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216자) · 기훈 · 시월 스무날

기운 쪽을 먼저

빌린 날들의 지도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시월 스무날 아침, 현감은 조곡관 아래 벼랑길에서 대질을 열었다. 관아 동헌이 아니라 그 자리를 고른 것은 현감이었다. 없는 날을 말하려면 그 날이 있던 자리에서 말하라고.

새벽에 된서리가 내려 벼랑길 돌바닥이 희었다. 해가 조곡관 문루 위로 올라오면서 서리가 한 뼘씩 녹아 물기로 번들거렸고, 발밑 물길에서 올라오는 물안개가 햇살에 섞여 길 전체가 뿌옇게 빛났다. 난간 없는 길 가장자리 아래로 물소리가 쉼 없이 올라왔다. 경구가 누웠던 너럭바위가 그 아래 보였다. 서리가 그 위에도 앉아 있었다.

현감은 말에서 내려 벼랑길 가운데 섰다. 엄 형방, 사령 넷, 먹통을 든 아전 하나가 뒤따랐다. 마치석은 사령 둘 사이에 서 있었다. 묶이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까지는 고발당한 사람이 아니라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다. 객주는 흰 도포에 갓을 반듯하게 쓰고, 갓끈 호박 구슬 스물넷을 가지런히 늘어뜨렸다.

조곡관 문루 위와 벼랑길 양쪽 끝에 구경꾼이 모여 있었다. 주막거리 사람들과 새재를 넘던 장꾼들과, 걸음터에서 걸어 나간 사람들 가운데 열 몇이 섞여 있었다. 곰보 할멈은 문루 돌계단에 앉아 제 무릎을 두드렸다. 쌍봉댁은 부엌칼 대신 떡 광주리를 옆에 끼고 섰는데, 광주리 덮은 보자기 위로 김이 올랐다. 구경 온 장꾼들이 그 떡을 사려고 하자 주모가 파는 떡이 아니라며 광주리를 등 뒤로 감췄다. 그러고는 가슴을 두 번 들썩이며 눈을 흘겼다.

구만득도 왔다. 걸음터 마름 노릇이 끝난 사람처럼 장대 없이 빈손이었다. 그는 객주 쪽을 한 번 보고 사람들 틈으로 숨었다.

현감은 나와 복남을 떼어 놓았다. 나는 조곡관 문루 밑에, 복남은 벼랑길 끝 바위 모퉁이 뒤에. 서로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거리였다. 아전 하나가 나한테 오고 형방이 복남한테 갔다. 현감이 두 사람한테 같은 것을 물으라고 쪽지를 들려 보냈다.

아전이 내 앞에서 쪽지를 폈다.

“첫 번째 초사흘에 객주가 입은 옷은 무슨 빛이었느냐?”

문루 그늘은 서늘했다. 돌로 쌓은 홍예 안쪽에서 찬 기운이 스며 나와 등에 닿았고, 이끼 냄새와 젖은 돌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벼랑길 저쪽에서 객주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사령 넷이 서 있었고, 그 사이로 물소리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나는 그 물음에 잠깐 놀랐다. 옷 빛깔은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단이한테도, 동헌 마당에서도, 경례한테도. 말할 까닭이 없었다. 해 질 녘 돌 셋 사이에서 걸어 나오던 객주가 떠올랐다. 억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온 해가 그 도포 자락을 비췄다.

“쪽빛이었소. 쪽빛 도포.”

아전이 받아 적었다. 둘째 물음이 이어졌다. 객주 손등 상처가 어느 손이었느냐. 오른손이었다. 갓끈이 풀린 쪽이 턱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왼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아전은 한 마디도 안 보태고 적기만 했다.

*

한 식경 뒤 현감이 모두를 벼랑길 가운데로 불러 모았다. 쪽지 두 장이 현감 손에 있었다. 현감이 그걸 소리 내어 읽었다.

“기훈. 쪽빛 도포, 오른손등, 갓끈은 턱 왼쪽으로 늘어짐. 복남. 쪽빛 도포, 오른손등에서 피, 왼손으로 갓끈을 묶음.”

현감은 쪽지를 접고 마치석을 봤다.

“객주. 초사흘에 네가 주막 마루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스물이 넘는다. 내가 그 스물을 불러 다 물었다. 스물 모두 흰 도포라 했다. 오늘 입은 그 옷이라고.”

벼랑길이 조용해졌다. 물소리만 올라왔다.

“거짓말을 맞추려는 두 사람이라면 스물이 본 흰 도포를 댔을 것이다. 그래야 들통이 안 나니까. 그런데 서로 떨어진 두 사람이 똑같이 아무도 안 본 빛깔을 댔다. 스물이 본 날에는 없던 빛깔을.”

현감은 소매에서 호박 구슬을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그리고 이것. 죽은 사람 손에서 나온 스물다섯째 구슬. 네 갓끈에는 스물넷이 다 있다. 그럼 이 하나는 어디서 왔느냐?”

마치석이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눈이 따라가지 않았다.

“사또, 없는 날로 나를 묶으시겠소?”

“묶는 것은 아니다. 추국할 때까지 가두는 것이다. 없는 날인지 있는 날인지는 추국에서 가린다.”

현감이 턱짓을 하자 사령 둘이 포승을 꺼냈다. 그 순간 마치석이 몸을 틀었다. 사령 사이를 빠져나와 곧장 나한테로 왔다. 벼랑 가장자리 쪽에 서 있던 나한테로. 두 손이 내 가슴팍을 떠밀었다.

몸이 뒤로 쏠렸다. 발뒤꿈치 아래 돌바닥이 끝나는 자리가 느껴졌다. 그 너머는 물소리였다. 왼쪽으로 쉰 몇 푼 기운 몸이 기운 쪽으로, 벼랑 쪽으로 넘어가려 했다.

나는 왼발을 먼저 디뎠다.

기운 쪽 발이 먼저 돌바닥을 짚자 무릎이 꺾이고, 허리가 받치고, 목이 따라 올라왔다. 여섯 해 걸으면서 몸에 새긴 순서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딱 한 순간 나는 똑바로 섰다. 벼랑 끝 돌바닥 위에, 서리 녹은 물기 위에. 마치석의 두 손이 내 가슴에서 미끄러졌다. 객주가 제 힘에 앞으로 쏠려 비틀거렸고, 사령들이 그 팔을 붙잡아 돌바닥에 엎어 눌렀다. 갓이 벗겨져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호박 구슬 스물넷이 한꺼번에 햇살을 받으며 떨어져 내려갔다.

나는 벼랑 끝에 선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려야 할 것 같았는데 떨리지 않았다.

돌바닥에 얼굴을 눌린 채 마치석이 나를 올려다봤다.

“자네는 원래 날에 쳤어, 기훈이. 그건 안 없어져.”

“알고 있소. 그래서 말했소.”

현감이 벼랑 가장자리로 와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물 위에 객주의 갓이 떠서 여울을 따라 빙글빙글 돌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현감은 그걸 한참 보다가 나를 봤다.

“그대, 방금 무엇을 한 거요? 넘어가는 줄 알았소.”

“기운 쪽을 먼저 디뎠소.”

현감이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제 발을 한번 내려다봤다. 벼랑길에 선 현감의 두 발이 가지런했다. 현감은 기운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

마치석을 조곡관 문루 아래로 끌고 간 뒤, 경례가 벼랑길로 내려왔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내내 복남 뒤에 서 있던 그 애는, 보자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벼랑 가장자리, 복남이 짚어 준 바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보자기를 풀었다. 쑥떡과 콩떡과 수수떡이 층층이 담겨 있었다.

“스무 냥어치는 못 했어요. 한 냥어치예요. 나머지 열아홉 냥은 오라비가 저승에서 갚아요.”

경례는 떡을 벼랑 끝 돌 위에 하나씩 놓았다. 놓으면서 말했다. 오라비, 떡값 안 갚아도 돼. 갚으려고 했다며. 그럼 됐어. 복남이 뒤에서 코를 훌쩍였다. 단이가 제 소매로 복남 코를 닦아 주면서 저도 울었다. 나는 조금 떨어져 서서 그 등을 봤다. 경례의 흰 상복 등허리에 볕이 앉았다. 떡 냄새가 물안개에 섞여 벼랑 아래로 내려갔다. 그 아래 너럭바위 위에서 서리가 마지막으로 녹고 있었다.

*

한낮이 조금 지났을 때 주흘관 쪽 길에서 말굽 소리가 올라왔다. 여럿이었다. 붉은 전립에 환도를 찬 군관 하나가 앞섰고, 조총을 멘 군졸 여섯이 뒤따랐다. 대구 경상감영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 뒤로 두루마기 옷고름을 단정하게 맨 사내가 나귀를 타고 따라왔다. 석태운이었다.

군관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현감에게 감사의 영을 전했다. 새재와 문경 걸음터의 날 빌리는 자리 일은 감영이 맡는다. 그 일에 얽힌 죄인은 감영으로 올린다. 마치석은 대구로 이송한다. 현감은 영을 받아 읽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혔다.

군관이 턱짓을 하자 군졸 하나가 주흘관 쪽으로 달려갔다. 해 질 녘에 우리가 새재를 내려왔을 때, 주흘관 홍예 옆 돌벽에 목판으로 찍은 방이 붙어 있었다. 까막눈인 나 대신 경례가 소리 내어 읽었다.

“이제부터 세 사람 이상이 한자리를 도는 것을 금한다. 어기는 자는 곤장 서른. 새재 고갯마루 돌 셋은 감영 군사가 지킨다.”

방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장꾼 하나가 세 사람 이상이면 장터 씨름판도 안 되느냐고 물었고, 옆 사람이 씨름판은 도는 게 아니라 붙는 거라고 대꾸했다. 몇이 웃었다. 웃음은 금방 그쳤다.

단이가 그 방 앞에서 얼굴이 하얘졌다. 걸음터에는 아직 걸어 나가지 못한 셋이 있다. 방에 누운 이백서른 영감도 있다. 돌지 않으면 넘어지는 사람들이다. 오늘 밤부터 그 사람들은 서 있으려면 죄인이 되어야 한다.

“나는 걸음터로 가겠소.”

단이가 방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셋이 돌면 안 된다니, 둘씩 붙들고 서 있으면 되겠지. 영감은 내가 업고 멍석에 앉히겠소. 누워서도 말은 하니까. 이백서른이면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들어야 하겠지만.”

단이가 그 말을 하고 웃었다. 웃는데 입술이 떨렸다.

석태운이 나귀를 몰아 방 앞을 지나다 멈췄다.

“내가 감영에 먼저 간다고 했지. 감사 나리가 빌림터를 거두시겠다네. 새재 돌 셋도, 걸음터도, 내 못 여섯도. 이제 영남대로에서 하루를 빌리려면 감영 허락을 받아야 해. 내 장사는 줄겠지. 대신 아무나 못 빌리게 됐으니 값은 오르겠지.”

행수는 나를 내려다봤다.

“자네 덕분일세, 기훈이. 자네가 말을 해서 여기까지 왔어.”

“걸음터에 좁쌀은 계속 대 주시오. 아직 셋이 있고, 누운 영감이 있소.”

행수가 고삐를 쥔 채 잠깐 나를 봤다. 그 눈에 무언가가 스쳤다가 지나갔다. 유곡역 사랑채에서 제 아비 얘기를 하던 때의 눈이었다.

“그건 감영에 물어보게. 이제 거기 쌀도 감영 쌀이 될 테니.”

나귀가 유곡역 쪽으로 멀어졌다. 군졸들이 함거에 마치석을 태우고 그 뒤를 따랐다. 함거 창살 사이로 객주가 나를 봤다. 갓을 잃은 맨머리였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현감이 말을 타기 전에 나를 불렀다.

“이제 감영 일이오. 문경 보방은 끝났소. 대구에 가려면 가시오. 나는 말리지 않소.”

나는 대답 대신 몸을 짚어 봤다. 쉰여덟이었다. 여드레 동안 멍석에서 여섯을 더 말했다. 아직 백 날 가운데 까닭 모르는 날이 남아 있고, 기울기는 남 눈에 보인다. 그래도 선다.

쌍봉댁이 떡 광주리를 들고 주흘관 쪽에서 내려왔다. 광주리에 남은 떡을 보자기째 경례 품에 안기며, 대구 가는 길에 먹으라고 했다. 경례가 저는 안 간다고 하자 주모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그 떡은 누가 먹느냐고. 복남이 제가 먹겠다고 손을 들었다가 경례한테 손등을 맞았다.

“저도 가요. 오라비 일이잖아요. 끝까지 봐야죠.”

“나도 가오. 추국에서 내가 또 말해야 할 거 아니오. 감영은 말이 길어서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하오.”

단이가 곁에 와 섰다. 걸음터로 가기 전에 배웅은 하겠다고 했다. 경례와 복남이 그 뒤에 섰다. 넷이 주흘관 방 앞에 섰다. 넷이 한자리에 서 있으니, 도는 것도 아닌데 군졸 하나가 우리를 흘끔 봤다.

대구는 남쪽으로 이백 리 남짓이다. 짐 없이 가는 길은 처음이다. 나는 기운 쪽을 먼저 디뎠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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