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224자) · 복남 · 시월 보름

떡값 스무 냥

빌린 날들의 지도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시월 보름, 유곡역 장이 파한 밤에 우리는 동래객주 뒤 창고로 갔다. 셋이었다. 나와 단이, 그리고 경례.

경례는 그날 아침 쌍봉댁 주막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 상복 위에 쌍봉댁이 빌려준 누비 배자를 걸치고, 보따리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따라가겠다고 했다. 단이가 위험하다고 하자 경례가 되물었다.

“오라비 일이잖아요. 아저씨들 일이 아니라.”

단이는 그 말에 대꾸를 못 하고 나를 봤다. 나도 대꾸를 못 했다. 쌍봉댁이 부엌에서 나와 경례 보따리에 주먹밥을 더 쑤셔 넣으며, 저 애 말이 맞다고, 데리고 가라고 했다. 가슴이 두 번 들썩였다.

유곡역까지 가는 길에 경례가 내 곁에서 걸었다. 그 애는 한참 말없이 걷다가, 영강 나루를 건널 즈음에 물었다. 지운 날을 산 사람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꿈처럼 흐릿하냐고, 아니면 어제처럼 또렷하냐고.

“어제보다 또렷하다. 두 번째 날은 남들하고 같이 산 날이라 남들 말에 섞여서 흐려지는데, 첫 번째 날은 나 혼자만 가진 날이라 아무 데도 안 섞인다.”

경례가 한참 그 말을 씹었다.

“그럼 복남 오라버니도 그날을 그렇게 갖고 있겠네요. 아무 데도 안 섞이게.”

“그렇겠지.”

“스무날 넘게 혼자 갖고 있으면 무겁겠다.”

경례가 그 말을 하고 뱃전을 짚었다. 그 애 손등에 떡 반죽하다 튄 자국이 하얗게 말라 붙어 있었다.

*

창고는 객주 마당 뒤편 흙벽 셋 가운데 하나였다. 새 놋쇠 자물쇠가 걸린 가운데 창고. 앞에 두건 쓴 장정 하나가 거적을 깔고 앉아 졸았다. 장이 파한 밤이라 객주 마당에는 짐바리가 치워져 있었고, 마방에서 역마들이 여물통을 긁는 소리만 났다. 늦가을 밤바람이 흙벽 틈을 훑고 지나가며 휘파람 같은 소리를 냈다. 창고 안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혼잣말이었다. 쉬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삼이 한 근에 스무 냥이면, 첫날 스무 냥에 사서 둘째 날 마흔 냥에 팔면, 아니지 둘째 날 스무 냥에 사서, 아이고 헷갈려, 어매 솜이불은 한쪽만 두껍게 누볐다니까…….”

복남이었다. 단이가 코를 막고 웃음을 참았다.

단이는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장정 앞으로 걸어갔다. 네 푼 기운 걸음으로 비틀비틀. 장정이 눈을 떴을 때 단이는 그 앞에서 막걸리 병을 떨어뜨리고 제 몸도 같이 떨어뜨렸다. 넘어지는 척이었는데 제대로 넘어졌다. 장정이 벌떡 일어나 단이를 부축했고, 단이는 부축받는 동안 장정 두건 끈을 풀어 버렸고, 장정이 두건을 잡는 동안 나는 창고 뒤로 돌아갔다. 경례가 따라왔다.

흙벽 아래쪽에 쥐구멍만 한 틈이 있었다. 경례가 거기 쪼그려 앉아 입을 댔다.

“복남 오라버니.”

안에서 혼잣말이 뚝 끊겼다.

“누구요?”

“도경례요. 경구 누이.”

한참 조용했다. 흙벽 틈으로 안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복남이 아주 작게 말했다.

“나 그날 봤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창고 모퉁이에 등불 하나가 섰다. 붉은 실이 매인 등불이었다. 석태운이 거기 서 있었다.

*

행수는 우리를 사랑채로 불러들였다. 장정 둘이 복남을 창고에서 끌어내 따라 들였다. 복남은 스무날 가까이 햇빛을 못 봐서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는데, 입은 여전히 쉬지 않았다. 사랑채 문턱을 넘으면서도 행수 어른 나 배고프오, 창고에 쥐가 셋이오, 하고 떠들었다. 행수가 손을 한 번 들자 조용해졌다.

지도는 그대로 벽에 걸려 있었다. 못이 여섯에서 일곱으로 늘어 있었다. 빈 못이던 유곡역·상주·낙동나루에 실이 걸렸고, 견탄 나루 자리에 새로 박힌 놋 못 머리가 등잔불에 반짝였다. 붉은 실이 그 사이를 거미줄처럼 이었다.

“자네가 올 줄 알았네.”

석태운은 서안 앞에 앉지 않고 선 채로 말했다.

“저 아이를 가둔 건 내 뜻이 아니야. 마 객주가 사람을 보냈네. 복남이를 내놓으라고. 그래서 가둔 걸세. 창고가 벼랑보다는 낫지.”

“그럼 왜 현감한테 안 데려가셨소?”

행수는 대답 대신 서안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접힌 자국이 여러 번 난 서찰이었다.

“초사흘에 저 아이가 마 객주한테 들고 간 서찰의 초본일세. 내가 쓴 거야. 읽어 보게.”

나는 까막눈이라 경례가 받아 읽었다. 경례는 언문은 읽었다. 한문 섞인 대목에서 막혀 단이가 거들었다. 걸음터 짐꾼 경구라는 자가 사람들을 데리고 나간다 하니, 객주가 단속하라. 터가 식으면 곤란하다.

행수가 서찰 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터가 식으면 곤란하다. 이 한 줄 때문에 내가 저 아이를 가뒀네. 걸음터가 식으면 내 첫째 못이 빠져. 그때는 그게 제일 큰일이었어. 영남대로 짐이 반나절 늦게 돌면 삼백이 굶으니까. 나는 지금도 그 셈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네.”

“단속하라 했네. 죽이라 하지 않았어.”

행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단속하라는 말을 객주가 어떻게 알아듣는지, 행수 어른은 모르셨소?”

행수는 한동안 지도를 봤다. 그러다 돌아섰다.

“알았다고 하면 나도 죄인이고, 몰랐다고 하면 나는 바보지. 나는 둘 다 되고 싶지 않았네. 그래서 저 아이를 가뒀어. 입을 막으려고. 알아. 그런 거야.”

행수는 복남 쪽으로 돌아섰다.

“복남아. 동래로 내려가거라. 삯 여섯 달 치를 주마. 네 어매 솜이불 열 채는 사겠지. 문경은 잊어라.”

복남은 행수를 봤다가, 경례를 봤다가, 제 발끝을 봤다. 오른쪽으로 서른 몇 푼 기운 발이었다. 창고에 스무날 가까이 갇혀 있는 동안 더 빌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행수 어른, 우리 어매가 솜이불을 왜 한쪽만 두껍게 누볐는지 아시오?”

“기울어 자니까.”

“나 기울어도 따뜻하라고요. 행수 어른 삯 받아서 산 솜으로.”

복남이 거기서 목이 메었다. 늘 싱글거리던 녀석이 우는 얼굴을 하니 얼굴이 제 것 같지 않았다.

“근데 나 그날 봤소. 보고도 여기서 스무날을 떠들기만 했소. 쥐한테. 쥐는 안 쳐 주잖아요.”

*

복남은 사랑채 방바닥에 앉아 경례 앞에서 말했다. 행수가 막지 않았다. 등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례와 복남이 마주 앉았고, 단이는 딴 데를 봤다. 나는 문설주에 기대 섰다. 창호지 밖에서 역마 한 마리가 길게 울었다.

첫 번째 초사흘 한낮이 지나고 얼마 뒤, 복남은 행수 서찰을 품고 새재를 넘고 있었다. 조곡관 아래 벼랑길에 이르렀을 때 앞에서 두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서찰 심부름꾼이라, 높은 사람들 다투는 소리가 나면 숨는 버릇이 있었다. 바위 뒤에 숨었다.

“경구 아저씨가 그랬소. 객주 짐 이제 안 진다고. 걸음터 사람들 데리고 새재 넘겠다고. 그리고, 누이 떡값 스무 냥 갚아야 하는데 객주 외상 따위 없다고.”

경례가 고개를 들었다. 복남은 경례 눈을 못 보고 등잔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객주가 손을 뻗었소. 경구 아저씨가 객주 갓끈을 잡았소. 갓끈이 뜯겼소. 나는 거기서 눈을 감았소. 소리만 들었소. 사람 소리 하나, 물소리 하나.”

눈을 뜨니 벼랑길에 객주 혼자 서 있었다고 했다. 객주는 왼손으로 뜯긴 갓끈을 묶고 있었고, 오른손등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고 했다. 복남은 서찰을 품은 채 바위 뒤에 한참 엎드려 있다가, 객주가 내려간 뒤에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서찰은 전하지 못했다. 해 질 녘에 걸음터 마당에 닿았고, 거기서 하루를 빌렸다.

“장날 다시 살려고 빌린 거 아니오. 그날을 없던 걸로 하려고 빌렸소. 무서워서.”

두 번째 초사흘에 복남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새재를 넘어 돌셋 주막 마루에 앉은 객주에게 서찰을 전했다. 객주는 서찰을 읽고 녀석한테 막걸리 한 사발을 따라 주었다. 복남은 그 사발을 다 마셨다.

나는 문설주에 기대 선 채 그 말을 들었다. 들으면서 내 첫 번째 초사흘을 그 옆에 나란히 놓았다. 해 질 녘 돌 셋에서 내려오던 객주는 갓끈이 풀려 있었고 오른손등에 붉은 줄이 세 가닥 나 있었다. 복남이 본 것은 그보다 한두 시진 앞이었고, 거기서 객주는 뜯긴 갓끈을 왼손으로 묶었으며 오른손등에는 피가 배어 있었다. 복남은 나를 몰랐고 나는 복남을 몰랐다. 우리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날의 앞과 뒤를 봤다. 두 조각이 맞물리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났다. 현감이 말한 것이 이거였다. 서로 모르는 둘이 같은 것을 말하면 듣겠다던 그 말.

말이 끝나자 복남이 제 가슴을 쥐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경례가 손을 뻗어 녀석 어깨를 받쳤다. 오라비를 죽인 사람을 보고도 입을 닫은 사내의 어깨를, 경례는 두 손으로 받쳤다. 그러고는 복남 어깨에 이마를 대고 한참 있었다.

“떡값이요.”

경례가 그 한 마디를 했다. 울음 사이로 웃음 같은 게 섞여 나왔다.

“스무 냥. 그거 우리 오라비가 떼먹은 거 맞아요. 나 초상날 그 얘기로 사람들 웃겼어요. 그런데 갚으려고 했대요. 마지막에.”

*

복남은 그날 밤 스물아홉이 줄었다. 초사흘 하루치와, 장날마다 빌린 까닭 하나. 삯을 곱으로 받으려고. 녀석은 그 까닭을 행수 앞에서 말했다. 행수는 등잔 너머에서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

행수가 벽의 지도로 걸어가 걸음터 자리 놋 못을 뽑았다. 붉은 실이 스르르 풀려 방바닥에 떨어졌다.

“걸음터는 이제 식었네. 오늘 저녁에 돌던 사람이 셋뿐이라더군. 서른넷이 걸어 나갔다고. 마 객주가 쌀을 줘서 셋을 겨우 돌리고 있다지. 셋이 모자라면 식어.”

행수는 뽑은 못을 손바닥에 올려 한참 내려다봤다.

“복남이는 데려가게. 내 사람이 아닐세. 삯은 받아 가고. 그리고 기훈이, 하나만 알아 두게. 저 아이가 현감 앞에서 말하면, 내 서찰도 같이 나올 걸세. 그러면 나는 가만히 앉아 기다리지 않아. 감영에 먼저 가겠네. 현감보다 높은 데에.”

복남이 방바닥에서 고개를 들었다.

“물으면 서찰 얘기도 할 거요, 행수 어른.”

“그래. 그렇게 하거라.”

행수는 등을 돌리고 지도를 봤다. 남은 못이 여섯이었다. 우리는 사랑채를 나왔다. 객주 마당 달빛 아래, 셋이 넷이 되어 걸었다. 경례가 복남 오른쪽에 붙어 걸었다. 녀석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서, 경례 어깨가 녀석을 받쳐야 똑바로 걸어졌다. 스물아홉이 줄었어도 아직 넷이 남았다고 했다.

객주 대문을 나서자 복남의 입이 도로 열렸다. 창고 쥐 셋 가운데 하나는 꼬리가 반밖에 없어서 반꼬리라고 불렀다는 둥, 반꼬리가 제 주먹밥을 훔쳐 갔다는 둥, 행수 어른 사랑채 지도 못은 동래 대장간에서 한 개에 닷 푼씩 준다는 둥. 경례가 녀석 옆구리를 꼬집었다.

“오라버니, 스무날 쥐하고만 얘기해서 사람 앞에서 말하는 법을 까먹었어요?”

“까먹은 게 아니라 쌓인 거요. 스무날 치가 쌓였소.”

단이가 앞에서 웃다가 돌부리에 채어 휘청했다. 네 푼 기운 사람이 휘청하면 남 눈에는 춤추는 것 같다. 복남이 그걸 보고 박수를 쳤다. 달이 영강 위에 떠 있었다. 강물이 달빛을 잘게 부수어 물가 갈대 밑동까지 밀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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