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16자)

쪼개진 돈

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 지백솔

소롬은 엄마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식탁 위에 젓가락을 반듯하게 놓고⁠, 엄마가 말을 멈출 때마다 고개를 한 번씩 끄덕였다⁠. 다 듣고 나서 처음 한 말은 이랬다⁠.

“⁠엄마 돈이잖아⁠. 엄마가 정해⁠.⁠”

순애는 딸을 보았다⁠. 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 서른네 해 동안 딸에게 「⁠네 돈이니 네가 정해⁠」라고 말한 적이 몇 번이었는지 세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나도 끼워 줘⁠. 엄마 혼자 공원 주차장 가고 그런 거 하지 마⁠. 내가 버스 끌고라도 갈 거야⁠.⁠”

“⁠버스 끌고 오면 다 들켜⁠.⁠”

“⁠그럼 승용차로 갈게⁠. 재빈 씨 차로⁠.⁠” 소롬이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재빈 씨 차 내가 몰아⁠. 그 사람 운전 못해⁠. 깜빡이를 커브 다 돌고 켜⁠.⁠”

순애는 웃었다⁠. 소롬도 웃으려다 말았다⁠. 둘 다 재빈 이야기에서 웃어도 되는지 아직 몰랐다⁠.

*

안산 경찰서 사이버수사팀 회의실의 칠판은 반쯤 지워진 다른 사건 그림 위에 새 그림이 그려졌다⁠. 반 경위가 파란 보드마커를 들고 맨 왼쪽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피해자⁠」라고 썼다⁠. 순애와 재빈⁠, 그리고 정 지점장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 지점장은 은행 휴가를 내고 왔다고 했다⁠. 반 경위가 「⁠자원봉사자⁠」라고 부르자 정수리가 빨개졌다⁠.

“⁠돈은 이렇게 가요⁠.⁠” 반 경위가 동그라미에서 화살표를 하나 그렸다⁠. 「⁠1차 계좌⁠」 “⁠피해자가 보내는 계좌요⁠. 시흥 어르신 같은 분들 통장이에요⁠. 「⁠고액 알바⁠」 광고로 빌리거나 사요⁠. 통장 하나에 체크카드 하나⁠, 비밀번호까지 같이 넘겨요⁠. 지급 정지가 걸리면 버리고 다음 통장을 써요⁠.⁠”

화살표가 1차 계좌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2차 계좌⁠」 넷⁠, 다섯⁠.

“⁠들어오자마자 몇 분 안에 쪼개서 다른 통장들로 옮겨요⁠. 한 덩어리로 두면 눈에 띄니까⁠. 2차 계좌도 다 남의 이름이에요⁠. 여기서 세 갈래로 갈라져요⁠.⁠”

반 경위가 갈래마다 글씨를 썼다⁠.

「⁠현금 인출 → 수거책⁠」 「⁠코인 구매 → 해외 지갑⁠」 「⁠상품권 구매 → 핀 번호 판매⁠」

“⁠첫째 갈래⁠. 현금으로 뽑아서 사람이 들고 날라요⁠. 수거책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알바 광고 보고 온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이에요⁠. 「⁠채권 회수⁠」⁠, 「⁠서류 전달⁠」⁠, 「⁠고액 당일 지급⁠」 자기가 뭘 나르는지 모르는 척하거나⁠, 진짜 몰라요⁠. 잡히면 사기 방조나 공범으로 처벌받아요⁠. 둘째 갈래⁠. 코인으로 바꿔서 해외로 넘겨요⁠. 넘어가면 저희가 쫓기 어려워요⁠. 셋째 갈래⁠. 상품권을 사서 핀 번호를 팔아 다시 현금으로 바꿔요⁠. 핀 번호는 쓰는 순간 끝이에요⁠.⁠”

반 경위가 마커 뚜껑을 닫았다⁠.

“⁠지점장님이 일억을 보내면⁠,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1차 계좌를 미리 알고 지켜보다가 들어가는 순간 은행과 같이 묶는 거예요⁠. 거기 남은 건 지킬 수 있어요⁠. 하지만 몇 분 사이에 2차로 넘어간 건 갈래마다 다시 쫓아야 해요⁠. 현금 갈래는 사람을 잡으면 돈도 잡아요⁠. 코인 갈래와 상품권 갈래는 대부분 못 잡아요⁠.⁠”

정 지점장이 손을 들었다⁠.

“⁠경위님⁠, 은행도 이상한 거래는 막습니다⁠. 저희도 이런 계좌들 잡아내려고 매일⁠…⁠.⁠”

“⁠알아요⁠. 그래서 요즘 저 사람들이 현금으로 바꾸는 거예요⁠. 은행이 잘 막으니까 사람이 들고 날라요⁠.⁠”

정 지점장이 손을 내렸다⁠. 은행이 잘해서 생긴 구멍이라는 말에 정수리가 다시 빨개졌다⁠.

“⁠통장 빌려준 시흥 어르신은 어떻게 돼요⁠?⁠”

순애가 물었다⁠. 반 경위가 1차 계좌 동그라미에 작은 사람 그림을 그렸다⁠.

“⁠오셨어요⁠. 지점장님이 적어 준 쪽지 들고요⁠. 부르기 전에 와서 다 말씀하셨으니 참작은 될 거예요⁠. 그래도 재판은 받으세요⁠. 통장을 넘긴 순간 저 사람들 물길의 첫 칸이 되신 거니까요⁠.⁠”

재빈이 칠판을 보며 말했다⁠.

“⁠단지에서는 이 그림을 「⁠물길⁠」이라고 불렀어요⁠. 물길이 막히면 다른 데를 판다고⁠. 「⁠은행⁠」이 회의 때마다 그 말을 했어요⁠. 은행들이 길을 막을수록 물은 사람 손으로 옮긴다고⁠.⁠”

순애는 칠판의 화살표들을 보았다⁠. 서른 해 동안 순애가 막은 것은 맨 왼쪽 동그라미에서 나가는 첫 화살표 하나였다⁠. 그다음은 늘 칠판 밖이었다⁠.

“⁠경위님⁠, 내 일억은 어느 갈래로 갈까요⁠?⁠”

“⁠모르죠⁠. 저 사람들이 정해요⁠.⁠”

“⁠그럼 내가 정하게 만들게요⁠.⁠”

*

저녁 일곱 시⁠, 솔빛 경로당 작은 방에 「⁠같은 목소리⁠」 사람 열둘이 모였다⁠. 순애가 일억 이야기를 하자 방이 조용해졌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시흥 꽃집 여자였다⁠. 탁 사장에게 착수금 오십과 공탁금 이백을 보낸 사람이었다⁠.

“⁠지점장님은 돈이 많아서 미끼도 일억이네요⁠.⁠”

“⁠꽃집 사장님⁠.⁠”

봉남이 말렸지만 꽃집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다 털렸는데⁠, 지점장님은 아직 일억이 있잖아요⁠. 그 일억으로 경찰이랑 작전 하신다고요⁠. 잡으면 지점장님 돈부터 돌려받으시겠죠⁠. 우리 돈은요⁠? 처음부터 우리 돈 찾자고 모인 거 아니었어요⁠? 탁 사장 말이 맞았네⁠. 지점장님은 지점장님 가족 지키느라 이러는 거잖아요⁠.⁠”

순애는 꽃집 여자 앞으로 가서 방바닥에 앉았다⁠. 눈높이를 맞췄다⁠.

“⁠맞아요⁠. 우리 가족 지키려고 하는 것도 있어요⁠. 숨기지 않을게요⁠.⁠” 순애가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사장님 돈은 아마 못 찾을 거예요⁠. 사장님이 보낸 착수금이랑 공탁금도요⁠. 그건 은행에 서른 해 있던 사람이 거짓말로 위로 못 해요⁠. 제가 일억을 내는 건 사장님 돈을 찾으려는 게 아니에요⁠. 사장님 다음 사람이 안 보내게 하려는 거예요⁠. 이 방에 내일 들어올 사람이요⁠.⁠”

꽃집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화방 인원수가 순애의 휴대전화 화면 위에서 마흔여섯으로 바뀌었다⁠. 방금 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나도 넣겠소⁠.⁠” 봉남이 말했다⁠. “⁠일억은 없고 몸이 있다⁠. 주차장에 나도 가요⁠. 기관사 눈은 멀리 보는 눈이라 파란 모자 하나는 잡아낸다⁠.⁠”

“⁠선생님은 무릎이⁠…⁠.⁠”

“⁠지점장 양반 무릎보다 내 무릎이 덜 아프다⁠.⁠”

미단이 손톱 끝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

“⁠탁 사장한테는 내가 흘릴게⁠. 차단 풀고⁠. 「⁠지점장님 혼자 간대요⁠, 딸도 모르게⁠」 미용실 원장 말은 다들 믿는다니까⁠.⁠”

꽃집 여자가 한참 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꽃 필요하면 말해요⁠. 주차장에 꽃 들고 서 있으면 아무도 이상하게 안 봐요⁠. 꽃집 사람이 제일 수상하지 않아요⁠.⁠”

방 안에서 누군가 웃었다⁠. 꽃집 여자도 울다 말고 웃었다⁠. 봉남이 에어컨을 「⁠냉방⁠」으로 바꾸었다⁠.

*

밤 열 시⁠, 순애는 케일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케일런⁠, 보낼게요⁠. 일억⁠. 대신 한 번만 얼굴 보여 줘요⁠. 열세 달 동안 한 번도 못 봤어요⁠. 얼굴 보면 내일 바로 은행 가요⁠.⁠」

답은 이십 분 뒤에 왔다⁠. 밤 조였다⁠. 매끄러웠다⁠.

「⁠순애 씨 ㅠㅠ 나도 너무 보고 싶어요⁠. 근데 기지 보안 때문에 카메라 오래 못 켜요⁠. 몇 초만 할게요⁠. 잠깐만요⁠.⁠」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순애는 반 경위가 미리 알려 준 대로 화면 녹화를 켜고 받았다⁠. 재빈이 옆에서 숨을 죽였다⁠.

화면에 케일런이 나왔다⁠. 캐나다 소방관의 얼굴이었다⁠. 군복을 입고 있었고⁠, 뒤에 모래색 벽이 있었다⁠. 케일런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입이 움직였다⁠. 스피커에서 서툰 목소리가 나왔다⁠.

“⁠순애 씨⁠, 사랑해요⁠. 보고 싶었어요⁠.⁠”

삼 초였다⁠. 화면이 멈추고 「⁠네트워크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글자가 떴다⁠. 통화가 끊겼다⁠.

「⁠케일런⁠: 미안해요 ㅠㅠ 기지 인터넷 안 좋아요⁠. 얼굴 봤죠⁠? 이제 믿어요⁠?⁠」

순애는 녹화한 영상을 다시 틀었다⁠. 삼 초를 다섯 번 돌려 보았다⁠. 두 번째부터는 소리를 끄고 봤다⁠.

“⁠재빈 씨⁠, 「⁠사랑해요⁠」 할 때 입술이 몇 번 닫혀요⁠?⁠”

“⁠네⁠?⁠”

“⁠「⁠사랑해요⁠」는 입술이 안 닫혀요⁠. 「⁠보고 싶었어요⁠」는 「⁠ㅂ⁠」에서 한 번 닫히고요⁠. 이 사람 입술은 처음부터 두 번 닫혀요⁠. 다른 말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눈을 봐요⁠. 세 번 깜빡이는데 세 번 다 같은 간격이에요⁠. 사람은 그렇게 안 깜빡여요⁠.⁠”

재빈이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방관 영상을 따서 얼굴만 움직인 거예요⁠. 목소리는 제 옛날 녹음이고요⁠. 오래 켜면 들키니까 몇 초만 보여 줘요⁠. 그것도 단지에 조가 따로 있어요⁠.⁠”

“⁠열세 달 기다린 얼굴이 삼 초짜리 가짜네요⁠.⁠” 순애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얼굴을 보여 달라고 해서 보여 주면 진짜라고 믿기 쉬워요⁠. 몇 초만 보여 주고 끊는 것도⁠, 입 모양이 말이랑 다른 것도⁠, 화면이 흐린 것도 다 봐야 해요⁠. 진짜 사람은 끊지 않아요⁠. 우리 언니는 콧구멍까지 보여 줘요⁠.⁠”

재빈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웃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케일런한테 뭐라고 답하실 거예요⁠?⁠”

순애는 답장을 쳤다⁠.

「⁠봤어요⁠. 고마워요⁠. 내일 은행 갈게요⁠. 계좌 알려 줘요⁠.⁠」

*

계좌는 오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 아침 일곱 시⁠, 탁갑룡이 전화했다⁠.

“⁠어머님⁠, 위에서 방법을 바꾸랍니다⁠.⁠”

“⁠무슨 방법이요⁠?⁠”

“⁠은행으로 일억을 한 번에 보내시면 은행이 막습니다⁠. 어머님 후배분들이 워낙 철두철미하시니까요⁠. 그래서 반만 계좌로 보내 주십쇼⁠. 오천⁠. 계좌는 오후 한 시에 문자로 드립니다⁠. 나머지 오천은 현금으로 찾으셔서⁠, 저녁 여섯 시에 호수공원 남쪽 주차장으로 가져오십쇼⁠. 제 직원이 받으러 갑니다⁠.⁠”

“⁠현금은 안 한다고 했어요⁠.⁠”

“⁠어머님이 영상 보시고 믿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믿으시는 분은 방법을 안 따지십니다⁠.⁠” 탁갑룡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어머님⁠, 금상첨화라는 말 아시지요⁠? 좋은 일에 좋은 일이 더해진다는 말이요⁠. 오늘 저녁에 일억이 다 들어오면 위에서 재빈이 빚을 지워 준답니다⁠. 재빈이가 따님 옆에 남는 거지요⁠. 금상첨화 아닙니까⁠?⁠”

이번에도 사자성어가 정확했다⁠.

“⁠직원은 어떻게 알아봐요⁠?⁠”

“⁠파란 모자를 쓰고 갈 겁니다⁠. 어머님은 은행 봉투에 넣어 오시면 됩니다⁠. 오천이면 봉투 열 개쯤 되겠지요⁠. 쇼핑백 하나면 들어갑니다⁠.⁠”

전화가 끊겼다⁠. 순애는 반 경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 경위는 듣자마자 말했다⁠.

“⁠계좌 오천은 한 시에 번호가 오면 바로 묶을 준비 할게요⁠. 몇 분 안에 다 넘어가지는 않게 해 볼게요⁠. 장담은 못 해요⁠. 현금 오천은 수거책을 잡으면 지켜요⁠. 탁갑룡이 직접 나오면 같이 잡고요⁠. 근데 지점장님⁠, 탁갑룡은 안 나올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파란 모자만 보내요⁠.⁠”

“⁠나와요⁠.⁠”

“⁠어떻게 아세요⁠?⁠”

순애는 창밖 호수공원을 내려다보았다⁠. 아침 볕에 연꽃 연못이 반짝였다⁠. 열세 달 전 사진을 찍었던 연못이었다⁠.

“⁠위에서 나를 직접 본다고 했어요⁠. 구채봉은 내가 돈을 건네는 걸 보고 싶어 해요⁠. 그러려면 누가 찍어야 해요⁠. 파란 모자는 돈만 받아요⁠. 찍는 사람은 탁갑룡이에요⁠. 저 사람은 위에 보고할 것을 남한테 안 맡겨요⁠. 빚이 저 사람 목에 있으니까요⁠.⁠”

반 경위가 잠깐 말이 없었다⁠.

“⁠지점장님⁠. 은행에 계실 때 손님들 많이 잡으셨겠어요⁠.⁠”

“⁠잡은 게 아니라 붙잡았어요⁠. 한 사람씩⁠. 창구에 앉혀 놓고⁠.⁠” 순애는 전화를 고쳐 쥐었다⁠. “⁠오늘은 반대로 해 볼게요⁠. 내가 창구에서 일어나서 나가는 거예요⁠.⁠”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