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61자)

백 일째, 조정실

시어머니는 구미호 · 석다감

2027년 6월 30일 수요일 오후 한 시 사십 분⁠, 법원 4층 가사조정실 앞 복도에는 긴 나무 의자가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창으로 장마 앞의 흐린 빛이 들어왔다⁠. 기상 캐스터의 말대로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비는 아직이었다⁠.

시어머니는 의자 한가운데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연보라 개량 한복에 은 머리 장식을 꽂았고⁠, 틀어 올린 머리는 이제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았다⁠. 아흔아홉 가닥이었다⁠. 무릎 위에 보온병을 얹고 있었다⁠. 엄마 민선자가 시어머니 옆에서 떡 봉지를 무릎에 끌어안고 있었고⁠, 복도 끝 정수기 옆에는 함병도가 양복 윗도리 차림으로 서 있었다⁠. 목의 방울에 손수건을 감아 소리를 막아 놓았다⁠.

지안은 시어머니와 의자 세 칸을 띄우고 앉았다⁠. 현오는 지안과 의자 두 칸을 띄우고 앉았다⁠. 하객 좌석 같았다⁠. 지안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휴대전화가 떨렸다⁠. 변희동이었다⁠. 「⁠자⁠, 하객 여러분⁠. 오늘 오후 두 시 예식은 사회자 없이 진행됩니다⁠. 매니저님 파이팅⁠.⁠」 지안은 답을 하지 않고 화면을 껐다⁠.

“⁠오지안 씨⁠, 주현오 씨⁠. 들어오세요⁠.⁠”

*

조정실은 회의실처럼 생겼다⁠. 긴 탁자 끝에 조정장 판사가 앉았고⁠, 옆에 조정위원이 앉았다⁠. 조정위원은 예순 남짓의 여자였는데⁠, 돋보기를 코끝에 걸고 서류를 넘기는 손놀림이 학교 선생님 같았다⁠. 지안과 현오는 탁자 양쪽에 마주 앉았다⁠. 탁자가 넓어서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탁자 한가운데에 휴지 상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한 사람에 하나씩이었다⁠. 웨딩홀 신부대기실에도 휴지 상자는 두 개였다⁠. 신부 것과 신부 어머니 것⁠.

조정위원이 서류를 읽었다⁠.

“⁠신청인 오지안 씨는 이혼을 구하시고⁠, 위자료는 청구하지 않으시고⁠, 전세 보증금은 반씩 나누시는 걸로 내셨네요⁠. 상대방 주현오 씨⁠, 지난번 협의이혼 확인기일에서는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하셨지요⁠.⁠”

“⁠네⁠.⁠”

“⁠오늘은 어떠세요⁠? 이혼에 동의하십니까⁠?⁠”

현오가 안경을 벗었다⁠. 닦지 않고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내가 원하면 하겠습니다⁠. 동의합니다⁠.⁠”

지안은 탁자 아래에서 손가락을 쥐었다⁠. 5월 6일 확인실에서는 없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대신 하나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조정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오가 셔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은색 열쇠 하나였다⁠. 손잡이에 낡은 빨간 끈이 묶여 있었다⁠.

“⁠정발산동 엄마 집 열쇠입니다⁠. 결혼한 해 가을부터 일 년 반 동안⁠, 밤마다 이 열쇠로 엄마 집 문을 열었습니다⁠. 아내한테 이유도 말 안 하고요⁠. 5월 18일부터는 안 썼습니다⁠. 오늘 아내 앞에서 내놓고 싶었습니다⁠.⁠”

조정위원이 돋보기 너머로 열쇠를 보았다⁠. 무슨 사연인지 묻지 않았다⁠. 법원 조정실도 웨딩홀처럼 손님의 사정을 다 묻지는 않는 곳이었다⁠.

“⁠알겠습니다⁠.⁠”

조정위원이 지안에게 몸을 돌렸다⁠.

“⁠신청인⁠, 상대방이 동의하셨습니다⁠. 합의되시면 오늘 조서를 작성하고⁠, 작성하는 때부터 이혼의 효력이 생깁니다⁠. 도장 가져오셨지요⁠?⁠”

지안은 가방 지퍼를 열었다⁠. 안쪽 주머니에서 빨간 도장 케이스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열쇠와 도장 케이스가 탁자 위에 한 뼘 거리로 나란히 놓였다⁠. 오늘 오후에 도장을 찍으면 자정에 지안과 현오는 부부가 아니었다⁠. 백 번째 밤은 차지 않았다⁠.

“⁠오 분만 주시겠어요⁠?⁠”

조정장이 시계를 보았다⁠.

“⁠십 분 드리지요⁠.⁠”

*

복도로 나오자 시어머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엄마도 떡 봉지를 든 채 따라 일어났고⁠, 병도가 정수기 옆에서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 시어머니가 지안 앞까지 걸어왔다⁠. 키가 커서 지안이 올려다보아야 했다⁠.

“⁠찍어요⁠.⁠”

시어머니가 먼저 말했다⁠.

“⁠어머님⁠, 지금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시어머니가 입을 다물었다⁠. 지안은 복도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법원 주차장이 보였다⁠. 5월 6일⁠, 현오의 작은 차 앞에서 사진 석 장을 시어머니 무릎에 놓았던 자리였다⁠.

지안은 다시 몸을 돌려 시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님⁠, 사람 되시면 정발산동 집 파시고 어디 사세요⁠?⁠”

시어머니가 눈을 깜빡였다⁠. 이런 물음이 올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몰라요⁠. 작은 방 하나 얻죠⁠. 늙으면 되니까요⁠.⁠”

“⁠우리 동네 금촌에 볕 잘 드는 방 하나 있어요⁠. 반찬가게 이 층⁠.⁠”

엄마가 끼어들었다⁠. 시어머니가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떡 봉지를 더 꼭 끌어안았다⁠.

“⁠밤에 화투 칠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다른 뜻 없어요⁠.⁠”

병도가 정수기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지안은 웃음이 날 뻔한 것을 참고 병도를 보았다⁠.

“⁠회장님은 어머님이 사람 되시는 게 싫으세요⁠?⁠”

“⁠싫은지 좋은지는 아버지가 정하실 일이었습니다⁠. 저는 보러 왔습니다⁠. 어떻게 정하시든 오늘 밤은 놀이터에 있겠습니다⁠.⁠”

지안은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첩을 열었다⁠. 3월 24일 새벽⁠, 확대경 아래 흰머리 한 가닥이 찍힌 사진이 맨 앞에 있었다⁠. 현오는 그날부터 자정마다 엄마 정수리를 찍어 지안에게 보냈다⁠. 안방에서 자기 시작한 뒤로도 자정이면 거실로 나가 한 장을 찍고 돌아왔다⁠. 지안은 한 번도 답하지 않았고⁠, 한 장도 지우지 않았다⁠. 사진이 아흔아홉 장이었다⁠.

남편이 안방에서 지안 옆에 누워 잔 날이 43일이었다⁠. 엄마 집 열쇠를 쓰지 않은 날도 43일이었다⁠. 지안이 이혼하려던 사람은 밤마다 엄마 집 문을 여는 남자였다⁠. 열쇠를 쥐던 남자는 지금 조정실 탁자 위에 열쇠를 내려놓고 앉아 있었다⁠.

“⁠어머님⁠.⁠”

“⁠네⁠.⁠”

“⁠저 어머님 때문에 정하는 거 아니에요⁠.⁠”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 알아들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알아요⁠.⁠”

*

조정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현오가 열쇠를 바라보던 눈을 들었다⁠. 지안은 자리에 앉아 조정위원을 보았다⁠.

“⁠조정 신청을 취하하겠습니다⁠.⁠”

조정위원의 돋보기가 콧등에서 조금 내려갔다⁠. 조정장이 서류를 덮었다⁠. 현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얼굴이었다⁠.

“⁠취하하시는 사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남편이 이제 집에서 자요⁠.⁠”

조정위원이 잠시 지안을 보다가 웃음을 참았다⁠. 돋보기를 밀어 올렸다⁠.

“⁠그러면 취하서에 서명이나 날인해 주시면 됩니다⁠.⁠”

직원이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 지안은 도장 케이스를 열었다⁠. 석 달 전 이혼 신고서에 찍었던 도장이었다⁠. 인주를 묻혔다⁠. 종이 아래 신청인 자리에 꾹 눌렀다⁠. 「⁠오지안⁠」 세 글자가 빨갛게 찍혔다⁠.

“⁠조건이 하나 있어요⁠.⁠”

지안이 현오를 보았다⁠.

“⁠다시 엄마 집에서 자면 그날로 다시 와⁠. 이번엔 숙려 기간 안 기다려⁠.⁠”

조정위원이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법으로는 안 되고요⁠, 두 분 약속으로 하세요⁠.⁠”

“⁠응⁠.⁠”

현오가 대답했다⁠. 일 년 반 동안 들은 대답 가운데 가장 빨랐다⁠. 지안은 탁자 위의 열쇠를 집어 손바닥에 쥐었다⁠. 빨간 끈이 손가락 사이로 늘어졌다⁠. 복도에서 시어머니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정발산동 집 문은 이제 집주인이 열면 되었다⁠.

*

밤 열한 시⁠, 거실 소파에 시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꼬리 아홉 개가 마지막으로 펼쳐졌다⁠. 엄마가 소파 옆 바닥에서 꼬리 세 개를 무릎에 쥐었다⁠. 지안과 현오는 소파 양 끝에 앉아 있었는데⁠, 가운데에 시어머니가 있어서 셋이 앉으니 소파가 꽉 찼다⁠. 베란다 창 아래로 놀이터가 보였다⁠. 미끄럼틀 옆 벤치에 함병도가 보온병을 들고 앉아 있었다⁠. 회원은 하나도 데려오지 않았다⁠.

자정 일 분 전⁠,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오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쥐어 줘⁠.⁠”

현오가 엄마 손을 잡았다⁠. 꼬리를 쥐던 손이 엄마 손을 쥐었다⁠. 손가락이 꼬리 뿌리를 쥘 때처럼 단단하게 오므라들었다⁠.

벽시계 초침이 12를 넘었다⁠. 지안이 휴대전화 손전등을 시어머니 머리에 비췄다⁠. 현오가 확대경을 댔다⁠. 흰머리가 너무 많아 셀 수 없었다⁠. 현오가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백⁠.⁠”

엄마가 꼬리를 쥔 채 박수를 치려다 꼬리를 놓칠 뻔하고 다시 쥐었다⁠.

백 번째 밤에는 아무도 자지 않았다⁠. 엄마는 화투 패를 꺼냈다가 집어넣었다⁠. 시어머니는 고려 개경 뒷산 이야기를 했고⁠, 교토의 여우 이야기를 했고⁠, 고봉산 덫에서 풀려나던 날 측량기사의 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이야기했다⁠. 지안은 들었다⁠. 현오도 들었다⁠. 새벽 세 시에 엄마가 꼬리를 쥔 채 꾸벅 졸았다⁠. 꼬리 하나가 엄마 코끝을 간질였고⁠, 엄마는 재채기를 하며 깨어 “⁠사돈⁠, 꼬리 좀 가만 둬요⁠” 하고는 다시 졸았다⁠. 시어머니가 소리 없이 웃었다⁠. 새벽 네 시에 비가 잠깐 지나갔다⁠. 비가 와도 지붕은 지붕이었다⁠.

*

7월 1일 목요일 새벽 다섯 시 십삼 분⁠, 호수 건너편 하늘이 붉게 갈라지고 첫 햇살이 베란다 유리를 넘어 거실 바닥에 길게 누웠다⁠. 햇살이 소파에 닿았다⁠.

꼬리 끝에서부터 털이 일어났다⁠. 민들레 씨앗이 바람을 받을 때처럼 흰 털이 한 올씩 들려 올라갔다⁠. 꼬리 아홉 개가 끝에서부터 가늘어졌다⁠. 털이 빠져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엄마의 무릎 위에서 꼬리가 사라지고 흰 털만 수북하게 남았다⁠. 엄마는 빈손을 펴 보았다⁠.

시어머니가 재채기를 했다⁠. 한 번⁠. 소금을 맞았을 때와 다른⁠, 사람의 재채기였다⁠. 시어머니는 코를 훌쩍이며 제 손등을 보았다⁠. 손등의 살갗이 어제보다 조금 얇아져 있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하나 생겨 있었다⁠.

“⁠배고파요⁠.⁠”

시어머니가 말했다⁠.

“⁠생고기요⁠?⁠”

현오가 물었다⁠.

“⁠아니⁠. 흰쌀밥⁠.⁠”

엄마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는 소리가 났고⁠, 이어서 쌀 씻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쌀을 세 번 헹구면서 “⁠사돈⁠, 밥은 고슬고슬하게 해요⁠, 질게 해요⁠?⁠” 하고 소리쳤다⁠. 시어머니가 천 년 만에 처음 받는 물음이라는 얼굴로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고슬고슬하게요⁠.⁠”

다섯 시 사십 분⁠, 초인종이 울렸다⁠. 함병도가 현관에 서 있었다⁠. 밤새 놀이터에 앉아 있어서 양복 어깨가 비에 젖어 있었다⁠. 시어머니가 맨발로 현관에 나갔다⁠. 손에 한지로 싼 꾸러미 하나를 들고 있었다⁠. 소파에 떨어진 흰 털을 한 줌 모아 연보라 고름으로 묶은 것이었다⁠.

“⁠함춘길 어른 계신 데 가져다 드려요⁠. 1988년 겨울에 쫓던 여우 털이에요⁠. 이제 쫓으실 일 없다고요⁠.⁠”

병도는 꾸러미를 두 손으로 받았다⁠. 시어머니의 흰머리와 눈가의 주름을 오래 보았다⁠.

“⁠집 파신 돈은 영수증 끊어 드리겠습니다⁠.⁠”

“⁠네⁠. 꼭 끊어 주세요⁠.⁠”

병도가 허리를 숙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목의 방울은 울리지 않았다⁠.

지안은 베란다 창을 활짝 열었다⁠. 아침 바람이 호수 냄새를 싣고 들어와 소파 위의 흰 털을 들어 올렸다⁠. 털이 거실을 한 바퀴 돌아 창밖으로 빠져나가 호수공원 위로 흩어졌다⁠. 소파 앞에서 현오가 돌돌이를 들고 무릎을 꿇은 채 남은 털을 한 줄씩 밀고 있었다⁠. 돌돌이가 금세 하얘졌다⁠. 현오는 끈적이 종이를 한 장 뜯어 내고 다시 밀었다⁠. 시어머니는 소파 끝에 앉아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흰머리 백 가닥 위에서 반짝였고⁠, 찻잔에서 김이 올라갔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