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61자)

위약금

구독자 십만 엄마 유튜버 · 윤은류

염득갑은 군산의료원 일 층 로비의 자판기 앞에서 은결 피디를 만났다⁠. 아침 아홉 시였다⁠. 피디는 지난번의 새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손에 노란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득갑이 뽑은 밀크커피를 받지 않았다⁠.

“⁠어르신⁠, 어제 반찬 가게 가셨죠⁠. 라이브 다시 보기 끝에 어르신 뒷모습 나왔어요⁠.⁠”

“⁠뒷모습도 계약서에 들어 있어⁠?⁠”

피디가 웃었다⁠. 웃으면서 봉투를 열었다⁠.

“⁠제십삼조요⁠. 회사와 협력사를 비방하지 않는다⁠. 어르신이 라이브에서 저희 공지방 사진을 보여 주시면 그게 비방이에요⁠. 그 순간 위약금 이천 청구합니다⁠. 사모님 재활 치료비로 잡아 두신 다음 달 광고도 없던 일이 되고요⁠.⁠”

“⁠그 공지방 글은 너그 회사가 쓴 것이여⁠. 내가 쓴 것이 아니고⁠.⁠”

“⁠그래서 더 안 되는 거예요⁠. 저희 회사 글이니까요⁠.⁠”

피디는 봉투를 득갑 손에 쥐여 주었다⁠. 청구서 견본이었다⁠. 이천만 원이라는 숫자가 맨 아래 굵게 찍혀 있었다⁠. 득갑은 봉투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똥 자국이 박힌 손등 위로 숫자가 겹쳐 보였다⁠.

“⁠어르신⁠, 회사도 어르신 좋아해요⁠. 대본 한 줄 빼 달라고 하신 것도 위에서 다 이해했어요⁠. 조용히만 계시면 돼요⁠. 조용히만⁠.⁠”

로비 저편에서 휠체어 바퀴 소리가 났다⁠. 득갑의 아내였다⁠. 재활 치료사가 밀어 주는 휠체어였고⁠, 아내는 치료사에게 잠깐 세워 달라고 손짓했다⁠. 아내는 걷는 연습을 마치고 올라가는 길이었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아내가 피디를 보고⁠, 남편 손의 봉투를 보았다⁠.

“⁠당신⁠, 그것이 뭐여⁠?⁠”

“⁠아무것도 아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왜 그렇게 쥐고 있어⁠?⁠”

피디가 아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 회복 축하드린다고 했다⁠. 아내는 인사를 받지 않고 남편을 보았다⁠.

“⁠당신 얼굴로 거짓말허지 말어⁠. 나 걷는 연습은 내 다리로 혀⁠. 광고 돈으로 허는 것이 아녀⁠.⁠”

치료사가 휠체어를 다시 밀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까지 아내는 남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피디는 어느새 출입문으로 나가고 없었다⁠. 득갑은 자판기 앞에 혼자 남아 식은 밀크커피를 한 번에 마셨다⁠. 설탕 맛이 이번에는 달지 않았다⁠.

*

남궁희자는 학습관 3층 교실 칠판 앞에서 강사와 마주 서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였다⁠. 동기들은 가지 않고 자리에 남아 있었다⁠. 춘엽은 맨 앞자리에서 털실 뭉치를 굴리고 있었고⁠, 득갑은 아침에 받은 노란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강사님⁠. 은결이 우리 학교랑 무슨 사이여요⁠?⁠”

강사는 마흔 중반의 남자였다⁠. 수업 때마다 겁먹지 마세요⁠, 누르면 켜집니다⁠, 하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겁먹은 얼굴이었다⁠.

“⁠작년 가을에 시에서 예산이 깎였어요⁠. 시니어 유튜버 학교가 없어질 뻔했어요⁠. 그때 은결에서 후원을 하겠다고 왔어요⁠. 수업마다 도시락 나오죠⁠. 삼각대도 다 나눠 드렸고요⁠. 그게 은결 돈이에요⁠.⁠”

“⁠그라고⁠?⁠”

“⁠그 대신 수료생 명단을 달라고 했어요⁠. 채널 이름하고 연락처요⁠. 좋은 분들께 기회를 드리겠다고요⁠.⁠”

교실이 웅성거렸다⁠. 낚시 할아버지가 책상을 쳤다⁠. 서예 할머니가 붓펜을 내려놓았다⁠. 춘엽이 털실 뭉치를 굴리다 멈췄다⁠.

“⁠3기에서 판 사람이 몇이여⁠?⁠”

“⁠득갑 선생님 말고 두 분 더 계세요⁠. 2기에서는 다섯 분 계시고요⁠.⁠”

“⁠그 사람들이 다 광고를 찍어⁠?⁠”

“⁠네⁠.⁠”

희자는 강사를 오래 보았다⁠. 강사의 손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

“⁠강사님은 알고도 줬소⁠?⁠”

“⁠알았어요⁠. 처음에는 몰랐고⁠, 두 번째 명단 줄 때는 알았어요⁠. 명단 안 주면 다음 학기 후원이 끊긴다고 했어요⁠. 후원 끊기면 학교가 문을 닫아요⁠. 어르신들이 오실 데가 없어져요⁠.⁠”

강사의 말이 끝으로 갈수록 빨라졌다⁠. 희자는 강사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학교가 없었으면 희자는 오후 세 시를 여전히 졸면서 보냈을 터였다⁠. 희자는 강사 책상 위의 도시락 빈 통을 집어 들었다⁠. 은결 로고가 뚜껑에 작게 찍혀 있었다⁠.

“⁠도시락은 맛있었어요⁠. 반찬이 좀 짰지마는⁠.⁠”

“⁠어머님⁠.⁠”

“⁠다음 학기 도시락은 우리가 싸 올게요⁠. 동기들이 돌아가믄서⁠. 삼각대는 돌려줘도 되고⁠.⁠”

춘엽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김밥 맡을게⁠!⁠”

낚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나는 회 떠 올게⁠.⁠」 서예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나는 젓가락 싸는 종이에 글씨 써 줄게⁠.⁠」 강사가 웃다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득갑만 손을 들지 않았다⁠. 노란 봉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남궁성율은 전주 한옥마을 뒷골목의 콩나물국밥집에서 쉰 살쯤 된 여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전주 시니어 유튜버 모임 단톡방에서 찾은 사람이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한지로 부채를 만드는 채널을 했고⁠, 석 달 전 은결에 채널을 팔았다⁠. 지금은 부채 대신 혈압약 광고를 찍는다고 했다⁠.

“⁠아버지 심장 수술이 급했어요⁠. 수술 날짜 잡아 놓고 돈이 모자랐어요⁠. 은결이 계약서 쓰기도 전에 수술비부터 넣어 줬어요⁠. 병원에 직접요⁠.⁠”

여자가 국밥에 새우젓을 넣었다⁠. 한 숟가락을 넣었다⁠. 성율은 엄마가 냉장고에 써 붙인 글씨가 떠올랐다⁠. 반 숟가락⁠.

“⁠아저씨 어머님 라이브 다 봤어요⁠. 멋있으세요⁠. 근데 아저씨⁠, 아저씨는 대기업 다니시잖아요⁠. 저는 학원 강사고요⁠, 남편은 택배 하고요⁠. 저희는 은결 아니었으면 아버지 수술 못 했어요⁠. 은결이 나쁜 데라고 하시려면 우리 아버지 심장은 누가 고쳐 줘요⁠?⁠”

성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국밥이 식어 갔다⁠. 콩나물 냄새가 김을 타고 올라오다가 멈췄다⁠.

“⁠아버지는 광고 찍는 게 싫대요⁠. 혈압약 먹는 척하는 게 싫대요⁠. 그래도 살았잖아요⁠. 사는 게 먼저잖아요⁠.⁠”

“⁠네⁠.⁠”

“⁠아저씨 어머님한테 전해 주세요⁠. 품앗이 좋은데⁠, 품앗이로는 수술비가 안 나온다고⁠.⁠”

성율은 국밥값을 내려고 일어났다⁠. 여자가 먼저 계산대로 갔다⁠. 손님한테 얻어먹으면 우리 아버지한테 혼난다고 했다⁠. 부채 만드는 사람은 바람을 빌려주는 사람이라서 남한테 빚지면 안 된다고⁠. 성율은 여자의 말을 그대로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었다⁠. 엄마한테 그대로 옮겨야 할 말이었다⁠.

*

차예늘은 미용실 유리문 안쪽 우편함에서 두꺼운 봉투를 꺼냈다⁠. 내용증명이었다⁠. 보낸 사람은 은결 미디어였다⁠. 예늘은 봉투를 들고 파마 손님 둘 사이를 지나 안쪽 소파에 앉았다⁠. 엄마가 손님 머리에 롤을 말다가 손을 멈췄다⁠.

봉투 안의 종이는 다섯 장이었다⁠. 영업 비밀 침해⁠, 명예 훼손⁠, 손해 배상 오천만 원⁠. 맨 아래에 「⁠협의에 응할 경우 청구를 다시 검토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협의의 조건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얼마래⁠?⁠”

“⁠오천이요⁠.⁠”

손님 하나가 거울 속에서 눈을 크게 떴다⁠. 엄마는 롤을 마저 말았다⁠.

“⁠오천이믄 파마 몇 개여⁠?⁠”

“⁠엄마⁠, 그런 거 묻지 마요⁠. 희자 선생님이랑 똑같아⁠.⁠”

“⁠동네 여자들은 다 똑같어⁠. 돈이 크믄 머리로 바꿔 세어 봐야 무서운지 안 무서운지 알어⁠.⁠”

예늘은 웃음이 났다⁠. 웃음이 나서 다행이었다⁠. 엄마가 롤을 다 말고 손님에게 삼십 분 기다리시라고 한 뒤⁠, 예늘 옆에 앉아 봉투를 돋보기로 읽었다⁠. 엄마도 돋보기를 머리에 얹고 다녔다⁠. 다 읽은 엄마가 돋보기를 벗고 말했다⁠. “⁠협의에 응허믄 다시 본다는 것은⁠, 니가 입 다물믄 봐준다는 소리여⁠. 희자 언니헌테 가져가⁠. 혼자 읽지 말고⁠.⁠” 예늘은 봉투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이번에는 넣으면서 무엇을 받았는지 알았다⁠.

*

남궁희자는 밤 열 시에 안방 장롱 서랍에서 통장 하나를 꺼냈다⁠. 은행 이름이 찍힌 파란 통장이었다⁠. 석 달 동안 광고 수익이 들어올 때마다 이자를 내고 남은 것을 이 통장으로 옮겼다⁠. 빚을 갚을 통장이었다⁠. 다음 달 말 대출 만기 때 원금 일부를 갚고 나머지는 연장할 생각이었다⁠. 은행 직원이 원금을 조금이라도 줄여 와야 연장이 된다고 했다⁠.

통장에 찍힌 숫자는 이천삼백만 원이었다⁠. 희자는 돋보기를 쓰고 숫자를 다시 보았다⁠. 영이 일곱 개였다⁠. 계산기에 넣으면 또 화면이 꽉 찰 숫자였다⁠.

부엌에서 성율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전주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릇 부딪는 소리 사이로 아들이 국밥집 여자의 말을 옮겼다⁠. 품앗이로는 수술비가 안 나온다고⁠. 부채 만드는 사람은 바람을 빌려주는 사람이라고⁠.

“⁠그 말이 맞어⁠.⁠”

“⁠엄마⁠, 그럼 우리가 틀린 거예요⁠?⁠”

“⁠아니⁠. 그 집도 맞고 우리도 맞어⁠. 맞는 사람끼리 싸우는 것이 제일 아퍼⁠.⁠”

희자는 통장을 덮지 않고 식탁 위에 펼쳐 놓았다⁠. 성율이 고무장갑을 낀 채 부엌에서 나와 통장을 보았다⁠. 숫자를 보고⁠, 엄마를 보았다⁠.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들은 알았다⁠. 이천삼백과 이천⁠.

“⁠엄마⁠, 안 돼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혔어⁠.⁠”

“⁠안 해도 알아요⁠. 그건 빚 갚을 돈이에요⁠.⁠”

“⁠엄마⁠, 은행에서 원금 줄여 와야 연장해 준다면서요⁠. 이거 없으면 만기 때 어떻게 해요⁠? 가게 보증금까지 들어간다면서요⁠.⁠”

“⁠그때 가서 생각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늦어요⁠. 엄마 맨날 그래요⁠. 아버지 병원비도 그때 가서 생각하다가 사천이백 된 거잖아요⁠.⁠”

말이 나가고 나서 성율은 입을 다물었다⁠. 고무장갑 끝에서 물이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희자는 아들을 보지 않고 통장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맞어⁠. 그때 가서 생각혔어⁠. 니 아버지 쓰러지고 나서 생각헐 틈이 없었응게⁠. 이번에는 틈이 있어⁠. 그라니께 지금 생각허는 것이여⁠.⁠”

“⁠생각해서 그걸 득갑 아저씨 주겠다고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혔다니께⁠.⁠”

희자는 통장을 덮었다⁠. 덮은 통장 위에 돋보기를 올려놓았다⁠.

희자는 대답하지 않고 소금 통을 열어 손끝에 소금 한 꼬집을 집었다⁠. 혀에 댔다⁠. 짰다⁠. 소금은 늘 짰다⁠. 그래서 소금이었다⁠.

*

염득갑은 밤 열한 시⁠, 병실 보호자 의자에서 류옥채의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득갑은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복도로 나갔다⁠.

“⁠선생님⁠, 늦게 죄송합니다⁠. 류옥채입니다⁠.⁠”

“⁠압니다⁠.⁠”

“⁠제안 하나 드릴게요⁠. 내일 서울로 올라오세요⁠. 차는 저희가 보내 드립니다⁠. 해명 영상 하나만 찍어 주시면 돼요⁠. 반찬 가게 어르신이 선생님 사정을 이용하셨다는 내용으로요⁠. 선생님은 그날 그냥 초대받아 가신 거고요⁠. 그러면 위약금은 없던 일로 하고⁠, 사모님 재활비는 저희가 끝까지 대겠습니다⁠.⁠”

복도 끝 창문 밖으로 해망동 쪽 바다가 검게 누워 있었다⁠. 조선소 크레인이 서 있던 자리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서른 해 동안 득갑이 불똥을 받던 자리였다⁠.

“⁠이사님⁠.⁠”

“⁠네⁠, 선생님⁠.⁠”

“⁠희자 씨가 나헌테 뭐라 혔는지 알어요⁠? 식혜 맛있다고 혔어요⁠. 우리 집사람 식혜⁠. 그것밖에 안 혔어요⁠.⁠”

“⁠선생님⁠,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차가 갑니다⁠.⁠”

“⁠나 안 가⁠.⁠”

득갑은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 병실로 돌아갔다⁠. 아내가 눈을 뜨고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아내는 말하지 않았다⁠. 아내가 손을 내밀었다⁠. 득갑은 불똥 자국 박힌 손으로 아내 손을 잡았다⁠. 아내의 손바닥이 걷는 연습으로 손잡이를 쥔 자리마다 빨갛게 부어 있었다⁠. 득갑은 엄지로 부은 자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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