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54자)

돋보기

구독자 십만 엄마 유튜버 · 윤은류

남궁희자는 부엌 식탁 위에 계약서 초안 열네 장을 펼쳐 놓고 돋보기를 썼다⁠. 형광등만으로는 글씨가 작아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서 종이 위에 비췄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휴대전화가 식탁 위에서 등불 노릇을 했다⁠. 성율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냉장고 위 시계가 열한 시를 넘겼다⁠.

“⁠제칠조⁠. 채널 및 채널에 올라간 모든 영상의 권리는 회사에 있다⁠.⁠”

희자는 소리 내어 읽고 종이를 한 장 넘겼다⁠.

“⁠제구조⁠. 출연자는 회사가 정한 내용과 일정에 따라 촬영에 응한다⁠.⁠”

한 장을 더 넘겼다⁠.

“⁠제십삼조⁠. 출연자는 회사와 회사의 협력사를 비방하지 않는다⁠. 협력사는 또 뭐여⁠?⁠”

“⁠회사랑 같이 일하는 데요⁠. 광고주 같은 거⁠.⁠”

희자는 돋보기를 벗어 종이 위에 놓았다⁠. 돋보기 알이 「⁠회사가 정한 내용⁠」이라는 글자를 크게 키웠다⁠.

“⁠이것이 이름만 가는 것이여⁠?⁠”

성율이 대답을 고르는 사이 희자는 냉장고 문을 열고 열무김치 통을 꺼냈다⁠. 한 가닥을 집어 맛을 보더니 뚜껑을 닫았다⁠. 다시 열고 한 가닥을 더 집었다⁠.

“⁠시었다⁠. 이틀 일찍 꺼낼 것을⁠.⁠”

“⁠엄마⁠, 계약서 얘기하는데 왜 김치 맛을 봐요⁠.⁠”

“⁠입이 써서⁠. 이 종이는 간이 하나도 안 맞어⁠. 짠 데는 너무 짜고⁠, 싱거운 데는 물만 부었어⁠. 출연료는 얼마라고 써 있는디⁠, 내가 안 찍겠다고 허믄 어찌 되는지는 한 줄도 없어⁠.⁠”

성율이 종이를 끌어가 넘겼다⁠. 희자 말대로였다⁠. 성율은 처음 안 사람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희자는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니는 다 읽었구나⁠.⁠”

“⁠읽었어요⁠.⁠”

“⁠다 읽고 나한테 팔라고 혔어⁠?⁠”

“⁠엄마는 무서운 걸 몰라요⁠. 그 남자가 가게에 왔을 때도 깻잎 얘기나 하고⁠. 내가 서울에서 엄마 영상 볼 때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요⁠? 댓글 하나 올라올 때마다 저게 우리 집 대문 앞에 와 있으면 어쩌나⁠.⁠”

“⁠무서운 것을 아니께 찍는 거여⁠.⁠”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니 아버지 냉장고 앞에서 쓰러졌을 때 나는 가게에서 손님을 받고 있었어⁠. 콩나물 한 봉지 달라는 손님이었어⁠. 그 뒤로는 무서운 것을 문 닫고 기다리는 것이 더 무서워⁠.⁠”

성율이 입을 다물었다⁠. 희자는 열무김치 통을 아들 앞에 밀어 놓았다⁠. 성율이 한 가닥을 집어 먹고 얼굴을 찡그렸다⁠.

“⁠시네⁠.⁠”

“⁠시지⁠?⁠”

모자가 같이 열무를 씹었다⁠. 성율이 종이를 모아 반으로 접었다⁠.

“⁠나 이번 주 연차 다 쓸게요⁠. 내려와 있을게요⁠. 엄마가 안 판다면 댓글이라도 내가 볼게요⁠.⁠”

“⁠그라믄 니가 설거지혀⁠.⁠”

“⁠설거지는 왜요⁠?⁠”

“⁠여기 있으믄 식구여⁠. 식구는 설거지혀⁠.⁠”

*

오춘엽은 아침 일곱 시에 안방 문틈으로 며느리를 보았다⁠. 며느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춘엽의 휴대전화를 들고 엄지로 화면을 밀고 있었다⁠. 춘엽의 휴대전화는 밤마다 거실 충전기에 꽂혀 잤다⁠. 며느리는 화면을 밀고⁠, 무언가를 누르고⁠, 또 밀었다⁠.

춘엽은 슬리퍼를 끌지 않고 맨발로 거실까지 갔다⁠.

“⁠아가⁠, 뭣 허냐⁠?⁠”

며느리가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화면에 「⁠춘엽이네 뜨개방⁠」 댓글창이 떠 있었다⁠. 「⁠뜨개 할매 이거 중국에서 떼 온 거 아님⁠?⁠」 밑에 「⁠삭제하시겠습니까⁠?⁠」가 떠 있었다⁠.

“⁠어머니⁠, 그게요⁠.⁠”

“⁠언제부터 혔어⁠?⁠”

“⁠작년 가을부터요⁠. 어머니 구독자 만 명 넘었을 때부터⁠.⁠”

춘엽은 바닥의 휴대전화를 주웠다⁠. 며느리 손가락이 누르다 만 「⁠삭제⁠」 단추를 춘엽이 눌렀다⁠. 댓글이 사라졌다⁠.

“⁠이렇게 허는 것이여⁠?⁠”

“⁠네⁠.⁠”

“⁠나는 내 영상에 욕이 하나도 안 달려서 내가 잘난 줄 알았지⁠.⁠”

며느리가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춘엽도 웃었다⁠. 웃다가 휴대전화 알림을 보았다⁠. 뒤집개TV 커뮤니티였다⁠. 「⁠다음 검증⁠: 군산 뜨개 할매⁠, 수제 맞음⁠? 현장 갑니다⁠」 밑에 춘엽의 뜨개방 사진이 붙어 있었다⁠. 베란다 창으로 앞 동 아파트 이름이 보이는 사진이었다⁠.

춘엽은 사진을 손가락으로 키웠다⁠. 앞 동 벽에 쓰인 큰 숫자까지 다 보였다⁠. 춘엽은 휴대전화를 며느리 손에 쥐여 주지 않고 자기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아가⁠, 오늘부터 이것은 니가 혼자 안 해⁠. 단톡방에 올릴 것이여⁠.⁠”

*

염득갑은 해망동 작업장의 용접 탁자를 치우고 의자 하나를 놓았다⁠. 은결 미디어 피디가 의자 앞에 조명을 세우라고 했다⁠. 피디는 서른쯤 된 남자였고⁠, 운동화가 새것이었다⁠. 피디가 탁자 위에 노란 상자를 올렸다⁠. 「⁠뼈마디 황금환⁠」

“⁠어르신⁠, 대본 보셨죠⁠? 첫 줄부터 가겠습니다⁠.⁠”

득갑은 대본을 눈에서 멀리 떼고 읽었다⁠.

“⁠이걸 먹고 나서⁠… 무릎이 춤을 춥니다⁠.⁠”

“⁠좋아요⁠, 좋은데 조금만 더 아프신 얼굴로요⁠. 무릎이 아팠던 시절을 생각하시면서⁠.⁠”

“⁠무릎은 안 아팠어⁠. 허리가 아프지⁠.⁠”

“⁠허리 말고 무릎으로 가실게요⁠. 다시요⁠.⁠”

득갑은 다시 읽었다⁠. 무릎이 춤을 춥니다⁠. 세 번째에 피디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다음 줄로 넘어갔다⁠.

“⁠자식들한테 손 벌리지 마시고⁠, 하루 두 알로⁠…⁠”

득갑이 대본을 내렸다⁠.

“⁠이 줄은 빼⁠.⁠”

“⁠어르신⁠, 이 줄이 제일 잘 팔려요⁠.⁠”

“⁠나는 우리 애들한테 손 벌렸어⁠. 집사람 수술비가 모자라서 큰애한테 손 벌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채널을 팔았어⁠. 그런 놈이 손 벌리지 말라고 허믄 그것이 거짓말이여⁠.⁠”

피디가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확인했다⁠. 확인하는 동안 작업장 셔터 틈으로 바닷바람이 들어와 조명 갓을 흔들었다⁠.

“⁠어르신⁠, 계약서 제구조 기억나시죠⁠? 회사가 정한 내용으로 찍는 거요⁠. 이 줄 빠지면 이번 광고비가 안 나와요⁠. 사모님 다음 달 재활 치료비 그걸로 잡아 두셨잖아요⁠.⁠”

득갑은 대본을 다시 들었다⁠. 손 벌리지 마시고⁠, 하루 두 알로⁠. 두 번 만에 오케이가 났다⁠. 피디가 장비를 챙기다가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학교에서 찍으신 영상 있죠⁠? 두 달 전 잔치 때요⁠. 희자 선생님 나오시는 거⁠.⁠”

“⁠그것은 희자 씨가 우리 집사람 식혜 맛본 것뿐이여⁠.⁠”

“⁠네⁠, 그거요⁠. 그 영상 어르신 채널에 올라가 있으니까 이제 저희 거예요⁠. 한 장면만 쓸게요⁠.⁠”

득갑이 대답하기 전에 피디는 셔터를 밀고 나갔다⁠. 득갑은 노란 상자를 뜯어 황금환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칡 맛이 났고⁠, 그다음은 설탕 맛이었다⁠.

*

남궁희자는 학습관 3층 교실 칠판 앞에 서 있었다⁠. 강사가 수업 앞의 십 분을 빌려주었다⁠. 희자가 앞에 서자 동기들이 손뼉을 쳤다⁠. 십만 선생이 강의를 한다고 누군가 소리쳤다⁠.

“⁠강의는 무슨⁠. 품앗이 허자는 것이여⁠. 모 심을 때 서로 손 빌려주드끼⁠. 춘엽 씨 영상에 이상한 댓글 달리믄 내가 신고허고⁠, 내 영상에 달리믄 춘엽 씨가 신고허고⁠. 누가 계약서 받으믄 혼자 읽지 말고 여기 가져와서 다 같이 돋보기 쓰고 읽고⁠.⁠”

“⁠돋보기는 각자 가져와⁠?⁠”

“⁠각자 가져와⁠. 머리에 얹고 찾지 말고⁠.⁠”

교실이 웃었다⁠. 춘엽이 일어나 앞 동 숫자가 보이던 사진 이야기를 했다⁠. 웃음이 줄었다⁠. 앞줄의 예순둘 된 낚시 채널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자기 영상에도 집 주소를 묻는 댓글이 달린다고 했다⁠. 뒷줄의 쉰아홉 된 서예 채널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손이 일곱 개 올라갔다⁠. 희자가 하나씩 셌다⁠.

뒷줄의 득갑은 손을 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 득갑이 노란 상자를 들고 교실을 돌며 황금환을 한 봉지씩 나눠 주었다⁠. 회사에서 동기들한테 돌리라고 했다고 했다⁠. 희자는 봉지를 받아 한 알을 혀에 올렸다⁠.

“⁠칡에 설탕이여⁠.⁠”

득갑이 걸음을 멈췄다⁠. 복도로 나가는 희자를 따라 나왔다⁠. 복도 끝 자판기 앞이었다⁠.

“⁠희자 씨⁠, 품앗이 좋지⁠. 근디 나는 빼⁠.⁠”

“⁠왜 빼요⁠?⁠”

“⁠나는 팔았응게⁠. 판 사람이 무슨 품앗이여⁠. 희자 씨는 아들이 대기업 다니니께 그런 소리 허지⁠. 나는 집사람 수술비가 없었어⁠. 그런 사람헌테 품앗이 허자는 것은 밥 굶는 사람헌테 반찬 나눠 먹자는 소리여⁠.⁠”

“⁠득갑 씨⁠, 반찬 나눠 먹자는 것이 아니고 밥상을 같이 지키자는 것이여⁠.⁠”

“⁠밥상이 내 것이 아녀⁠, 인자⁠.⁠”

득갑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교실에서 나오던 동기 둘이 걸음을 멈췄다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득갑이 자판기 옆 벽에 등을 기댔다⁠.

“⁠희자 씨⁠. 다음 주 수요일에 광고 하나 올라와⁠. 황금환⁠. 거기 희자 씨도 나와⁠.⁠”

희자가 손바닥 위의 황금환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어디서 나와⁠?⁠”

“⁠두 달 전 학교 잔치⁠. 우리 집사람 식혜 맛보고 희자 씨가 달다 달어 혔잖여⁠. 그것이 내 채널에 올라가 있었어⁠. 내 채널이 그 사람들 것이니께⁠, 희자 씨 그 한마디도 인자 그 사람들 것이여⁠.⁠”

자판기가 혼자 웅 하고 돌았다⁠. 희자는 황금환 봉지를 손에 쥔 채 득갑을 보았다⁠. 득갑은 희자를 보지 않고 자판기 불빛에 비친 자기 손등의 불똥 자국을 보고 있었다⁠.

*

차예늘은 미용실 거울 앞 회전의자에 앉아 엄마가 바닥의 머리카락을 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문 닫은 미용실 안에 파마약 냄새가 남아 있었다⁠. 엄마는 빗자루를 세 번 밀고 한 번 쉬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을 때 엄마가 쉬는 박자였다⁠.

“⁠서울서 연락 왔다매⁠. 희자 언니 채널 사겠다는 데서⁠.⁠”

“⁠누가 그래요⁠?⁠”

“⁠동네가 다 알어⁠. 은결인지 은단인지⁠. 니도 거기 간다매⁠.⁠”

“⁠간다고 한 적 없어요⁠. 한 주만 나와 보라는 거예요⁠. 수습으로⁠.⁠”

엄마가 빗자루를 세웠다⁠.

“⁠희자 언니 반찬 석 달 얻어먹고⁠, 그 집 채널 사겠다는 데로 일하러 가⁠?⁠”

“⁠엄마⁠, 나 서울 회사에서 석 달 치 못 받았어요⁠. 여기서 반찬 받고 편집하는 거⁠, 그거 일 아니에요⁠. 엄마 미용실 소파에서 자는 것도 일 아니고⁠.⁠”

엄마가 대꾸하지 않고 쓰레받기에 머리카락을 담았다⁠. 흰 머리카락과 검은 머리카락이 한데 엉켜 있었다⁠. 동네 할머니들의 머리였다⁠. 엄마는 쓰레받기를 들고 잠깐 서 있다가 휴지통에 털었다⁠.

“⁠가믄 가는 대로 혀⁠. 대신 희자 언니헌테 니 입으로 말혀⁠. 남의 입으로 듣게 허지 말고⁠.⁠”

예늘은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았다⁠. 엄마가 손님들에게 하던 말이었다⁠. 머리 망친 것은 남한테 듣기 전에 내 입으로 말한다⁠. 예늘은 휴대전화를 열어 류옥채에게 답장을 보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한 주 나가겠습니다⁠.⁠」 보낸 뒤에 희자 선생님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 세 번 썼다가 세 번 지웠다⁠. 엄마가 미용실 불을 하나씩 껐고⁠, 마지막 불이 꺼질 때까지 예늘은 문자를 보내지 못했다⁠.

*

학습관에서 돌아온 밤⁠, 성율은 엄마 채널의 관리 화면을 처음으로 열었다⁠. 예늘이 알려 준 대로 「⁠차단 단어⁠」 칸을 찾았다⁠. 거기에 넣은 단어가 들어간 댓글은 아예 안 보이게 된다고 했다⁠. 성율은 자판을 두드렸다⁠. 틀니⁠. 주소⁠. 몇 동⁠. 혼자 사세요⁠. 마지막으로 할매⁠.

저장 단추를 누르자 화면 위에 초록 글씨가 떴다⁠. 「⁠차단 단어 다섯 개가 저장되었습니다⁠.⁠」 성율은 노트북을 덮고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통에 남은 그릇을 씻었다⁠. 냉장고 위 시계가 열두 시를 넘겼다⁠. 엄마 방 문틈으로 휴대전화 불빛이 새어 나왔다⁠. 엄마는 아직 자지 않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성율은 방문을 두드리지 않고 문틈에 귀를 댔다⁠. 휴대전화에서 굵은 사투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이 경첩은 기름을 먹여야 혀⁠. 문짝이 우는 것은 배고프다는 소리여⁠.⁠」 두 달 전 득갑 아저씨의 철물 수리 영상이었다⁠. 엄마는 같은 대목을 몇 번이고 되돌려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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