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38자)

조정실에서 장남이 꺼낸 누런 봉투

저승 만원으로 돌아온 시어머니 · 피오담

10월 28일 목요일 저녁 뉴스가 국회 본회의장을 비췄다⁠. 전광판에 찬성 숫자가 떴고 의장이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귀환자 특례법 국회 통과 … 49일째 해 질 녘을 사망 시각으로⁠」

「⁠귀환 기간에 한 유언·증여는 효력 인정 … 정부 지침도 법으로⁠」

안방에서 시어머니는 화면을 보며 손가락을 접었다⁠. 오늘이 28일이고 11월 3일까지 6일이 남았다⁠. 한월이 윗목에서 팻말을 무릎에 세우고 앉아 있었다⁠.

“⁠날짜가 법이 됐네요⁠.⁠” 한월이 말했다⁠. “⁠저쪽 규정을 이쪽에서도 받아 적었습니다⁠.⁠”

“⁠법이 내 죽는 날을 정혀 주는구먼⁠. 친절도 하다⁠.⁠”

춘희가 집을 나간 지 8일째였다⁠. 부엌에서 명길이 쌀을 씻는 소리가 났다⁠. 이제 물을 버릴 때 쌀은 버리지 않았다⁠. 대신 밥이 매일 질었다⁠.

시어머니가 휴대전화를 들고 음성 메시지 단추를 꾹 눌렀다⁠.

“⁠춘희야⁠. 니 남편이 밥을 죽으로 쑨다⁠. 물을 얼마나 잡는지 알려 줘라⁠.⁠”

삼 분 뒤 답장이 왔다⁠. 글자였다⁠.

「⁠손등까지요⁠」

시어머니가 화면을 한참 보더니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명길아⁠! 손등까지래⁠!⁠”

“⁠손바닥 쪽이요⁠, 손등 쪽이요⁠?⁠”

시어머니가 다시 음성 메시지를 눌렀다⁠. “⁠손바닥이냐 손등이냐⁠.⁠”

삼 분 뒤 답장이 왔다⁠.

「⁠손을 펴서 손등이 잠길 만큼이요⁠. 간장은 기호에 따라요⁠」

시어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웃음인지 아닌지 한월은 알 수 없었다⁠.

*

같은 날 밤 열한 시⁠, 찜질방 수면실에서 춘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해진이었다⁠.

“⁠형수님⁠, 내일 조정에 오세요⁠. 형수님은 당사자가 못 되셔서 말씀은 못 하셔도 들으실 수는 있어요⁠.⁠”

“⁠제가 가서 뭐 해요⁠.⁠”

“⁠그냥 보세요⁠. 누가 누구 편인지요⁠.⁠” 해진의 목소리 뒤로 볼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일 큰아드님도 오세요⁠. 참고인으로요⁠. 본인이 자청하셨어요⁠.⁠”

춘희는 전화를 끊고 맥반석 위에 누웠다⁠. 천장의 형광등이 하나 깜박였다⁠.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돌아누우며 물었다⁠.

“⁠새댁⁠, 내일 나가⁠?⁠”

예순 가까운 나이에 새댁 소리를 들었다⁠. 찜질방에서 8일을 묵은 사람은 춘희 하나뿐이라⁠,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춘희는 새댁으로 통했다⁠.

“⁠가 봐야 알 것 같아요⁠.⁠”

“⁠가⁠. 가서 할 말 혀⁠.⁠” 아주머니가 수건을 얼굴에 덮었다⁠. “⁠나는 할 말 못 하고 삼십 년 살았어⁠. 지금은 영감이 없어서 할 데도 없어⁠.⁠”

10월 29일 금요일 오전 열 시⁠, 법원 이 층 조정실⁠. 긴 탁자 한가운데에 칠십 대 조정위원이 앉았다⁠. 은퇴한 판사라고 했다⁠. 한쪽에 시어머니와 해진이⁠, 맞은편에 명호와 명철이 앉았다⁠. 명길은 참고인 자리에 따로 앉았다⁠. 춘희는 해진이 불러 맨 뒷자리 방청 의자에 앉았다⁠. 찜질방에서 본 뒤로 7일 만에 시어머니와 한 방에 있었다⁠. 둘은 눈인사도 하지 않았다⁠.

조정위원이 서류를 넘기며 정리했다⁠. 명호는 상속받은 논을 이장에게 팔아 일억 육천을 받았고⁠, 명철은 예금 팔천을 받았다⁠. 정부 지침과 어제 통과한 특례법대로라면 두 사람은 받은 돈을 돌려줘야 한다⁠. 두 사람 다 돈을 이미 썼다⁠.

“⁠다 쓰셨어도 돈은 남은 걸로 봅니다⁠. 그건 두 분도 아시죠⁠?⁠”

“⁠압니다⁠.⁠” 명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다만 저는 사정이 다릅니다⁠.⁠”

“⁠말씀하세요⁠.⁠”

명호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2010년 법무사 사무소 개업식 사진이었다⁠. 화환 앞에 젊은 명호와 칠십 대의 시어머니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날 어머니가 개업식에 오셔서 저한테 말씀하셨습니다⁠. 논은 네 몫이다⁠, 사무소 하다 힘들면 팔아 써라⁠. 그래서 저는 그 논을 원래 제 것으로 알았습니다⁠. 상속이 아니라 어머니가 생전에 주신 걸로요⁠. 제가 판 건 제 논입니다⁠.⁠”

해진이 볼펜을 내려놓았다⁠. “⁠글로 받으셨어요⁠?⁠”

“⁠말로 받았습니다⁠.⁠”

“⁠글로 안 한 증여는 넘겨주기 전까지는 언제든 거둘 수 있어요⁠. 민법 555조요⁠. 할머니는 등기를 넘겨주신 적이 없어요⁠.⁠”

“⁠거두신 적도 없습니다⁠.⁠” 명호가 바로 받았다⁠. “⁠어머니는 그 뒤로 한 번도 다른 말씀을 안 하셨어요⁠. 2010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열일곱 해 동안요⁠.⁠”

조정위원이 시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님⁠,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시어머니가 입을 다물었다⁠. 개업식 날이 기억나는 얼굴이었다⁠. 아들이 화환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매던 날⁠,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흐린 얼굴이었다⁠. 명호는 어머니의 흐린 틈을 알아보았다⁠. 법무사로 스무 해 가까이 살며 사람이 말끝을 흐리는 틈을 수백 번 보았다⁠.

“⁠어머님⁠?⁠”

시어머니가 대답하기 전에 조정위원이 명철을 보았다⁠. “⁠송명철 님은 따로 하실 말씀 있습니까⁠?⁠”

명철이 휴대전화를 꺼내 가게 통장 내역을 화면에 띄웠다⁠. 「⁠카드론 상환⁠」 「⁠월세⁠」 「⁠튀김기 할부⁠」⁠. 줄마다 빨간 글씨였다⁠.

“⁠저는 그냥 다 썼습니다⁠. 할 말 없습니다⁠.⁠” 명철이 화면을 끄고 어머니를 보았다⁠. “⁠엄마⁠, 근데 저 토시 샀어요⁠.⁠”

시어머니가 명철의 팔뚝을 보았다⁠. 검은 토시가 손목까지 덮고 있었다⁠.

“⁠잘혔다⁠.⁠”

조정위원이 둘을 번갈아 보다가 서류로 눈을 돌렸다⁠. 명호가 헛기침을 했고⁠, 조정위원이 다시 시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님⁠, 개업식 날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했을 수도 있고⁠.⁠” 시어머니가 말했다⁠.

명호의 어깨가 내려갔다⁠. 이겼다는 사람의 어깨였다⁠.

*

참고인 자리에서 명길이 일어났다⁠.

“⁠제가 드릴 게 있습니다⁠.⁠”

명길이 누런 봉투를 탁자 위에 놓았다⁠. 조정위원 앞까지 손으로 밀었다⁠. 명호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형⁠.⁠”

“⁠2025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어머니가 손으로 쓰신 겁니다⁠.⁠” 명길은 동생을 보지 않고 조정위원을 보았다⁠. “⁠논 열두 마지기는 큰며느리 엄춘희에게 준다고 쓰셨습니다⁠. 제가 8월 1일⁠, 장례 다음 날 어머니 반닫이 세 번째 서랍에서 찾았습니다⁠. 명호하고 같이 읽었습니다⁠. 명호가 주소도 도장도 없어서 무효라고 했고⁠, 제가 아내한테 말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제가 석 달 동안 낚시 가방에 숨겼습니다⁠.⁠”

조정실이 조용해졌다⁠. 맨 뒷자리에서 춘희가 무릎 위의 손을 꽉 쥐었다⁠. 장바구니에 넣어 다니던 고무장갑이 손가락 사이로 비죽 나와 있었다⁠.

조정위원이 종이를 펴서 읽었다⁠. 돋보기를 쓰고 한 번⁠, 벗고 한 번 더 읽었다⁠. 해진에게 넘겼다⁠. 해진이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와 도장이 없어서 자필 유언으로는 무효가 맞아요⁠. 민법 1066조요⁠.⁠” 해진이 종이를 탁자 가운데 놓았다⁠. “⁠다만 할머니가 2025년에 논을 누구한테 주려고 하셨는지는 이걸로 분명해요⁠. 둘째 아드님한테 2010년에 주셨다면⁠, 2025년에 큰며느님한테 준다고 쓰실 이유가 없죠⁠.⁠”

명호가 탁자를 짚었다⁠. 손바닥이 탁자에 쩍 달라붙는 소리가 났다⁠.

“⁠형⁠, 이거 상속결격이야⁠. 유언서 숨긴 사람은 상속 못 받아⁠. 나 그거 청구할 거야⁠. 엄마 다시 가시면 형은 이 집에서 마루 한 칸도 없어⁠.⁠”

“⁠그건 다른 법정에서 다투시고요⁠.⁠” 조정위원이 말했다⁠.

“⁠해⁠.⁠” 명길이 말했다⁠. 처음으로 동생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해⁠, 명호야⁠.⁠”

명철이 두 형 사이에서 의자를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했다⁠. “⁠형들⁠, 형들 왜 그래⁠. 우리 엄마 앞에서⁠…⁠…⁠.⁠”

시어머니는 탁자 위의 종이를 보고 있었다⁠. 제 글씨였다⁠. 받침마다 꾹꾹 눌러 쓴 글씨⁠. 시어머니가 손가락으로 두 번째 줄을 짚었다⁠. 「⁠대신 내 제사와 종가 제사는 춘희가 끝까지 지낸다⁠」⁠. 손가락이 같은 줄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시어머니는 뒷자리의 춘희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조정위원에게 말했다⁠.

“⁠아까 한 말 거둘게⁠. 개업식 날 논 준다는 말 안 했어⁠. 이 종이가 내 말이여⁠.⁠”

*

조정은 오후 두 시에 끝났다⁠. 명호는 일억 육천을⁠, 명철은 팔천을 시어머니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한 번에 갚을 수 없어 해마다 나눠 갚기로 했고⁠, 시어머니가 다시 떠나면 갚을 돈은 시어머니의 상속인이나 유언으로 정한 사람에게 간다는 줄이 붙었다⁠. 명철은 서명을 하며 울었다⁠. 튀김기 한 대를 팔아야 한다고 했다⁠. 명호는 울지 않았다⁠. 서명을 하고 펜 뚜껑을 닫는 소리가 컸다⁠.

법원 계단에서 명호가 형 앞을 지나갔다⁠. 멈추지 않고 말했다⁠.

“⁠이제 형제 아니야⁠.⁠”

명호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명철이 명호를 따라 두 계단 내려가다가 멈추고 돌아와 명길을 끌어안았다⁠. 다시 돌아서 명호를 따라 뛰어 내려갔다⁠. 다시 멈췄다⁠. 결국 계단 한가운데 서서 두 형을 번갈아 보며 코를 풀었다⁠.

명길은 계단 맨 위에 혼자 서 있었다⁠. 시어머니는 해진의 부축을 받아 엘리베이터로 갔다⁠. 한월이 팻말을 들고 뒤를 따랐다⁠.

춘희가 명길 옆으로 와서 나란히 멈췄다⁠. 둘은 한참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명호의 차가 빠져나갔고⁠, 명철이 택시를 잡았다⁠.

“⁠당신⁠, 그거 왜 내놨어요⁠?⁠”

“⁠당신이 내가 정할 일이 아니라고 했잖아⁠.⁠” 명길이 계단 난간을 쥐었다⁠. “⁠그래서 다 보라고 내놨어⁠. 이제 당신이 정해⁠.⁠”

“⁠동생 잃었네요⁠.⁠”

“⁠응⁠.⁠”

“⁠집도 잃을 수 있고요⁠.⁠”

“⁠응⁠.⁠”

춘희가 장바구니를 고쳐 들었다⁠. 고무장갑이 장바구니 밖으로 손가락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집에 가요⁠.⁠” 춘희가 말했다⁠. “⁠어머님 5일 남았어요⁠.⁠”

“⁠당신은 괜찮아⁠?⁠”

춘희가 남편을 보았다⁠. 사십 년 만에 처음 듣는 물음이었다⁠.

“⁠안 괜찮아요⁠. 그래도 가요⁠.⁠”

*

저녁 여섯 시⁠, 종가 부엌에 불이 켜졌다⁠. 춘희가 고무장갑을 끼고 쌀을 씻었다⁠. 물을 버릴 때 쌀 한 톨 흘리지 않았다⁠. 손을 펴서 손등이 잠길 만큼 물을 잡았다⁠. 명길은 부엌 문간에 서 있다가 춘희가 눈짓하자 무를 썰었다⁠. 무가 도마 밖으로 굴러 나갔다⁠.

시어머니가 부엌 문턱에 지팡이를 짚고 앉았다⁠.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십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시어머니는 문턱에서 보았고⁠, 춘희는 등으로 시어머니의 눈을 느꼈다⁠.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춘희가 탕국에 씨간장을 넣을 때 시어머니가 몇 국자냐고 묻지 않았다⁠.

상을 들고 안방으로 가는 길에 한월이 마루 끝에서 춘희를 불러 세웠다⁠. 갓을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8일 동안 어머님은 밥을 반 공기씩만 드셨습니다⁠. 저승 밥보다 맛이 없다고 하셨어요⁠.⁠”

“⁠아범 밥이 질어서 그래요⁠.⁠”

“⁠그것도 있습니다⁠.⁠” 한월이 팻말을 고쳐 쥐었다⁠. “⁠밤마다 부엌 문턱에 앉아 계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부엌을 보고요⁠. 규정상 저는 넋의 속을 말씀드리면 안 되는데⁠, 이건 제 눈으로 본 것이라서요⁠.⁠”

저녁상에서 시어머니는 밥을 두 그릇 먹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지팡이로 방바닥을 두 번 찧었다⁠.

“⁠11월 2일 화요일 오전 열 시⁠. 시내 공증 사무소⁠.⁠” 시어머니가 말했다⁠. “⁠내 유언 헌다⁠. 이번엔 주소도 쓰고 도장도 찍고⁠, 공증인 앞에서 똑바로 헌다⁠.⁠”

명길이 숟가락을 놓았다⁠. 한월이 조기 꼬리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들었다⁠.

“⁠다 와⁠. 명길이 니도⁠. 명철이도⁠.⁠” 시어머니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음성 메시지 단추를 눌렀다⁠. 단톡방에는 명호가 아직 남아 있었다⁠.

“⁠명호 너도 와⁠. 도장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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