁠.⁠”

“⁠우리만 웃으니까⁠.⁠” 순애가 말했다⁠. “⁠남들은 그 이름 들으면 무슨 소린지 몰라⁠. 우리는 들으면 웃어⁠. 그런 걸 남이 흉내 못 내⁠.⁠”

소롬이 시트를 놓았다⁠. 짬뽕집 이름을 남편이 부르던 대로 소리 내어 말했다⁠. 순애가 웃었고⁠, 소롬도 웃었다⁠. 벽의 도마뱀이 한 번 더 울었다⁠. 이번에는 둘 다 놀라지 않았다⁠.

*

구채봉은 저녁 여덟 시에 강가 호텔 일 층 커피숍으로 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검은 반소매 셔츠를 입은 남자 둘이 입구 양옆에 자리를 잡았다⁠. 구채봉은 흰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었다⁠. 단정히 묶은 머리 사이로 흰 머리카락이 몇 가닥 보였다⁠. 화면에서보다 작았다⁠. 열세 해 전 고잔지점 금고 앞에서도 작았다⁠.

반 경위와 주재관은 커피숍 맞은편 식당에서 국수를 시켜 놓고 있었다⁠. 소롬은 로비 소파에 앉아 잡지를 거꾸로 들었다⁠. 봉남에게 배운 것이었다⁠.

구채봉은 순애 맞은편에 앉아 망고 주스를 시켰다⁠. 순애는 뜨거운 차를 시켰다⁠.

“⁠여기서 뜨거운 거 드시면 땀 나세요⁠, 지점장님⁠.⁠”

“⁠땀은 나도 돼요⁠. 손이 떨리면 안 되고⁠.⁠”

구채봉이 웃었다⁠. 창구 웃음이 아니었다⁠.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손 안 떨리시네요⁠. 저는 그날 밤 손이 떨렸어요⁠. 금고 앞에서⁠. 기억나세요⁠?⁠”

“⁠기억나요⁠. 밤 열 시였고⁠, 시재가 삼천만 원 비었고⁠, 구 부지점장이 금고 문을 붙잡고 있었어요⁠. 내일 아침까지 맞춰 놓겠다고 했어요⁠.⁠”

“⁠지점장님은 아침까지 시간을 주셨죠⁠.⁠”

“⁠줬어요⁠.⁠”

“⁠그게 저를 위한 거였다고 생각하세요⁠?⁠”

순애는 찻잔을 들었다⁠. 뜨거웠다⁠. 내려놓지 않았다⁠.

“⁠그날 밤 아침까지 시간을 준 거⁠, 그게 서른 해 동안 내가 규정을 어긴 단 한 번이에요⁠. 바로 신고했어야 했어요⁠. 나는 구 부지점장이 돈을 채워 오길 바랐어요⁠. 채워 오면 없던 일로 하려고 했어요⁠. 아침에 돈은 안 왔고⁠, 나는 신고했어요⁠.⁠”

구채봉이 망고 주스 빨대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아침까지 못 채울 걸 아시면서 시간을 주셨잖아요⁠. 아들 무균실 병원비는 그날 밤에 이미 나갔어요⁠. 지점장님은 그걸 아셨어요⁠. 시간을 준 게 아니라⁠, 지점장님 마음 편하시라고 하룻밤 미룬 거예요⁠. 저한테 기회를 줬다고 믿고 싶으셨던 거죠⁠.⁠”

순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찻잔의 열이 손바닥으로 번졌다⁠.

“⁠저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안 미뤄요⁠. 여기서는 돈이 들어오면 사 분 안에 쪼개요⁠. 미루는 사람이 제일 먼저 다쳐요⁠. 지점장님한테 배웠어요⁠.⁠”

“⁠나한테 배운 건 금고 시재 맞추는 법이에요⁠. 남의 노후를 쪼개는 법이 아니고요⁠.⁠”

“⁠같은 거예요⁠. 숫자를 틀리지 않는 법⁠.⁠” 구채봉이 혀로 이를 한 번 찼다⁠. “⁠지점장님⁠, 저 단지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 저처럼 한국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에요⁠. 빚⁠, 실직⁠, 이혼⁠, 신용 불량⁠. 은행 창구에서 지점장님 같은 분들이 대출 안 된다고 돌려보낸 사람들이요⁠. 여기 오면 일이 있고 밥이 있어요⁠. 맞기도 하지만요⁠.⁠”

“⁠맞기도 하는 데서 일하는 걸 일이라고 하지 않아요⁠. 여권 뺏고 실적 못 채우면 지하 방에 넣는 건 감금이에요⁠.⁠”

“⁠지점장님은 여전히 정답만 말씀하시네요⁠.⁠” 구채봉이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한국 은행들이 길을 다 막아서 여기도 요즘 힘들어요⁠. 대포 통장 하나 구하기가 예전보다 어렵고⁠, 계좌가 하루면 묶여요⁠. 그래서 사람 손으로 현금을 날라야 하고요⁠. 지점장님 같은 분이 여기 계시면 길이 다시 열릴 텐데요⁠.⁠”

순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얘기 하려고 나를 여기까지 불렀어요⁠?⁠”

“⁠아니요⁠. 재빈이 얘기 하려고요⁠.⁠” 구채봉이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인화한 것이었다⁠. 책상 앞에 앉은 재빈이 헤드셋을 쓰고 있었다⁠. 뒤로 실적표가 붙은 벽이 보였다⁠. 재빈은 카메라를 보지 않았다⁠.

“⁠어제부터 녹음 중이에요⁠. 케일런 말고 새 사람이요⁠. 일본 의사래요⁠. 목소리가 좋아서 쓸 데가 많아요⁠.⁠”

순애는 사진을 집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로 사진 모서리를 눌러 탁자 위에서 바로 놓았다⁠.

“⁠구 부지점장⁠, 원하는 게 뭐예요⁠?⁠”

“⁠보여 드리고 싶어요⁠. 지점장님이 서른 해 동안 막은 길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칠판 그림 말고 진짜로요⁠.⁠” 구채봉이 일어났다⁠. 경비원 둘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내일 아침 아홉 시⁠, 단지 정문⁠. 지점장님 혼자 오세요⁠. 따님도⁠, 경찰도 말고요⁠. 맞은편 식당에서 국수 드시는 두 분⁠, 국수 식기 전에 드시라고 전해 주세요⁠.⁠”

구채봉은 망고 주스 값을 탁자에 놓고 나갔다⁠. 순애의 찻값까지 놓았다⁠. 지폐가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금고 시재를 맞추던 손이었다⁠.

*

로비에서 소롬이 거꾸로 든 잡지를 내려놓고 엄마에게 왔다⁠. 반 경위와 주재관이 식당에서 건너왔다⁠. 국수를 반도 못 먹은 얼굴이었다⁠.

“⁠혼자 오래요⁠.⁠” 순애가 말했다⁠. “⁠내일 아침 아홉 시⁠.⁠”

“⁠안 돼요⁠.⁠” 반 경위와 소롬이 동시에 말했다⁠. 둘이 서로를 보았다⁠.

주재관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지점장님⁠, 정문 안으로 한 사람이라도 한국 사람이 들어가서 안을 확인해 주면 현지 경찰이 단속 명분을 잡을 수 있습니다⁠. 감금된 사람이 있다는 걸 눈으로 본 증인이요⁠. 지금까지 그게 없어서 못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증인이 지점장님이 되면 안 됩니다⁠. 나오신다는 보장이 없어요⁠.⁠”

순애는 커피숍 창밖의 강을 보았다⁠. 밤의 강물 위로 배 한 척이 불을 켜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다⁠.

“⁠들어간 사람 마흔 명보다 나온 사람이 적다면서요⁠.⁠”

“⁠예⁠.⁠”

“⁠그럼 나 하나 더 들어가서⁠, 하나 더 데리고 나오면 되겠네요⁠.⁠”

호텔 벽 어딘가에서 도마뱀이 울었다⁠. 깨깟⁠. 깨깟⁠. 소롬이 엄마의 손목을 잡았다⁠. 순애는 딸의 손을 떼지 않았다⁠.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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