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66자)

놀이터 설명회

시어머니는 구미호 · 석다감

2027년 6월 29일 화요일 오전 아홉 시⁠, 연회팀 단톡방에 대표의 공지가 올라왔다⁠. 「⁠7월 1일 자로 연회 총괄 지배인에 본점 2팀장을 임명합니다⁠. 모두 축하해 주세요⁠.⁠」 축하 이모티콘이 줄줄이 달렸다⁠. 지안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오래 누르고 있다가 꽃다발 이모티콘 하나를 달았다⁠. 축하하는 마음도 거짓이 아니었다⁠. 2팀장은 일을 잘했다⁠.

오전 열한 시⁠, 2팀장이 지안 책상으로 와서 커피를 내려놓았다⁠.

“⁠지안 씨 아니었으면 대표님 딸 다쳤어⁠. 다들 알아⁠.⁠”

“⁠불은 저희 시어머니가 껐어요⁠.⁠”

“⁠그것도 알아⁠.⁠”

2팀장이 웃었다⁠. 지안도 웃었다⁠. 영상이 퍼진 뒤로 라온채의 예약 취소 전화는 열흘 만에 멈췄고⁠, 대신 「⁠여우가 불 끈 그 예식장 맞죠⁠?⁠」 하고 묻는 상담 전화가 늘었다⁠. 대표는 상담 전화를 받으면서도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바꾸지 않는 것이 대표다웠다⁠.

점심때 변희동이 짜장면 두 그릇을 들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자⁠, 하객 여러분⁠. 승진을 못 해도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희동 씨 이혼할 때 짜장면 먹었다던 거⁠, 그거 진짜예요⁠?⁠”

“⁠진짜죠⁠. 두 번 다 곱빼기⁠.⁠”

지안은 나무젓가락을 쪼갰다⁠. 한 짝이 비뚤게 부러졌다⁠. 희동이 제 젓가락과 바꿔 주었다⁠.

“⁠매니저님⁠, 내일이죠⁠?⁠”

“⁠네⁠. 오후 두 시⁠.⁠”

“⁠도장 챙기세요⁠. 나는 첫 번째 때 안 가져가서 법원 앞 도장집에서 새로 팠어요⁠. 만 오천 원⁠.⁠”

“⁠두 번째 때는요⁠?⁠”

“⁠그때 판 거 또 썼죠⁠. 도장은 버리기 아깝더라고⁠.⁠”

지안은 짜장면을 반 그릇 남기고 오후 반차를 냈다⁠.

*

밤 아홉 시⁠, 아파트 놀이터 미끄럼틀 앞에 앰프 두 대가 놓였다⁠. 그네 기둥에 현수막이 매달렸다⁠. 「⁠흰 여우 주민 설명회 — 한국전래퇴마협회⁠」⁠. 협회 회원 아홉 명이 놋쇠 방울을 손에 쥐고 모래밭 가장자리를 따라 서 있었다⁠. 평균 연세 예순여덟이 밤바람 속에 서 있으니 방울이 저절로 떨려 자잘한 소리가 났다⁠.

주민은 백 명 남짓 모였다⁠. 동대표가 접이식 의자에 앉았고⁠, 경비 아저씨가 손전등을 들고 입구에 서 있었다⁠. 1104호 아이 엄마는 몰티즈를 안고 왔고⁠, 1204호 아주머니는 돗자리를 깔고 귤을 까고 있었다⁠. 엄마 민선자가 지안 옆에 섰고⁠, 현오는 지안 뒤에 서 있었다⁠. 시어머니는 아직 12층에 있었다⁠.

함병도가 마이크를 잡았다⁠. 양복 윗도리 위로 놋쇠 방울을 꺼내 걸었다⁠.

“⁠밤늦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아는 것을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병도는 노트북을 앰프에 이어 미끄럼틀 옆 흰 천에 사진을 띄웠다⁠. 1988년 눈 덮인 양계장⁠, 목발을 짚은 함춘길⁠, 작년 봄 정육점 셔터의 이빨 자국⁠, 경찰 신고 기록의 날짜⁠. 마지막으로 폐백실 화재 영상이 흘렀다⁠. 흰 꼬리 아홉 개가 불타는 병풍을 덮는 장면에서 주민 몇이 숨을 들이켰다⁠.

“⁠신부를 구하신 것도 맞습니다⁠.⁠”

병도가 영상을 멈췄다⁠.

“⁠그리고 불을 끄는 꼬리는 불을 낼 수도 있습니다⁠. 정육점 셔터를 문 이빨은 사람 손도 물 수 있습니다⁠. 여우는 내일 밤 자정에 백 번째 밤을 채웁니다⁠. 채우면 사람이 되고⁠, 사람이 되면 천 년 동안 한 일을 저희는 물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묻습니다⁠.⁠”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 “⁠경찰은 뭐 하냐⁠”고 했고⁠, 누군가 “⁠여우를 경찰이 어떻게 잡냐⁠”고 했다⁠. 동대표가 시청 야생동물 민원 창구에 전화했더니 담당자가 한참 웃다가 진지해졌다고 말했다⁠. 1104호 아이 엄마가 몰티즈를 더 꼭 안았다⁠. 경비 아저씨가 손전등으로 모래밭을 비추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털은 제가 석 달째 쓸고 있습니다⁠.⁠”

앞줄 주민 몇이 웃었다⁠. 웃고 나서 서로 눈치를 보았다⁠.

지안은 앰프 앞으로 나갔다⁠. 손이 떨렸다⁠. 하객 사백 명 앞에서는 떨리지 않던 손이었다⁠. 병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병도가 잠깐 지안을 보더니 마이크를 건넸다⁠.

“⁠지금부터 식순을 정리하겠습니다⁠.⁠”

놀이터가 조용해졌다⁠. 진행 멘트는 주민들의 귀에도 익숙했다⁠. 다들 누군가의 결혼식에 가 본 사람들이었다⁠.

“⁠1번⁠, 협회 말씀은 들었습니다⁠. 2번⁠, 당사자 말씀이 있겠습니다⁠. 3번⁠, 질문을 받겠습니다⁠. 4번⁠, 결정은 오늘 하지 않습니다⁠.⁠”

“⁠결정을 왜 안 합니까⁠?⁠”

병도가 물었다⁠. 마이크 없이도 목소리가 컸다⁠.

“⁠결정할 사람이 여기 없어서요⁠. 내일 오후 두 시에 법원 조정실에서 제가 정해요⁠. 여기서 회장님께 먼저 말씀드리지 않아요⁠. 주민분들께도요⁠.⁠”

병도가 지안을 마주 보았다⁠. 병도는 웃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상대가 제 패를 다 보여 주지 않을 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럼 2번을 듣겠습니다⁠.⁠”

*

밤 열 시 오십 분⁠, 시어머니가 아파트 1층 공동현관을 나왔다⁠. 연보라 한복에 은 머리 장식을 꽂았고⁠, 흰머리 아흔여덟 가닥이 가로등 아래에서 은빛 그물처럼 보였다⁠. 맨발이 아니라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주민들이 길을 텄다⁠. 몰티즈가 짖으려다 시어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조용해졌다⁠.

시어머니는 앰프 앞까지 걸어왔다⁠. 지안이 마이크를 건넸다⁠. 시어머니는 마이크를 받지 않았다⁠. 목소리를 조금 높였을 뿐인데 놀이터 끝까지 들렸다⁠.

열한 시가 되었다⁠. 시어머니의 한복 치마가 부풀었다⁠. 그을린 끝을 잘라 내 조금 짧아진 꼬리 아홉 개가 놀이터 모래 위로 펼쳐졌다⁠. 주민들이 한 걸음씩 물러났다⁠. 엄마가 앞으로 나가 꼬리 세 개를 무릎에 쥐고 모래밭 가장자리에 앉았다⁠.

“⁠1988년 겨울⁠, 교하 양계장 닭 이백 마리는 내가 먹었어요⁠.⁠”

시어머니가 병도를 보며 말했다⁠.

“⁠그해 겨울 고봉산에 먹을 게 없었어요⁠. 배가 고팠고⁠, 닭장 철망은 얇았어요⁠. 저수지까지 쫓아온 분이 얼음에 빠졌을 때⁠, 나는 저수지 둑에서 봤어요⁠. 그리고 도망갔어요⁠.⁠”

병도의 턱이 굳었다⁠. 놋쇠 방울을 쥔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사람을 불러 줄 수도 있었어요⁠. 여우가 사람을 부르면 들킬까 봐 안 불렀어요⁠. 천 년 동안 한 일 가운데 그게 가장 부끄러워요⁠.⁠”

시어머니는 모래 위에 무릎을 꿇었다⁠. 꼬리 아홉 개가 시어머니를 따라 내려앉았다⁠. 이마가 모래에 닿았다⁠.

“⁠함춘길 어른께 죄송합니다⁠. 아드님께도 죄송합니다⁠.⁠”

놀이터에 귤 까는 소리도 멈췄다⁠. 병도는 한참 서 있었다⁠. 방울을 쥔 손이 천천히 풀렸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병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아버지는 다리 하나로 스물일곱 해를 사셨습니다⁠. 사과로 그 다리가 펴지지는 않습니다⁠.⁠”

“⁠알아요⁠.⁠”

시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모래가 붙어 있었다⁠.

“⁠정발산동 집을 내놓겠어요⁠. 판 돈으로 양계장 댁과 회장님 댁에 갚을게요⁠. 양계장 주인 아드님이 아직 교하에 사는 것도 알아요⁠.⁠”

주민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엄마가 꼬리를 쥔 채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현오가 지안 어깨 뒤에서 숨을 들이켰다⁠. 정발산동 집은 시아버지와 서른 해 가까이 산 집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요⁠.⁠”

시어머니가 지안을 보았다가 다시 병도를 보았다⁠.

“⁠내일 오후에 며늘아가가 도장을 찍으면⁠, 자정에 회장님 따라 고봉산에 갈게요⁠. 묶지 않아도 걸어서 갈게요⁠. 며늘아가 탓은 하지 마세요⁠. 며늘아가는 백 일 가운데 아흔아홉 날을 빌려줬어요⁠. 빌려 달라고 한 적도 없는 사람한테 내가 빌렸어요⁠.⁠”

병도가 지안에게 몸을 돌렸다⁠.

“⁠따님⁠. 내일 도장을 찍으십니까⁠?⁠”

“⁠내일 조정실에서 정해요⁠.⁠”

지안은 같은 대답을 했다⁠. 병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저는 내일 밤 이 놀이터에서 해 뜰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사람이 되시면 그 자리에서 보겠습니다⁠. 못 되시면 고봉산까지 모시겠습니다⁠.⁠”

“⁠3번⁠, 질문 받겠습니다⁠.⁠”

지안이 마이크를 들었다⁠. 1204호 아주머니가 귤 껍질을 든 손을 들었다⁠.

“⁠새댁 시어머니가 3월에 끓인 삼계탕⁠, 나도 한 그릇 얻어먹었거든요⁠. 맛있었어요⁠. 그게 질문이에요⁠.⁠”

웃음이 터졌다⁠. 1104호 아이 엄마가 몰티즈를 안은 채 손을 들었다⁠.

“⁠불 끄신 거 저도 영상으로 봤어요⁠. 고마워요⁠. 그래도 저는 무서워요⁠. 둘 다예요⁠.⁠”

“⁠둘 다 맞아요⁠.⁠”

시어머니가 대답했다⁠. 아이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렸다⁠.

*

밤 열한 시 오십팔 분⁠, 12층 베란다⁠. 엄마는 베란다 문턱에 의자를 놓고 꼬리를 무릎에 쥔 채 졸고 있었다⁠. 현오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지안은 시어머니와 나란히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호수공원을 내려다보았다⁠. 밤바람에 호수 물비린내와 밤꽃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6월 끝자락의 바람은 미지근했다⁠. 놀이터에는 협회 회원 몇이 아직 남아 앰프를 차에 싣고 있었다⁠.

자정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정수리에 손을 댔다⁠. 지안이 휴대전화 손전등을 비췄다⁠.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아 보였다⁠.

“⁠아흔아홉⁠.⁠”

지안이 말했다⁠. 현오가 늘 하던 말이었다⁠.

“⁠어머님⁠. 왜 저였어요⁠?⁠”

5월 6일 주차장에서 막았던 물음이었다⁠. 시어머니는 난간에 두 손을 얹었다⁠.

“⁠2024년 4월 13일⁠, 라온채 그랜드홀이요⁠. 신랑 아버지가 그날 구치소에 있었어요⁠. 신랑이 며늘아가한테 부탁했죠⁠. 신부 집에는 아버님이 해외 출장 중이라고 말해 달라고⁠.⁠”

지안은 기억했다⁠. 신부대기실 앞 복도에서 신랑이 울면서 부탁했다⁠.

“⁠며늘아가가 그랬어요⁠. 그 말은 제가 못 해요⁠, 신랑님이 직접 하세요⁠. 그러고는 신랑 옆에 서 있어 줬어요⁠. 신랑이 사실대로 말할 때까지⁠. 그다음에 혼주끼리 멱살을 잡았고⁠, 며늘아가는 가운데로 들어갔어요⁠.⁠”

“⁠어머님은 그걸 보고 저를 고르셨어요⁠?⁠”

“⁠현오한테는 백 일을 참아 줄 사람 말고⁠, 못 참겠다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현오는 말을 안 하는 아이라서요⁠. 참는 사람끼리 살면 둘 다 말을 안 해요⁠.⁠”

시어머니가 난간에서 손을 뗐다⁠.

“⁠내 백 일 때문에 고른 것도 맞아요⁠. 둘 다 맞아요⁠. 하나만 골라 말하면 거짓말이 돼요⁠.⁠”

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호수 위로 산책길 가로등이 길게 비쳤다⁠. 시어머니가 지안을 보았다⁠.

“⁠내일 도장 찍어도 돼요⁠. 나는 산에 가도 돼요⁠. 천 년 더 기다리면 되니까⁠.⁠”

“⁠천 년이 쉬워요⁠?⁠”

“⁠쉽지 않아요⁠. 그래도 며늘아가 일 년 반보다는 내가 덜 억울해요⁠. 나는 고른 사람이고⁠, 며늘아가는 골라진 사람이니까⁠.⁠”

*

새벽 한 시⁠, 지안은 안방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서랍 맨 안쪽에 빨간 도장 케이스가 있었다⁠. 석 달 전 이혼 신고서에 찍은 도장이었다⁠. 뚜껑을 열자 인주가 마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지안⁠」 세 글자가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

현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섯 주째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지안과 현오 사이에는 아직 사람 하나가 누울 자리가 있었지만⁠, 첫날보다 한 뼘 좁아져 있었다⁠.

“⁠찍을 거야⁠?⁠”

“⁠내일 정해⁠.⁠”

현오는 더 묻지 않았다⁠. 안경을 집어 들었다가 닦지 않고 협탁에 내려놓았다⁠. 대신 협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에 쥐고 다시 누웠다⁠. 지안은 쥔 것이 무엇인지 보지 않았다⁠.

지안은 도장 케이스 뚜껑을 닫았다⁠. 딸깍⁠, 소리가 났다⁠. 출근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석 달 전 이혼 신고서가 있던 자리였다⁠.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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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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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필깎이2026.11.06· 9화

    놀이터에서 주민 설명회라니 설정부터 웃겼는데, 시어머니가 꼬리를 드러내고 사과하는 장면에서 울었어요. 도장을 가방에 넣는 마지막 줄이 오래 남네요.

    • 석다감작가2026.11.06

      아흔아홉 번째 밤에 시어머니가 처음으로 진짜 이유를 꺼냈어요. 백 번째 날 이야기는 마지막 화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