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48자)

빚 갚을 돈

구독자 십만 엄마 유튜버 · 윤은류

목요일 오전 아홉 시 십 분⁠, 월명동 은행 지점의 번호표 기계 앞에서 남궁희자는 단추를 두 번 눌렀다⁠. 번호표가 두 장 나왔다⁠. 한 장은 예금⁠, 한 장은 대출이었다⁠. 희자는 두 장을 다 들고 대기석에 앉았다⁠. 남궁성율이 옆에 앉았다⁠.

“⁠엄마⁠, 왜 두 장 뽑아요⁠?⁠”

“⁠어느 줄이 빠른지 몰라서⁠.⁠”

“⁠그건 반칙이에요⁠.⁠”

“⁠은행이 빠르믄 반칙을 안 허지⁠.⁠”

예금 창구 번호가 먼저 불렸다⁠. 희자는 대출 번호표를 아들 손에 쥐여 주고 일어났다⁠. 성율은 번호표를 손바닥에 쥔 채 엄마를 따라 일어났다⁠.

“⁠엄마⁠, 진짜 해요⁠?⁠”

“⁠앉어 있어⁠.⁠”

“⁠빚 갚을 돈이잖아요⁠. 은행에서 원금 줄여 와야 연장해 준다면서요⁠. 다음 달 말이에요⁠. 그거 못 하면 가게 보증금까지 넘어간다면서요⁠.⁠”

“⁠가게는 내가 지켜⁠.⁠”

“⁠그 돈으로 지키려던 거잖아요⁠!⁠”

성율의 목소리가 대기석 천장까지 올라갔다⁠. 옆자리의 할아버지가 신문을 내리고 둘을 보았다⁠. 희자는 아들을 앉히지 않고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성율아⁠, 빚은 내 것이여⁠. 니 아버지랑 나랑 같이 진 것이고⁠, 내가 갚을 것이여⁠. 득갑 씨 얼굴은 내 동기 것이여⁠. 빚은 늦게 갚으믄 이자가 붙어⁠. 얼굴은 한 번 팔리믄 못 찾어⁠. 이자가 붙는 것이 아니고 아예 남의 것이 돼⁠. 너도 봤잖여⁠. 내 얼굴이 황금환 옆에 붙는 거⁠.⁠”

성율이 대꾸하지 못했다⁠. 창구 직원이 희자의 번호를 다시 불렀다⁠. 희자가 창구로 갔다⁠. 직원은 서른쯤 된 여자였다⁠. 희자가 내민 통장을 받다가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어⁠, 선생님⁠. 월명동 선생님 맞으시죠⁠? 저 선생님 장조림 보고 메추리알 처음 깠어요⁠. 껍질 안 깨지게 굴리는 거요⁠.⁠”

“⁠굴렸어⁠?⁠”

“⁠굴렸어요⁠. 진짜 잘 까져요⁠.⁠”

희자가 웃었다⁠. 직원이 화면을 보고 웃음을 거두었다⁠.

“⁠이천만 원⁠, 수표로요⁠?⁠”

“⁠응⁠. 한 장으로⁠.⁠”

직원이 수표를 세다가 손을 멈췄다⁠. 목소리를 낮췄다⁠.

“⁠선생님⁠, 이거 대출 갚으시려던 돈 아니에요⁠? 이 통장 만드실 때 대출 원금 넣으실 거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그때 상담했어요⁠.⁠”

“⁠그랬지⁠.⁠”

“⁠그런데⁠…⁠”

“⁠다음 달에 또 넣을게⁠. 우리 학생들이 많응게⁠.⁠”

직원이 수표에 도장을 찍었다⁠. 희자가 수표를 지갑에 넣고 돌아서자 성율이 대출 번호표를 든 채 서 있었다⁠. 대출 창구에서 성율의 번호가 불렸다⁠. 성율은 번호표를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

염득갑은 아침부터 해망동 작업장을 쓸었다⁠. 쇳가루를 쓸고⁠, 용접 탁자를 닦고⁠, 병원 영수증 묶음을 서랍에 넣었다⁠. 그라인더 위에 덮개를 씌웠다⁠. 서른 해 동안 손님 올 때 한 번도 치운 적 없는 작업장이었다⁠. 희자가 전화로 열한 시에 서울 사람이 온다고 했다⁠.

“⁠희자 씨⁠, 그 돈 진짜 낼 거여⁠?⁠”

“⁠득갑 씨는 가만있으라 혔잖여⁠.⁠”

“⁠내 위약금을 남이 내는디 내가 어찌 가만있어⁠?⁠”

“⁠그라믄 의자나 하나 더 갖다 놔⁠. 서울 양반 앉을 거⁠.⁠”

득갑은 고물 의자 중에 다리가 안 흔들리는 것을 골라 걸레로 닦았다⁠. 닦다가 의자 다리에 박힌 녹을 보았다⁠. 사포를 꺼내 녹을 갈았다⁠. 갈다 보니 의자가 새것처럼 반들반들해졌다⁠. 득갑은 반들반들해진 의자를 탁자 앞에 놓고 한 걸음 물러나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 의자에 앉을 사람에게 이천만 원이 건네질 참이었다⁠.

*

류옥채는 열한 시 정각에 해망동 작업장 셔터를 두드렸다⁠. 법무팀 직원 하나가 뒤에 서 있었다⁠. 셔터가 올라가자 녹을 갈아 낸 의자 하나가 가장 먼저 보였다⁠. 탁자 건너편에 남궁희자와 염득갑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희자는 위생모 대신 연두색 털실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머님⁠, 오셨어요⁠.⁠”

“⁠앉으쇼⁠. 득갑 씨가 의자를 갈았어요⁠. 새것이여⁠.⁠”

류옥채가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법무팀 직원이 해지 합의서 두 장을 탁자 위에 놓았다⁠. 희자가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합의서 옆에 놓았다⁠. 수표 한 장이었다⁠.

류옥채는 수표를 바로 집지 않았다⁠.

“⁠어머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말씀드릴게요⁠. 다음 달 말 대출 만기시죠⁠. 이 돈 없으시면 원금을 못 줄이세요⁠. 연장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어머님이 한 해만 저희와 계약해 주시면 이 위약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득갑 선생님도 풀어 드리고⁠, 어머님 대출도 저희가 정리하고요⁠. 다 같이 사는 길이에요⁠.⁠”

득갑이 희자를 보았다⁠. 희자는 류옥채를 보았다⁠.

“⁠이사님은 왜 자꾸 나를 살려 줄라고 혀요⁠?⁠”

“⁠어머님이 다치시는 게 싫어서요⁠.⁠”

“⁠나도 그 말은 믿어요⁠. 근디 이사님이 살려 주믄⁠, 나는 이사님 것이 돼요⁠. 득갑 씨처럼⁠. 득갑 씨는 살았는디⁠, 무릎이 춤을 춰요⁠.⁠”

득갑이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는 어깨였다⁠. 류옥채의 입꼬리도 아주 조금 움직였다⁠.

“⁠수표 받으쇼⁠. 우리 학생들이 반찬 보고 눌러 준 돈이여⁠. 깨끗혀요⁠.⁠”

류옥채가 수표를 집었다⁠. 앞뒤를 보고 법무팀 직원에게 건넸다⁠. 직원이 합의서를 득갑 앞에 밀었다⁠. 득갑이 볼펜을 쥐었다⁠. 서명란 위에서 볼펜 끝이 한 번 떨렸다⁠. 득갑은 볼펜을 고쳐 쥐고 서명했다⁠. 용접봉을 쥐던 손이라 글씨가 굵고 반듯했다⁠.

류옥채가 일어났다⁠. 반들반들한 의자를 탁자 밑으로 밀어 넣었다⁠.

“⁠어머님⁠, 저희 어머니도 이렇게 하셨을 거예요⁠. 남의 일에 먼저 돈을 내는 분이셨어요⁠. 그래서 혼자 남으셨고요⁠.⁠”

“⁠이사님 어머니는 혼자 남은 것이 아니고 이사님을 남겼지⁠.⁠”

류옥채가 대답하지 않고 셔터 쪽으로 걸어갔다⁠. 셔터 밑에서 몸을 돌렸다⁠. 목소리가 다시 고르게 돌아와 있었다⁠.

“⁠득갑 선생님 일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어머님 일은 지금부터 법대로 하겠습니다⁠. 편집자님 소송도 그대로 갑니다⁠.⁠”

셔터가 내려왔다⁠. 바다에서 갈매기 소리가 셔터 틈으로 들어왔다⁠.

*

염득갑은 목요일 오후 남궁반찬 유리문 앞에서 새 채널의 첫 영상을 찍었다⁠. 채널 이름은 아내가 지었다⁠. 「⁠득갑이 다시 고칩니다⁠」 구독자는 영이었다⁠. 찍는 사람은 성율이었다⁠.

“⁠이 가게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끽 소리가 나⁠. 경첩이 배고프다는 소리여⁠. 기름을 먹여야 혀⁠.⁠”

득갑은 경첩에 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끽 소리가 줄었다⁠. 한 방울 더 떨어뜨리자 소리가 없어졌다⁠. 문에 달린 종만 울렸다⁠.

“⁠됐다⁠. 인자 종소리만 나네⁠.⁠”

성율이 녹화를 끄고 엄지를 들었다⁠. 희자가 진열대 뒤에서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득갑이 다시 고칩니다⁠」 구독 단추가 회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구독자 일 명⁠. 첫 구독자였다⁠.

저녁이 되자 구독자가 서른이 되었다⁠. 춘엽이 단톡방에 주소를 올리고 「⁠안 누르는 사람 품앗이에서 뺌⁠」이라고 썼다⁠. 낚시 할아버지는 두 번 눌러서 구독을 취소했다가 다시 눌렀다⁠. 전주 모임에서도 사람들이 눌렀다⁠. 득갑은 휴대전화를 들고 숫자가 바뀔 때마다 아내에게 전화했다⁠. 일곱 번째 전화에서 아내가 그만 좀 하라고 했다고 득갑이 자랑했다⁠.

*

밤 열 시⁠, 남궁희자는 부엌에서 장조림을 졸였다⁠. 식탁 위에 빈 통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천삼백에서 이천이 빠진 숫자였다⁠. 냉장고 문에는 은행에서 온 편지가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대출 만기 안내 — 2027년 6월 30일⁠」

희자는 간장을 붓고 국자로 저었다⁠. 맛을 보았다⁠. 짰다⁠. 간장을 한 번 더 부었다는 것을 맛을 보고 알았다⁠. 서른 해 동안 간장을 두 번 부은 날은 남편 장례 다음 날뿐이었다⁠.

성율이 설거지를 하다 엄마 국자에서 한 숟가락을 떠 맛을 보았다⁠.

“⁠짜요⁠.⁠”

“⁠짜네⁠.⁠”

희자가 처음으로 아들 말에 맞장구를 쳤다⁠. 성율이 고무장갑을 벗었다⁠. 냄비에 물을 반 컵 붓고 불을 줄였다⁠. 희자는 말리지 않았다⁠.

희자는 냉장고 문의 편지를 떼어 식탁 위 빈 통장 옆에 놓았다⁠. 돋보기를 쓰고 다시 읽었다⁠. 만기일까지 원금의 일부를 상환하시거나 소득을 증빙하시면 연장 심사가 가능합니다⁠. 희자는 소득이라는 글자에 손가락을 댔다⁠. 반찬 가게 장사는 소득이었다⁠. 휴대전화 앞에서 떠드는 일이 소득이 되는지는 은행에 물어본 적이 없었다⁠.

“⁠성율아⁠, 내가 찍는 것도 소득이여⁠?⁠”

“⁠세금 내면 소득이죠⁠.⁠”

“⁠세금은 내⁠.⁠”

“⁠그럼 소득이에요⁠.⁠”

희자는 편지를 다시 냉장고 문에 붙였다⁠. 이번에는 자석 두 개로 붙였다⁠.

“⁠엄마⁠, 이제 어떡해요⁠?⁠”

“⁠물 부었응게 다시 졸여야지⁠.⁠”

*

강현곤은 밤 열한 시⁠, 전주 원룸에서 협력 계약 해지 통보를 세 번째로 읽고 있었다⁠. 법무팀 이름으로 온 메일이었다⁠. 「⁠협력 채널 운영 지침 위반으로 계약을 해지합니다⁠. 지급 예정 협력비는 지급하지 않습니다⁠.⁠」 위반한 지침이 무엇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현곤은 알았다⁠. 화내는 장면 하나를 못 건졌다⁠.

메일을 닫자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같은 협력 채널 단톡방이었다⁠. 해지 통보를 받고도 아직 아무도 현곤을 내보내지 않은 방이었다⁠. 「⁠팩트방망이⁠」가 영상 주소를 올리고 웃는 이모티콘을 붙였다⁠. 「⁠뒤집개 형이 못 한 거 내가 함⁠. 집 앞 직행⁠」

현곤은 영상을 눌렀다⁠. 파란 대문이 화면 가득 찍혀 있었다⁠. 문패의 남궁이라는 글자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현곤은 두 해 동안 가게까지만 갔다⁠. 은결이 집 앞까지는 가지 말라고 했고⁠, 현곤도 대문 앞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다⁠. 열여덟 살 때 대문을 두드리던 노인정 할머니들의 주먹 소리를 현곤은 아직 기억했다⁠. 엄마는 주먹 소리를 듣고 이불을 머리까지 덮었다⁠.

현곤은 단톡방에 「⁠이건 아니지⁠」라고 쳤다가 지웠다⁠. 냉장고 위의 반찬 통이 눈에 들어왔다⁠. 두 번째 통이었다⁠. 아직 반쯤 남아 있었다⁠. 현곤은 휴대전화를 들고 예늘의 번호를 찾았다⁠. 수습 주간에 편집실 공용 단톡방에 올라와 있던 번호였다⁠.

*

밤 열한 시 사십 분⁠, 남궁성율은 대문 밖에서 나는 웃음소리에 방문을 열었다⁠. 젊은 남자 목소리 둘이었다⁠. 휴대전화 화면 불빛이 대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성율은 휴대전화를 켜서 알림을 보았다⁠. 엄마 채널 댓글창에 같은 주소가 서른 개 넘게 붙어 있었다⁠. 「⁠팩트방망이⁠」라는 채널의 영상이었다⁠. 제목은 「⁠십팔만 반찬 할매 집 앞 직접 가 봄⁠」 썸네일에 우리 집 파란 대문이 찍혀 있었다⁠. 대문 옆 문패의 남궁이라는 글자가 또렷했다⁠. 은결 서버의 「⁠협력채널⁠」 폴더에 있던 일곱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예늘이 찍은 사진에서 본 이름이었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세 번⁠.

“⁠할머니⁠, 계세요⁠? 지금 라이브 중인데 한마디만 해 주세요⁠!⁠”

엄마 방 문이 열렸다⁠. 엄마가 잠옷 위에 다홍색 앞치마를 걸치고 나왔다⁠. 손에 국자가 들려 있었다⁠. 성율은 엄마 앞을 막았다⁠. 한 달 전 가게 유리문 앞에서는 막지 못했다⁠.

“⁠엄마⁠, 오늘은 내가 나가요⁠.⁠”

“⁠니가 나가믄 니 얼굴이 찍혀⁠.⁠”

“⁠찍으라고 해요⁠. 엄마 얼굴 대신 내 얼굴 찍으라고 해요⁠.⁠”

성율은 엄마 손에서 국자를 빼앗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가로로 들고 녹화를 눌렀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앞까지 걸어갔다⁠. 대문 너머에서 화면 불빛 두 개가 흔들렸다⁠. 성율은 빗장을 풀고 대문을 열었다⁠. 셀카봉 두 개가 동시에 성율의 얼굴을 향했다⁠. 성율도 휴대전화를 두 남자의 얼굴로 들었다⁠.

“⁠찍으세요⁠. 나도 찍을게요⁠.⁠”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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