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10자)

위패를 뒤집은 장로

무공 일타 강사 · 여무겸

칠월 열이레 아침⁠, 짐배가 학관 거리 옆 운하 나루에 닿자마자 대석이 뛰어왔다⁠. 사흘 사이에 대석의 눈 밑이 거뭇해져 있었다⁠.

“⁠쌤⁠, 큰일 났어요⁠.⁠”

“⁠오늘은 몇 개야⁠?⁠”

“⁠세 개요⁠.⁠” 대석이 손가락을 접었다⁠. “⁠하나⁠, 손끝 뜨거운 애가 열하나에서 열넷이 됐어요⁠. 둘⁠, 장로님이 밤마다 약방에 와서 열넷한테 다 침을 놔요⁠. 셋⁠, 갈필수 쌤이 우리 학관 건물 살 사람 있냐고 거리에 묻고 다녀요⁠. 쌤이 곧 내놓을 거라고요⁠.⁠”

“⁠내놓을 생각 없는데⁠.⁠”

“⁠조합장님은 쌤 생각보다 빨라요⁠.⁠”

나는 등에 진 보따리를 고쳐 멨다⁠. 기름 먹인 천으로 싼 상자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상자를 들고 나루를 떠날 때 노를 들지 않았다⁠. 선창 끝에서 오리알 소쿠리를 내 품에 밀어 넣었을 뿐이다⁠. 오리알은 오는 길에 아람과 뱃사공이 다 먹었다⁠.

“⁠대석⁠, 화산 객사가 어디지⁠?⁠”

“⁠성안 청하방이요⁠. 왜요⁠?⁠”

“⁠거래하러⁠.⁠”

*

화산 객사는 청하방 골목 안쪽⁠, 담장이 높은 집이었다⁠. 문간에 매화 수를 놓은 회색 무복 둘이 서 있었다⁠. 무림문 앞 공터와 단교에서 내 수강생들의 가슴을 보던 두 사람이었다⁠. 둘은 나를 보자 서로 얼굴을 보았고⁠, 아람을 보자 허리를 굽혔다⁠.

마당 한가운데 무량이 있었다⁠. 웃옷을 벗고 칼 대신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예순여덟 살 몸에 군살이 없었다⁠. 빗자루가 지나간 자리마다 흙이 결대로 누웠다⁠. 쓰는 박자가 하나에 두 번⁠, 둘에 한 번이었다⁠. 나는 마당 문간에서 빗자루 박자를 보다가 웃음이 났다⁠. 화산 장로도 집에서는 세 걸음 두 박자로 마당을 쓸었다⁠.

“⁠웃을 일이 있소⁠?⁠”

“⁠마당을 시험 박자로 쓰셔서요⁠.⁠”

무량이 빗자루를 담장에 세웠다⁠. 장포를 걸치고⁠, 팔짱을 꼈다⁠. 아람이 내 뒤에서 한 발 나왔다가 할아버지 눈을 보고 도로 들어갔다⁠.

나는 보따리를 풀어 마당 돌 위에 상자를 놓았다⁠. 뚜껑을 열고 첫 장을 폈다⁠. 무량은 다가오지 않았다⁠. 다가올 필요가 없었다⁠. 무량은 첫 장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다⁠.

“⁠장로님⁠, 거래하러 왔습니다⁠.⁠”

“⁠말하시오⁠.⁠”

“⁠이 서문⁠, 제가 태우겠습니다⁠. 화산 진대윤이라는 이름은 저하고 장로님하고 아람이만 압니다⁠. 연병보는 혈교 비급으로 남고⁠, 화산은 백 년 동안 그랬듯이 깨끗합니다⁠. 대신 고발을 거둬 주십시오⁠. 제 수강생들이 구월 아흐레에 원서를 낼 수 있게요⁠.⁠”

마당이 조용했다⁠. 담장 너머 골목에서 두부 장수의 방울 소리가 지나갔다⁠.

“⁠그대 출처는⁠?⁠”

“⁠출처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장로님이 고발을 거두시면 관아는 출처를 묻지 않아요⁠.⁠”

무량이 팔짱을 풀었다⁠. 상자 앞으로 걸어와 쪼그려 앉았다⁠. 손가락으로 첫 장 끝의 이름을 짚었다⁠. 짚기만 하고 쓸지 않았다⁠.

“⁠대윤 할아버지는 내 할아버지의 형님이오⁠.⁠” 무량이 말했다⁠. “⁠화산에서 기초를 제일 잘 가르치던 분이었소⁠. 강남 물가 마을이 해마다 수적에게 털린다는 말을 듣고 산을 내려갔소⁠. 열두 수 가운데 세 수를 뽑아 농사꾼들에게 한 달 만에 가르쳤소⁠. 곁에서 보면서⁠. 숨을 모았다가 내보내는 것까지 곁에서 일러 주면서⁠. 마을이 수적을 쫓아냈소⁠. 다음 해에 대윤 할아버지 제자 하나가 그 책을 들고 혈교로 갔소⁠.⁠”

“⁠혈교는 곁에서 보지 않았겠네요⁠.⁠”

“⁠백 명씩⁠, 천 명씩 가르쳤소⁠. 숨을 모으는 것만 가르치고 내보내는 것은 가르치지 않았소⁠. 모은 숨이 안에서 타면 사람이 겁을 모르게 되오⁠. 혈교는 그걸 원했소⁠. 겁 없는 군사⁠.⁠” 무량이 이름에서 손을 뗐다⁠. “⁠화산이 토벌에 나섰소⁠. 토벌군을 이끈 사람이 내 할아버지였소⁠. 형님이 쓴 책으로 싸우는 군사들을⁠, 동생이 베었소⁠. 대윤 할아버지는 토벌이 끝나기 전에 혈교 진영 앞에서 돌아가셨소⁠. 제자들을 데리러 들어갔다가⁠.⁠”

아람이 숨을 들이켰다⁠. 소매를 접어 올린 팔이 떨렸다⁠.

“⁠화산은 책을 거두어 장경각에 넣고 혈교 비급이라고 불렀소⁠. 사당에는 대윤 할아버지 위패를 그대로 두었소⁠. 설날마다 절을 했소⁠. 절하면서 그분이 쓴 책은 혈교 책이라고 불렀소⁠. 나는 스물여덟에 장경각 사본 맨 앞에 붙어 있던 이 서문을 처음 읽었소⁠. 읽고 나서 불에 넣었소⁠. 화산 사본에는 이제 서문이 없소⁠. 그 뒤로 설날마다 절하는 게 견딜 수 없었소⁠. 둘 중 하나는 그만둬야 했소⁠. 책을 화산 책이라고 부르든지⁠, 절을 그만두든지⁠.⁠”

무량이 일어났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장로가 되던 해에 나는 절을 그만두었소⁠. 위패를 벽으로 돌렸소⁠. 책을 화산 책이라고 부를 용기가 없어서⁠.⁠”

“⁠잠깐만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그럼 이건 혈교 칼이 아니고 화산 칼이에요⁠. 화산 기초 열두 수 가운데 셋이요⁠. 고발할 이유가 없어요⁠.⁠”

“⁠누가 썼든⁠.⁠” 무량이 나를 보았다⁠. “⁠곁에서 보지 않고 가르치면 혈교의 칼이 되오⁠. 백 년 전에 그렇게 됐소⁠. 그대는 백 명 앞에서 가르쳤소⁠. 곁에서 보았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백 명 앞에서 나는 칠판을 보았다⁠. 부채 끝을 보았다⁠. 웃는 얼굴을 보았다⁠. 가슴을 본 적은 없었다⁠.

“⁠그대가 태우자는 것은 내가 마흔 해 전에 이미 한 일이오⁠. 위패를 돌린 것이나 서문을 태우는 것이나 같소⁠. 감추는 거래로 화산은 백 년을 왔소⁠. 그 거래를 내가 또 하면⁠, 그대 수강생 손은 누가 식히오⁠?⁠”

“⁠할아버지⁠.⁠”

아람이 앞으로 나왔다⁠. 무량이 손자를 보았다⁠.

“⁠손바닥 열 대⁠, 기억하세요⁠?⁠”

“⁠기억한다⁠.⁠”

“⁠일곱 살이었어요⁠. 왜 저것만 뒤집혀 있냐고 물어서요⁠.⁠”

“⁠기억한다⁠.⁠”

“⁠그럼 왜 말 안 해 주셨어요⁠? 그때 말해 주셨으면 저는 화산 칼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컸을 거예요⁠. 학관에서 혈교 칼을 배운다고 할아버지가 고발하러 왔을 때⁠, 그게 우리 집 칼이라는 걸 알았을 거예요⁠.⁠”

무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객사 하인이 찻쟁반을 들고 마당으로 들어오다가 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차 식습니다⁠, 장로님⁠.⁠”

“⁠놔두게⁠.⁠”

하인이 쟁반을 마당 돌 위에⁠, 상자 옆에 놓고 물러났다⁠. 찻잔 셋에서 김이 올라 서문 위로 흘렀다⁠. 아무도 잔을 들지 않았다⁠. 아람이 대답을 기다리다가 돌아섰다⁠. 문간의 회색 무복 둘이 길을 비켜 주었다⁠.

“⁠거래는 없소⁠.⁠” 무량이 말했다⁠. “⁠내일 진시⁠, 관아로 오시오⁠.⁠”

*

열이레 밤 하방가 약방은 학관이 되어 있었다⁠. 손끝 뜨거운 열넷이 침상과 바닥과 약재 자루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고⁠, 의원은 약탕기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나는 등잔을 들고 문간에 섰다⁠. 해시 종이 울릴 무렵 무량이 침통을 들고 들어왔다⁠. 낮에 객사 마당에서 거래를 걷어찬 사람이⁠, 밤에는 내 수강생들 가슴에 손을 얹으러 왔다⁠.

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무량이 첫 침상 앞에 앉자 나는 등잔을 들어 가슴께를 비췄다⁠. 무량이 나를 한 번 보고⁠, 등잔 빛 아래에서 침을 놓았다⁠. 두 번째 침상으로 옮기자 나도 등잔을 들고 옮겼다⁠. 세 번째에서 무량이 손바닥을 가슴에 얹고 기다렸다⁠. 숨이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렸다⁠. 숨이 들어오자 눌렀다⁠.

“⁠내쉬어라⁠.⁠”

나는 무량의 손을 보았다⁠. 누르는 때를 보았다⁠. 숨이 들어와 꽉 찬 순간⁠, 멈추기 직전⁠. 무량은 멈추기 직전을 눈으로 보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기다렸다⁠. 백 명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사람 앞에 앉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국숫집 둘째 차례가 되었다⁠. 둘째가 눈을 뜨고 무량을 올려다보았다⁠.

“⁠장로님⁠, 저 국숫집 둘째예요⁠.⁠”

“⁠안다⁠.⁠”

“⁠저 붙으면 화산 가요⁠? 화산 가면 장로님한테 또 혼나요⁠?⁠”

무량의 손이 둘째의 가슴 위에서 멈췄다⁠. 숨이 들어왔고⁠, 무량이 눌렀다⁠.

“⁠붙고 나서 물어라⁠.⁠”

둘째가 숨을 길게 내쉬며 웃었다⁠. 열이 내려간 얼굴로 웃었다⁠. 열네 번째 침상까지 우리는 그렇게 옮겨 다녔다⁠. 다 끝났을 때 무량이 침통을 닫고 일어났다⁠. 문간에서 나와 어깨가 스쳤다⁠.

“⁠한 사람에 숨 일곱 번이오⁠.⁠” 무량이 말했다⁠. “⁠열넷이면 아흔여덟 번⁠. 그대 강의실 백 명이면 칠백 번이오⁠. 매일⁠.⁠”

“⁠계산 빠르시네요⁠.⁠”

“⁠학관 거리에 오래 있다 보니⁠.⁠”

무량이 하방가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등잔을 들고 서서 칠백이라는 숫자를 되뇌었다⁠. 일타 강사가 하루에 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예순여덟 살 노인은 상목이 쓰러진 새벽부터 밤마다 칠백에 다가가고 있었다⁠. 고발장을 붙인 손으로⁠, 고발당한 학관 수강생들의 가슴을 하나씩 누르면서⁠.

*

칠월 열여드레 진시⁠, 항주부 관아 대청에는 열흘 전보다 사람이 많았다⁠. 단교에서 판결이 미뤄진 뒤로 학관 거리 사람들은 관아에서 무슨 소리가 나기만 하면 몰려왔다⁠. 대청 문 밖에 어머니회 두 패⁠, 갈필수와 은관⁠, 밀짚모자를 쓴 갈필수 학관 수강생들⁠, 자리 장사꾼까지 있었다⁠. 장사꾼은 관아 담장 위 자리를 팔고 있었다⁠.

추관은 파리채를 쥐고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이 피곤했다⁠.

“⁠오늘은 고발인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열었소⁠. 봉 강사는 피고발인이라 불렀고⁠. 장로⁠, 말하시오⁠.⁠”

무량이 대청 가운데로 나왔다⁠. 팔짱을 끼지 않았고⁠, 종이도 꺼내지 않았다⁠. 마흔 해 전에 불에 넣은 서문을 무량은 외우고 있었다⁠. 강남 물가 마을부터 곁에서 보지 못할 사람에게는 주지 말라는 끝 줄까지⁠, 한 번도 막히지 않고 읊었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고발한 비급 『⁠연병보⁠』를 쓴 사람은 화산 진대윤이오⁠. 내 할아버지의 형님이오⁠. 혈교가 쓴 책이 아니오⁠. 화산이 쓰고 혈교가 가져간 책이오⁠. 화산은 백 년 동안 이걸 감추었소⁠.⁠”

대청이 조용해졌다가⁠, 문 밖부터 무너졌다⁠. 어머니회 왼쪽 패와 오른쪽 패가 처음으로 같은 소리를 냈다⁠. 담장 위 자리 장사꾼이 떨어질 뻔했다⁠. 추관이 파리채를 탁자에 떨어뜨렸다⁠.

추관이 파리채를 주우며 물었다⁠. “⁠고발한 사람 집안 책이오⁠?⁠”

“⁠그렇소⁠.⁠”

“⁠그럼 고발은 거두오⁠?⁠”

“⁠거두지 않소⁠.⁠”

추관이 파리채를 다시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줍지 않았다⁠. 포졸 하나가 대신 주워 탁자에 올려놓고 슬그머니 물러났다⁠.

“⁠장로⁠, 나는 무공을 모르오⁠. 그래도 이건 알겠소⁠. 자기 집 책을 남이 베꼈다고 고발한 사람이⁠, 자기 집 책이라고 밝히고 나서 고발은 그대로 두겠다는 거요⁠?⁠”

“⁠베꼈다고 고발한 게 아니오⁠. 곁에서 보지 않고 숨 멈추는 칼을 가르쳤다고 고발했소⁠. 책이 누구 것이든 그건 같소⁠.⁠”

대청 문 밖에서 갈필수가 조교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조교가 인파를 헤치고 학관 거리 쪽으로 뛰었다⁠. 나는 갈필수의 입 모양을 읽었다⁠. 화산도⁠, 혈교⁠. 오늘 밤 학관 거리 기둥마다 붙을 전단의 첫 줄이었다⁠. 갈필수는 오늘도 남보다 먼저 팔았다⁠.

무량이 나를 돌아보았다⁠. 대청의 모든 눈이 무량을 따라왔다⁠. 내가 어제 객사 마당에 내놓은 거래가⁠, 대청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감춰 줄 것이 없으니 거래할 것도 없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출처 하나였다⁠.

“⁠화산은 출처를 댔소⁠, 봉 강사⁠.⁠” 무량이 말했다⁠. “⁠이제 그대 차례요⁠. 대윤 할아버지 책은 백 년 동안 곁에서 보는 사람 없이 떠돌았소⁠. 그대 집안은 그 책을 들고 무엇을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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