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53자)

열쇠

달에서 쫓겨난 토끼가 차린 떡집 · 차무겸

“⁠여기 있습니다⁠.⁠”

내가 방울에 대고 말했다⁠. 다리 밑 바람이 방울을 흔들었다⁠. 방울 속 목소리가 잠깐 끊겼다가 다시 흘러나왔다⁠.

「⁠아롱⁠. 오늘 밤 늙은 방아꾼이 얼었다⁠.⁠」

궁주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높은 단 위에서 방앗간 마당을 내려다보며 절구 수를 묻던 목소리였다⁠. 슬픈 목소리도⁠, 화난 목소리도 아니었다⁠.

「⁠젊은 것들에게 절구 곁 자리를 내주고 담장 밑에 웅크렸다⁠. 새벽 순찰이 찾았을 때는 공이를 안고 있었다⁠. 공이 자루의 무명 끈을 풀어 네가 쓰던 절구에 감아 두었더구나⁠.⁠」

나는 방울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방울에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옥비가 내 옆에 와 있었다⁠. 송화가 옥비 뒤에서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있었다⁠.

「⁠대보름 달이 뜨면 길이 열린다⁠. 떡메를 가지고 올라오너라⁠. 너도⁠.⁠」

“⁠못 갑니다⁠.⁠”

목소리가 한참 없었다⁠. 물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궁주가 내 이름 대신 옥비를 불렀다⁠.

「⁠수비대장⁠. 너는 할 일을 알 것이다⁠.⁠」

방울이 울음을 멈췄다⁠. 서리 덮인 옥이 내 손바닥에서 다시 차가운 돌이 되었다⁠.

*

셋은 아무 말 없이 골목으로 돌아왔다⁠. 종로 큰길에 택시가 드문드문 지나갔다⁠. 옥비는 내 두 걸음 앞에서 걸었다⁠. 송화는 옥비 옆에서 걸었고⁠,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옥토끼 부엌에 혼자 들어와 불을 켰다⁠. 안반 옆에 계수나무 떡메가 세워져 있었다⁠. 손잡이가 늘 서늘했다⁠. 나는 떡메를 끌어안고 부엌 바닥에 앉았다⁠.

스승은 방앗간지기를 백 년 했고⁠, 내게 자리를 물려준 뒤로 이백 년을 공이만 잡았다⁠. 처음 방앗간에 들어간 날⁠, 스승이 소원 쌀 한 알을 내 혀에 올려 주었다⁠. 나는 아무 맛도 안 난다고 했다⁠. 스승은 웃었다⁠.

“⁠맛이 없지⁠? 다행이다⁠.⁠”

다행이라는 말의 뜻을 나는 삼백 년 동안 몰랐다⁠. 할머니의 찹쌀을 혀에 올린 날 알았다⁠. 맛을 아는 토끼는 남의 소원을 찧지 못하고 먹는다⁠.

나는 일어나 할머니가 물려준 광목 앞치마 자락을 손바닥 너비로 찢었다⁠. 찢은 천을 계수나무 떡메 손잡이에 칭칭 감았다⁠. 스승이 공이 자루에 무명 끈을 감던 방식이었다⁠. 끝을 안으로 접어 넣고 이빨로 매듭을 당겼다⁠. 손잡이가 조금 덜 서늘해졌다⁠. 천에 배어 있던 쌀풀 냄새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

대보름 사흘 전 아침⁠, 옥비는 대궐떡집 앞치마를 두르지 않았다⁠. 수비대의 흰 옷을 입고 옥토끼 부엌으로 들어왔다⁠. 머리에 모자도 쓰지 않았다⁠. 사람 얼굴 위로 회색 귀 두 개가 그대로 솟아 있었다⁠. 왼쪽 귀가 접혀 있었다⁠. 할머니가 부엌 의자에서 옥비의 귀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아이고⁠, 너도냐⁠.⁠”

옥비는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안반 앞에 선 나를 마주 보았다⁠.

“⁠스승은 나에게도 스승이었다⁠.⁠”

옥비가 말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수비대 어린 것들이 담장 위에서 언 발을 동동 구를 때⁠, 방앗간 뒷문으로 데운 쌀겨 주머니를 내주던 토끼가 스승이었다⁠. 옥비도 쌀겨 주머니를 받아 품에 넣고 자랐다⁠.

“⁠떡메를 다오⁠.⁠”

“⁠만 개 치고 줄게⁠.⁠”

“⁠아롱⁠.⁠”

“⁠대보름 저녁 여섯 시까지 청계광장⁠. 만 개 다 넘기고⁠, 그날 밤 달이 뜨면 줄게⁠. 너 혼자 들고 올라가⁠.⁠”

“⁠만 명이 먹은 뒤에 떡메가 무슨 소용이냐⁠? 대보름 밤에 만 명이 달을 안 본다⁠. 서울 사람들이 다 본 저녁 뉴스에서 만 명이 떡을 먹는다⁠. 사흘 뒤 밤에 소원이 안 올라오면 스승 다음은 누구냐⁠?⁠”

옥비의 코가 빨라졌다⁠. 나는 떡메 손잡이의 광목을 쥐었다⁠.

“⁠아홉 집이 빚을 냈어⁠. 회장님이 보증을 섰어⁠. 만 개 안 치면 아홉 집이 다 다시 내려가⁠.⁠”

“⁠아홉 집은 다시 올릴 수 있다⁠. 언 토끼는 다시 못 일으킨다⁠.⁠”

옥비의 말이 맞았다⁠. 나는 안다⁠. 알면서 버텼다⁠. 고백하자면 이 아침의 나는 옳은 토끼가 아니었다⁠. 다만 골목 아홉 집의 셔터가 다시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토끼였다⁠. 셔터 내려가는 소리는 절구 멈추는 소리보다 가까웠다⁠. 가까운 소리가 더 컸다⁠.

할머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에 빗자루는 없었다⁠. 할머니는 옥비와 나 사이로 와서⁠, 펴지지 않는 손으로 옥비의 팔을 툭툭 쳤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만⁠. 아침부터 싸우지 마라⁠. 떡 맛 떨어진다⁠.⁠”

옥비는 할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 앞에서 할머니의 빈 그릇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옥비는 내게 한마디만 남기고 부엌을 나갔다⁠.

“⁠대보름 달이 뜨기 전까지다⁠.⁠”

*

옥비가 나간 뒤 할머니가 부엌 의자에 다시 앉았다⁠. 할머니는 한참 부엌문을 보다가 나를 불렀다⁠.

“⁠아롱아⁠.⁠”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늘 너라고 불렀다⁠.

“⁠저 총각⁠, 뭐가 얼었다는 거냐⁠?⁠”

“⁠스승님이요⁠. 달에서 저 가르친 토끼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았다⁠. 할머니는 섣달 보름 밤부터 한 번도 놀라지 않았다⁠.

“⁠늙은이냐⁠?⁠”

“⁠삼백 살도 넘었어요⁠.⁠”

“⁠그럼 나보다 늙었네⁠.⁠”

할머니는 펴지지 않는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그리고 부엌 선반에서 사기 종지 하나를 꺼내 달라고 했다⁠. 내가 종지를 내리자 할머니는 종지에 조청을 한 숟갈 떠 담았다⁠. 섣달 보름 밤 내 혀에 처음 올려 준 조청이었다⁠.

“⁠늙은이 가는 길에 단것 하나는 놔야지⁠.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할머니는 종지를 부엌 창틀에 올려놓았다⁠. 창밖으로 낮달이 하얗게 떠 있었다⁠. 할머니는 종지를 놓고 손을 모으지는 않았다⁠. 빌지 않았다⁠. 바랄 것이 없는 사람도 슬퍼할 줄은 알았다⁠. 나는 창틀의 종지를 보다가 부엌 밖으로 나갔다⁠. 쑥떡이 종지 냄새를 맡으러 창틀로 뛰어올랐고⁠, 할머니가 손등으로 쑥떡의 엉덩이를 밀어냈다⁠.

*

오후부터 골목은 서른 가마의 찹쌀을 나르기 시작했다⁠. 방앗간 창고에서 포대가 하나씩 나와 아홉 집으로 흩어졌다⁠. 집마다 함지와 고무 대야를 골목에 내놓았다⁠. 함지가 모자라서 송편 집은 김장 대야를 꺼냈고⁠, 약식 집은 목욕탕에서 쓰던 빨간 대야를 꺼냈다⁠. 약식 집 남편이 대야를 씻다가 아내에게 혼났다⁠.

“⁠그걸 왜 꺼내⁠!⁠”

“⁠깨끗하잖아⁠!⁠”

“⁠당신 발 담그던 거잖아⁠!⁠”

골목 사람들이 웃었다⁠. 대야는 결국 쌀이 아니라 콩가루 체 받침이 되었다⁠.

방앗간 사장은 골목 한가운데에 의자를 놓고 앉아 순서를 외쳤다⁠. 대보름 전날 밤 아홉 시에 불린 쌀은 대보름 새벽 다섯 시에 찌고⁠, 대보름 새벽에 불린 쌀은 낮 열두 시에 찌고⁠. 귀가 어두워서 남들이 대꾸하는 소리는 하나도 듣지 못했지만⁠, 순서는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낙원상가 장구 총각이 대보름 당일 아침부터 장단을 맞춰 주겠다며 장구를 맡겨 놓고 갔다⁠. 맞은편 노인은 철사 감긴 시루를 한 번 더 철사로 감았다⁠. 대보름에 시루가 터지면 안 된다고 했다⁠. 꿀떡 집 아주머니는 만 개라는 말을 들은 뒤로 손목에 파스를 붙이고 다녔다⁠. 아직 한 개도 안 쳤는데 손목이 아프다고 했다⁠.

상인회장의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울렸다⁠. 주무관이었다⁠. 생중계 순서가 바뀌었고⁠, 서울시장이 여섯 시 반에 첫 떡을 받기로 했다고 했다⁠. 상인회장은 통화를 끊고 내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나는 웃는 법을 이제 조금 알았다⁠. 입꼬리만 올렸다⁠.

해 질 녘에는 골목 한가운데에 씻어 엎어 둔 함지와 대야가 줄지어 있었다⁠. 대야마다 물기가 남아 저녁 햇빛을 받았다⁠. 나는 대야 사이를 걸으며 포대 하나를 열어 찹쌀을 손바닥에 덜어 보았다⁠. 낱알이 마르고 단단했다⁠. 대보름 전날 밤이면 이 쌀이 전부 물을 먹고 부풀 것이었다⁠. 손바닥의 쌀에서 비리고 단 냄새가 났다⁠.

*

밤에 할머니는 일찍 잠들었다⁠. 나는 이 층 할머니 방문 앞에서 잠깐 서 있다가⁠, 문틈으로 할머니 숨소리를 들었다⁠. 고르고 느렸다⁠. 걱정 하나 없는 숨이었다⁠.

할머니의 열쇠 꾸러미는 부엌 못에 걸어 두었다⁠. 일곱 개의 녹슨 열쇠 가운데 가게 뒷문 열쇠는 둘이었다⁠. 하나는 할머니가 내게 주었다⁠. 다른 하나가 어디 있는지 나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부엌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안반 옆에 떡메를 세워 두었다⁠. 광목을 감은 손잡이가 어둠 속에서 하얗게 보였다⁠. 창틀의 쑥떡이 꼬리를 늘어뜨리고 졸았다⁠. 나는 쑥떡의 꼬리가 흔들리는 것을 세다가 잠들었다⁠. 설 대목부터 보름 가까이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눈을 감자 어깨가 이불 속으로 꺼지듯 무거워졌다⁠.

*

새벽 네 시⁠, 뒷문 경첩이 울었다⁠.

나는 경첩 소리에 깨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토끼치고 잠귀가 어둡다⁠. 달 궁에서는 방앗간 마당이 시끄러워서 귀를 닫고 자는 버릇이 들었다⁠. 내가 깬 것은 다섯 시였다⁠. 쌀을 찔 시간이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안반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허공을 짚었다⁠.

안반 옆이 비어 있었다⁠. 떡메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 광목 실오라기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하얀 실이 안반 모서리에 걸려 늘어져 있었다⁠.

나는 부엌을 둘러보았다⁠. 참나무 떡메는 벽에 그대로 있었다⁠. 계수나무 떡메만 없었다⁠. 창틀의 쑥떡이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귀가 나와 있어서 쑥떡의 말이 들렸다⁠.

“⁠네 시에 왔다 갔어⁠. 너네 할매 손녀⁠.⁠”

뒷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골목의 찬바람이 들어왔다⁠. 문간에 송화가 서 있었다⁠. 패딩 위로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고⁠, 손에 녹슨 열쇠 하나를 쥐고 있었다⁠. 할머니 꾸러미의 열쇠와 똑같이 생긴 열쇠였다⁠.

“⁠할머니가 열여섯 살 때 줬어요⁠. 아궁이에 데었던 날⁠. 언제든 부엌에 들어와 불 쬐라고⁠.⁠”

송화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깍듯했다⁠.

“⁠떡메는 옥비 씨한테 줬어요⁠.⁠”

나는 발을 굴렀다⁠. 사람 발이 부엌 바닥을 쾅 내리찍었다⁠. 함지의 물이 출렁였다⁠. 송화는 움찔하지 않았다⁠.

“⁠왜⁠?⁠”

“⁠어젯밤 다리 밑에서 들었잖아요⁠. 아롱 씨 스승이 얼었다는 거⁠. 아롱 씨는 그 말 듣고도 만 개 친다고 했잖아요⁠.⁠”

“⁠아홉 집은⁠? 너네 아빠는⁠?⁠”

“⁠아빠는 빚 갚을 수 있어요⁠. 아빠는 기계도 있고⁠, 손도 있어요⁠. 아빠 손에 굳은살 없는 거⁠, 할머니가 예순 해 동안 빈 소원이었어요⁠. 할머니가 장독대 그릇 안 뒤집는 거 보고 알았어요⁠. 그 소원 아롱 씨 떡이 먹은 거잖아요⁠.⁠”

“⁠옥비가 가져오라고 했어⁠?⁠”

“⁠아뇨⁠.⁠”

송화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옥비 씨는 안 받으려고 했어요⁠. 수비대장은 훔친 물건을 들고 성문을 넘지 않는대요⁠. 그래서 제가 평상에 놓고 내려왔어요⁠. 옥비 씨가 훔친 거 아니에요⁠. 제가 할머니 부엌에서 꺼낸 거예요⁠. 궁에 알리실 거면 제 이름을 대세요⁠.⁠”

송화가 열쇠를 내 앞 안반 위에 내려놓았다⁠. 열쇠가 나무판에 닿는 소리가 작았다⁠.

“⁠옥비 씨는 옥탑에 있어요⁠. 대보름 달이 뜰 때까지 안 내려온대요⁠. 떡메 안고⁠.⁠”

송화는 돌아서지 않았다⁠. 내 얼굴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나도 송화를 보았다⁠. 둘 사이 안반 위에 녹슨 열쇠 하나와 광목 실오라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골목에서 방앗간 기계가 돌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 바닥의 함지마다 찹쌀이 물을 먹고 하얗게 부풀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뭉개질 만큼 다 불어 있었다⁠. 칠 떡메가 없었다⁠. 대보름까지 이틀이 남아 있었다⁠.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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