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41자)

일억

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 지백솔

오전 열 시⁠, 가람은행 고잔지점 지점장실 탁자 위에 오만 원권 묶음이 쌓였다⁠. 백 장씩 띠를 두른 묶음이 열 개⁠. 정 지점장이 한 묶음씩 계수기에 넣었다⁠. 기계가 촤르르 돌 때마다 지폐 냄새가 났다⁠. 잉크와 종이와 남의 손 냄새⁠.

“⁠지점장님⁠, 규정상 여쭙겠습니다⁠.⁠” 정 지점장이 계수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현금 오천만 원⁠, 용도가 무엇입니까⁠?⁠”

“⁠미끼⁠.⁠”

“⁠그렇게 적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가족 보호⁠」라고 적어⁠.⁠”

정 지점장이 펜을 들었다가 한숨을 쉬고 적었다⁠. 계수기가 마지막 묶음을 다 셌다⁠. 「⁠100⁠」 정 지점장이 묶음 열 개를 은행 봉투 열 개에 하나씩 넣었다⁠. 봉투 열 개가 쇼핑백 하나에 들어갔다⁠. 탁갑룡이 말한 대로였다⁠.

“⁠지점장님⁠, 오천만 원이 이렇게 가볍습니다⁠.⁠”

“⁠내가 서른 해 동안 손님들한테 이거 들고 나가지 말라고 했어⁠. 오늘 처음 들고 나가 보네⁠.⁠”

쇼핑백 손잡이가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순애는 정 지점장의 말을 고쳐 주지 않았다⁠.

*

오후 한 시 이 분⁠, 탁갑룡의 문자가 왔다⁠. 은행 이름과 계좌 번호⁠, 예금주 이름⁠. 처음 보는 여자 이름이었다⁠. 순애는 그대로 반 경위에게 넘겼다⁠. 반 경위는 사이버수사팀 회의실에서 은행 담당자와 전화를 연결해 두고 있었다⁠. 순애는 고잔지점 창구 앞에 앉았다⁠. 정 지점장이 직접 창구에 앉았다⁠.

“⁠지점장님⁠, 보내겠습니다⁠.⁠”

“⁠보내⁠.⁠”

한 시 칠 분⁠, 오천만 원이 나갔다⁠. 화면에 「⁠이체 완료⁠」가 떴다⁠. 순애는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반 경위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들어갔어요⁠. 지금 묶어 달라고 했어요⁠. 잠깐만요⁠.⁠”

수화기 너머에서 키보드 소리가 났다⁠. 은행 담당자가 무어라 말했고⁠, 반 경위가 받아 적는 소리가 났다⁠. 창구의 벽시계 초침이 한 바퀴를 돌았다⁠. 두 바퀴⁠. 세 바퀴⁠.

“⁠지점장님⁠. 1차 계좌에 천이백만 원 남은 거 묶였어요⁠. 나머지는 사 분 사이에 다섯 계좌로 쪼개져 나갔어요⁠. 지금 그 다섯을 따라가는 중이에요⁠.⁠”

사 분⁠. 칠판의 화살표가 순애의 머릿속에서 갈라졌다⁠. 순애는 창구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았다⁠. 정 지점장이 사탕 바구니를 슬그머니 순애 앞으로 밀었다⁠. 순애는 사탕을 집지 않았다⁠. 창구 너머 대기 의자에서 번호표를 든 손님들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은행 창구에서 전 지점장이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시계만 보고 있는 모습은 손님들에게도 처음이었다⁠.

다섯 시까지 반 경위는 세 번 더 전화했다⁠. 2차 계좌 둘에서 천백만 원을 더 묶었다⁠. 한 계좌에서는 누군가 현금을 뽑으려다 은행 직원의 물음에 그냥 나가 버렸다⁠. 나머지 두 계좌의 돈은 코인 거래로⁠, 상품권 구매로 바뀌어 사라졌다⁠.

“⁠이천칠백이에요⁠.⁠” 반 경위의 마지막 전화였다⁠. “⁠코인으로 넘어간 게 천구백⁠, 상품권으로 바뀐 게 팔백⁠. 그건 지금은 못 잡아요⁠. 해외로 나갔어요⁠.⁠”

“⁠바다를 건넜네요⁠.⁠”

“⁠네⁠.⁠”

순애는 쇼핑백 손잡이를 다시 쥐었다⁠. 오천만 원이 아직 손에 있었다⁠. 이천칠백만 원은 바다 건너에 있었다⁠. 메콩강 가 어딘가에서 누군가 혀로 이를 한 번 찼을 것이다⁠.

*

저녁 여섯 시⁠, 호수공원 남쪽 주차장은 퇴근길 차들이 빠져나가며 반쯤 비어 있었다⁠. 매미가 가로수마다 울었다⁠. 순애는 쇼핑백을 들고 주차장 가운데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다⁠. 흰 블라우스⁠, 회색 카디건⁠. 은테 안경에 저녁 햇빛이 비쳤다⁠.

주차장 가장자리 벤치에 봉남이 철도 배지 달린 모자를 쓰고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다⁠. 신문이 거꾸로였다⁠. 화단 옆에서 꽃집 여자가 해바라기 다발을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했다⁠. 산책로에서 미단이 양산을 쓰고 같은 자리를 세 번째 돌았다⁠. 주차장 출구 바로 앞 칸에는 재빈의 은색 소형차가 세워져 있었고⁠, 운전석에 소롬이 앉아 있었다⁠. 재빈은 경찰서에 남았다⁠. 반 경위가 그렇게 정했다⁠.

여섯 시 사 분⁠, 파란 모자가 왔다⁠. 걸어서 왔다⁠. 키가 크지 않았고⁠, 반바지에 운동화⁠, 등에 가방을 멨다⁠. 모자 아래 얼굴이 어렸다⁠. 스물을 겨우 넘긴 얼굴이었다⁠.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누군가와 통화하며 두리번거렸다⁠. 순애를 찾자 통화를 끊고 다가왔다⁠.

“⁠감순애 님 되세요⁠?⁠”

“⁠네⁠.⁠”

“⁠회사에서 서류 받아 오라고 해서요⁠.⁠”

순애는 쇼핑백을 내밀지 않았다⁠.

“⁠학생⁠, 이게 무슨 회사 일이에요⁠?⁠”

“⁠채권 회수 알바요⁠. 거래처에서 서류 받아서 사무실에 전달하는 거예요⁠. 건당 이십만 원 줘요⁠. 면접도 없이 바로 됐어요⁠.⁠”

“⁠이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요⁠?⁠”

학생의 눈이 쇼핑백으로 갔다가 순애의 얼굴로 돌아왔다⁠. 눈동자가 한 번 흔들렸다⁠.

“⁠서류라고⁠…⁠. 저는 열어 보면 안 된다고 해서요⁠.⁠”

“⁠현금 오천만 원이에요⁠. 사기당한 사람 돈이에요⁠. 학생이 이걸 받아서 누구한테 주면⁠, 학생도 사기 공범이 돼요⁠. 몰랐다고 해도요⁠.⁠”

학생이 한 걸음 물러났다⁠. 등 뒤의 가방끈을 꽉 쥐었다⁠.

“⁠저 진짜 몰랐어요⁠. 그냥 알바라고⁠…⁠.⁠”

“⁠알아요⁠. 학생 같은 사람 많아요⁠. 그래도 잡혀요⁠.⁠”

순애가 쇼핑백을 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학생이 무심코 받았다⁠. 학생의 손이 손잡이를 쥐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움직였다⁠. 산책로에서 운동복 차림의 형사 둘이 뛰어왔고⁠, 반 경위가 주차된 승합차에서 내렸다⁠. 학생은 도망가지 않았다⁠. 쇼핑백을 든 채로 선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자가 벗겨졌다⁠.

“⁠저 엄마한테 전화해야 돼요⁠. 엄마가 알면⁠…⁠.⁠”

순애는 학생 옆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이 소리를 냈다⁠.

“⁠엄마한테 지금 전화해요⁠. 경찰 아저씨가 허락하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은 나쁜 사람들만 해요⁠.⁠”

*

순애는 일어나며 주차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귀를 열었다⁠. 매미 소리⁠, 자동차 문 닫히는 소리⁠, 봉남의 신문 넘기는 소리⁠. 소리들 사이에 작고 규칙적인 소리가 섞였다⁠. 딸깍⁠, 딸깍⁠, 딸깍⁠. 비상등 소리였다⁠.

주차장 북쪽 끝⁠, 나무 그늘 아래에 검은 승용차가 비상등을 켜고 세워져 있었다⁠. 운전석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창틀 위로 휴대전화 하나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찍고 있었다⁠.

“⁠경위님⁠, 북쪽 끝⁠. 검은 차⁠. 비상등⁠.⁠”

반 경위가 고개를 돌리는 사이 검은 차의 비상등이 꺼지고 엔진이 깨어났다⁠. 차가 후진해 출구 쪽으로 미끄러졌다⁠. 출구 앞 칸에서 소롬이 은색 소형차 시동을 걸었다⁠. 그보다 먼저⁠, 벤치에서 봉남이 일어났다⁠. 거꾸로 든 신문을 내던지고 출구 앞 차로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두 팔을 양옆으로 쭉 폈다⁠. 건널목 앞에서 기차를 세우는 신호수의 자세였다⁠.

“⁠정지⁠! 정지⁠! 신호 빨간불이다⁠!⁠”

검은 차가 봉남 앞 두 걸음에서 멈췄다⁠. 타이어가 아스팔트 위에서 짧게 울었다⁠. 소롬의 은색 차가 검은 차 뒤를 막았다⁠. 꽃집 여자가 해바라기 다발을 들고 운전석 옆으로 다가왔다⁠. 미단이 양산을 접었다⁠.

순애는 운전석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탁갑룡이 운전대를 잡고 앉아 있었다⁠. 금테 안경이 콧등에서 조금 미끄러져 있었다⁠. 창틀의 휴대전화에서 녹화 중 표시가 빨갛게 깜빡였다⁠.

“⁠실장님⁠, 위에 보고할 거 다 찍으셨어요⁠?⁠”

탁갑룡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녹화를 끄지 않았다⁠.

“⁠어머님⁠.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저 하나 잡아도 저 같은 사람은 단지에 백 명 있어요⁠. 저는 빚 갚으러 여기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알아요⁠. 실장님 빚도 진짜고⁠, 실장님이 두 해 동안 겪은 것도 진짜겠지요⁠. 그런데 시흥 어르신 연금도 진짜고⁠, 봉남 선생님 집도 진짜고⁠, 저 학생도 진짜예요⁠.⁠”

반 경위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탁갑룡이 내리며 순애를 보았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어머님⁠. 자업자득입니다⁠. 저도⁠, 어머님도⁠.⁠”

수갑이 채워지는 소리가 났다⁠. 봉남이 팔을 내리고 무릎을 짚었다⁠. 숨을 몰아쉬며 순애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기관사 삼십오 년에 사람 앞에서 열차 세운 건 처음이다⁠.⁠”

탁갑룡은 순찰차 뒷좌석에 앉혀졌다⁠. 문이 닫히기 전에 탁갑룡이 고개를 내밀었다⁠. 순애를 불렀다⁠.

“⁠어머님⁠. 재빈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경찰서에 있어요⁠.⁠”

“⁠확인해 보십쇼⁠.⁠” 탁갑룡이 금테 안경을 고쳐 썼다⁠. 수갑 찬 두 손이 함께 올라갔다⁠. “⁠위는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부릅니다⁠. 저를 잃었으니 누굴 부를지는 어머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저는 이번엔 진짜로 모르는 일입니다⁠. 이번엔 사자성어도 안 쓰겠습니다⁠.⁠”

순찰차 문이 닫혔다⁠. 순애는 휴대전화를 꺼내 「⁠홍삼⁠」을 눌렀다⁠. 신호가 갔다⁠. 받지 않았다⁠. 다시 눌렀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하는 안내가 나오기 전에 순애가 끊었다⁠. 출구 앞 은색 차 운전석에서 소롬이 엄마를 보고 있었다⁠. 순애는 고개를 저었다⁠. 소롬이 자기 휴대전화를 들어 같은 번호를 눌렀다⁠. 소롬도 고개를 저었다⁠.

반 경위가 사이버수사팀에 전화했다⁠. 짧게 묻고 짧게 들었다⁠. 전화를 끊고 순애에게 왔다⁠.

“⁠한 시간 전에 화장실 간다고 나갔대요⁠. 휴대전화는 책상 위에 두고요⁠. 검은 거 말고 자기 거만 가지고요⁠.⁠”

*

밤 아홉 시⁠, 소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재빈의 번호였다⁠. 음성 메시지였다⁠. 소롬은 엄마 집 식탁에 휴대전화를 놓고 스피커로 틀었다⁠.

서툰 발음이 아니었다⁠. 영어 억양도 없었다⁠. 재빈의 목소리였다⁠. 숨을 짧게 두 번 들이켰다⁠.

“⁠소롬 씨⁠. 경찰서에서 나왔어요⁠. 「⁠위⁠」에서 전화가 왔어요⁠. 제가 안 오면 소롬 씨 버스가 다음 차례래요⁠. 목소리 말고 진짜로요⁠. 저는 이 말을 믿어요⁠. 단지에서 그 사람이 말한 대로 안 된 일을 본 적이 없어요⁠. 제 빚은 제가 갚고 올게요⁠. 열한 시 비행기예요⁠. 경위님께는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어머님께⁠…⁠.⁠”

녹음이 잠깐 멈췄다⁠. 공항 안내 방송이 뒤에서 들렸다⁠. 「⁠탑승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머님께⁠, 숨은 안 넣었다고 전해 주세요⁠.⁠”

메시지가 끝났다⁠. 소롬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울지 않았다⁠. 코로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켰다⁠. 순애는 딸의 숨을 들었다⁠.

열 시 반⁠, 순애의 휴대전화에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구채봉이 있었다⁠. 뒤로 밤의 강물이 검게 흘렀고⁠, 발전기가 웅웅거렸다⁠. 구채봉이 혀로 이를 한 번 찼다⁠.

“⁠지점장님⁠,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탁 실장은 아깝네요⁠. 지점장님 돈 이천칠백은 잘 도착했어요⁠. 재빈이는 지금 비행기 타고 있고요⁠. 제 발로 오는 거예요⁠. 제가 끌고 온 거 아니에요⁠.⁠”

“⁠구 부지점장⁠.⁠”

“⁠지점장님⁠, 나머지 돈도 재빈이도 여기 있어요⁠. 받고 싶으시면 직접 오세요⁠. 포이산⁠. 지점장님이 오시면 재빈이를 돌려보내 드릴게요⁠. 안 오시면⁠, 재빈이는 여기서 남은 빚을 갚아요⁠. 목소리 좋은 애니까 오래 쓸 수 있어요⁠.⁠”

화면이 꺼졌다⁠. 순애는 식탁을 짚고 일어나 찬장 서랍을 열었다⁠. 은행 봉투가 있던 서랍이었다⁠. 정기예금 통장 대신 여권이 들어 있었다⁠. 남편과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행 뒤로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여권이었다⁠. 유효 기간이 아직 두 해 남아 있었다⁠.

소롬이 엄마 손의 여권을 보았다⁠. 자기 가방을 열었다⁠. 버스 회사 신분증 아래에서 여권을 꺼냈다⁠.

“⁠이번 정류장은 포이산⁠. 엄마⁠, 나도 내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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