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14자)

이혼 상견례

시어머니는 구미호 · 석다감

2027년 4월 20일 화요일 오전 아홉 시⁠, 지안은 거실 프린터에서 막 나온 종이 석 장을 식탁에 펼쳤다⁠. 맨 위에 「⁠오지안 · 주현오 이혼 상견례 식순⁠」이라고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웨딩홀 상견례 식순 서식을 그대로 가져와 글자만 바꾼 것이었다⁠.

1⁠. 양가 입장 및 인사 · 2⁠. 이혼 사유 낭독(⁠신부 측⁠) · 3⁠. 답변(⁠신랑 측⁠) · 4⁠. 살림 나누기 · 5⁠. 식사(⁠한정식 B코스⁠) · 6⁠. 폐회⁠.

현오가 식순을 들고 안경을 벗었다⁠. 셔츠 자락으로 닦고⁠, 다시 쓰고⁠, 또 벗었다⁠.

“⁠사유 낭독은 좀 빼면 안 될까⁠?⁠”

“⁠식순은 바꿀 수 없어요⁠. 양가에 이미 보냈어요⁠.⁠”

“⁠우리 엄마한테도⁠?⁠”

“⁠어머님이 제일 먼저 답장하셨어⁠.⁠”

소파에서 시어머니가 찻잔을 든 채 손을 들었다⁠. 정수리에 흰머리 스물여덟 가닥이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시어머니는 식순 한 장을 가져가 볼펜으로 맨 끝에 한 줄을 보탰다⁠. 「⁠7⁠. 차⁠」⁠.

“⁠밥 먹고 차는 마셔야죠⁠.⁠”

“⁠어머님⁠, 이혼 상견례예요⁠.⁠”

“⁠이혼해도 차는 마셔요⁠.⁠”

지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엄마였다⁠. 「⁠엄마 아빠 둘 다 간다⁠. 니 아빠 넥타이 맸다⁠. 사돈 몇 시에 오냐⁠」⁠. 이어서 법원 알림 문자가 들어왔다⁠. 「⁠협의이혼의사확인 기일 안내⁠: 5월 6일(⁠목⁠) 10⁠:00⁠. 당사자 본인 출석⁠」⁠. 두 문자가 화면에 나란히 떠 있었다⁠.

*

정오⁠, 라온채 2층 상견례룸 매화실⁠. 지안이 신입 때 서빙하던 방이고⁠, 지안의 결혼 상견례를 했던 방이었다⁠. 둥근 원목 식탁 위에 신선로와 갈비찜⁠, 구절판이 놓였고⁠, 창 앞에 학 그림 병풍이 둘러져 있었다⁠. 서빙 직원 둘이 지안을 보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매니저님⁠, 음료 뭐로 넣을까요⁠?⁠”

“⁠오늘은 저 손님이에요⁠.⁠”

“⁠네⁠, 매니저님⁠.⁠”

엄마 민선자는 꽃무늬 블라우스에 진주 목걸이를 걸고 왔다⁠. 결혼 상견례 때 했던 목걸이였다⁠. 아빠는 짙은 남색 넥타이를 매고 엄마 옆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가락을 하나씩 닦았다⁠. 택시를 서른 해 몰다 은퇴한 아빠는 말이 적었다⁠. 결혼 상견례 때도 아빠가 한 말은 “⁠잘 부탁드립니다⁠” 하나였다⁠.

시어머니는 연보라 개량 한복을 입고 왔다⁠. 틀어 올린 머리에 은 머리 장식을 꽂았는데⁠, 흰머리 스물여덟 가닥이 감춰지지 않고 은실처럼 비쳤다⁠. 엄마가 흰머리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사돈⁠, 그새 많이 세셨네⁠.⁠”

“⁠네⁠. 요즘 날마다 하나씩 돋아요⁠.⁠”

시어머니가 자랑하듯 말했다⁠. 엄마는 칭찬인지 흉인지 몰라 물을 마셨다⁠.

지안이 일어나 식순 1번을 진행했다⁠. 양가가 서로 고개를 숙였다⁠. 2년 전과 같은 인사였는데 고개가 내려가는 속도가 달랐다⁠. 엄마는 시어머니보다 고개를 덜 숙이려고 애썼고⁠, 시어머니는 엄마보다 더 숙였다⁠.

“⁠식순 2번⁠, 이혼 사유 낭독입니다⁠.⁠”

지안이 종이를 펴려는데 엄마가 손을 뻗어 종이를 낚아챘다⁠.

“⁠이건 엄마가 읽어⁠. 니가 읽으면 울어⁠.⁠”

엄마는 돋보기를 코에 걸었다⁠.

“⁠하나⁠. 결혼한 해 가을부터 일 년 반 동안 밤마다 지 엄마 집에서 잤음⁠.⁠”

“⁠맞아요⁠.⁠”

시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돋보기가 콧등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둘⁠. 왜 거기서 자는지 물어도 말 안 했음⁠.⁠”

“⁠맞아요⁠.⁠”

“⁠셋⁠.⁠”

엄마는 종이에 없는 말을 읽기 시작했다⁠. 지안은 세 번째 줄을 쓴 기억이 없었다⁠.

“⁠우리 딸 백 일을⁠, 사돈이 왜 써요⁠?⁠”

시어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딸 서른넷이에요⁠. 백 일이면 소개팅을 열 번 해요⁠. 이혼하는 애를 붙잡아서 백 일을 더 살게 하는 게⁠, 그게 사람 할 짓이에요⁠?⁠”

“⁠사람 할 짓은 아니죠⁠. 나는 아직 사람이 아니라서요⁠.⁠”

엄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안은 엄마가 화날 때 목이 먼저 빨개지는 것을 알았다⁠.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까지 붉게 보였다⁠.

“⁠맞아요⁠, 내가 쓰는 거예요⁠. 며늘아가 백 일을 내가 써요⁠. 그래서 빌고 있어요⁠.⁠”

“⁠빌면 다예요⁠? 여우 같은 시어미가 아들을 끼고 앉아서⁠…⁠…⁠.⁠”

여우라는 말이 끝나기 전에 시어머니의 치마가 부풀었다⁠.

꼬리 아홉 개가 한꺼번에 펼쳐지면서 등 뒤 병풍을 밀어 넘어뜨렸다⁠. 학 그림이 바닥에 엎어졌고⁠, 꼬리 하나가 식탁 위를 쓸어 신선로 뚜껑을 날렸다⁠. 육수가 구절판 위로 쏟아졌다⁠. 서빙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쟁반을 든 채 굳었다⁠.

지안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직원을 문밖으로 돌려세우고 문을 잠그고⁠, 무전기를 입에 댔다⁠.

“⁠매화실 서빙 오 분 멈춤⁠. 오 분 동안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매니저님⁠, 안에 무슨 일⁠…⁠…⁠”

“⁠오 분이요⁠.⁠”

돌아서자 엄마가 식탁 끝에 놓인 소금 그릇을 들고 있었다⁠. 전을 찍어 먹으라고 놓은 굵은소금이었다⁠. 엄마는 망설이지 않았다⁠. 반찬가게 삼십 년의 팔로 소금을 한 움큼 쥐어 시어머니에게 뿌렸다⁠.

“⁠물러가라⁠!⁠”

소금이 시어머니의 한복과 꼬리 위에 하얗게 내려앉았다⁠. 시어머니가 재채기를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재채기할 때마다 꼬리 아홉 개가 함께 털을 부풀렸고⁠, 털에 붙은 소금이 사방으로 튀었다⁠. 현오의 안경알에도 소금이 붙었다⁠.

“⁠사돈⁠, 그건 귀신한테 하는 거예요⁠. 나는 여우고요⁠.⁠”

시어머니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조선 세종 임금 때 상견례에서도 누가 이렇게 뿌렸어요⁠. 그때도 재채기만 났어요⁠.⁠”

아빠는 소란 사이에 갈비찜 한 조각을 집어 천천히 씹고 있었다⁠.

*

엄마가 소금 그릇을 내려놓고 현오에게 몸을 돌렸다⁠.

“⁠자네⁠. 자네는 누구 편인가⁠?⁠”

현오가 안경을 벗었다⁠. 소금이 묻은 안경을 셔츠 자락으로 문질렀다⁠. 소금 알갱이가 렌즈를 긁는 소리가 났다⁠.

“⁠일단 앉으시죠⁠, 어머님⁠.⁠”

“⁠앉아 있잖아⁠!⁠”

엄마가 식탁을 손바닥으로 쳤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보았다⁠.

“⁠현오야⁠. 대답해⁠.⁠”

현오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 지안은 남편이 지금 무엇을 고르고 있는지 보였다⁠. 엄마의 백 일을 고르면 아내를 잃고⁠, 아내를 고르면 엄마가 산으로 간다⁠. 하나만 고르라는 물음 앞에서 남편은 일 년 반 동안 그랬듯이 둘 다 붙잡은 채로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 손에 쥔 안경만 세 번째로 닦였다⁠.

지안은 무릎 위에서 식순 종이를 접었다⁠. 반으로⁠, 다시 반으로⁠.

“⁠식순 3번⁠, 신랑 측 답변은 건너뛰겠습니다⁠.⁠”

목소리가 안 떨렸다⁠. 웨딩홀에서 신랑이 혼인 서약을 까먹으면 지안은 늘 이렇게 넘겼다⁠.

“⁠식순 4번⁠, 살림 나누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에어프라이어는 어머님 거예요⁠. 찻잔도 어머님 거고요⁠. 나머지는 반반⁠.⁠”

“⁠에어프라이어는 며늘아가 써요⁠. 나는 튀김 안 먹어요⁠.⁠”

“⁠그럼 제 거예요⁠.⁠”

엄마가 지안을 보았다⁠. 딸이 우는 대신 살림을 나누는 것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내내 물만 마시던 아빠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빠는 넘어진 병풍 너머로 꼬리 아홉 개를 한참 보고 말했다⁠.

“⁠사돈⁠, 꼬리가 참 곱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시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사돈어른⁠.⁠”

엄마가 아빠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아빠는 다시 갈비찜을 집었다⁠. 오 분이 지나 서빙 직원이 노크를 했을 때 꼬리는 치마 속으로 들어가 있었고⁠, 병풍은 다시 서 있었고⁠, 신선로 국물은 행주로 닦여 있었다⁠. 직원은 바닥에 깔린 흰 털과 소금 알갱이를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라온채 직원 교육 첫 장에는 「⁠손님의 사정은 묻지 않는다⁠」가 적혀 있었고⁠, 이 줄을 쓴 사람이 지안이었다⁠.

식순 7번은 시어머니가 직접 진행했다⁠. 다관에 찻잎을 넣고 물을 부어 잔 다섯에 나눴다⁠. 엄마는 마시지 않겠다며 팔짱을 꼈다가⁠, 아빠가 마시는 것을 보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한 모금 더 마셨다⁠.

*

한 시 반⁠, 2층 여자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지안은 시어머니의 한복 어깨에 붙은 소금을 손으로 털었다⁠. 거울 속 시어머니의 눈가가 재채기 때문에 붉었다⁠. 굵은소금이 세면대 위로 떨어져 물 빠지는 구멍 쪽으로 굴러갔다⁠.

“⁠어머님은 왜 맨날 맞다고만 하세요⁠? 싸우실 거면 싸우세요⁠.⁠”

“⁠맞는 말에 틀렸다고 하면 거짓말이잖아요⁠.⁠”

“⁠저희 엄마 말이 다 맞아요⁠?⁠”

“⁠다 맞아요⁠. 사돈은 딸을 지키는 거고⁠, 나는 사돈 딸 백 일을 쓰려는 거고⁠.⁠”

시어머니가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씻었다⁠. 손등에 엄마가 뿌린 소금이 아직 붙어 있었다⁠.

“⁠대신 나는 안 물러나요⁠. 맞는 말을 다 듣고도 또 빌 거예요⁠. 며늘아가가 법원 가는 날까지⁠.⁠”

지안은 휴지를 뽑아 시어머니에게 건넸다⁠. 시어머니가 손을 닦고 휴지를 반으로 접어 소매에 넣었다⁠. 버리지 않고 소매에 넣는 버릇이 지안의 외할머니와 같았다⁠. 둘 다 전쟁 겪은 사람의 손버릇이라고 엄마가 말한 적이 있었다⁠. 시어머니는 전쟁을 몇 번이나 겪었을지 지안은 묻지 않았다⁠.

*

오후 두 시⁠, 라온채 지하 주차장⁠. 엄마는 차 앞에서 코를 풀 휴지를 찾았다⁠.

“⁠지안아⁠, 휴지 있어⁠?⁠”

“⁠코트 주머니에⁠.⁠”

엄마가 딸의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졌다⁠. 휴지 대신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엄마가 종이를 펴서 돋보기를 다시 걸었다⁠.

「⁠한국전래퇴마협회 — 야간 짐승 퇴치 · 묵은 집 정화 · 상담 환영 / 회장 함병도⁠」⁠.

“⁠이거네⁠.⁠”

“⁠엄마⁠, 그거 시댁 대문에 붙어 있던 거야⁠. 그냥 뗀 거야⁠.⁠”

“⁠뗀 걸 왜 갖고 다녀⁠?⁠”

엄마가 전단 아래 전화번호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주소가 파주 금촌 시장이었다⁠. 엄마 가게에서 걸어서 오 분 거리였다⁠.

“⁠우리 동네네⁠.⁠”

“⁠엄마⁠, 하지 마⁠.⁠”

“⁠너는 니 일 해⁠. 엄마는 엄마 일 할 테니까⁠.⁠”

엄마는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아빠가 조수석 문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 지안은 엄마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을 수도 있었다⁠. 손이 나가지 않았다⁠. 엄마의 일이 맞기도 했다⁠. 딸을 시댁에서 빼내는 것⁠.

“⁠여보세요⁠, 퇴마 협회죠⁠? 네⁠, 여우요⁠. 꼬리가 아홉 개예요⁠. 아뇨⁠, 진짜예요⁠. 소금은 안 들어요⁠. 재채기만 해요⁠.⁠”

*

밤 열 시⁠, 신혼집 거실에서 시어머니는 소파에 누워 있었고⁠, 꼬리 한 올 한 올 사이에 낀 소금 알갱이를 현오가 빗으로 털어 내고 있었다⁠. 빗질 소리가 사각사각 났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 두었는데 신문지 위에 소금이 눈처럼 쌓였다⁠. 신문지는 엄마가 반찬통을 싸 왔던 파주 지역 신문이었다⁠. 1면에 「⁠금촌 시장 빈 점포 늘어⁠, 상인회 대책 회의⁠」라는 제목이 소금 밑에 깔려 있었다⁠. 현오는 빗에 낀 털을 손가락으로 걷어 내 비닐봉지에 모았다⁠. 한 봉지가 벌써 베개만 했다⁠.

지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오지안 씨 되십니까⁠? 한국전래퇴마협회 회장 함병도입니다⁠. 어머님께서 의뢰하셨습니다⁠.⁠”

목소리가 공손하고 또박또박했다⁠. 콜센터 상담원 같았다⁠.

“⁠저는 의뢰 안 했어요⁠.⁠”

“⁠압니다⁠. 그래서 따님께도 직접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 오후⁠, 파주 사무실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도 같이 오십니다⁠. 저희가 따님께 보여 드릴 사진이 있습니다⁠.⁠”

“⁠무슨 사진이요⁠?⁠”

“⁠1988년 겨울 사진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지안이 고개를 들자 소파 위의 시어머니가 눈을 뜨고 있었다⁠. 빗질하던 현오의 손이 멈췄다⁠.

“⁠1988년이요⁠?⁠”

시어머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해 겨울은 내가 배가 많이 고팠어요⁠.⁠”

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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